막말의 사현후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에 번정 개혁과 막부 정치 참여를 통해 일본 근대화에 영향을 미친 네 명의 유력한 번주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사쓰마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후쿠이번의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슌가쿠), 도사번의 야마우치 도요시게 (요도), 우와지마번의 다테 무네나리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막부 정치 개혁을 시도하고, 쇼군 후계자 문제에 관여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안세이 대옥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후 복권되어 공무합체를 추구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새로운 정치 세력과의 갈등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사현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비판적인 면이 공존하며, 그들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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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요도 - 안세이 대옥 안세이 대옥은 1858년 이이 나오스케가 서구 열강과의 통상 조약 체결 반대 세력과 쇼군 후계자 관련 세력을 탄압한 사건으로, 요시다 쇼인 등을 처벌하고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했으며, 메이지 유신의 배경이 되었다.
사현후는 번의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에도 막부의 정치에 참여하였다. 아베 마사히로가 노중 수좌였을 때, 유력한 친번·외양의 여러 다이묘들도 막부 정치에 참여하도록 개혁을 요구했다. 아베도 이에 응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1857년에 급사하였다.
그 후,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에 취임하여 막부 각료를 거느리게 되자 상황은 일변했고,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던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뒤를 이어 쇼군으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를 두고 사현후와 이이는 대립하였다. 사현후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고산쿄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추천했고, 이이는 고산케기슈번주인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추천하였다. 결국 이이가 강권을 발동하여 정적들을 배제시키고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요시토미가 쇼군 가문의 세자가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대옥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급서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같은 해 7월 이후 은거에 들어갔으며 거듭 근신을 명령받아 번저에 연금되었다.[3]
1860년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암살당하고, 1863년에 이르기까지 근신은 차츰 해제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들은 은거 상태였지만 막부와 번 양쪽 모두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막번체제 안에 있는 다이묘였고 막부에 대한 관여를 지속하기 위해 도막에 대한 생각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막부와 번주들에 의한 연합정치였으며, 나아가 조정과 막부의 합일을 꾀하는 공무합체였다. 대정봉환에 이어 막부 자체를 폐지 및 부정하고 조정에 의한 정치를 표방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1868년 1월 3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사현후 각각은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에 취임하였으나, 도막을 추진했던 지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와는 뜻이 맞지 않아 메이지 초기까지 하나둘 공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하기 시사』(萩市史) 제1권에는 애당초 「막말의 사현후」(幕末の四賢侯)라는 것은 슌가쿠와 친교가 있었던 인물로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3. 1. 막부 정치 개혁 요구와 좌절
아베 마사히로가 로주 수좌로 있을 때, 사현후는 유력한 친번·도자마 다이묘들도 막부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개혁을 요구하였다. 아베도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1857년에 급서하고 만다.
그 뒤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에 취임하여 막부 각료를 거느리게 되면서 상황이 일변하였다.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던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뒤를 이어 누구를 쇼군으로 옹립할 것인가를 두고 사현후와 이이는 대립하였다. 사현후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고산쿄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추천하였고, 이이는 고산케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추천하였다. 결국 이이가 강권을 발동하여 정적들을 배제하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요시토미가 쇼군 가문의 세자가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대옥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급서했고, 나머지 세 명은 같은 해 7월 이후 은거에 들어갔으며, 거듭 근신을 명령받아 번저에 연금되었다.[2][3]
3. 2. 복권과 막부 정치 참여
사현후는 1860년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암살당한 이후 복권되어 막부와 번 양쪽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가운데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슌가쿠)는 1862년 8월(분큐 2년 7월)에 막부의 새로운 요직인 정사총재(政事総裁)직에 취임하였다.[2]
1863년 말, 슌가쿠, 무네나리, 요도 그리고 시마즈 히사미쓰가 참예(参預)에 임명되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는 참예회의(参預会議)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히사미쓰를 싫어했던 쇼군 요시노부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참예회의는 단기간에 붕괴되었다.[2]
1867년 6월(게이오 3년 5월), 다시 네 사람이 모여 사후회의(四侯会議)가 개최되었다. 이는 막부의 권위를 없애고 유력 번(雄藩)들의 연합에 의한 합의로 이를 대신하게 한다는 사쓰마 번의 계책이었으나, 요시노부의 교묘한 회유로 이 또한 무력화되었다. 그 뒤 요도는 요시노부에 대해 대정봉환을 건의했고, 슌가쿠 또한 이에 찬동하였다.[2]
3. 3. 공무합체와 대정봉환
사현후는 막번체제 내에서 막부와 번주들의 연합 정치를 지향했으며, 더 나아가 조정과 막부의 합일을 꾀하는 공무합체를 추구했다. 야마우치 도요시게(요도)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을 건의했고, 마쓰다이라 슌가쿠 또한 이에 찬동하였다.[2]
4. 메이지 유신 이후
사현후는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에 취임하였으나, 도막을 추진했던 지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와는 뜻이 맞지 않아 메이지 초기까지 하나둘 공직에서 물러났다.[2] 이들은 막번체제 하의 다이묘였기에 막부에 대한 관여를 지속하기 위해 도막(倒幕)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2] 이들의 주장은 막부와 번주에 의한 연합 정치, 더 나아가 조정과 막부의 합일을 꾀하는 공무합체(公武合体)였다.[2]
5. 평가
사현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사현후는 번의 정치 개혁에 착수했을 뿐만 아니라 막부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가 로주 수좌(老中首座)로 있을 때 유력한 친번(親藩) ・ 도자마(外様) 다이묘들도 막부 정치에 참여시키자는 개혁을 요구했고, 아베도 이에 동의하여 개혁이 채택되었지만 1857년에 급서하고 만다.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다이로(大老)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후사가 없었던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의 뒤를 이을 쇼군으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를 두고 사현후와 이이는 대립했다. 사현후는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이이는 도쿠가와 요시토미(도쿠가와 요시후쿠)를 추천했다.[3] 결국 이이는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요시토미를 쇼군 후계자로 결정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대옥사 직전에 급서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같은 해 7월 이후 은거, 근신 명령을 받아 번저(藩邸)에 연금되었다.
1860년사쿠라다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되고, 1863년까지 근신이 해제되면서 사현후는 다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1862년 8월 막부의 정사총재(政事総裁)직에 취임했다. 1867년 6월에는 사후회의(四侯会議)가 개최되었으나, 요시노부의 회유로 무력화되었다. 이후 야마우치 요도는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大政奉還)을 건의했고, 슌가쿠도 이에 찬동했다.
사현후는 막번체제 내에서 막부와 번주들의 연합정치, 나아가 조정과 막부의 합일을 꾀하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주장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 1868년 1월 3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사현후는 메이지 신정부 요직에 취임했으나, 도막(倒幕)을 추진했던 지사들과 뜻이 맞지 않아 메이지 초기까지 공직에서 물러났다.[3]
『萩市史|하기 시사일본어』 제1권에서는 '막말의 사현후'라는 표현이 슌가쿠와 친분이 있던 인물로 한정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2]
5. 1. 긍정적 평가
사현후는 번의 정치 개혁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막부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가 로주 수좌(老中首座)로 있을 때, 유력한 친번(親藩) ・ 도자마(外様) 다이묘들을 막부 정치에 참여시키자는 개혁을 요구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3] 하지만 1857년 아베 마사히로가 급서하면서 이 개혁은 중단되었다.
이후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다이로(大老)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후사 문제가 발생하자 사현후는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이이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요시후쿠를 차기 쇼군으로 추천하며 대립하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도쿠가와 요시후쿠를 쇼군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현후는 은거, 근신 처분을 받았다.
1860년사쿠라다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되고, 1863년까지 근신이 해제되면서 사현후는 다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막부의 정사총재(政事総裁)직에 취임했고, 사현후는 참예회의(参預会議)에 참여하여 국정을 논의했다. 하지만 쇼군 요시노부의 비협조로 회의는 단기간에 붕괴되었다.
1867년 사후회의(四侯会議)가 개최되었지만, 요시노부의 회유로 무력화되었다. 이후 야마우치 요도는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大政奉還)을 건의했고, 슌가쿠도 이에 찬동했다.
사현후는 막번체제 내에서 막부와 번주들의 연합정치, 나아가 조정과 막부의 합일을 꾀하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5. 2. 비판적 평가
일각에서는 사현후가 막번 체제의 틀 안에서 개혁을 추구하여,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들은 막부와 번주들에 의한 연합정치를 주장하고 조정과 막부의 합일을 꾀하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추구했다. 그러나 왕정복고의 대호령(1868년 1월 3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사현후는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에 취임하였으나 도막(倒幕)을 추진했던 지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와는 뜻이 맞지 않아 메이지 초기까지 하나둘 공직에서 물러났다.[3]
5. 3. 기타
萩市史|하기 시사일본어 제1권에서는 "막말의 사현후"라는 표현이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슌가쿠)와 친분이 있던 인물로 한정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2]
참조
[1]
문서
斉彬は異母弟・久光の長男・島津忠義|茂久を養子にして世子としていたが、斉彬が急死して茂久が数え19で藩主となると、久光はその後見人として藩政を牛耳った。以後薩摩では久光が事実上の藩主として活躍したため、彼のことを特に「国父」あるいは「国主」と呼んだ。
[2]
문서
後の15代将軍
[3]
문서
後の14代将軍・徳川家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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