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예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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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예회의는 1863년 일본 에도 막부 말기에 막부의 권위 하락과 존왕양이 운동의 격화 속에서 조정과 막부의 협력을 통해 국정 안정을 꾀하고자 설치된 회의이다. 사쓰마 번의 제안에 따라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등 유력 다이묘들이 조정 참예로 임명되어 국정 논의에 참여했다. 주요 의제는 조슈 번 처리 문제와 요코하마 쇄항 문제였으나, 참예들 간의 대립, 특히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시마즈 히사미쓰의 갈등으로 인해 1864년 붕괴되었다. 이후 사쓰마 번은 막부 타도 노선으로 전환하는 등 일본 막부 말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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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예회의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설치 시기 | 1868년 1월 3일 |
폐지 시기 | 1869년 2월 17일 |
존속 기간 | 1년 1개월 14일 |
정치 | |
정치 체제 | 의정관제 |
설치 법령 | 왕정복고 후 정치체제 개혁 |
기능 | 최고 정책 결정 기관 |
의장 | 다테 모토나리 |
부의장 | 고토 쇼지로 |
서기 | 후쿠오카 고타로, 에토 신페이 |
구성원 | |
구성 | 의정관 참의 외국관 회계관 형법관 제도국 사법국 탄핵국 |
관련 인물 | 사카키바라 야스히데 사나다 유키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고마쓰 아키히토 나베시마 나오마사 야마우치 요도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시마즈 히사미쓰 도쿠가와 요시노부 |
기타 | |
관련 사건 | 보신 전쟁 |
2. 배경
이이 나오스케의 미일수호통상조약 강압적 체결에 반발한 존왕양이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으로 이들을 탄압했으나,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암살당해 에도 막부의 권위가 급속히 떨어졌다.[1] 막부는 조정과 결탁해 권위 회복을 꾀하려 했다.[1]
원래 조정은 정치와 관계가 규제되었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 국학, 미토학의 융성과 대정위임론 등으로 점차 잠재적 지위가 높아졌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둘러싼 논쟁과 정치공작 속에서 로주 호리타 마사요시(사쿠라 번주)가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고메이 천황의 칙허를 얻으려 하면서 천황 및 조정의 권위는 더욱 급상승했다.[2]
이러한 가운데, 조정과 결합해 막부의 권위 하락을 막으려는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이 등장했다. 로쥬(老中) 구제 히로주(세키슈쿠 번(関宿藩)주), 안도 노부마사(이와키히라 번(磐城平藩)주) 등은 쇼군(征夷大将軍)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를 정략 결혼시켰다.
한편, 막부 권위가 쇠퇴하며 막정에서 소외되었던 친번·외양다이묘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졌고, 그중에서도 진보적 사상을 가지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유력 제후들을 국정에 참여시켜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이 대두되었다.
1862년(분큐 2년) 시마즈 히사미쓰 주도로 문구의 개혁이 단행되어,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정사총재직), 도쿠가와 요시노부(쇼군 후견직) 등이 막정 개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마즈 히사미쓰가 에도를 떠날 때 생맥 사건을 일으켜 오히려 존왕양이파가 세력을 얻었다.
1863년, 조슈 번과 과격파 구게들이 조정을 장악하며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고메이 천황 의향에 따라 아이즈 번, 사쓰마 번 등이 8월 18일의 정변을 일으켜 조슈 번 세력과 존왕양이파 구게들을 교토에서 추방했다. (7경 낙향)[2] 정국 주도권을 잃은 조정은 유력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명하여 정국 안정을 위한 조정 개혁 및 대책을 모색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유력 다이묘들의 합의에 의한 자문 기관 설치를 통해 공의정체(公議政體)를 실현하고자 했다.[2]
10월 3일 히사미쓰, 10월 18일 마쓰다이라 하루아키, 11월 3일 다테 무네시게, 11월 26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교토에 들어왔고, 12월 28일에는 야마우치 요도가 입경했다. 이 기간에 천황에게서 극비 천한(宸翰)을 받은 히사미쓰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천황은 조정 개혁으로 존왕양이 과격파를 일소한 후에는 종전과 같이 막부에 대정을 위임하고, 공무합체(公武合体)하여 일을 처리할 방침을 보였으나, 사쓰마 번은 쇼군을 상경시킨 뒤 유력 제후의 합의에 의한 자문 기관을 설치해 공의정체(公議政体)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공무합체라고 생각해 제후들의 협력을 구했다. 12월 5일 사쓰마 번은 현명한 제후들을 조정에 불러 의주(議奏)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요시노부 숙소에 모인 하루아키, 무네시게, 마쓰다이라 요시야스 등도 이에 동의해 결정 사항이 되었다.[2] 이것이 참예회의의 기본 방침이 된다.
나아가 히사미쓰의 주상(奏上)[3]에 의해 12월 23일 다카시 스케히로가 관백(関白)에서 물러나고, 좌막(佐幕)(친막부)적인 니조 나리요시가 취임했다.
2. 1. 막말의 정국
이이나 나오스케의 강압적인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한 반발로 존왕양이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이나 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으로 이들을 탄압했지만, 오히려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암살당하면서 에도 막부의 권위는 급속히 떨어졌다.[1] 그래서 막부는 조정과 결탁하여 권위 회복을 꾀하려 했다.[1]원래 조정은 정치와의 관계가 규제되었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는 국학, 미토학의 융성, 대정위임론 등의 등장으로 차츰 잠재적 지위를 높이고 있었다. 게다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둘러싼 논쟁과 정치공작 속에서 로주 호리타 마사요시(사쿠라 번주)가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고메이 천황의 칙허를 얻으려 하면서 천황 및 조정의 권위는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2]
2. 2. 공무합체론과 공의정체론
막부는 이이나 나오스케(井伊直弼)(히코네번(彦根藩)주)의 강압적인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체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안세이대옥(安政の大獄)으로 탄압했지만, 사쿠라다몬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으로 이이나 나오스케가 암살당하면서 권위가 급속히 저하되었다. 이에 막부는 조정과 결탁하여 권위 회복을 도모하려 하였다.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의 칙허를 얻으려 했던 로주(老中) 호리타 마사무츠(堀田正睦)(사쿠라번(佐倉藩)주)의 시도와 국학(国学)・미토학(水戸学)의 융성,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 등의 영향으로, 종래 정치와 관계가 규제되었던 조정과 천황(天皇)의 권위는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조정과 결합하여 막부의 권위 하락을 막으려는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이 등장한다. 로쥬(老中) 구세 히로주(久世広周)(세키슈쿠 번(関宿藩)주),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이와키히라 번(磐城平藩)주) 등은 쇼군(征夷大将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와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인 가즈노미야(和宮)를 정략 결혼시켰다.
한편, 막부의 권위가 쇠퇴함에 따라, 그동안 막정에서 소외되었던 친번·외양다이묘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졌고, 그중에서도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유력 제후들을 국정에 참여시켜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이 대두되었다.
2. 3. 문구의 개혁
1862년(분큐 2년) 시마즈 히사미쓰의 주도로 문구의 개혁이 단행되어,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정사총재직), 도쿠가와 요시노부(쇼군 후견직) 등이 막정 개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마즈 히사미쓰가 에도를 떠날 때 생맥 사건을 일으키면서 오히려 존왕양이파가 세력을 얻게 되었다.2. 4. 8월 18일의 정변과 그 후의 정국
1863년, 조슈 번과 과격파 구게들이 조정을 장악하며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고메이 천황의 의향에 따라 아이즈 번, 사쓰마 번 등이 8월 18일의 정변을 일으켜 조슈 번 세력과 존왕양이파 구게들을 교토에서 추방했다. (7경 낙향)[2] 정국 주도권을 잃은 조정은 유력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명하여 정국 안정을 위한 조정 개혁 및 대책을 모색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유력 다이묘들의 합의에 의한 자문 기관 설치를 통해 공의정체(公議政體)를 실현하고자 했다.[2]10월 3일 히사미쓰, 10월 18일 마쓰다이라 하루아키, 11월 3일 다테 무네시게, 11월 26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교토에 들어왔고, 12월 28일에는 야마우치 요도가 입경했다. 이 기간에 천황으로부터 극비 천한(宸翰)을 받은 히사미쓰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천황은 조정 개혁으로 존왕양이 과격파를 일소한 후에는 종전과 같이 막부에 대정을 위임하고, 공무합체(公武合体)하여 일을 처리할 방침을 보였으나, 사쓰마 번은 오히려 쇼군을 상경시킨 뒤 유력 제후의 합의에 의한 자문 기관을 설치하여 공의정체(公議政体)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공무합체라고 생각하고 제후들의 협력을 구했다. 12월 5일 사쓰마 번은 현명한 제후들을 조정에 불러 의주(議奏)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요시노부의 숙소에 모인 하루아키, 무네시게, 마쓰다이라 요시야스 등도 이에 동의하여 결정 사항이 되었다.[2] 이것이 참예회의의 기본 방침이 된다.
더 나아가, 히사미쓰의 주상(奏上)[3]에 의해 12월 23일에 다카시 스케히로가 관백(関白)에서 물러나고, 좌막(佐幕)(친막부)적인 니조 나리요시가 취임했다.
3. 참예회의의 성립
1863년 12월 5일 사쓰마 번은 현명한 제후들을 조정에 불러 의주(議奏)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숙소에 모인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다테 무네나리,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도 이에 동의하여 결정되었다.[2] 이것이 참예회의의 기본 방침이 된다.
12월 23일에는 다카시 스케히로가 관백에서 물러나고, 친막부적인 니조 나리요시가 취임했다.[3]
이러한 사쓰마 번의 상소에 따라 12월 31일에 시마즈 히사미쓰를 제외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야마우치 요도, 다테 무네나리,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조정 참예(朝廷参預)로 임명되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이듬해 1864년 1월 13일에 임명되었다.[4] 참예의 직무는 니조 성을 회의 장소로 하여, 이틀에 한 번씩 참내하여 천황의 휘장 앞에서 조의(朝議)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1864년 1월 15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다시 상경(上洛)했다. 고메이 천황은 이에모치에게 오랑캐 정벌의 책략을 논의할 것, 참예 제후의 정치 참여, 공무합체 방침의 명확화 등을 요구하는 칙서를 내렸다. 2월 16일 참예 제후에게 로주(老中) 방 출입이 허락되어, 공식적으로 막정(幕政) 참여가 명령되었다.
4. 참예회의의 구성원
- 도쿠가와 요시노부 (이치하시 도쿠가와 가 당주, 쇼군 후견직)[4]
- 마쓰다이라 슌가쿠 (에치젠 번 전 번주, 전 정사총재직)[4]
- 야마우치 요도 (도사 번 전 번주)[4]
- 다테 무네나리 (우와지마 번 전 번주)[4]
-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아이즈 번주, 교토 수호직)[4]
- 시마즈 히사미쓰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아버지)[4]
이 외에도 구마모토 번 집정으로 번주 호소카와 나리모리의 아들 나가오카 고미, 후쿠오카 번 세자 구로다 요시타다가 있었다. 도쿠가와 요시카쓰 (오와리 번 전 번주)는 참예에 임명되었으나[5] 사퇴하였다.
5. 참예회의의 의제
국정 합의 기관으로 설치된 참예회의에서 당면 과제는 당시 현안이었던 조슈 번 처리와 양이(요코하마 쇄항) 문제였다.
5. 1. 조슈 번 처분 문제
8월 18일의 정변으로 교토에서 추방된 조슈 번은 실지 회복을 위한 정치 공작을 계속했고, 교토 내 동정 여론도 높았다. 그러나 효명천황의 조슈 번에 대한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고, 조슈파 이케다 시게마사(오카야마 번주), 우스기 나리노리(요네자와 번주), 이케다 요시토쿠(돗토리 번주), 아사노 나가토시(히로시마 번주), 후지도우 타카키요(쓰 번주) 등은 교토에서 물러났다. 조슈 번은 가로 네쿠리 카즈사, 이하라 주케이 등을 오사카에 파견하여 여러 차례 조슈 번의 무죄를 호소하는 탄원서 제출을 시도했지만, 입경은 허락되지 않았다.[6]12월 24일 세키몬 해협을 통과 중이던 사쓰마 번 증기선 나가사키마루(막부로부터 빌린 것)가 조슈 번이 점령하고 있던 후젠국 다노우라(원래는 고쿠라 번 영토) 포대에서 포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교토에 전해지자 시마즈 히사미쓰는 격노하여 조슈 번에 대한 정벌 즉시 실행 또는 번주 부자의 오사카 소환 등의 강경 처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야마우치 요도는 쇼군의 에도 귀환 후 에도로 불러들이는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하여 시마즈 히사미쓰와 대립하여 난항을 겪었다. 결국 조슈 번의 가로를 오사카로 소환하여 칠경의 인도를 명령하고, 따르지 않을 경우 정벌을 실행한다는 방침이 되었다.[3]
5. 2. 요코하마 쇄항 문제
고메이 천황은 양이를 강력히 주장했고, 국정 자문 기구인 참예회의에서도 통상 조약 파기 및 해외 무역을 허가한 여러 항구의 폐쇄가 의제로 다뤄졌다. 그러나 참예에 참여한 제후들은 대부분 개국론자들이었고, 애초에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쇄항에 반대하여 오히려 천황의 실망을 샀다. 이 시기, 일부 양이파를 제외하고는 이미 여러 외국과의 조약 파기는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으며, "양이"의 구체적인 시책은 효고(고베)항의 개항 저지 및 요코하마항의 쇄항을 의미하게 되었다.[7]한편, 원래 여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개국을 단행한 당사자인 막부도 양이에는 반대했지만, 전년 가모 상락 때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양이 실행을 약속받았기에, 이미 분큐 3년(1863년) 12월에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요코하마 쇄항 협상을 위해 프랑스에 외국봉행·이케다 나가하루를 전권으로 하는 협상단(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을 파견했었다. 참예회의에서도, 처음에는 요코하마 쇄항에 난색을 표했을 듯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사쓰마 번의 부상을 경계하여, 시마즈 히사미쓰의 주장에는 동조할 수 없다며, 오히려 요코하마 쇄항의 실행을 주장하게 되었다. 2월 15일에 열린 참예회의에서는, 히사미쓰와 요시노부가 이 문제로 격렬하게 충돌했다.[7]
6. 참예회의 체제의 붕괴
장주 문제에서 시원찮은 결과만 나온 데다, 요코하마 개항 문제에서는 참예(参預)들, 특히 이이모치(慶喜)와 히사미쓰(久光)의 대립이 격화되어 참예회의 체제는 곧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가 1864년 2월 16일(음력)에 참예 제후들을 자택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지만, 만취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나카가와노미야에게 시마즈 히사미쓰, 슌가쿠(春嶽), 소죠(宗城)를 가리키며 "이 세 사람은 천하의 대우물(大愚物)·대간물(大奸物)이며, 후견직인 자신과 함께하고 싶지 않다"라고 폭언을 퍼부었다.[8] 때문에 기분이 상한 시마즈 히사미쓰는 완전히 참예회의를 포기하고 막부와의 협조 자세를 버렸다.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와 소마 다이토(小松帯刀)(사쓰마번 가로(家老))가 중재에 나섰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막부 로주들과도 대립하기 시작했고, 로주인 미즈노 다다사다(야마가타번주)는 "참예회의는 천하의 해물(害物)이며, 차라리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하기에 이르렀다.[9]
이렇게 해서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참예회의는 와해되었다. 1864년 2월 25일(음력)에 요도(容堂)가 가장 먼저 교토를 떠났고, 3월 9일(음력)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참예를 사임했다. 이어 다른 참예들도 잇달아 사임했다.
7. 참예회의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4년 3월 25일(음력) 쇼군 후견직을 사임하고, 조정으로부터 신설된 금리위수총독(禁裏衛守総督, 섭해방어지휘 겸임)에 임명되어 이조 성에서 에도의 막부와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후 요시노부는 마쓰다이라 요시야스 및 교토쇼시다이가 된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라(구와나 번주)와 함께 막부 중앙과는 반쯤 독립된 세력인 일회상정권(一会桑政権)을 구축했다.[1] 한편, 프랑스 파견 막부 사절단은 예상대로 협상에 실패하여 귀국했고, 독단으로 파리협정(パリ約定)을 맺은 이케다 나가하루나 다나베 다이이치 등 사절단은 처벌받았지만, 그 후 막부와 일회상 모두 요코하마 쇄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1]
시마즈 히사미쓰가 주도한 사쓰마 번의 막부 개혁 노선은 참예회의 붕괴로 중단되었고, 이후 사쓰마 번은 막부보다 조정에 대한 지지를 강화했다. 같은 해 금문의 변 이후에는 막부 타도까지 고려하여 막부 약체화를 꾀하고, 웅번(雄藩) 연합 노선으로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1]
1866년 말 15대 쇼군에 취임한 요시노부는 효고 개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 대한 공작을 펼쳤다. 이에 대해 제후 회의 노선을 추진하려 한 사쓰마 번의 주도로, 이듬해 5월 13일 히사미쓰, 요도, 무네시게, 슌가쿠를 모아 국정을 논의하는 사후회의(四侯会議)가 열렸다.[2] 이는 참예회의의 재현과 같았으나, 오히려 히사미쓰가 조슈 번에 대한 관대한 처우를 주장하고 요시노부가 효고 개항을 우선시하는 등 정반대의 전개가 되었다. 사쓰마의 의도를 간파한 요시노부가 조막파 공경을 끌어들여 철야 조정 회의에서 조약 칙허를 강행함으로써 사후회의는 단기간에 붕괴되었고, 이후 사쓰마 번은 막부 타도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2]
참조
[1]
문서
참예회의 구성원 분석
[2]
서적
続再夢紀事
[3]
서적
孝明天皇紀
[4]
문서
시마즈 히사미쓰의 참예
[5]
서적
徳川慶喜公伝
[6]
서적
徳川慶喜公伝, 伊達宗城在京日記
[7]
서적
徳川慶喜公伝
[8]
서적
徳川慶喜公伝
[9]
서적
徳川慶喜公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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