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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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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미아누스는 250년경 판노니아에서 태어난 로마 황제이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부제가 되었고, 286년에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으며 공동 황제가 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카라우시우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퇴위했지만, 아들 막센티우스의 권력 찬탈을 지지하며 다시 권력을 잡으려 했다. 그는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자살했으며, 그의 딸 파우스타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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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아누스
기본 정보
수염을 기른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흉상
초상 머리, Musée Saint-Raymond
이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로마자 표기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출생일250년경
출생지시르미움 (현재의 스렘스카미트로비차, 세르비아)
사망일310년 7월경 (향년 약 60세)
사망지마실리아 (마르세유, 프랑스)
종교고대 로마 종교
통치 정보
직위로마 황제 (서방)
재위 기간286년 4월 1일 –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동방)
재위 유형아우구스투스
선대 황제디오클레티아누스 (단독)
후대 황제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부제 재위 기간285년 7월 21일 또는 25일 – 286년
부제 유형카이사르
재위 기간 (반란)306년 말 – 308년 11월 11일, 310년 (짧게)
재위 유형 (반란)아우구스투스
정식 명칭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막시미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황제 칭호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족 관계
배우자에우트로피아
자녀막시미아나 테오도라
막센티우스
파우스타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 (라틴어)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Herculius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권력 획득

막시미아누스는 약 250년경 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의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근처 판노니아 속주에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6][7] 고대 자료들은 그의 고향을 이리리쿰으로, 그의 덕목을 판노니아식으로, 그리고 전쟁으로 찢긴 다뉴브 강변에서의 고된 성장 과정을 애매하게 언급하고 있다.[8][9][10]

그는 군에 입대하여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년)와 프로부스(재위 276-282년) 황제 휘하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복무했다. 그는 아마도 283년 카루스의 메소포타미아 원정에 참여했고 284년 11월 20일 니코메디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취임식에 참석했을 것이다.[11]

막시미아누스는 그의 엄청난 에너지, 단호하고 공격적인 성격, 그리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성향으로 황제직에 매력적인 후보였다. 4세기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막시미아누스를 "우정에서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이지만 다소 무례하고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자"라고 묘사했다.[13] 다른 자질에도 불구하고, 막시미아누스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색보다 행동을 선호했다. 289년의 파네기리쿠스는 그의 행동을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에 대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승리와 비교하면서, 막시미아누스는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14] 그의 야망은 순전히 군사적인 것이었고, 그는 정치를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맡겼다.[15]

막시미아누스는 시리아 출신 아내 에우트로피아와 사이에 막센티우스파우스타 두 자녀를 두었다. 고대 자료에는 그들의 출생 날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막센티우스의 출생년도에 대한 현대적인 추정치는 약 276년에서 283년까지 다양하며,[18] 파우스타의 출생년도는 대부분 289년 또는 290년경으로 추정된다.[19]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내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를 고대 자료들은 종종 막시미아누스의 계모녀라고 부르는데, 이는 오토 제크와 에른스트 슈타인으로 하여금 그녀가 에우트로피아와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사이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게 만든다.[20]

2. 2. 부제 및 정제 임명

285년 7월, 디오클레티아누스밀라노(밀라노, 이탈리아)에서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Caesar)로 임명했다.[24] 이는 제국 전역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막대한 업무량을 처리할 부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2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평범한 장군으로 여겼고, 막시미아누스와 같이 전투에 능숙한 인물이 대부분의 전투를 수행하기를 원했다.[27]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들 없이 딸 발레리아만 두었기에, 가족 외부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공동 통치자를 찾아야 했다.[28] 역사가 윌리엄 세스턴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의 아들"(filius Augusti)로 입양했다고 주장하지만, 프랭크 콜브는 입양 주장이 파피루스 증거의 오독에 근거한다고 반박했다.[29] 그럼에도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노멘(성씨) 발레리우스를 사용했다.[30]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단독 통치가 위험하고 이중 통치의 선례가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여러 황제가 동료와 권력을 공유했다.[32]

디오클레티아누스, 동방의 막시미아누스의 상급 동료이자 아우구스투스.




286년 4월 1일, 막시미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황제) 칭호를 받았다.[63][64] 이는 카라우시우스와의 위기에 직면하여 이루어졌으며, 제국 선전에서는 막시미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형제이자 권위와 명성에서 동등한 자로 선포되었다.[65]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임명식에 참석할 수 없었는데,[66] 이 때문에 막시미아누스가 칭호를 찬탈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역사가 윌리엄 리드베터는 이를 반박했다.[67] 황제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신뢰하여 제국 권력을 부여했고,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존중하여 그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다.[68]

287년경, 두 통치자의 관계는 종교적 용어로 재정의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오비우스(Iovius), 막시미아누스는 헤르쿨리우스(Herculiu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33] 주피터와 헤라클레스의 상징을 통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계획과 지휘, 막시미아누스는 임무 완수의 역할을 맡았다.[34] 그러나 황제들은 제국 숭배에서 "신"이 아니었으며, 신의 도구로서 지상에 신의 뜻을 부과했다.[35] 의식이 끝나자 막시미아누스는 서방 정부의 통치권을 맡아 갈리아로 파견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방으로 돌아왔다.[36]

로마 제국은 이중 ''임페리움''으로 분열되지 않았으며, 제국 선전은 단일하고 불가분의 로마, 즉 ''파트리모니움 인디비숨''을 강조했다.[69] 법령과 제국 축제는 두 황제의 이름으로 시행되었고, 동일한 동전이 제국 양쪽에서 발행되었다.[71]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아프리카 속주에 명령을 내렸고, 막시미아누스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토에 대해 마찬가지로 할 수 있었다.[72]

막시미아누스는 판노니아의 도시 시르미움에서 태어나 군에 입대하여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프로부스 황제를 섬겼다. 283년 카르스 황제의 메소포타미아 원정에 참여했고, 284년 니코메디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자리에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3.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원정

막시미아누스는 285년 중반 후기 갈리아로 가서 바가우다이와 교전했다.[43] 바가우다이는 고대 문헌에 잠깐 언급될 뿐인 모호한 집단으로, 285년의 봉기가 그들의 첫 등장이었다.[38] 4세기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들을 아만두스와 아이리아누스의 지휘 아래 있는 시골 사람들로 묘사했지만,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그들을 산적이라고 불렀다.[39] 이 원정에 대한 세부 사항은 희박하며 전술적 세부 사항은 제공하지 않는다. 역사적 자료는 막시미아누스의 미덕과 승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44] 289년 막시미아누스에 대한 찬사에는 반란군이 가혹함과 관용을 혼합하여 패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4] 연말까지 반란은 상당히 진압되었고, 막시미아누스는 그의 대부분의 병력을 라인 강 국경으로 이동시켜 안정기를 예고했다.[46]



막시미아누스는 게르만족의 반응을 피할 만큼 바가우다이를 신속하게 진압하지 못했다. 285년 후반에 두 개의 바바리아 군대 – 하나는 부르군트족과 알레만니, 다른 하나는 카이보네스와 헤룰리 – 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입했다.[47] 첫 번째 군대는 질병과 기근으로 죽었고, 막시미아누스는 두 번째 군대를 요격하여 패퇴시켰다.[48] 그런 다음 그는 미래의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라인 강 본부를 설립했는데,[49] 모군티아쿰(마인츠, 독일),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 독일), 또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나(쾰른, 독일) 중 한 곳이었다.[50]

막시미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를 즉시 진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라인강 유역 부족들에 대한 원정을 벌였다.[73] 287년 1월 1일 집정관의 파스케스(fasces)를 받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야만인의 습격 소식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그는 토가를 벗고 갑옷을 입고 야만인들에게 진군했고, 그들이 완전히 흩어지지는 않았지만 그해 말 갈리아에서 승리를 축하했다.[77]

막시미아누스는 모젤(Moselle)강-보주 산맥(Vosges) 지역의 부르군트족과 알레만니족 부족을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공격했다. 그는 초토화 작전(scorched earth)을 사용하여 그들의 땅을 황폐화시키고 기근과 질병을 통해 그들의 수를 줄였다. 부르군트족과 알레만니족 다음으로 막시미아누스는 약한 헤룰리족과 카이보네스족을 공격했다. 그는 그들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포위하고 패배시켰다. 그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게르만군이 붕괴될 때까지 전투 전선을 따라 이동했다. 로마군은 도망치는 부족 군대를 추격하여 격파했다. 기아로 약화된 적들을 상대로[75] 막시미아누스는 라인강을 넘어 대규모 침략을 시작했다.[78] 그는 게르만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적들의 고향을 파괴[75]하고 로마 군사력의 우월성을 과시했다.[87] 287년 말까지 그는 우위를 점했고 라인강 지역은 게르만 부족민들로부터 해방되었다.[75] 막시미아누스의 찬사가는 "내가 라인강 너머에서 보는 모든 것은 로마의 것이다"라고 선언했다.[79]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 막시미아누스의 프라이토리안 총독(praetorian prefect)이자 그의 딸 테오도라의 남편


다음 해 초, 막시미아누스(Maximian)가 카라우시우스(Carausius)를 처리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동방에서 돌아왔다.[80] 두 황제는 그 해에 만났지만,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81]

그 해 후반, 막시미아누스(Maximian)는 알레만니(Alamanni)족 영토 깊숙한 곳에 위치한 라인강 상류와 도나우강 상류 사이의 지역인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에 기습 침공을 감행한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레티아(Raetia)를 통해 게르마니아를 침공했다. 두 황제 모두 진군하면서 농작물과 식량을 불태워 게르만족의 생계 수단을 파괴했다.[83] 전쟁 후 라인강 연안의 도시들이 재건되었고, 마인츠(Mainz)와 쾰른(Cologne)과 같은 곳의 동쪽 강둑에 교두보가 만들어졌으며, 요새, 도로 및 요새화된 도시로 구성된 군사 국경이 확립되었다. 토르나쿰(Tournai, 벨기에(Belgium)), 바바쿰(Bavay, 프랑스(France)), 아투아투카 퉁그로룸(Tongeren, 벨기에(Belgium)), 모사에 트라예크툼(Maastricht, 네덜란드(Netherlands)), 쾰른(Cologne)을 연결하는 군사 도로는 국경선을 따라 여러 지점을 연결했다.[85]

288년 초, 막시미아누스는 그의 딸 테오도라의 남편이자 근위대 대장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임명하여 카라우시우스의 프랑크족 동맹군에 대한 원정을 이끌게 했다. 콘스탄티우스는 그들의 영토를 통해 북쪽으로 진군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북해에 도달했다. 프랑크족은 평화를 청했고, 그 후의 합의에서 막시미아누스는 폐위된 프랑크 왕 게노바우데스를 복위시켰다.[77]

막시미아누스는 로마 영토의 일부 지역, 즉 노비오마구스(나이메헌, 네덜란드)에서 트라예크툼(유트레흐트(Utrecht), 네덜란드)까지 라인강과 바알강 사이[85] 또는 트리어 근처[87]에 프리지아인, 살리안 프랑크족, 카마비족 및 기타 부족들이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들의 존재는 즉시 사용 가능한 병력을 제공하고 다른 프랑크족 부족들의 정착을 막아 막시미아누스에게 북쪽 라인강 연안의 완충 지대를 제공하고 이 지역의 주둔군 필요성을 줄였다.[85]

2. 4. 카라우시우스의 반란

카라우시우스의 반란에 가담한 군단 중 하나인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의 휘장과 기준을 보여주는 로마 앤티픽스 기와


갈리아 대부분은 평정되었지만, 영국 해협에 인접한 지역은 여전히 프랑크족과 색슨족의 해적질로 고통받고 있었다. 프로부스 황제와 카리누스 황제는 색슨 해안을 요새화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었다.[51] 예를 들어, 270년에서 285년 사이에 도버와 불로뉴에 해군 기지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52] 해적 문제에 대응하여 막시미아누스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남부 및 서부 네덜란드) 출신의 메나피이족인 마우사에우스 카라우시우스를 영국 해협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해적들을 소탕하도록 했다.[53] 카라우시우스는 성공을 거두었고,[54] 285년 말까지는 많은 수의 해적선을 나포했다.[55]

막시미아누스는 곧 카라우시우스가 해적들이 약탈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약탈품을 일반 대중이나 황실 재무부에 반환하는 대신 스스로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56] 막시미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의 체포와 처형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카라우시우스는 브리타니아로 도망쳤다. 브리타니아인들 사이에서 카라우시우스에 대한 지지는 강력했고, 적어도 두 개의 브리타니아 군단 (제2 아우구스타 군단과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이 그에게 배신했으며, 불로뉴 근처의 군단(아마도 제30 울피아 빅트릭스 군단)의 일부 또는 전부도 그에게 합류했다.[57] 카라우시우스는 군대 내의 소수의 충성파들을 신속히 제거하고 자신을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했다.[58]

막시미아누스는 반란에 대해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함대가 없었고 – 그는 그것을 카라우시우스에게 주었고 – 헤룰리족과 프랑크족을 진압하느라 바빴다. 한편 카라우시우스는 함대를 확장하고, 프랑크족 용병을 고용하고, 군인들에게 높은 봉급을 지급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58] 286년 말까지 브리타니아, 갈리아 북서부 대부분, 그리고 영국 해협 연안 전체가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59] 카라우시우스는 자신을 독립적인 브리타니아 국가인 ''임페리움 브리타니아룸''의 수장으로 선포하고,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보다 현저히 순도가 높은 주화를 발행하여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60] 심지어 막시미아누스의 군대조차 카라우시우스의 영향력과 부에 취약했다.[61]

카라우시우스(Carausius), 반란을 일으킨 로마의 브리튼 황제. 명문: IMP. CARAVSIVS P. F. AVG. / LEGion IIII FL – ML (런디니움 주조)


289년까지 막시미아누스는 카라우시우스의 브리튼 침공을 준비했지만, 어떤 이유로 계획은 실패했다. 289년 막시미아누스의 칭송가는 이 전투에 대해 낙관적이었지만, 291년의 칭송가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88] 콘스탄티우스의 칭송가는 그의 함대가 폭풍으로 인해 손실되었다고 주장했지만,[89] 이것은 단순히 패배의 굴욕을 줄이기 위한 것일 수 있다.[90]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도 막시미아누스의 실패 소식을 듣고 동부 지방 순회를 중단했다.[91]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쪽으로 서둘러 돌아와 290년 5월 10일 에메사에 도착했고,[92] 290년 7월 1일 다뉴브 강의 시르미움에 도착했다.[93]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90년 12월 말이나 291년 1월에 밀라노에서 막시미아누스를 만났다.[94] 군중들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황제들은 많은 시간을 공개적인 행렬에 바쳤다.[95] 포터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이 의식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의 동료에 대한 지지가 계속됨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통치자들은 비밀리에 정치와 전쟁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고,[96] 그들은 제국 집정관에 네 명의 황제(테트라르키아)를 포함시키는 것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97] 한편, 로마 상원의 사절단은 통치자들을 만나 제국 관청과의 드문 접촉을 재개했다.[98] 황제들은 303년까지 다시 만나지 않았다.[99]

289년 막시미아누스의 침공 실패 후, 카라우시우스와 불안한 휴전이 시작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브리튼과 대륙에서 카라우시우스의 통치를 용인했지만, 분리주의 국가에 공식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카라우시우스는 자신의 영토가 갈리아의 대륙 해안 너머에 있는 것에 만족했다.[100]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의 통치에 대한 이러한 모욕을 용납하지 않았다. 카라우시우스의 분리와 이집트, 시리아, 다뉴브 국경에서의 추가적인 도전에 직면하여, 그는 두 명의 황제로는 제국을 관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101] 293년 3월 1일 밀라노에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카이사르 직위에 임명했다.[102] 같은 날 또는 한 달 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같은 직위에 임명하여 "테트라르키아"(Tetrarchy) 또는 "4인 통치"를 수립했다.[103] 콘스탄티우스는 막시미아누스가 실패한 곳에서 성공하고 카라우시우스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104]

콘스탄티우스는 293년까지 북부 갈리아에서 카라우시우스의 세력을 몰아냈고, 같은 해 카라우시우스는 암살당했고 그의 재무관인 알렉투스가 그를 대신했다.[105] 콘스탄티우스는 해안을 따라 라인강과 셸트강 어귀까지 진격하여 카라우시우스의 프랑크족 동맹군을 물리치고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얻었다.[106] 이제 그의 시선은 브리타니아로 향했고, 콘스탄티우스는 그 후 몇 년 동안 침략 함대를 건조했다.[107] 콘스탄티우스의 임명 후에도 여전히 이탈리아에 있던 막시미아누스는 침략 계획을 통보받았고, 296년 중반에 갈리아로 돌아왔다.[108] 그곳에서 그는 라인강 국경을 카라우시우스의 프랑크족 동맹군으로부터 방어하는 동안 콘스탄티우스는 브리타니아 침공을 개시했다.[109]
알렉투스(Allectus), 카라우시우스의 후계자. 명문: IMP. C. ALLECTVS P. F. AVG. / VIRTVS AVGusti – Senatus Consulto
알렉투스는 콘스탄티우스의 근위대 대장 아스클레피오도투스와의 전투에서 노스다운스에서 전사했다. 콘스탄티우스 자신은 두브리스(도버) 근처에 상륙하여 런디니움(런던)으로 진군했고, 그곳 시민들은 그를 해방자로 맞이했다.[110]

2. 5. 북아프리카 원정



콘스탄티우스가 브리타니아에서 카라우시우스의 후계자 알렉투스를 무찌르고 승리하여 돌아오자,[112] 막시미아누스는 마우레타니아(북서 아프리카)의 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112] 3세기 동안 로마의 권위가 약해짐에 따라 유목민 베르베르족은 이 지역의 정착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113] 289년,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대략 현재 알제리) 주지사는 바바레스족과 퀸크젠티아니족에 대항하여 소규모 군대를 투입함으로써 일시적인 휴전을 얻었지만, 약탈자들은 곧 다시 공격해왔다.[113]

296년, 막시미아누스는 프라이토리안 코호르트, 아퀼레이아 출신, 이집트와 다뉴브 지역의 군단병, 갈리아와 게르만의 보조군단, 트라키아 출신 신병들로 군대를 조직하여 그 해 말 스페인을 경유하여 진격했다.[113] 그는 약탈하는 무어인들로부터 지역을 방어했을 가능성이 있으며,[114]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대략 현재 모로코)로 진출하여 프랑크족 해적들로부터 그 지역을 보호했다.[115]

297년 3월, 막시미아누스는 베르베르족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공격을 시작했다.[116] 이 전역은 오래 지속되었고, 막시미아누스는 297-298년 겨울을 카르타고에서 보낸 후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116] 그는 아틀라스 산맥으로 베르베르족을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영토 깊숙이 진출했다.[117] 지형은 불리했고 베르베르족은 게릴라전에 능숙했지만, 막시미아누스는 계속 밀어붙였다. 그는 부족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처벌을 가하고자 했으며, 이전에는 안전했던 땅을 황폐화시키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나머지는 사하라 사막으로 몰아냈다.[117]

그의 전역은 298년 초에 끝났고, 3월 10일 카르타고에 개선 입성했다.[118] 그곳의 비문에는 사람들이 막시미아누스에게 감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런던에 입성한 콘스탄티우스처럼 그를 ''redditor lucis aeternae''("영원한 빛의 회복자")라고 칭송했다.[117] 막시미아누스는 299년 초 로마에서 또 다른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119]

2. 6. 은퇴와 복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 20주년 기념식인 비켄날리아(Vicennalia)는 303년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일부 증거에 따르면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에게 함께 은퇴할 것을 약속받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지위를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에게 넘겨주었다.[124] 막시미아누스는 은퇴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고 저항은 거의 없었다. 은퇴 전에 막시미아누스는 304년 세기의 게임(Secular Games)을 주관하면서 마지막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125]

305~306년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주조된 막시미아누스의 퇴위를 기념하는 은도금 폴리스(follis). 명문: DN MAXIMIANVS BAEATISSIMO SEN. AVG. / PROVIDENTIA DEORVM QVIES AVGG. S F.


305년 5월 1일, 밀라노와 니코메디아에서 각각 별도의 의식을 통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동시에 은퇴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제외되고, 갈레리우스의 영향으로, 갈레리우스의 전 동료인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의 조카 막시미누스 다자 (두 사람 모두 오랜 군 경력을 가진 자들)가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126] 막시미아누스는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한때 차지했던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새로운 4두정치에 곧 냉담해졌다. 비록 막시미아누스가 세베루스를 카이사르로 선포하는 의식을 주관했지만, 2년 안에 그는 불만을 품고 새로운 정권에 대항하는 아들의 반란을 지지하게 되었다.[127] 막시미아누스는 캄파니아, 루카니아 또는 시르미움에 있는 별장에서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128]

콘스탄티우스가 306년 7월 25일 사망한 후, 콘스탄티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취했다. 이는 갈레리우스를 불쾌하게 했고, 그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제안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 칭호는 세베루스에게 돌아갔다.[130]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권력을 시기하여 306년 10월 28일, 황궁 근위병대 한 부대를 설득하여 자신을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하게 했다. 막센티우스는 단독 지도자의 자리에 불안감을 느껴 막시미아누스에게 황제의 옷을 보내고 "두 번째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하며, 이론적으로는 동등한 통치권을 제안했지만 실제 권력과 계급은 낮았다.[131]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를 인정하지 않고 세베루스를 군대와 함께 로마로 보내 그를 몰아내려 했다. 세베루스의 군인들 상당수가 막시미아누스 휘하에서 복무했고 막센티우스의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대가 막센티우스에게 투항했다. 세베루스는 라벤나로 도주했고, 막시미아누스는 이 도시를 포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항복 조건을 제시했고 세베루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막시미아누스는 세베루스를 체포하여 로마 남부의 공공 별장에 인질로 감금했다. 307년 말,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다시 로마를 함락하지 못하고 군대를 대부분 온전한 상태로 북쪽으로 후퇴했다.[132]

막센티우스(Maxentius)의 드레스덴 흉상


막센티우스가 로마의 방어를 강화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로 가서 콘스탄티누스와 협상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막내딸 파우스타와 결혼하고 막센티우스의 분리주의 정권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에 오르는 거래가 성립되었다. 대신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사이의 구 가족 동맹을 재확인하고 이탈리아에서 막센티우스의 대의를 지지하지만 갈레리우스와의 전쟁에서는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 거래는 307년 말 트리어에서 열린 이중 결혼식으로 확정되었고, 이 자리에서 콘스탄티누스는 파우스타와 결혼하고 막시미아누스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다.[133]

막시미아누스는 307-308년 겨울에 로마로 돌아왔지만 곧 아들과 불화를 겪었고 308년 초 로마 군인들 앞에서 그의 통치권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로마의 병든 정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막센티우스가 로마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하며 막센티우스의 어깨에서 황제의 토가를 벗겼다. 그는 군인들이 자신을 인정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군인들은 막센티우스 편을 들었고, 그 후 막시미아누스는 수치스럽게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134]

정치적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 갈레리우스는 308년 11월 11일, 다뉴브 강 상류의 군사 도시 카르누툼에서 은퇴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를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그곳에서 막시미아누스는 다시 퇴위했고 콘스탄티누스는 다시 카이사르로 강등되었으며, 막시미누스는 동방의 카이사르가 되었다. 갈레리우스의 충실한 군 동료인 리키니우스는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임명되었다.[135] 309년 초 막시미아누스는 그를 받아들일 유일한 궁정인 갈리아의 콘스탄티누스 궁정으로 돌아왔다.[136]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만족하지 않자, 310년 초 그들은 승진했고, 그 결과 이제 네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존재하게 되었다.[137]

2. 7. 최후

310년,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프랑크족과의 전쟁 중일 때 반란을 일으켰다.[138]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군대 일부와 함께 남쪽 아를로 파견되어 남부 갈리아의 막센티우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를에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황제의 자주색 옷을 입었다. 비록 막시미아누스가 자신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뇌물을 제공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군대 대부분은 충성을 지켰고, 막시미아누스는 도시를 떠나야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곧 반란 소식을 듣고 프랑크족에 대한 원정을 포기하고 남부 갈리아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마르세이유(Massilia)에서 도망치는 막시미아누스와 대치했다. 마르세이유는 아를보다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더 잘 견딜 수 있었지만, 충성스러운 시민들이 후문을 콘스탄티누스에게 열어주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었다. 막시미아누스는 체포되어 자신의 죄에 대해 질책을 받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황제의 칭호를 박탈당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에게 약간의 관용을 베풀었지만 그의 자살을 강력하게 부추겼다. 310년 7월, 막시미아누스는 자살했다.[138]

콘스탄티누스의 콜로서스상의 머리


이전의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막시미아누스의 자살 후 막센티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의 충실한 아들로서 자신을 보였다.[139] 그는 아버지의 신격화된 이미지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겠다는 욕망을 선포했다.[140]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에 자살을 불행한 가족 비극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311년까지 그는 다른 버전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그를 사면한 후,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잠자는 동안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파우스타는 그 음모를 알아채고 콘스탄티누스에게 경고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침대에 환관을 두었다. 막시미아누스는 환관을 죽였을 때 체포되었고 자살을 제안받았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141] 선전 외에도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에 대한 ''기억의 말살''을 시행하여 그를 언급하는 모든 비문을 파괴하고 그의 이미지가 새겨진 모든 공공 건물을 제거했다.[142]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배시켰다. 막센티우스는 죽었고 이탈리아는 콘스탄티누스의 통치하에 들어왔다.[143] 에우트로피아는 막센티우스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 아니라는 맹세를 했고, 막시미아누스의 기억은 회복되었다. 막센티우스 치하에서의 그의 신격화는 무효로 선언되었고, 그는 아마도 317년에 다시 신으로 재봉헌되었다. 그는 318년부터 신격화된 콘스탄티우스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함께 콘스탄티누스의 주화에 ''divus'' 즉 신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144] 이 세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의 조상으로 칭송받았다. 그들은 "최고의 황제들"이라고 불렸다.[145] 그의 딸 파우스타와 테오도라를 통해 막시미아누스는 337년부터 363년까지 재위한 모든 황제의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였다.[146]

3. 칭호

막시미아누스는 여러 차례의 군사적 승리를 통해 다양한 칭호를 얻었다. 287년과 288년, 293년, 301년에는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고, 289년, 294년, 300년에는 사르마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다. 298년에는 아르메니아쿠스 막시무스, 메디쿠스 막시무스, 아디아베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모두 받았으며, 295년과 298년에는 페르시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다. 297년에는 카르피쿠스 막시무스와 브리타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획득했다.

또한, 막시미아누스는 287년, 288년, 290년, 293년, 297년, 299년, 303년, 304년, 307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4. 가족 관계

막시미아누스는 에우트로피아와 결혼하여 막센티우스(서로마 제국의 부제이자 후일의 찬탈자)와 파우스타(후일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내)를 낳았다. 또한, 막시미아누스에게는 계모녀 테오도라(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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