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투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막투이는 15세기 초 명나라에 협력하여 베트남 통치에 관여한 인물이다. 1407년 명나라가 호 왕조를 멸망시킨 후, 그는 명나라에 베트남을 중국의 군현으로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했고, 명나라에 의해 교지포정사사 우참정으로 임명되었다. 후 쩐 왕조와의 전투에서 명나라를 지원했으며, 1412년 반란 진압 중 사망했다. 막투이의 현손 막당중은 막 왕조를 건국한 후 그를 유조, 조복홍도적덕황제로 추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전쟁 사망자 - 페드로 데 알바라도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1485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콘키스타도르로, 에르난 코르테스의 부관으로서 아즈텍 정복에 참여하고 과테말라 총독을 역임했으며, 대사원 학살과 원주민에 대한 잔혹 행위로 비판받다 1541년 사망했다. - 전쟁 사망자 - 핫타 요이치
핫타 요이치는 일본의 토목공학 기사이자 타이완 총독부 관리로, 타이완 총독부 기술관으로 근무하며 자난 평야 관개 사업의 일환인 우산터우 댐 건설을 주도하여 타이완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그의 업적은 타이완에서 높이 평가받아 기리는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 1412년 사망 - 이거이
이거이는 이성계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조선 건국 후 공신에 책록되었고,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영의정부사를 지내는 등 조선 초 정치에 기여한 무신이자 공신이다. - 1412년 사망 - 마르그레테 1세
마르그레테 1세는 14세기 말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한 덴마크 여왕이자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아들 올라프 2세 사후 에리크를 후계자로 삼아 3국의 왕으로 옹립하여 동맹을 통치하며 북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407년 명나라가 호 왕조를 멸망시킨 후, 막투이는 다른 원로들과 함께 명나라에 베트남 통치를 요청하였다.[1] 명나라는 이를 받아들여 교지포정사사를 설치하고 막투이를 우참정(右參政)으로 임명하였다.[2] 이후 1408년 간정제가 후 쩐 왕조를 세우고 명나라에 저항하자, 막투이는 명나라 장수 장보를 따라 후 쩐 왕조 군대를 공격하는 데 참여하였다.[3] 1412년에는 농문력(農文歷)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고립되어 독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4] 훗날 그의 현손인 막당중이 1527년 막 왕조를 세운 뒤, 막투이를 유조(裕祖) '''조복홍도적덕황제'''(肇福弘道積德皇帝)로 추존하였다.[5]
2. 1. 초기 생애와 명나라 협력
1407년, 명나라가 호 왕조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때 막투이는 박장 등 여러 부현(府縣)의 원로 1,200명과 함께, 이전 쩐 왕조의 자손들이 호꾸이리에게 모두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며 명나라에 베트남을 과거처럼 중국의 군현으로 다시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했다.[1] 명나라는 호꾸이리와 호한뜨엉 부자를 사로잡은 뒤, 막투이 등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구준(丘濬)의 기록인 《평정교남록(平定交南錄)》에는 막투이가 직접 호한트엉과 그의 태자를 사로잡았다고도 전해진다.[2]명나라는 베트남 지역에 교지포정사사(交趾布政使司)를 설치하고, 막투이를 우참정(右參政)으로 임명하여 명나라의 통치에 협력하도록 하였다. 1408년에는 간정제가 후 쩐 왕조를 세우고 명나라의 통치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막투이는 명나라 장수 장보를 따라 간정제의 거점인 연주(演州)를 공격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간정제와 당떳은 명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화주(化州)로 후퇴했으며, 명나라 군대는 보찐해구(布政海口)까지 이들을 추격했다.[3]
1412년, 농문력(農文歷)이라는 인물이 르엉선(諒山)에서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 군대의 이동 경로를 차단하고 많은 군사를 살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막투이는 군대를 이끌고 농문력을 토벌하러 나섰으나, 전투 중 깊숙이 진격하다가 고립되었고 결국 독화살에 맞아 전사했다.[4]
2. 2. 후 쩐 왕조와의 전투
1407년, 명나라가 호 왕조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막투이는 박장 등 부현(府縣)의 기로(耆老) 1,200명과 함께 쩐씨의 자손이 호꾸이리에게 모두 살해되었음을 선언하고 명나라에 베트남을 과거처럼 중국의 군현으로 회복시켜달라고 청하였다.[1] 명나라는 호꾸이리, 호한뜨엉 부자를 사로잡은 뒤 그들의 건의한 대로 행하였다. 구준(丘濬)의 《평정교남록(平定交南錄)》에는 막투이가 호한트엉과 그의 태자를 사로잡았다고 되어 있다.[2]명나라는 교지포정사사(交趾布政使司)를 설립하고 막투이를 우참정(右參政)으로 삼았다. 1408년, 간정제가 병사를 일으켜 후 쩐 왕조를 세우고 명나라에 저항하였다. 막투이는 장보를 따라 간정제의 거점인 연주(演州)를 공격하였다. 간정제와 당떳은 장보를 대적하지 못하여 화주(化州)로 달아났다. 명나라군은 그대로 추격하여 보찐해구(布政海口)에 이르렀다.[3]
1412년, 농문력(農文歷)이 르엉선(諒山)에서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군이 이동하는 도로를 막은 뒤 수많은 명나라군을 죽였다. 막투이는 병사를 이끌고 농문력을 토벌하러 갔으나 고립되어 깊숙이 들어갔다가 독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4]
2. 3. 사후 추존
1527년, 막투이의 현손인 막당중이 막 왕조를 세운 뒤 막투이의 묘호를 유조(裕祖), 시호를 '''조복홍도적덕황제'''(肇福弘道積德皇帝)라고 하였다.[5]3. 가족
(내용 없음)
3. 1. 가계
4. 평가
막투이에 대한 평가는 베트남 역사에서 극명하게 엇갈린다.
참조
[1]
서적
수역주자록
[2]
서적
평정교남록
[3]
서적
대월사기전서
[4]
서적
대월사기전서
[5]
서적
대월통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