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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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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 쩐 왕조는 1407년, 명나라의 지배에 대항하여 쩐 왕조의 후손인 쩐응오이를 중심으로 건국된 베트남의 왕조이다. 명나라에 의해 멸망한 쩐 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했으나, 명나라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간정제, 중광제를 거치며 1414년에 멸망했다. 이후 레러이가 람선 봉기를 일으켜 명나라를 몰아내고 레 왕조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쩐까오를 옹립했으나, 1428년 쩐까오를 살해하고 레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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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쩐 왕조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명대월(大越)
공용어한문
베트남어
종교불교 (국교)
도교
유교
베트남 민간 신앙
통화구리 합금 동전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모도 (1407년–1409년)
빈탄 (1409년–1413년)
역대 황제간정제 (최초)
중광제 (마지막)
역사
성립1407년
멸망1413년
주요 사건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현재 국가베트남
기타
지위미승인 원시 국가

2. 역사

호구려(胡季犛)가 후 Trần 왕조를 찬탈하고 여러 개혁을 추진했으나, 찬탈과 숙청으로 반대자가 많았다.[2] 명나라 영락제는 안남(安南)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후 Trần 왕조의 복권과 그 일족의 복위를 요구했으나, 호구려는 이를 거절했다.[3]

1407년 영락제는 대군을 안남에 침공시켰고(Ming–Hồ War영어), 호구려는 많은 신하들에게 배반당하여 붙잡혀[3] 살해되었으며, 대우(大虞)는 멸망했다. 이후 안남은 명나라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갔다.[3] 명나라의 가혹한 착취와 동화 정책으로 안남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407년 10월, Trần Triệu Cơvi는 후 Trần 왕조 제9대 황제 예종의 차남 진뢰(陳頠)를 맹주로 삼아 봉기했고,[3] 진뢰는 제호를 칭하여 즉위했다(간정제(簡定帝)).[3] 이것이 후 후 Trần 왕조의 기원이다.

1408년 명나라 지배에 대한 첫 번째 베트남의 봉기는 쩐응오이 왕자가 이끌었다. 명나라 황제는 무성에게 운남, 광서, 귀주, 사천에서 4만 명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지만, 쩐응오이의 게릴라 부대에 완전히 패배했다. 영락제1409년 2월 23일 무성을 대신하여 장부를 임명했다. 1407년에 점령한 8,600척의 배와 4만 7천 명의 군대를 동원한 장부는 9월에 해전에서 쩐응오이의 2만 명의 군대와 600척의 배를 압도했다. 쩐응오이는 12월에 체포되어 난징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조카 쩐뀌꽝은 명나라에 대한 투쟁을 계속 이끌었다.

간정제는 반명 세력을 결집하여 명나라에 저항했으나, 명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로 인해 고전했다. 1408년 초, 그는 乂安(현재의 게안성)으로 진군했고, 이에 化州(호아쩌우, 현재의 투아티엔후에성)의 鄧悉[3]과 이전에 升華府(탄호아, 현재의 꽝남성) 관리였던 阮景真이 호응했다. 12월, 대월군은 逋姑(뽀꼬, 현재의 남딘성 이이엔현 옌방사) 선착장에서 鄧悉과 阮景真 등의 분전으로 4만 명의 명군을 격퇴했다고 전해진다(보꼬 전투).[3] 이후 간정제의 명성은 안남 전역에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대월군에 투항했다.

그러나 보꼬 전투 승리 후, 간정제는 공신들의 실력을 두려워하여 阮夢莊의 중상모략에 따라 鄧悉과 阮景真을 처형했다.[3] 그 결과, 봉기는 점차 분열되었다. 이 폭정에 분노한 鄧容(鄧悉의 아들)과 阮景異(阮景真의 아들)는 많은 군사와 함께 乂安에 들어가 간정제의 조카인 陳季擴(쩐 꾸이 꾸안)를 황위에 올렸다(중광제).[3] 띤화성에서 화주로 이동하여 간정제를 상황으로 삼아 중추에서 배제했다. 결국 간정제는 명군에 잡혀 금릉(현재의 난징)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쩐뀌꽝(陳貴況)은 결국 다시 움직임을 재개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그의 반란에 결집시켰다. 장부(張輔)는 교지(交趾)로 돌아가 베트남인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쩐뀌꽝이 그 지역에서 큰 야망을 가지고 있으며 명나라 황제가 그의 백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장부는 다시 2만 4천 명의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1411년 2월 12일 남딘에서 쩐뀌꽝의 군대와 싸워 4,500명을 사살하고 2,000명을 사로잡았다. 8월 6일, 장생(張晟)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탕화에서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160척의 선박을 침몰시키고 120척의 배를 나포하고 수십만 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

화력과 병력에서 열세였던 쩐뀌꽝과 그의 추종자들은 베트남의 지형을 이용하여 명나라 정규군과 계속 싸웠고, 필요할 때는 캄보디아로 후퇴했다. 1413년 말까지 그의 군대는 60%에서 70%의 손실을 입었고 생존을 위해 명나라 군량창에서 식량과 곡식을 훔쳐야 했다. 그는 그의 아내와 그의 형제와 함께 1414년 3월 30일 명나라에 사로잡혔고, 8월 16일 난징에서 처형되었다.[2]

그러나 鄧悉 등 명장의 죽음은 큰 타격이었다. 1411년 중반, 증원을 받은 명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띤화로 진격을 시작했고, 대월군은 후에로 후퇴했다. 1413년 8월, 후에는 명군의 공격을 받았고, 대월군은 명군 앞에 흩어졌다. 중광제, 鄧容, 阮景異는 차례로 포로가 되었고,[3]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대월군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후쩐 왕조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중광제는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압송되는 도중 1414년에 투신자살했다는 설도 있으나,[3] 실제로는 영락제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레러이라는 영웅이 1418년에 평정왕을 자칭하며 람선 봉기를 일으켰다.[4] 1424년 영락제가 죽은 것도 도움이 되어 명군을 연전연승으로 격파했다. 명나라에서는 영락제 사후 다음 해에 즉위한 홍희제가 죽고, 고서의 난이 일어나는 등의 상황으로 안남 지배는 점차 약화되었고, 1427년 레리는 마침내 명군을 안남에서 철군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안남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레리는 거지의 아들로서 예종의 조카라고 자칭했던 쩐까오(陳暠)를 옹립하고[4] (천경제) 스스로는 배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1427년 쩐까오는 명나라로부터 안남국왕에 봉해졌다.[4] 그러나 이것은 왕조 건설을 위한 시간벌이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1428년 레리는 쩐까오를 살해하고[5] 레 왕조를 열었다(태조). 후쩐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2. 1. 건국 배경

호구려(胡季犛)가 후 Trần 왕조를 찬탈하고 여러 개혁을 추진했으나, 찬탈과 숙청으로 반대자가 많았다.[2] 명나라 영락제는 안남(安南)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후 Trần 왕조의 복권과 그 일족의 복위를 요구했으나, 호구려는 이를 거절했다.[3]

1407년 영락제는 대군을 안남에 침공시켰고(Ming–Hồ War영어), 호구려는 많은 신하들에게 배반당하여 붙잡혀[3] 살해되었으며, 대우(大虞)는 멸망했다. 이후 안남은 명나라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갔다.[3]

명나라의 가혹한 착취와 동화 정책으로 안남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407년 10월, 애국자였던 Trần Triệu Cơvi는 후 Trần 왕조 제9대 황제 예종의 차남 진뢰(陳頠)를 맹주로 삼아 모도(謨渡)(현재 닌빈성(寧平省) 옌모현(延謨縣) Yên Thành, Yên Môvi)에서 봉기했다.[3] 진뢰는 제호를 칭하여 즉위했다(간정제(簡定帝)).[3] 이것이 후 후 Trần 왕조의 기원이다.

2. 2. 명나라와의 항쟁

1406년부터 1407년까지 벌어진 명나라의 베트남 정복은 호규리를 제거하고 이전 쩐 왕조대월의 왕위에 복귀시키려는 시도였으나, 대월의 멸망과 명나라의 교지 설치로 이어졌다. 명나라 역사서는 쩐 왕조의 후계자를 찾지 못해 베트남 왕국을 명나라에 편입시켰다고 기록했지만, 쩐 왕실의 일원들이 나타나 명나라의 지배에 도전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무시하고, 추적하여 처형하기까지 하였다.[2]

1400년, 후 쩐 왕조는 신하 호구려(胡季犛)에게 찬탈당하여 멸망했다.[2] 호구려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여 국정을 굳건히 하였으나, 찬탈과 숙청을 반복했기에 국내에는 반대자도 많았다. 명나라영락제가 안남(安南) 남하 정책을 추진하면서, 후 쩐 왕조의 복권과 그 일족인 陳添平|진첨평중국어의 복위를 요구하자[3] 호구려는 이를 거절했다. 영락제는 1407년 대군을 안남에 침공시켜( Ming–Hồ War|명호 전쟁영어), 호구려는 많은 신하들에게 배반당하여 붙잡혀[3] 살해되었고, 대우(大虞)는 멸망했다.

이후 안남은 명나라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갔다.[3] 명나라가 안남에 가혹한 착취와 과도한 동화 정책을 강요했기 때문에, 안남 각지에서 명나라에 대한 반란이 발생했다. 1407년 10월, Trần Triệu Cơ|진조기vi는 후 쩐 왕조 제9대 황제 예종의 차남인 진뢰(陳頠)를 맹주로 삼아 봉기했다.[3] 진뢰는 제호를 칭하여 즉위했다(간정제(簡定帝)).[3] 이것이 후 쩐 왕조의 기원이다.

1408년 명나라 지배에 대한 첫 번째 베트남의 봉기는 쩐응오이 왕자가 이끌었다. 베트남 역사서는 그를 전 쩐 왕의 둘째 아들로 인정하지만, 명나라에서는 그를 멍족(몽골계 소수민족)의 사칭자로 여겼다. 명나라 황제는 무성에게 운남, 광서, 귀주, 사천에서 4만 명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지만, 쩐응오이의 게릴라 부대에 완전히 패배했다. 영락제1409년 2월 23일 무성을 대신하여 장부를 임명했다. 1407년에 점령한 8,600척의 배와 4만 7천 명의 군대를 동원한 장부는 9월에 해전에서 쩐응오이의 2만 명의 군대와 600척의 배를 압도했다. 쩐응오이는 12월에 체포되어 난징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조카 쩐뀌꽝은 명나라에 대한 투쟁을 계속 이끌었다.

간정제는 반명 세력을 결집하여 명나라에 저항했으나, 명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로 인해 고전했다. 1408년 초, 그는 乂安(현재의 게안성)으로 진군했고, 이에 化州(호아쩌우, 현재의 투아티엔후에성)의 鄧悉[3]과 이전에 升華府(탄호아, 현재의 꽝남성) 관리였던 阮景真이 호응했다. 12월, 대월군은 逋姑(뽀꼬, 현재의 남딘성 이이엔현 옌방사) 선착장에서 鄧悉과 阮景真 등의 분전으로 4만 명의 명군을 격퇴했다고 전해진다(보꼬 전투).[3] 이후 간정제의 명성은 안남 전역에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대월군에 투항했다.

그러나 보꼬 전투 승리 후, 간정제는 공신들의 실력을 두려워하여 阮夢莊의 중상모략에 따라 鄧悉과 阮景真을 처형했다.[3] 그 결과, 봉기는 점차 분열되었다.

이 폭정에 분노한 鄧容(鄧悉의 아들)과 阮景異(阮景真의 아들)는 많은 군사와 함께 乂安에 들어가 간정제의 조카인 陳季擴(쩐 꾸이 꾸안)를 황위에 올렸다(중광제).[3] 띤화성에서 화주로 이동하여 간정제를 상황으로 삼아 중추에서 배제했다. 결국 간정제는 명군에 잡혀 금릉(현재의 난징)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쩐뀌꽝(陳貴況)은 결국 다시 움직임을 재개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그의 반란에 결집시켰다. 장부(張輔)는 교지(交趾)로 돌아가 베트남인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쩐뀌꽝이 그 지역에서 큰 야망을 가지고 있으며 명나라 황제가 그의 백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장부는 다시 2만 4천 명의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1411년 2월 12일 남딘에서 쩐뀌꽝의 군대와 싸워 4,500명을 사살하고 2,000명을 사로잡았다. 8월 6일, 장생(張晟)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탕화에서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160척의 선박을 침몰시키고 120척의 배를 나포하고 수십만 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

화력과 병력에서 열세였던 쩐뀌꽝과 그의 추종자들은 베트남의 지형을 이용하여 명나라 정규군과 계속 싸웠고, 필요할 때는 캄보디아로 후퇴했다. 1413년 말까지 그의 군대는 60%에서 70%의 손실을 입었고 생존을 위해 명나라 군량창에서 식량과 곡식을 훔쳐야 했다. 그는 그의 아내와 그의 형제와 함께 1414년 3월 30일 명나라에 사로잡혔고, 8월 16일 난징에서 처형되었다.[2]

그러나 鄧悉 등 명장의 죽음은 큰 타격이었다. 1411년 중반, 증원을 받은 명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띤화로 진격을 시작했고, 대월군은 후에로 후퇴했다. 1413년 8월, 후에는 명군의 공격을 받았고, 대월군은 명군 앞에 흩어졌다. 중광제, 鄧容, 阮景異는 차례로 포로가 되었고,[3]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대월군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후쩐 왕조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중광제는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압송되는 도중 1414년에 투신자살했다는 설도 있으나,[3] 실제로는 영락제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2. 3. 레러이의 봉기와 후 쩐 왕조의 부활

1408년 초, 간정제는 게안성(乂安)으로 진군했고, 투아티엔후에성(化州)의 鄧悉[3]꽝남성(升華府) 관리였던 阮景真이 호응했다. 12월, 대월군은 남딘성 이이엔현 옌방사(逋姑) 선착장에서 鄧悉과 阮景真 등의 분전으로 4만 명의 명군을 격퇴했다고 전해진다(보꼬 전투).[3] 이후 간정제의 명성은 안남 전역에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대월군에 투항했다.

그러나 보꼬 전투 승리 후, 간정제는 공신들의 실력을 두려워하여 阮夢莊의 중상모략에 따라 鄧悉과 阮景真을 처형했다.[3] 그 결과, 봉기는 점차 분열되었다.

이 폭정에 분노한 鄧悉의 아들 鄧容과 阮景真의 아들 阮景異는 많은 군사와 함께 乂安에 들어가 간정제의 조카인 陳季擴(쩐 꾸이 꾸안)를 황위에 올렸다(중광제).[3] 이들은 띤화성에서 화주로 이동하여 간정제를 상황으로 삼아 중추에서 배제했다. 결국 간정제는 명군에 잡혀 금릉(현재의 난징)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명나라 장군 鄧悉 등의 죽음은 대월군에게 큰 타격이었다. 1411년 중반, 증원을 받은 명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띤화로 진격을 시작했고, 대월군은 후에로 후퇴했다. 1413년 8월, 후에는 명군의 공격을 받았고, 대월군은 명군 앞에 흩어졌다. 중광제, 鄧容, 阮景異는 차례로 포로가 되었고,[3]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대월군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후쩐 왕조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중광제는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압송되는 도중 1414년에 투신자살했다는 설도 있으나,[3] 실제로는 영락제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레러이라는 영웅이 1418년에 평정왕을 자칭하며 람선 봉기를 일으켰다.[4] 1424년 영락제가 죽은 것도 도움이 되어 명군을 연전연승으로 격파했다. 명나라에서는 영락제 사후 다음 해에 즉위한 홍희제가 죽고, 고서의 난이 일어나는 등의 상황으로 안남 지배는 점차 약화되었고, 1427년 레리는 마침내 명군을 안남에서 철군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안남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레리는 거지의 아들로서 예종의 조카라고 자칭했던 쩐까오(陳暠)를 옹립하고[4] (천경제) 스스로는 배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1427년 쩐까오는 명나라로부터 안남국왕에 봉해졌다.[4] 그러나 이것은 왕조 건설을 위한 시간벌이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1428년 레리는 쩐까오를 살해하고[5] 레 왕조를 열었다(태조). 후쩐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3. 역대 군주

대수시호연호재위 기간
1간정황제(簡定皇帝)쩐응오이
(Trần Ngỗi)
흥카인(興慶)1407년 ~ 1409년
2계황제(繼皇帝)쩐뀌코앙
(Trần Quý Khoáng)
쭝꽝(重光)1409년 ~ 1414년
3종황제(終皇帝)쩐까오
(Trần Cảo)
티엔카인(天慶)1426년 ~ 1428년


참조

[1] 서적 https://books.google[...]
[2] 서적
[3] 서적 베트남사략 제1권 제3편 자치의 시대 제12장 후진조
[4] 서적 베트남사략 제1권 제3편 자치의 시대 제14장 군사행동의 10년
[5] 서적 베트남사략 제1권 제3편 자치의 시대 제15장 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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