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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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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 신드주에 위치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 기원전 26세기에 건설되어 하라파 문명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인더스강 하류 서쪽에 위치하며, "죽은 자의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다. 1922년 재발견되었으며, 계획적인 도시 구조, 정교한 상하수도 시스템, 대목욕탕 등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흔적을 보여준다. 현재는 염해와 홍수로 인한 훼손으로 보존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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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개요
모헨조다로 - 스투파 언덕의 모습
"모헨조다로, 스투파 언덕의 모습"
공식 명칭모헨조다로의 고고 유적
영어 명칭Archaeological Ruins at Moenjodaro
프랑스어 명칭Ruines archéologiques de Mohenjo Daro
신드어موئن جو دڙو (مو엔 조 다로)
우르두어موئن جو دڑو (모엔 조 다로)
의미죽은 자의 언덕
위치라르카나 구, 신드 주, 파키스탄
유형정착지
면적250 헥타르
건설 시기기원전 26~25세기
폐기 시기기원전 19세기
문화인더스 문명
세계 유산 정보
ID138
등재 연도1980년
기준문화 (ii, iii)
면적240 헥타르

2. 명칭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3][7] 이라바탐 마하데반(Iravatham Mahadevan)은 모헨조다로의 한 봉인을 분석한 결과, 이 도시의 고대 이름은 "수탉(''kukkuta'')의 도시('' -rma'')"를 뜻하는 ''Kukkuṭārma''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수탉 싸움은 이 도시에서 의례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모헨조다로는 아프리카, 서아시아, 유럽, 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길들여진 닭의 계통군이 확산되는 중심지이었을 수도 있다.[6] 모헨조다로는 현지 신드어로 "죽은 자의 언덕"으로 해석된다.[3][7] '''모헨조다로'''는 현지 신드어로 "'''죽음의 언덕'''"을 의미하며, 역사학자들이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는 매우 오래된 시대의 사망자들이 잠든 고분으로서, 현지 주민들은 두려워서 접근하지 않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이 도시의 본래 이름, 즉 당시의 명칭에 대해서는 인더스 문자가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서조차 얻을 수 없다.

3. 위치

모헨조다로 유적지 포함 인더스 문명 주요 유적지 및 추정 영역을 보여주는 지도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 신드주 라르카나 지역의 인더스 강 하류 서쪽 제방 근처에 위치해 있다.[8] 인더스 강의 범람원에 있는 플라이스토세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라르카나 마을에서 약 28km 떨어져 있다.[9]

4. 역사적 배경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26세기에 건설되었다.[10] 이 도시는 하라파 문명으로 알려진 고대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11] 인더스 문명은 선사 시대 인더스 문화에서 기원전 3000년경에 발전했다. 인더스 문명은 전성기 때 현재의 파키스탄과 북인도 대부분을 차지했고, 서쪽으로는 이란 국경까지, 남쪽으로는 인도 구자라트까지, 북쪽으로는 박트리아의 외곽까지 확장되었으며, 하라파, 모헨조다로, 로탈, 칼리반간, 돌라비라, 라키가리 등이 주요 도시 중심지였다. 모헨조다로는 당시 가장 발전된 도시였으며,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토목 공학과 도시 계획을 자랑했다.[12] 인더스 문명이 기원전 1900년경 갑작스럽게 쇠퇴하면서 모헨조다로는 버려졌다.[10][19]

5. 재발견 및 발굴

모헨조다로는 약 3,700년 동안 잊혀져 있다가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인도 고고학 조사국의 R. D. 바네르지가 처음 방문했다.[13] 그는 당시 불교 으로 추정되는 구조물과 석기 조각을 발견하고 유적의 고대성을 확신했다.[13] 이후 1924년에서 1925년 사이 K. N. 딕싯이, 1925년에서 1926년 사이에는 존 마셜이 발굴을 주도했다.[13]

모헨조다로의 고고학적 유적


1924년 모헨조다로 발굴


1930년대에는 마셜, D. K. 딕시타르, 어니스트 매케이가 대규모 발굴을 이끌었다.[14] 1945년에는 모티머 휠러와 그의 수습생인 아마드 하산 다니와 F. A. 칸이 추가 발굴을 진행했다.[14] 1964년과 1965년에는 조지 F. 데일스가 마지막 대규모 발굴을 이끌었다.[5]

1965년 이후, 노출된 구조물의 풍화 손상 때문에 발굴이 금지되었고, 구제 발굴, 지표 조사, 보존 프로젝트만 허용되었다.[5] 1980년대에는 마이클 얀센과 마우리치오 토시가 이끄는 독일과 이탈리아 조사단이 건축 기록, 지표 조사, 국지적 조사 등 침습성이 적은 고고학 기술을 사용하여 모헨조다로에 대한 추가 정보를 수집했다.[5]

1980년, 파키스탄의 신청으로 “모헨조다로의 고고학 유적” (영어: Archaeological Ruins at Moenjodaro)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모헨조다로는 지하수 상승에 의한 염해와 1965년 이후 유적을 덮었던 퇴적물이 제거되면서 벽돌이 염분을 흡수하여 풍화되는 염분 쇄설 현상으로 보존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2015년 파키스탄 모헨조다로 국가 기금(Pakistan's National Fund for Mohenjo-daro)이 실시한 건조 코어 드릴링 결과 유적지가 발굴된 지역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15] 또한, 2022년 파키스탄 홍수로 크게 손상되어 주 당국은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했다.[64]

6. 도시 구조 및 건축

모헨조다로 유적은 인더스강 하류 오른편 기슭에 있으며, 1922년 쿠샨 제국의 불탑(佛塔)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66] 사방 5킬로미터 이상에 걸친 도시로, 동쪽에는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으로 구성된 저지대 시가지가 있고, 서쪽에는 행정과 교육, 종교적 건물로 이루어진 성채가 있다.

모헨조다로는 직선형 건물이 격자형으로 배치된 계획 도시이다.[16] 도시의 규모와 공공 건물 및 시설은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을 시사한다.[28] 도시는 성채(Citadel)와 하층 도시(Lower City)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약 12m 높이의 진흙 벽돌 언덕인 성채에는 공중 목욕탕, 약 5,00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대규모 주거 시설, 그리고 두 개의 대형 집회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청결을 중시하여 집집마다 하수도를 갖춘 욕탕이 있었고, '''대목욕탕'''도 별도로 있었다. 이곳의 대목욕탕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중 목욕탕이었다.[68] 대목욕탕 북쪽에는 작은 목욕 시설 여덟 곳이 2열로 늘어선 곳이 발견되었는데, 각 욕실에는 이층으로 연결되는 방이 있었고, 거기에는 사제들이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는 방이 있었다.[70]

주변 도시 배치를 보여주는 대욕장(Great Bath, Mo헨조다로)의 모습


동쪽 시가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북으로 높은 벽을 쌓아서 만든 폭 9.14미터의 곧은 도로이다. 이 지역은 도로를 따라 배수시설을 완비하고 있었다. 주택에서 토관(土管)을 통해 하수구로 물이 흐르면, 이 물은 다시 지하 배수로를 따라 큰 길의 하수도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평균 폭이 1미터 정도 되는 우물 75개가 있어서 식수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71]

유적은 동서 두 개의 유적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는 시가지가, 서쪽에는 성채(城塞)[1]가 펼쳐져 있다. 규모는 거의 1.6킬로미터 정사각형으로 추정되지만, 향후 조사에 따라 더 큰 규모로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 유적은 질서 정연한 도시 계획을 보여주며, 도로는 직각으로 교차하여 바둑판처럼 세분화되어 있었다.[2] 상하수도 시스템[3], 개인용 욕실, 공중목욕탕 등이 이미 존재했으며, 수량의 계절적 변동을 고려하여 저수지를 충분히 정비할 정도로 수리공학은 크게 발전했다.

모헨조다로 건설에 있어 고대 도시 계획의 영향을 시사하는 거리와 건물의 규칙성


시가지는 동서 2개, 남북 3개의 너비 10미터의 대로에 의해 12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각 구역은 대로로 통하는 1.5~3미터 정도의 좁은 골목길로 다시 나뉘어져 있었다. 여기서는 일반 가옥부터 대상숙소라고 불리는 건물, 노동자용 허름한 오두막 등 다양한 건물이 발견되고 있다. 가옥은 크기가 다양하지만, 중정을 중심으로 하고 그것을 둘러싸듯이 여러 개의 방을 가지도록 만들어졌으며, 출입구를 대로 쪽에 두지 않고 골목길에 면하여 문을 여는 스타일이 일반적이었다.

[1] Fletcher et al.(2012), p.103, “모헨조다로 성채”

[2] 나가타(2013), 테라무라 유후미, 우노 타카오 "발굴과 GIS 분석으로 인더스 문명 도시를 탐구하다"

[3] 이토(2016), 타임머신(로마 수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에도의 수도-100만 도시의 수도; 모헨조다로의 하수도-4000년 전의 하수도)

6. 1. 도시 특징

모헨조다로 유적은 인더스강 하류 오른편 기슭에 있으며, 1922년 쿠샨 제국의 불탑(佛塔)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66] 사방 5킬로미터 이상에 걸친 도시로, 동쪽에는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으로 구성된 저지대 시가지가 있고, 서쪽에는 행정과 교육, 종교적 건물로 이루어진 성채가 있다.

모헨조다로는 직선형 건물이 격자형으로 배치된 계획 도시이다.[16] 도시의 규모와 공공 건물 및 시설은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을 시사한다.[28] 도시는 성채(Citadel)와 하층 도시(Lower City)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약 12m 높이의 진흙 벽돌 언덕인 성채에는 공중 목욕탕, 약 5,00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대규모 주거 시설, 그리고 두 개의 대형 집회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청결을 중시하여 집집마다 하수도를 갖춘 욕탕이 있었고, '''대목욕탕'''도 별도로 있었다. 이곳의 대목욕탕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중 목욕탕이었다.[68] 대목욕탕 북쪽에는 작은 목욕 시설 여덟 곳이 2열로 늘어선 곳이 발견되었는데, 각 욕실에는 이층으로 연결되는 방이 있었고, 거기에는 사제들이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는 방이 있었다.[70]

동쪽 시가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북으로 높은 벽을 쌓아서 만든 폭 9.14미터의 곧은 도로이다. 이 지역은 도로를 따라 배수시설을 완비하고 있었다. 주택에서 토관(土管)을 통해 하수구로 물이 흐르면, 이 물은 다시 지하 배수로를 따라 큰 길의 하수도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평균 폭이 1미터 정도 되는 우물 75개가 있어서 식수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71]

유적은 동서 두 개의 유적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는 시가지가, 서쪽에는 성채(城塞)[1]가 펼쳐져 있다. 규모는 거의 1.6킬로미터 정사각형으로 추정되지만, 향후 조사에 따라 더 큰 규모로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 유적은 질서 정연한 도시 계획을 보여주며, 도로는 직각으로 교차하여 바둑판처럼 세분화되어 있었다.[2] 상하수도 시스템[3], 개인용 욕실, 공중목욕탕 등이 이미 존재했으며, 수량의 계절적 변동을 고려하여 저수지를 충분히 정비할 정도로 수리공학은 크게 발전했다.

시가지는 동서 2개, 남북 3개의 너비 10미터의 대로에 의해 12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각 구역은 대로로 통하는 1.5~3미터 정도의 좁은 골목길로 다시 나뉘어져 있었다. 여기서는 일반 가옥부터 대상숙소라고 불리는 건물, 노동자용 허름한 오두막 등 다양한 건물이 발견되고 있다. 가옥은 크기가 다양하지만, 중정을 중심으로 하고 그것을 둘러싸듯이 여러 개의 방을 가지도록 만들어졌으며, 출입구를 대로 쪽에 두지 않고 골목길에 면하여 문을 여는 스타일이 일반적이었다.

[1] Fletcher et al.(2012), p.103, “모헨조다로 성채”

[2] 나가타(2013), 테라무라 유후미, 우노 타카오 "발굴과 GIS 분석으로 인더스 문명 도시를 탐구하다"

[3] 이토(2016), 타임머신(로마 수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에도의 수도-100만 도시의 수도; 모헨조다로의 하수도-4000년 전의 하수도)

6. 2. 주요 건물

모헨조다로 유적은 인더스강 하류 오른편 기슭에 있으며, 1922년 쿠샨 제국의 불탑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66] 거대한 벽돌 건물, 정교한 배수 시설, 돌 조각, 청동 도구, 금 장신구 등 고도로 발달한 도시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도시 동쪽에는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으로 구성된 저지대 시가지가 있고, 서쪽에는 행정, 교육, 종교적 건물로 이루어진 성채가 있다. 성채는 기단을 쌓아 만들었으며, 높은 사리탑,[66] 대목욕탕, 곡물 창고, 대회의장, 학교 등이 있다. 성채는 종교적 의미가 큰 상징적 역할을 했다.[67]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청결을 중시하여 집집마다 하수도를 갖춘 욕탕이 있었고, 대목욕탕도 있었다. 대목욕탕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중 목욕탕이었다.[68] 구운 벽돌들을 정교하게 짜맞춰 만든 대목욕탕은 남북으로 계단이 있고, 근처 대형 우물에서 물을 공급하며, 남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사용한 물을 빼내도록 되어 있다. 대목욕탕 북쪽에는 작은 목욕 시설 여덟 곳이 2열로 늘어서 있었고, 각 욕실에는 이층으로 연결되는 방이 있었는데, 사제들이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70]

대욕장


1950년, 머티머 휠러 경은 모헨조다로에서 하나의 큰 건물을 "대곡창"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조나단 마크 케노이어는 "곡창"에서 곡물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대회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9] "대곡창" 근처에는 대규모의 정교한 공중 목욕탕인 대욕장(Great Bath)이 있다. 기둥이 있는 안뜰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벽돌로 지어진 수영장이 있고, 역청으로 방수 처리되었다.

동쪽 시가지에는 남북으로 높은 벽을 쌓아서 만든 폭 9.14미터의 곧은 도로가 있다. 이 지역은 도로를 따라 배수시설을 완비하고 있었다. 주택에서 토관을 통해 하수구로 물이 흐르면, 지하 배수로를 따라 큰 길의 하수도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평균 폭이 1미터 정도 되는 우물 75개가 있어서 식수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71]

모헨조다로에서는 독특한 도량형 체계를 운용해 다양한 저울추가 발굴되었고, 벽돌 모양이나 크기도 균일하게 유지했다.[72] 무기류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6. 3. 요새

모헨조다로 유적은 인더스강 하류 오른편 기슭에 있으며, 1922년 쿠샨 제국의 불탑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66] 사방 5킬로미터 이상에 걸친 도시로, 서쪽에는 성채가 있다. 성채는 기단을 쌓아 만들었으며, 높은 사리탑[66], 대목욕탕, 곡물 창고, 대회의장, 학교 등이 있었다. 성의 역할보다는 종교적 의미가 큰 상징적 역할을 했다.[67]

모헨조다로의 "성채"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안쪽에는 벽돌을 10미터 정도 쌓아 올린 기단이 설치되어 있다. 기단 위에는 도시를 다스렸을 공공적인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거의 중앙에는 가로 12미터, 세로 7미터, 깊이 2.4미터의 대욕장이 있고, 인접하여 가로 45미터, 세로 27.5미터 범위 내에 약 27개의 곡물창고 기단군이 있다.

대욕장은 종교 의례를 행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며,[69] 곡물창고는 현재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성채는 정치 중심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종교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헨조다로는 일련의 도시 성벽이 없었지만, 주요 정착지 서쪽에는 감시탑이 있었고, 남쪽에는 방어 시설이 있었다. 하라파와 비슷한 건축 양식을 공유하며, 다른 인더스 문명 유적지들처럼 강력하게 요새화되지 않았다.


6. 4. 상수도 및 우물

모헨조다로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건설되었으며, 상수도 시스템과 우물은 최초로 계획된 건설물 중 일부였다.[21]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청결을 중시하여, 집집마다 하수도를 갖춘 욕탕이 있었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중 목욕탕인 대목욕탕도 별도로 있었다.[68]

발굴된 결과, 모헨조다로에는 700개가 넘는 우물이 배수 시스템과 목욕 시설과 함께 존재한다.[22] 이는 당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전례 없는 수치이며, 집 3채당 우물 1개꼴이다.[23] 많은 수의 우물 때문에, 주민들은 인더스강이 유적지 근처를 흐르고 있었던 점과 함께, 도시가 포위되었을 경우 우물이 장기간 물을 공급할 수 있었던 점을 고려했을 때, 연간 강수량에만 의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24] 모헨조다로와 다른 많은 하라파 유적지에서 사용된 원형 벽돌 우물 설계는 인더스 문명의 발명으로 여겨진다.[25]

동쪽 시가지에는 도로를 따라 배수시설을 완비하고 있었다. 주택에서 토관(土管)을 통해 하수구로 물이 흐르면, 이 물은 다시 지하 배수로를 따라 큰 길의 하수도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평균 폭이 1미터 정도 되는 우물 75개가 있어서 식수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71] 유적지 건물의 하수와 폐수는 유적지의 거리와 나란히 설치된 중앙 배수 시스템을 통해 처리되었다.[26] 길가에 설치된 이러한 배수로는 대부분의 인분과 하수를 효과적으로 처리했는데, 배수로는 대부분 인더스강으로 폐기물을 운반했을 가능성이 높다.[27]

6. 5. 홍수와 재건

'''모헨조다로 유적'''은 인더스강 하류 오른편 기슭에 있으며, 1922년 부근에 있는 쿠샨 제국의 불탑(佛塔)을 조사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66]

사방 5킬로미터 이상에 걸친 도시로, 동쪽에는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으로 구성된 저지대 시가지가 있고, 서쪽에는 행정과 교육, 종교적 건물로 이루어진 성채가 있다. 도시에는 홍수 방어를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플랫폼도 있었다.[28] 휠러(Wheeler)는 이 도시가 6번 정도 홍수로 침수되고 토사가 쌓인 후, 같은 장소에 재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29] 일부 고고학자들은 도시를 진흙 바다에 잠기게 한 최종적인 홍수로 인해 유적지가 버려졌다고 믿었다.[30]

그레고리 포세흘(Gregory Possehl)은 토지의 과도한 이용과 확장이 홍수를 야기했으며, 진흙 홍수가 유적지가 버려진 이유가 아니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도시의 일부가 한꺼번에 진흙 홍수로 휩쓸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규모 홍수와 농작물, 목초지, 벽돌과 도자기 제작을 위한 자원의 고갈로 인해 유적지가 쇠퇴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30][31]

7. 주요 유물

모헨조다로에서는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인물상, 구리와 돌로 만든 도구, 새겨진 인장, 저울과 분동, 금과 자스퍼 장신구, 그리고 아이 장난감 등 수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33][54] 소형 조각상과 그릇과 같은 많은 청동과 구리 제품들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모헨조다로 주민들이 로스트 왁스 기법을 활용할 줄 알았음을 보여준다.[34][55] 발굴지에서 발견된 용광로는 제련이 아닌 구리 세공과 금속 용융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5] 발굴지 북동부에는 조개 가공에 전적으로 할애된 지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5][56] 발굴지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구리 제품 중 일부는 번역되지 않은 인더스 문자와 상징물이 새겨진 구리판이다.[36][57] 아직 문자가 해독되지 않았지만, 판에 새겨진 많은 이미지는 다른 판과 일치하며, 모두 인더스어로 같은 캡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산양 이미지와 뒷면에 같은 글자가 새겨진 세 개의 판이 있다.[37][58]

방향을 찾는 새가 있는 배. 모헨조다로 인장 모형, 기원전 2500~1750년.
[32]

토기와 테라코타 파편들이 발굴되었는데, 많은 토기에 재가 남아 있어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사람의 유골을 담는 용도였거나 발굴지에 있는 집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한다.[38][59] 이러한 난로 또는 화로는 집을 데우는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리나 여과에도 사용될 수 있었지만, 일부는 단지 난방용으로만 사용되었다고 믿는다.[38][59]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처음에는 라호르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나중에 영국 라지의 새로운 수도를 위해 계획되던 새로운 "중앙 제국 박물관"에 일부가 전시될 예정인 뉴델리의 ASI 본부로 옮겨졌다. 인도의 독립이 임박했지만, 인도의 분할은 예상되지 않았다. 파키스탄 당국은 그들의 영토에서 발굴된 하라파 유물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인도 당국은 거절했다. 결국 약 12,000개의 유물(대부분 토기 파편)이 두 나라에 똑같이 나뉘는 합의에 이르렀다. 어떤 경우에는 목걸이와 허리띠의 구슬을 두 무더기로 나누는 등 매우 문자 그대로 해석되었다. "가장 유명한 두 개의 조각상"의 경우 파키스탄은 사제왕을 요구하여 받았고, 인도는 훨씬 작은 춤추는 소녀와[39][60] ''파슈파티 인장''을[60] 보유했다.

인도가 보유한 모헨조다로 유물의 대부분은 뉴델리의 인도 국립 박물관에, 파키스탄에 반환된 유물들은 카라치의 파키스탄 국립 박물관에 있으며, 모헨조다로 자체에 설립된 박물관에도 많은 유물이 있다. 1939년, 발굴지에서 발굴된 소량의 대표적인 유물이 인도 고고학 조사국 국장에 의해 영국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40][61]

8. 인더스 문자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인더스 문명의 문자는 그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해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73]

9. 농업

인더스강 유역의 도시 사회에서는 농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밀을 재배하고 소를 사육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넓은 도로와 경사로가 정비되었기에 수확물을 실은 수레가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운송 수단과 함께 식량의 보존 기술도 발달했다.

10. 기후

모헨조다로는 열대 사막 기후(BWh) 지역으로, 매우 더운 여름과 온화한 겨울을 가진다.[62] 최고 기온 기록은 2010년 5월에 기록된 53.7°C이며, 최저 기온 기록은 2006년 1월에 기록된 -5.4°C이다.[62] 강수량은 적으며, 주로 우기(7월~9월)에 집중된다. 연평균 강수량은 100.1 mm이며,[62] 최고 연 강수량은 2022년에 기록된 1023.8 mm이고, 최저 연 강수량은 1987년에 기록된 10 mm이다.[62]

11. 현대

문명 유적으로서의 발견1922년, 인도고고학조사국원이었던 역사학자 R. D. 반도파드야이 (라칼다스 다스 반도파드야이/Rakhaldas Das Bandyopadhyay영어, 라칼다스 반도파드야이/রাখালদাস বন্দোপাধ্যায়bn)의 발굴 조사에 의해 이루어졌다.[63] 1980년, 파키스탄의 신청으로 “Archaeological Ruins at Moenjodaro영어” (번역 명칭: '''모헨조다로의 고고학 유적''' )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적이 속한 지역 일대에서는 지하수 상승에 의한 염해가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모헨조다로는 이를 덮어왔던 퇴적물이 대규모로 제거된 1965년 이후, 유구의 구성물인 벽돌이 염분을 흡수하여 풍화되는 염분 쇄설 현상이 멈추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흙으로 돌아가 버린 유구도 적지 않으며, 보존 문제가 수십 년 동안 계속 제기되고 있다.

2005년 모헨조다로의 남아있는 구조물들


1980년 5월 27일 파리에서 유네스코(UNESCO,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를 통해 복원 자금 지원에 대한 초기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여러 국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국가기여액 (미국 달러)
오스트레일리아62,650.00 달러
바레인3,000.00 달러
카메룬1,000.00 달러
이집트63,889.60 달러
독일375,939.85 달러
인도49,494.95 달러
이라크9,781.00 달러
일본200,000.00 달러
쿠웨이트3,000.00 달러
몰타275.82 달러
모리셔스2,072.50 달러
나이지리아8,130.00 달러
사우디아라비아58,993.63 달러
스리랑카1,562.50 달러
탄자니아1,000.00 달러



1996년 12월 파키스탄 정부와 국제 기구의 자금 지원이 중단되면서 모헨조다로의 보존 작업은 중단되었다. 1997년 4월 유네스코에서 제공한 자금을 사용하여 현장 보존 작업이 재개되었고, 20년간의 자금 지원 계획은 유적지와 기존 구조물을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000만 달러를 제공했다. 2011년에는 유적지 보존에 대한 책임이 신드 주 정부로 이관되었다.[47]

현재 이 유적지는 지하수 염분화와 부적절한 복원으로 위협받고 있다. 많은 벽들이 이미 무너졌고, 다른 벽들도 기초부터 무너지고 있다. 2012년 파키스탄 고고학자들은 개선된 보존 조치가 없다면 이 유적지가 2030년까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48][49]

2014년 1월, 파키스탄 인민당빌라왈 부토 자르다리가 모헨조다로 유적지를 신드 축제 개막식 장소로 선택하면서 유적지는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이는 발굴과 시추 등 기계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50][51] 펀자브 대학교 고고학과장인 파르잔드 마시는 이러한 활동은 고대 유물법에 따라 금지되어 있다고 경고하며 "고고학 유적지에서는 못 하나 박을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50][51] 2014년 1월 31일, 신드 주 정부가 행사를 계속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드 고등법원에 소송이 제기되었다. 국내외 역사학자와 교육자들의 모든 항의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인민당은 역사적 유적지에서 축제를 개최했다.

2022년 파키스탄 홍수로 피해를 입고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주 당국은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했다.[64]

11. 1. 보존 및 현재 상태

1980년 5월 27일 파리에서 유네스코(UNESCO,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를 통해 복원 자금 지원에 대한 초기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여러 국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국가기여액 (미국 달러)
오스트레일리아62,650.00 달러
바레인3,000.00 달러
카메룬1,000.00 달러
이집트63,889.60 달러
독일375,939.85 달러
인도49,494.95 달러
이라크9,781.00 달러
일본200,000.00 달러
쿠웨이트3,000.00 달러
몰타275.82 달러
모리셔스2,072.50 달러
나이지리아8,130.00 달러
사우디아라비아58,993.63 달러
스리랑카1,562.50 달러
탄자니아1,000.00 달러



파키스탄 정부와 국제 기구의 자금 지원이 중단되면서 1996년 12월 모헨조다로의 보존 작업은 중단되었다. 1997년 4월 유네스코에서 제공한 자금을 사용하여 현장 보존 작업이 재개되었고, 20년간의 자금 지원 계획은 유적지와 기존 구조물을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000만 달러를 제공했다. 2011년에는 유적지 보존에 대한 책임이 신드 주 정부로 이관되었다.[47]

현재 이 유적지는 지하수 염분화와 부적절한 복원으로 위협받고 있다. 많은 벽들이 이미 무너졌고, 다른 벽들도 기초부터 무너지고 있다. 2012년 파키스탄 고고학자들은 개선된 보존 조치가 없다면 이 유적지가 2030년까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48][49]

유적이 속한 지역 일대에서는 지하수 수위 상승에 의한 염해가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모헨조다로는 이를 덮어왔던 퇴적물이 대규모로 제거된 1965년 이후, 유구의 구성물인 벽돌이 염분을 흡수하여 풍화되는 염분 쇄설 현상이 멈추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흙으로 돌아가 버린 유구도 적지 않으며, 보존 문제가 수십 년 동안 계속 제기되고 있다.

2022년 파키스탄 홍수로 피해를 입고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주 당국은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했다.[64]

11. 2. 2014년 신드 축제

2014년 1월, 파키스탄 인민당빌라왈 부토 자르다리가 모헨조다로 유적지를 신드 축제 개막식 장소로 선택하면서 유적지는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이는 발굴과 시추 등 기계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50][51] 펀자브 대학교 고고학과장인 파르잔드 마시는 이러한 활동은 고대 유물법에 따라 금지되어 있다고 경고하며 "고고학 유적지에서는 못 하나 박을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50][51] 2014년 1월 31일, 신드 주 정부가 행사를 계속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드 고등법원에 소송이 제기되었다. 국내외 역사학자와 교육자들의 모든 항의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인민당은 역사적 유적지에서 축제를 개최했다.

11. 3. 2022년 파키스탄 홍수

2022년 파키스탄 홍수로 모헨조다로 유적이 피해를 입고 크게 손상되어, 주 당국은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했다.[64] 유적이 속한 지역 일대에서는 지하수 상승에 의한 염해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1965년 이후 유구의 구성물인 벽돌이 염분을 흡수하여 풍화되는 염분 쇄설 현상이 멈추지 않고 있다. 흙으로 돌아가 버린 유구도 적지 않아 보존 문제가 수십 년 동안 계속 제기되고 있다.

12. 유네스코 세계유산

12. 1. 등록 기준

wikitext

이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록 기준 ii, iii을 충족하여 등재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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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The ancient Indus : urbanism, economy, and socie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23] 학술지 Water Supply and Sewage Disposal at Mohenjo-Daro 1989-10
[24] 학술지 Water Supply and Sewage Disposal at Mohenjo-Daro 1989-10
[25] 학술지 Water Supply and Sewage Disposal at Mohenjo-Daro 1989-10
[26] 학술지 Water Supply and Sewage Disposal at Mohenjo-Daro 19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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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적 A Peaceful Realm: The Rise and Fall of the Indus Civilizatio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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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학술지 The Mohenjo-daro Floods: A Reply 196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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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서적 A Peaceful Realm: The Rise and Fall of the Indus Civilization https://archive.org/[...] Westview Press 2002
[57] 논문 Copper Tablets from Mohenjo-daro and the Study of the Indus Script https://www.academia[...] 2008
[58] 논문 Copper Tablets from Mohenjo-daro and the Study of the Indus Script https://www.academia[...] 2008
[59] 논문 Pottery Braziers of Mohenjo-Daro 1939-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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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문서 이 탑은 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더스문명의 유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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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논문 공중목욕탕 유적을 통해 본 로마 시대의 목욕문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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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서적 최초의 문명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사군자 2000
[7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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