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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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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중 발견된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1,500년 만에 처음으로 열렸으며, 남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양식과 백제 요소가 혼합된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무덤에서는 무령왕릉 지석을 비롯하여 금제 관식, 금귀걸이, 은팔찌 등 2,906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지석을 통해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백제와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을 통해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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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무령왕릉
한자 표기武寧王陵
로마자 표기Muryeong Wangneung
다른 이름공주 송산리 7호분
위치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유형고분
역사
국가백제
건립 시기미상
발굴 시기1971년 7월 7일
발굴자미상
추가 정보
무령왕릉 묘 전체 모습
무령왕릉 현실 입구

2. 무령왕릉의 발견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무덤 외형은 지름 20미터, 높이 7.7m의 흙무덤(토총) 형태였으며, 배수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덤의 구조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지만, 백제 고유의 요소도 함께 보여준다. 봉분 형태는 공주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양식이다. 중국에서는 무덤을 북쪽에 조성하는 관습이 있었지만, 무령왕릉은 남쪽에 위치한다. 다만, 왕과 왕비의 위치는 중국식으로 배치되었다.[14]

주실(主室)은 직사각형의 검은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 2.72m, 높이 3.14m이다. 남쪽 벽에는 아치형 문이 있고, 동서쪽 벽에는 등불을 놓는 감실이 각각 두 개씩, 북쪽 벽에는 한 개가 있다. 벽돌에는 주로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가로와 세로 배열을 번갈아 쌓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2. 1. 발굴 경과

1971년 7월 5일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되었다. 무덤 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되지 않은 상태였다.[14]

7월 7일 무덤의 아치형 입구를 발견하였다.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여 자정까지 배수로를 팠다. 7월 8일 날이 밝자 발굴을 다시 시작하여 오후 3시경 입구를 막는 벽돌 바닥까지 발굴하였다. 위령제를 지낸 후 오후 4시경에 입구를 막는 벽돌 하나를 들어내자 하얀 연기가 나왔다. 계속해서 벽돌을 들어내자 널길 중앙에서 돌짐승을 발견하였다. 무덤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 해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이로써 1442년 만에 무령왕과 왕비의 실존이 밝혀졌다. 이후 발굴팀은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왕릉 발굴을 발표하였고, 혼란 속에서 밤을 새워 유물을 수습하였다.

2. 2. 발굴의 의의

1971년 충청남도 공주시(옛 웅진) 송산리 고분군에서 묘지가 출토되어 무령왕릉임이 확인되었다. 묘지(대한민국 국보 제163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3]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523년)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위 기록은 왕의 생몰년을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무령왕릉은 왕비를 함께 묻은 벽돌무덤(전축분)이며, 관의 재료가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히노키(コウヤマキ)(고야마키)로 만들어진 점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외에도 금반지, 귀걸이, 금박을 입힌 베개와 발받침, 관 장식 등 금세공품과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동경, 도자기 등 약 3000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3]

묘지(국립공주박물관 전시)


목관(복원, 국립공주박물관 전시)


묘지석이나 부장품에서는 고구려 덕흥리 고분처럼 매장자의 불교 신앙을 보여주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금으로 만든 관식, (木机), 족좌 등에 사용된 당초문이나 연화문은 중국 남조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문양"이다.[4] 묘실이나 묘도의 측벽을 장식하는 연화문 전돌 중 하나에는 "士 壬辰年作"이라는 명문이 있고, 인접한 6호분에서도 "梁官品為師矣"라는 명문이 새겨진 연화문 전돌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왕릉 장식 전돌은 중국 남조 의 관와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임진년(512년)에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4]

백제 와당은 소변팔엽연화문을 중심으로 한 남조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기원은 무령왕릉과 6호분의 연화전돌이다.[5]

3. 무령왕릉의 구조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고분군 내의 7호분 무덤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은 현재 총 7기가 있는데, 1~5호분은 백제 굴식 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7호분)은 벽돌무덤이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굴식 벽돌무덤이다. 돌방무덤한성도읍기부터 시작된 무덤 양식이며, 벽돌무덤은 6세기 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 양식이다.

무덤의 외형은 지름 약 20m의 구 모양을 하고 있으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높이는 7.7m이다. 널방은 연꽃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북쪽을 축선(軸線)으로 평면이 4.2m × 2.72m로 되어 있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3. 1. 무덤 양식

무령왕릉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과 벽돌무덤(전축분)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중국 남조의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양식이 두드러진다. 발견된 벽돌에는 '양관와위사(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의미이다.[12] 이를 통해 백제가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13]

무덤의 외형은 지름 20미터, 높이 7.7m의 흙무덤(토총)처럼 보이지만, 배수 시설을 갖춘 정교한 설계를 보여준다. 무덤은 남중국 양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백제 요소가 섞여 한국식 무덤의 특징을 나타낸다. 석실의 아치형 구조와 벽돌의 색상 배치는 순수한 한국적인 요소이다. 봉토 형식은 공주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형태이다.

무덤 주실(主室)은 직사각형이며 검은 벽돌로 만들어졌다.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 2.72m, 높이 3.14m이다. 남쪽과 북쪽 벽은 직선이지만, 동쪽과 서쪽 벽은 안쪽으로 곡선을 이루어 아치형 천장을 형성한다. 남쪽 벽에는 무덤 통로와 입구로 이어지는 아치형 문이 있다. 문의 길이는 2.9m, 너비 1.04m, 높이 1.45m이다. 동쪽과 서쪽 벽에는 등불을 놓는 감실이 각각 두 개씩, 북쪽 벽에는 한 개가 있다. 벽돌은 가로와 세로 배열을 번갈아 쌓았으며, 주로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공주 무령왕릉


왕릉에서는 "사 임진년작(士 壬辰年作)"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연화문 전돌이 발견되었고, 인접한 6호분에서도 "양관품위사의(梁官品為師矣)"라는 명문이 새겨진 연화문 전돌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왕릉을 장식한 전돌은 중국 남조 양의 관와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512년에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4]

3. 2. 내부 구조

무령왕릉의 널방(墓室)은 연꽃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은 하나의 방으로, 북쪽을 축으로 하여 평면이 4.2m × 2.72m이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의 높이는 2.93m이다. 벽면에는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씩 등불을 놓는 감실(龕室)이 있다. 이 감실은 제6호분과 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연꽃 모양의 창문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안에 등잔이 들어간다.[1]

왕릉 축조에는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글자가 새겨진 벽돌에는 '…士壬辰年作(사임진년작)'이라는 글씨나 大方(대방), 中方(중방), 急使(급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벽돌의 짧은 변에는 연꽃무늬(蓮花紋)와 인동연꽃무늬(忍冬蓮花紋)가, 긴 변에는 연화사격자무늬(蓮花斜格子紋)와 사격자무늬(斜格子紋)가 장식되어 있다.[1]

주실(主室)은 검은 벽돌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모양이다. 남북 길이는 4.2m, 동서 너비는 2.72m, 높이는 3.14m이다. 남쪽과 북쪽 벽은 직선이지만, 동쪽과 서쪽 벽은 안쪽으로 곡선을 이루어 아치형 천장을 만든다. 남쪽 벽에는 무덤의 통로와 입구로 이어지는 아치형 문이 있다. 문의 길이는 2.9m, 너비는 1.04m, 높이는 1.45m이다. 동쪽과 서쪽 벽에는 등불을 놓는 양파 모양 또는 불꽃 모양의 감실이 각각 두 개씩 있으며, 북쪽 벽에는 하나의 감실이 있다. 벽돌은 세로와 가로 배열을 번갈아 가며 쌓았다. 벽돌에는 주로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지만, 다른 장식들도 함께 사용되었다.[2]

4. 유물

무령왕릉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금, 은으로 만든 장신구가 주를 이루고, 청동 제품, 도자기, 목제품 등도 발견되었다. 특히 백제 금속공예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금제 장신구들이 많이 출토되었다.[7]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로는 왕과 왕비를 위해 제작된 두 벌의 왕관, 귀중한 명문과 연대가 기록된 두 개의 지석, 중국 청자 항아리, 동제 그릇, 금, 은 팔찌와 귀걸이, 발받침, 청동거울, 링 폼멜 검(ring-pommelled sword), 금동 신발 등이 있다. 부장품은 관 아래에 놓여 있었고, 가장 중요한 유물 중 일부는 왕과 왕비의 시신 위에 놓여 있었다. 예를 들어 검은 왕의 허리에, 왕관 장식은 왕과 왕비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1971년 발굴 당시 묘실 바닥에서는 은어의 등뼈를 포함한 물고기 뼈 조각들이 발견되었다.[11] 이는 제수용 또는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로 은어가 부장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백제 와당은 소변팔엽연화문을 중심으로 한 남조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기원이 무령왕릉과 6호분의 연화전돌이다.[5]

왕비의 관 장식
(국보 제155호)

4. 1. 주요 유물

무령왕릉에서는 108종 2,906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백제 금속공예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7] 크게 왕의 유물과 왕비의 유물로 나눌 수 있다.

무령왕릉의 지석 (국보 163호)


특히 무령왕릉 지석(국보 163호)은 백제 무령왕의 무덤임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지석은 2장의 장방형 석판으로, 해서체로 글이 새겨져 있다. 지석의 내용은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해주며, 백제인들의 사상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무령왕릉의 출토 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다.[8]

석수 (국보 162호)


무령왕릉 석수(국보 162호)는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응회암제 조각상으로,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무령왕릉 목관


왕과 왕비의 목관은 일본 규슈지방금송으로 만들어졌다.[9] 금송은 일본에서 신성한 나무로 여겨지며, 목질이 단단하고 습기에 강해 최고의 관재로 여겨졌다.

무령왕릉에서는 청동거울도 여러 점 출토되었다.

1971년 발굴 당시 묘실 바닥에서는 은어의 등뼈를 포함한 물고기 뼈 조각들이 발견되었다.[11] 이는 제수용 또는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로 은어가 부장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4. 1. 1. 왕의 유물

무령왕릉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공예품으로는 금, 은으로 만든 장신구가 많고, 청동 제품, 이기류(利器類), 도자기, 목제품 등이 있다. 특히 백제 금속공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금제투작 초화문관식은 백제 왕관 특유의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신구로 손꼽힌다.[7]

왕의 금제관식 (국보 154호)


그 외에도 정교한 세공 기술이 돋보이는 금목걸이, 금팔찌, 은팔찌, 금귀고리, 금제 뒤꽂이, 거울(銅鏡), 금두식곡옥(金頭飾曲玉) 등이 있다. 특히 곡옥은 백제에서 처음 나타난 새로운 형태이며, 금제 뒤꽂이는 연꽃무늬나 타출보상당초문(打出寶相唐草紋)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용(龍)의 양각과 음각 명문(陰刻銘文)이 새겨진 은제 팔찌도 주목할 만하다.[7]

왕비의 베개(頭杭)는 벌집 모양의 금박선(金箔線) 안에 비천(飛天)·봉황(鳳凰)·연꽃무늬(蓮花紋) 등을 새겨 넣은 희귀한 유물이다. 베갯머리에 꽂혀 있던 한 쌍의 봉황두(鳳凰頭)는 검은색과 붉은색 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높이 10cm 정도의 작은 크기임에도 정교하게 만들어졌다.[7]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108종 2,906점에 달한다.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와 그 위에 놓여 있던 오수전 한 꾸러미, 돌로 만든 짐승 모양의 석수(石獸)도 발견되었다.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 조각 아래에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 허리띠, 금동장신발, 은제팔찌 등 다양한 장신구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대도가 출토되었다. 또한 왕과 왕비의 베개 및 발받침, 청동거울 3면, 은제탁잔 등도 중요한 부장품으로 꼽힌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왕과 왕비를 위해 제작된 두 벌의 왕관과 귀중한 명문과 연대가 기록된 두 개의 석비가 특히 중요하다. 석비에는 왕과 왕비의 이름, 나이, 사망 및 매장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의 무덤에서는 매우 드문 경우이며,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외에도 중국 청자 항아리, 동제 그릇, 금,은 팔찌와 귀걸이, 발받침, 청동거울, 링 폼멜 검(ring-pommelled sword), 금동 신발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종류주요 유물특징
금제 장신구무령왕 금제관식(국보 154호),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156호), 무령왕 금제 뒤꽂이(국보 159호), 금목걸이, 금팔찌, 금두식곡옥 등백제 특유의 온화하고 우아한 양식, 정교한 세공 기술
은제 장신구은팔찌 등용(龍)의 양각과 음각 명문(陰刻銘文)
기타 장신구허리띠, 금동신발 등
기타 유물무령왕 발받침(국보 165호), 왕비 베개(두침), 봉황두, 청동거울, 동제수저, 용봉문대도 등왕비 베개는 벌집 모양 금박선 안에 각종 무늬, 봉황두는 정교한 솜씨


4. 1. 2. 왕비의 유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유물은 백제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 각종 장신구: 금제 투작 초화문 관식은 백제 왕관 특유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신구이다.[7] 아홉 마디 금목걸이, 금팔찌, 은팔찌, 금귀고리, 금제 뒤꽂이 등 다양한 장신구들이 정교한 세공 기술을 보여준다. 특히, 곡옥은 백제에서 처음 나타난 형태이며, 금제 뒤꽂이는 연화문, 타출보상당초문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7] 용의 양각과 음각 명문이 새겨진 은제 팔찌도 주목할 만하다.[7]
  • 베개(두침): 벌집 모양 금박선 안에 비천, 봉황, 연화문 등 다양한 무늬가 그려진 왕비의 베개는 희귀한 유물이다.[7] 베갯머리에 꽂혀 있던 한 쌍의 봉황두는 검은색과 붉은색 칠 위에 금박을 입혀 정교하게 제작되었다.[7]
  • 기타 유물: 왕비의 유물로는 다리미, 신발 등도 출토되었다.


다음은 왕비의 주요 유물 목록이다.

유물명설명국보 지정 번호
무령왕비 금제관식왕비의 금제 관 장식국보 제155호
무령왕비 금귀걸이왕비의 금 귀걸이국보 제157호
무령왕비 금목걸이왕비의 금 목걸이국보 제158호
무령왕비 은팔찌왕비의 은제 팔찌, 용의 양각과 음각 명문이 있음국보 제160호
무령왕비 베개왕비의 베개, 벌집 모양 금박선 안에 각종 무늬가 그려져 있음국보 제164호
발받침


4. 2. 지석



무령왕릉 지석국보 제163호로, 왕릉 널길 입구에서 발견된 두 장의 석판이다. 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의 청회색 섬록암에 해서체로 글이 새겨져 있다. 다만, 시료 채취가 불가능하여 정확한 재질은 알 수 없으나, 육안 관찰 결과 섬록암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8]

523년 무령왕이 사망하고 2년 3개월간 임시 매장 후 왕릉에 안치하면서 왕의 묘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다. 526년 왕비가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른 후 529년에 안치하면서 매지권을 뒤집어 뒷면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 이 지석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석 중 하나이며, 무령왕릉이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유물이다.

지석 뒷면에는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 1만 닙을 주고 땅을 사서 능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토지매매 문서인 매지권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백제인들의 사상과 토지 매매 관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중국 돈인 오수전이 함께 놓여 있어 화폐를 이용한 토지 매매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석의 내용은 짧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하고, 백제인들의 사상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편년 연구의 기준 자료가 된다. 지석에 나타난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 고조에게서 받은 작호이며, '사마왕'은 무령왕의 이름으로, 《삼국사기》에는 '斯摩', 《일본서기》에는 '斯麻'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죽음은 '붕(崩)', 무덤은 '대묘(大墓)'로 표현되었다. 지석에 새겨진 무령왕의 사망년월은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한다.

1971년 충청남도 공주시(옛 웅진) 송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묘지(대한민국 국보 제163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523년)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이 기록은 왕의 생몰년을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4. 3. 석수

국보 162호인 무령왕릉 석수는 널길 입구 중앙에 밖을 향해 놓여 있었으며, 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은 없다. 높은 콧등날이 등 뒤까지 이어져 있고,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불룩 튀어나온 긴 무늬가 네 곳에 있으며, 머리 위 융기 위에는 철로 만든 나뭇가지 모양의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 모양 갈기가 새겨져 있다. 출토 당시부터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된 상태였다. 이 석수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무덤 내부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7]

4. 4. 거울

무령왕릉에서는 여러 점의 청동 거울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백제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거울들은 국보 제161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7]

4. 5. 목관

왕과 왕비가 안치된 목관은 관재(棺材)로 사용된 목재의 수종을 분석한 결과,[9] 일본 규슈 지방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금송은 일본에서 불단이나 무덤의 꽃으로 사용되며 일본인에게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다. 무령왕의 관재는 수령 300년 이상인 거목으로 금송의 키가 30m, 지름이 1m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금송은 목질이 매우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여 최고의 관재로 여겨졌으며 일본에서는 지배 계층만 사용하였다. 왕의 관은 동쪽에 있고 왕비의 관은 안쪽, 즉 서쪽에 놓여 있었다.

4. 6. 은어뼈

201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묘의 석실 바닥에서 긁어모은 티끌과 흙을 정밀 분석한 결과, 은어 등뼈 141점과 종류를 알 수 없는 다른 생선 뼈 조각 136점을 발견하였다.[11] 길이 25cm 정도의 은어가 최소한 세 마리 이상 부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 그릇이 다수 발견되었고, 은어 척추뼈들 가운데 푸른빛으로 변색된 것이 적지 않아 청동 그릇 녹물이 은어 등뼈를 물들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은어를 부장한 까닭은 제수용 또는 부활을 상징하는 물고기를 제의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4. 7. 벽돌

무령왕릉 축조에는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중 글씨가 새겨진 벽돌과 문양 있는 벽돌이 주목할 만하다. 글씨가 새겨진 벽돌에는 '…士壬辰年作(사임진년작)'이라는 글씨나 大方(대방), 中方(중방), 急使(급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벽돌의 짧은 변에는 연꽃무늬(蓮花紋)와 인동연꽃무늬(忍冬蓮花紋)가, 긴 변에는 연화사격자무늬(蓮花斜格子紋)와 사격자무늬(斜格子紋)가 장식되어 있다.[3]

묘실이나 묘도의 측벽을 장식하는 연화문 벽돌 중에는 "士 壬辰年作"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이 있는데, 이는 512년에 벽돌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인접한 6호분에서도 "梁官品為師矣"라는 명문이 새겨진 연화문 벽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왕릉을 장식한 벽돌은 중국 남조 의 관와를 모방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4]

백제 와당은 소변팔엽연화문을 중심으로 한 남조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기원이 무령왕릉과 6호분의 연화 벽돌이다.[5]

5. 무덤 양식과 국제 교류

1971년 충청남도 공주시(옛 웅진) 송산리 고분군에서 묘지가 출토되어 무령왕릉임이 확인되었다. 묘지(대한민국 국보 제163호)에는 왕의 생몰년이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고분은 왕비를 함께 묻은 벽돌무덤(전실분)이며, 관이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히노키(코우야마키)로 만들어진 것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외에도 금반지, 귀걸이, 금박을 입힌 베개와 발받침, 관 장식 등의 금세공품,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동경, 도자기 등 약 3000점에 가까운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었다.[3]

이 지역은 송산리 고분군으로, 백제가 공주를 수도로 삼았던 시대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약 10기 있으며, 1호분부터 7호분(무령왕릉)까지 발굴되었다. 1호분부터 5호분은 돌로 만든 횡혈식 석실 구조이고, 무령왕릉과 6호분은 벽돌무덤이다.

묘지석이나 부장품에서 고구려덕흥리 고분처럼 매장자의 불교 신앙을 증명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금으로 만든 관식, (목궤), 족좌 등의 장식에 사용된 당초문이나 연화문은 중국 남조 불교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4]

5. 1. 중국과의 관계

무령왕릉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중국 남경을 수도로 한 양나라 무덤 양식과 유사하다. 중국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기술자와 화공들을 데려갔다는 기록이 있어, 양나라 기술자들이 무덤 축조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벽돌에는 '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의미의 '양관와위사(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12] 남경에 있는 제가산 남조묘들과 무령왕릉의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 무덤 양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보수성을 띠는데, 무령왕릉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를 통해 무령왕 시대에 백제가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

묘실이나 묘도의 측벽을 장식하는 연화문 전돌 중 하나에는 "士 壬辰年作"이라는 명문이 있고, 인접한 6호분에서도 "梁官品為師矣"라는 명문이 새겨진 연화문 전돌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왕릉을 장식한 전돌은 중국 남조 의 관와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임진년(512년)에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4]

백제 와당은 소변팔엽연화문을 중심으로 한 남조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기원이 무령왕릉과 6호분의 연화전돌이다.[5]

5. 2. 일본과의 관계



왕과 왕비의 목관은 재료로 사용된 나무의 수종 분석 결과,[9] 일본 규슈 지방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금송은 일본에서 불단이나 무덤의 꽃으로 사용되며 일본인에게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다. 무령왕의 관재는 수령 300년 이상인 거목으로, 금송의 키가 30미터에 지름이 1미터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송은 목질이 매우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여 최고의 관재로 여겨졌으며, 일본에서는 지배 계층만 사용하였다.

무령왕이 일본에서 출생하고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에, 무령왕릉은 발굴부터 지금까지 일본 측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아키히토 천황이 2001년 회견에서 자신의 선조인 간무 천황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이라는 《속일본기》의 내용을 인용한 이후,[16] 일본 천황가에서 무령왕과 무령왕릉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17] 2004년에는 일본의 구황족인 아사카 도모히코대한민국을 방문해 무령왕릉을 참배한 후, 제사를 지내고 천황가의 제사용품을 충청남도 공주시에 기증하였다.[18][19]

6. 현대 한국 사회와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백제 문화의 상징이자 중요한 역사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문화적 상징: 공주 10경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며, 국립공주박물관, 웅진 백제역사관,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관 등 다양한 전시 시설을 통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
  • 역사 교육 자료: 1971년 발굴 이후 역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학생들에게 백제 시대를 가르치는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국립공주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를 통해 무령왕릉의 역사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조명하고 있다.[1][2][3]

6. 1. 문화적 가치와 활용

공주문화원, 공주예총, 향토사학자, 언론인, 사진작가 등으로 구성된 공주 10경 선정위원회는 공주 10경 후보지 15개소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공주 10경에 무령왕릉이 선정되었다.[15]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 주변에는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과 전시관이 있다.

  • 국립공주박물관(国立公州博物館): 출토된 금제 관 장식 등 많은 국보가 전시되어 있다.[6]
  • 공주시 금강변에 위치한 웅진 백제역사관(熊津百済歴史館)
  •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관(宋山里古墳群模型展示館)

6. 2. 대중 매체와 무령왕릉

6. 3. 역사 교육과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971년 발굴 이후, 무령왕릉과 그 안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역사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에게 백제 시대를 가르치는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무령왕릉은 교과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시를 통해서도 대중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1973년 자료관 개관 기념 전시를 시작으로,[1] 2001년 발굴 30주년 기념 전시,[2] 2011년 발굴 40주년 기념 특별전[3] 등을 개최하여 무령왕릉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려왔다. 특히 2011년 특별전은 광주국립박물관에서도 열려 더 많은 사람들이 무령왕릉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참조

[1] 논문 Kim 1973, 1986; Kim and Pearson 1977
[2] 웹사이트 百済歴史遺跡地区 > 熊津時代(公州) > 宋山里古墳群 http://www.baekje-he[...] 2019-04-22
[3] 웹사이트 宋山里古墳群と武寧王陵 http://www.gongju.go[...] 2015-05-17
[4] 간행물 東アジアにおける仏教の伝来と受容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1989-03
[5] 간행물 東アジアにおける仏教の伝来と受容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1989-03
[6] 웹사이트 国立公州博物館 http://japanese.visi[...]
[7] 웹사이트 무녕왕릉 종합유물 http://donation.enc.[...]
[8] 서적 충남지역 석조문화재의 현황과 보존대책 충청남도 1999-12
[9] 웹인용 무령왕릉 나무관 https://emuseum.go.k[...] e뮤지엄 2021-10-26
[10] 서적 충청남도지 4권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1] 뉴스 백제 무령왕은 은어를 즐겼을까 http://hani.co.kr/ar[...]
[12] 웹사이트 중국 육조문화와 백제문화 http://www.koreanhis[...]
[13] 웹사이트 무령왕릉발굴 30주년 - 아직도 풀리지 않은 다섯가지 의문 http://bbs1.kbs.co.k[...] 2006-05-07
[14] 서적 백제고분 발굴 이야기 도서출판 주류성
[15] 뉴스 '공주 10景' 탄생! http://www.newstown.[...] 뉴스타운 2012-07-02
[16] 웹인용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https://www.kunaicho[...]
[17] 뉴스 日王 당숙 무령왕릉 참배 https://n.news.naver[...] 2004-08-04
[18] 뉴스 일본 천황가에서 기증한 무령왕릉 제수품 10년 넘게 행방불명 https://www.chosun.c[...] 2023-10-07
[19] 뉴스 朝香宮家出身の朝香誠彦さん、百済武寧王陵を参拝 https://japanese.joi[...] 200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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