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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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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수리는 궁궐의 잡일을 담당했던 여성 노예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고려 말 몽골 궁정에서 유래하여 고려와 조선 왕실에서 사용되었으며, 물을 긷는 일 외에도 다양한 잡일을 했다. 대부분 기혼 여성으로 궁녀의 추천을 통해 입궐했으며,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했다. 무수리는 붉은색이 섞인 검은색 한복을 입고, 머리를 가발 모양으로 틀어 올린 후 허리띠에 신분증 역할을 하는 표찰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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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리
정보
한글 표기무수리
로마자 표기Musuri
개요
설명조선 시대 궁궐에서 여종을 이르던 말
역할주로 세탁, 청소, 바느질 등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아 하던 여종

2. 어원

무수리는 '수사'(水賜, 물을 줌) 또는 '수사이'(水賜伊, 물을 주는 일을 담당하는 여성)라고도 불렸으며, 이들이 거처하는 곳은 '수사간'(水賜間, 물을 긷는 사람들의 공간)[3]이라고 불렸다. 남성 노예는 '파지'(巴只)라고 불렸다. '수사'와 '파지'라는 용어는 고려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태종실록에는 이 계급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 왕실은 전 국가인 고려의 제도를 따랐으며, 어린 남자 노예는 궁궐 청소를 담당하는 '파지'라고 불렸고, 여자 노예는 '수사'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사'와 '파지' 제도가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시사한다.[2]

'무수리'라는 용어는 원래 몽골 궁정에서 사용되었으므로, 고려 말기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1][2]

3. 역할 및 계층

무수리는 물을 긷는 일 외에도 각 부서의 특성에 따라 모든 잡일을 담당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혼 여성으로, 나인의 추천을 통해 입궐했다. 넓은 의미에서 무수리는 궁녀의 일부였지만,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이는 어린 나이에 입궐하여 관례를 치른 품계가 있는 궁녀와 구별되는 점이었다. 따라서 무수리는 궁에서 궁녀를 돕는 하녀였으며,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했다.[1][5] 예외적인 사례로, 영조(재위 1724–1776)는 숙종과 최숙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최숙빈은 인현왕후의 처소에서 무수리였다. 영조는 생전에 어머니의 낮은 신분에 매우 민감하여, 그녀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4][5]

4. 복장

무수리는 붉은색이 약간 섞인 검은색 면으로 만든 수수한 을 입었다. 머리카락을 둥근 가발 모양으로 말아 올리고, 옷과 같은 천으로 만든 넓은 허리띠를 찼으며, 허리띠에는 표찰(牌, ''패'')이 달려 있었다. 이 표찰은 궁궐 밖에서 일을 하러 들어올 때나 궁궐 내 건물 사이를 심부름할 때 일종의 신분증 역할을 했다. 당시 나인(궁녀)과 양반(귀족 부인)들은 ''동그래저고리''라고 불리는 매우 짧은 상의, 즉 저고리의 일종을 입었지만, 무수리의 저고리 길이는 남성 노예와 마찬가지로 길었다.[1][2]

참조

[1] 웹사이트 무수리 http://100.empas.com[...] Empas / Britannica
[2] 웹사이트 무수리 http://100.empas.com[...] Empas / EncyKorea
[3] 웹사이트 http://kordic.empas.[...] 2022-03-00
[4] 서적 The Confucian Kingship in Korea: Yŏngjo and the Politics of Sagacit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영조 (英祖) http://100.empas.com[...] Empas / Enc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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