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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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흠은 어려서부터 무재를 인정받았으며, 위나라에서 관직을 지냈다. 그는 조조의 사면을 받은 적이 있으며, 조상의 비호를 받기도 했으나, 성격이 거칠고 오만하여 인망을 얻지 못했다. 관구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오나라로 망명했고, 손준의 신임을 얻어 군사적 활동을 했으나, 제갈탄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죽임을 당했다. 사후 그의 아들들은 위나라에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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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문흠 |
원어 이름 | 文欽 |
로마자 표기 | Wén Qīn |
자 | 중약(仲若) |
출생지 | 보저우, 안후이 성 |
사망일 | 258년 2월 또는 3월 |
사망 장소 | 서우현, 안후이 성 |
아버지 | 문기(文稷) |
자녀 | 문호 문앙 |
직업 | 군사 장군, 정치인 |
작위 | 초후(譙侯) |
관직 | |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 | 시작: 255년 종료: 258년 2월 또는 3월 |
도호(都護) | 시작: 255년 종료: 258년 2월 또는 3월 |
여강태수(廬江太守) | 시작: ? 종료: 255년 |
양주자사(揚州刺史) | 시작: ? 종료: ? |
전장군(前將軍) | 시작: ? 종료: ? |
2. 초기 생애와 경력
문흠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무용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는 조조를 섬기며 무인으로서 공을 세웠다. 문흠은 조상과 같은 마을 출신으로, 아버지처럼 무용이 뛰어났다.[3]
219년, 위풍이 업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노리고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이는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문흠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될 뻔했으나, 아버지 문직의 공으로 조조가 사면해 주었다.[1]
명제의 태화 연간(227년~233년)에 오영교독, 아문장이 되었다.[2]
문흠은 성격이 거칠고 예절을 갖추지 못해 인망이 없었다. 그는 역임한 모든 관직에서 오만하게 굴며 상사를 업신여겼고, 관료의 법을 따르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항상 탄핵 상소를 받았지만, 조예는 그것을 억눌러 주었다. 후에 회남의 아문장이 되었고, 노강 태수, 응양장군으로 승진했다.[4]
명제 사후, 양자인 조방이 즉위했으나 어렸기 때문에 후견인인 조상이 실권을 잡았다. 문흠은 왕릉에게 탐욕스럽고 잔인하다고 탄핵받아 잠시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조상은 문흠과 동향이었기 때문에 문흠을 후하게 대우하고, 사건의 상세한 내용도 조사하지 않고 다시 임지로 돌려보낸 후 관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문흠은 더욱 뽐내고 거만한 태도를 취하며 용맹함을 과시하고 으스댔기 때문에 헛된 명성을 얻었다.
2. 1. 초기 생애
어려서부터 재주와 무용이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는 조조를 섬기며 무인으로서 공적이 있었다. 문흠은 조상과 같은 마을 출신으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용이 뛰어났다고 한다.219년, 업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노리고 위풍이 쿠데타 계획을 세웠으나 누설되어 처형되었으며, 문흠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아버지 문직의 공으로 인해 조조가 사면해 주었다.[1]
명제의 태화 연간, 오영교독, 아문장이 되었다.
2. 2. 조위에서의 초기 경력
219년, 위풍이 업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노리고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문흠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될 뻔했으나, 아버지 문직의 공으로 조조에게 사면받았다.[1]태화 연간(227년~233년)에 오영교독, 아문장이 되었다.[2] 문흠은 조상과 같은 마을 출신으로, 아버지처럼 무용이 뛰어났다.[3]
문흠은 성격이 거칠고 예절을 갖추지 못해 인망이 없었다. 그는 역임한 모든 관직에서 오만하게 굴며 상사를 업신여겼고, 관료의 법을 따르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항상 탄핵 상소를 받았지만, 조예는 그것을 억눌러 주었다. 후에 회남의 아문장이 되었고, 노강 태수, 응양장군으로 승진했다.[4]
명제 사후, 양자인 조방이 즉위했으나 어렸기 때문에 후견인인 조상이 실권을 잡았다. 문흠은 왕릉에게 탐욕스럽고 잔인하다고 탄핵받아 잠시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조상은 문흠과 동향이었기 때문에 문흠을 후하게 대우하고, 사건의 상세한 내용도 조사하지 않고 다시 임지로 돌려보낸 후 관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문흠은 더욱 뽐내고 거만한 태도를 취하며 용맹함을 과시하고 으스댔기 때문에 헛된 명성을 얻었다.
3. 양주에서의 활동
문흠은 여강 태수 및 응양장군을 지냈으나, 왕릉이 그의 실정을 상주하여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조상과 동향이고, 조상의 최측근 심복 정밀의 계책으로 후대를 받았다. 다시 여강으로 돌아가 관군장군이 된 문흠은 더욱 교만해지고 허명을 높였다. 육안에 진영을 두고 오나라 도망자와 반란자를 유인하여 변방에 피해를 입혔으나, 주이에게 격파당했다(243년 이후).[1] 250년 겨울 10월에는 거짓 모반으로 주이를 유인했으나 실패했다.[1]
조상 사후, 위나라 조정은 문흠을 전장군으로 승진시켰으나 그는 여전히 불안해했다.[4] 제갈탄을 대신해 양주자사가 되었으나, 양주의 군권을 쥔 제갈탄과는 사이가 나빴다.[4]
3. 1. 여강에서의 통치
여강 태수 및 응양장군이 되었다. 왕릉이 문흠의 실정을 상주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여졌으나, 권세를 쥔 조상과 동향이었으므로 후대받았다. 여기에는 조상의 최측근 심복 정밀의 계책이 있었다. 다시 여강으로 돌아가 관군장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문흠은 더욱 교만해지고 허명을 높였다. 육안 땅에 진영을 두고 오나라 도망자와 반란자를 유인하여 변방에 피해를 입혔는데, 주이의 습격을 받아 격파당했다. 이는 적오 4년(243년) 이후의 일이다.[1] 적오 13년(250년) 겨울 10월, 거짓으로 모반하여 주이를 유인했으나 주이가 거짓 투항으로 알고 신중하게 대처하여 실패했다.[1]3. 2. 관구검과의 관계
조상이 주살된 후, 위나라 조정에서 문흠을 달래기 위해 전장군으로 승진시켰으나 여전히 불안해했다.[4] 제갈탄을 대신해 양주자사가 되었으나, 양주의 군권을 쥔 제갈탄과는 사이가 나빠 모의를 함께하지 않았다.[4] 관구검이 제갈탄 대신 진동장군(鎭東將軍)·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에 임명되어 양주의 군권을 쥐게 되었다.[4] 문흠은 전공을 여러 차례 세우고 노획물을 부풀려 조정의 총애를 받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원한이 있었는데, 관구검이 이를 헤아리고 문흠을 후대하니 문흠은 관구검에게 두 마음을 품지 않게 되었다.[4]4. 관구검·문흠의 난 (255년)
조상이 주살된 후, 위나라 조정은 문흠을 전장군으로 임명하여 회유하려 했으나, 문흠은 여전히 불안감을 느꼈다. 제갈탄을 대신해 양주자사가 되었으나, 양주의 군권을 쥔 제갈탄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모의를 함께하지 않았다. 이후 관구검이 제갈탄을 대신하여 진동장군(鎭東將軍)·도독양주제군사(都督揚州諸軍事)에 임명되면서 양주의 군권을 쥐게 되었다. 문흠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노획물을 부풀려 조정의 관심을 받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원한을 품고 있었다. 관구검은 이러한 문흠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를 후대했고, 문흠은 관구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었다.[4]
253년, 제갈각이 합비신성을 포위했을 때 관구검과 함께 성을 방어했다.[4]
한편, 문흠은 곽회에게 서신을 보내어 함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곽회가 사망하여 무산되었다.[4]
4. 1. 반란의 발발
정원 2년(255년) 정월, 관구검과 함께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4] 수춘 일대의 사람들을 협박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노약자들로 성을 지키게 한 후, 5~6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예주 항현으로 진격했다.[4] 관구검은 성을 지키고, 문흠은 유격대를 맡았다.[4]4. 2. 낙가 전투와 패배
정원 2년(255년) 정월, 관구검과 함께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관구검의 명령을 받아 낙가에 주둔하고 있는 연주자사 등애의 군대를 쳤으나, 사마사가 등애를 구원하였다. 아들 문앙의 진언으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적을 협공했는데, 문앙의 습격은 성공했으나 문흠이 약속 시간에 늦어 실패하고 후퇴하였다.[4]문앙의 기습에 놀란 사마사는 눈이 튀어나와 목숨이 경각에 처했었다. 윤대목은 사마사의 군중에서 문흠을 설득하겠다는 이유로 문흠을 찾아 "군후는 어찌 며칠을 더 참지 못하시오!"라며 사마사가 곧 죽을 것임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문흠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윤대목을 죽이려 하였고, 윤대목은 울면서 돌아갔다. 윤달 16일, 사마사는 기병으로 문흠을 추격하여 낙가에서 격파했다.[4]
이 패배를 들은 관구검의 군대는 붕괴되었으며, 문흠은 오나라로 도망쳤다.
4. 3. 오나라로의 망명
관구검의 군대가 붕괴되자, 문흠은 오나라로 도망쳐 손준에게 투항했다.[4] 오나라에서 문흠은 도호(都護)·가절(加節)·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유주목·초후(譙侯)로 임명되었다.[4]5. 오나라에서의 활동
문흠은 오나라에 망명하였으나 여전히 교만하여 여거, 주이 등의 미움을 샀다. 그러나 손준만은 문흠을 비호했다.[4]
256년, 손준에게 위나라를 칠 계책을 냈다. 그해 8월, 손준은 문흠에게 여거, 유찬, 주이, 당자와 함께 회수와 사수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손준이 죽자 문흠은 여거, 당자와 함께 등윤을 승상으로 추천하는 표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조서를 받아 유찬, 당자와 함께 여거를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4]
5. 1. 손준과의 관계
문흠은 오나라에서 여거, 주이 등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손준은 문흠을 비호했다.[4] 256년, 손준에게 위나라를 공격할 계책을 제안했다. 그해 8월, 손준은 문흠에게 여거, 유찬, 주이, 당자와 함께 회수와 사수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4] 손준이 죽자, 문흠은 여거, 당자와 함께 등윤을 승상으로 추천하는 표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조서를 받아 유찬, 당자와 함께 여거를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4]5. 2. 제갈탄의 난 지원 (257년~258년)
257년 6월, 당자, 전단, 전역, 왕조와 함께 3만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을 지원했다.[4] 왕기의 포위망을 뚫고 수춘성에 들어가 주이와 호응하여 여러 차례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실패했다.제갈탄의 부하 장반과 초이가 손침이 퇴각하기 전에 속히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문흠은 이를 반대하였다. 제갈탄이 장반과 초이를 죽이려 하였으므로 둘은 위나라에 투항했다. 함께 구원을 온 전씨 일족들이 모조리 위나라에 투항하고, 손침도 주이를 죽이고 손은으로 주이를 대신했다가 곧 귀국했다.
258년 1월, 문흠은 전씨 일족들이 투항했으므로, 이쪽이 크게 불리하게 되어 저쪽이 방비가 없을 때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갈탄과 당자도 이를 옳게 여기고 포위망을 뚫고자 맹렬히 싸웠으나 결국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문흠은 위나라 군사를 내어 보내고 오나라 군대들로 성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제갈탄은 듣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나쁜 사이였는데 단지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결국 제갈탄은 문흠을 죽였다.
6. 죽음
257년 6월, 문흠은 당자, 전단(全端), 전역, 왕조(王祚)와 함께 3만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을 구원하러 갔다. 왕기가 포위망을 완성하기 직전 성내에 들어가 주이와 호응하여 여러 차례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제갈탄의 부하 장반과 초이가 손침이 퇴각하기 전에 속히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문흠은 이를 반대했다. 제갈탄이 장반과 초이를 죽이려 하였으므로 둘은 위나라에 투항했다. 함께 구원을 온 전씨 일족들이 모조리 위나라에 투항하고, 손침도 주이를 죽이고 손은으로 주이를 대신했다가 곧 귀국했다.[4]
6. 1. 제갈탄과의 갈등과 최후
제갈탄과 당자도 문흠의 주장을 옳게 여겨 맹렬히 싸웠으나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4] 문흠은 위나라 군사를 내보내고 오나라 군대로 성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제갈탄은 이를 듣지 않았다. 원래 사이가 나빴던 데다 어쩔 수 없이 협력하던 상황이었기에,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결국 제갈탄은 문흠을 죽였다.[4]6. 2. 사후
문앙과 문호는 사마소에게 투항했다. 문앙과 문호는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에 투항했었던 사람들이었고, 사마소의 형 사마사를 병들어 죽게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위나라에 다시 투항하면 처벌받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사마소는 이들을 용서하고, 이들에게 수춘성 주위를 돌면서 "나 같은 사람도 위나라에서 용서해 주었다"라고 외치게 했다. 이들의 외침을 들은 제갈탄의 병사들은 더더욱 항복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1]제갈탄의 난이 평정된 후, 문앙과 문호는 허락을 받아 문흠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1]
7. 가계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Wei Shu
[3]
서적
魏書 (曹魏)
[4]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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