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돌라 공성전 (15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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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란돌라 공성전 (1510년)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페라라 공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로,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의 세력을 견제하고 교황령을 확장하기 위해 캉브레 동맹에서 탈퇴한 후, 페라라 공국을 공격하여 미란돌라를 포위했다. 율리우스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미란돌라를 점령했으나, 이후 프랑스의 반격으로 인해 페라라 공국 공격은 실패했다. 이후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511년 프랑스가 볼로냐와 미란돌라를 재탈환하면서 율리우스 2세는 신성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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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돌라 공성전 (1510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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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 | 미란돌라 공성전 |
전체 | 캉브레 동맹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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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511년 1월 2일 – 1511년 1월 19일 |
장소 | 이탈리아 에밀리아 미란돌라 |
결과 | 베네치아-교황령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교황령 우르비노 공국 스페인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
교전국 2 | 미란돌라 공국 페라라 공국 프랑스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 교황 율리오 2세 |
교전국 2 | 샤를 2세 당부아즈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 2,500명의 보병 400명의 기사 100-150명의 무장 병사 |
교전국 2 | 400명의 보병 100명의 에스테 군인 70명의 미란돌라 군인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국 1 | 400명 사상 |
교전국 2 | 100명 사상 |
2. 배경
16세기 초, 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의 주요 관심 지역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령이 가장 강력한 독립적인 정치 세력 중 하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교황령의 통치자였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 내 외국 세력의 존재를 교황령 중심의 이탈리아 전쟁 중재자 역할을 확립하는 데 큰 걸림돌로 여겼다. 또한, 리미니, 파엔차, 체르비아 등 로마냐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존재 역시 교황령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이 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교황령이 이탈리아 중부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유지해야만 외국 세력들 사이에서 완충 지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베네치아와 같은 강력한 지역 경쟁자는 이러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었다.
2. 1. 캉브레 동맹 결성
16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오늘날 이탈리아를 구성하는 영토에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 지역 세력 중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령은 가장 강력한 독립적인 정치 실체 중 하나였다.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이자 교황령의 통치자인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이탈리아 내 외국 세력의 존재는 이탈리아 전쟁의 중재자로서 교황령을 만들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심각한 문제였다. 또 다른 문제이자, 리미니, 파엔차, 체르비아의 로마냐 점령 이후 더욱 시급한 문제는 베네치아의 지배력이었다. 율리우스는 교황령이 이탈리아 중부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다면 두 외국 세력 사이의 완충 지대로 번영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베네치아와 같은 강력한 지역 경쟁자는 교황령이 이탈리아 중부를 지배하는 능력을 방해할 것이었다.
그 결과, 1509년 3월 25일 율리우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분할을 명시적인 목적으로 하는 캉브레 동맹에 유럽 주요 강국들과 함께 참여했다.
3. 캉브레 동맹 전쟁
1509년 5월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베네치아는 프랑스군에게 바일라 전투에서 즉각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로 베네치아 군대와 용병들은 혼란에 빠졌고, 캉브레 동맹의 구성원들은 북부 이탈리아, 중부 이탈리아, 나폴리 해안을 따라 많은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다.
3. 1. 율리우스 2세의 평화 협상
1509년 5월 캉브레 동맹 전쟁이 시작되자, 베네치아는 프랑스군에게 아냐델로 전투에서 즉각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로 베네치아 군대와 용병들은 혼란에 빠졌고, 캉브레 동맹의 회원국들은 북부 이탈리아, 중부 이탈리아, 나폴리 해안을 따라 많은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 베네치아는 율리우스 2세에게 접근하여 평화를 맺고 캉브레 동맹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양측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결국 1510년 2월 11일, 베네치아는 율리우스 2세가 제시한 평화 조항에 동의했다.4. 율리우스 2세의 프랑스 견제
베네치아와 평화 협정을 맺음과 동시에 율리우스 2세는 캉브레 동맹에서 탈퇴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가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에 대항할 새로운 동맹을 모색하여 신성 로마 제국 및 스페인과 접촉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스위스 용병과 5년 계약을 맺어 군사력을 보강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 및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4. 1. 페라라 공국 공격
베네치아와 평화 협정을 맺은 율리우스 2세는 캉브레 동맹에서 탈퇴하고, 프랑스가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데 집중했다. 그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및 스페인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 군대를 재건하도록 지원하고 스위스 근위병 용병과 5년 동맹을 맺어 군사력을 보강했다.프랑스를 겨냥한 첫 번째 군사 작전의 목표는 페라라 공국이었다. 페라라 공국은 캉브레 동맹의 일원이자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으며, 교황령의 봉토이기도 했다. 1510년 8월, 율리우스 2세는 페라라를 공격했지만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 공격은 프랑스 루이 12세의 경계를 샀으나, 프랑스는 즉각적인 무력 대응은 하지 않았다. 율리우스 2세는 이에 멈추지 않고 모데나 시를 공격하여 빠르게 점령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밀라노의 프랑스군 사령관인 샤몽은 10월에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교황령 북부의 주요 거점인 볼로냐로 진격했다.
당시 볼로냐를 방어할 병력이 부족했던 율리우스 2세는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샤몽과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베네치아와 스페인에서 보낸 증원군이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볼로냐에서 철수했다.
4. 2. 볼로냐 방어전
율리우스 2세는 페라라 공국 공격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빠르게 모데나 시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에 대응하여 밀라노의 그랜드 마스터 샤몽은 1510년 10월, 교황령의 북부 본부인 볼로냐를 향해 프랑스 군대를 진격시켰다.볼로냐를 방어하기에는 군대가 부족했던 율리우스 2세는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샤몽과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베네치아 및 스페인 증원군이 도착했고, 프랑스군은 철수했다.
5. 미란돌라 공성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군대는 페라라를 다시 공격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속 이어가고자 했고, 페라라 영토 내의 주요 전초 기지인 콩코르디아와 미란돌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교황은 페라라 서쪽에 위치한 이 두 요새를 점령하면, 프랑스군이 페라라를 지원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5. 1. 공성전 과정
교황령 군대는 페라라를 다시 공격하기에는 규모가 작았다. 하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이어가기로 하고, 페라라 영토의 전초 기지인 콩코르디아와 미란돌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율리우스 2세는 페라라 서쪽의 이 두 거점을 점령하면 프랑스군이 페라라를 돕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콩코르디아는 비교적 쉽게 함락되었으나, 미란돌라는 교황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해가 바뀐 1511년 초부터 미란돌라에 대한 본격적인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휘하 장군들의 지휘에 불만을 느낀 율리우스 2세는 1511년 1월 2일 직접 미란돌라로 향했다. 미란돌라에 도착한 교황은 장군들을 질책하고 곧바로 군사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란돌라 측은 항복을 거부했다. 율리우스 2세가 성을 함락시킨 후 약탈을 허용하겠다고 위협했음에도 미란돌라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1511년 1월 19일, 미란돌라는 항복했다. 율리우스 2세는 성 안으로 들어간 직후, 자신의 군대가 약탈을 벌이는 것을 막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5. 2. 점령 후 상황
1511년 1월 19일, 미란돌라는 마침내 항복했다. 율리우스 2세는 성 안으로 들어간 직후, 자신의 군대가 약탈하는 것을 막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6. 이후 상황
미란돌라 공성전 이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페라라를 확보하고 페라라 공작을 프랑스로부터 분리시키려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페라라 확보 실패에 더해, 1511년 초 율리우스 2세에게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프랑스가 1511년 5월 23일 볼로냐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며칠 뒤 미란돌라를 다시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511년 말,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동맹인 신성 동맹 결성에 성공했다. 이 동맹의 결성은 결국 1512년 5월 프랑스군이 밀라노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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