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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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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는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다. 그는 교황 레오 9세와 교황 수위권, 필리오케 조항, 성찬례에서의 무교병 사용 등 신학적, 문화적 문제로 대립했다. 레오 9세는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미하일 1세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미하일 1세는 이에 반발하며 "세계 총대주교"를 칭하며 맞섰다. 교황 사절단이 파견되었지만, 교황의 사망으로 권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 훔베르토 추기경이 미하일 1세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했고, 미하일 1세는 이에 맞서 훔베르토 일행을 파문했다. 이러한 상호 파문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미하일 1세는 비잔틴 제국 내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다. 1965년 상호 파문이 철회되었지만, 완전한 친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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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

2. 생애와 배경

미하일 키룰라리오스는 100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교회에 들어갔다. 그는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서방 교회(가톨릭교회)와 동방 교회(정교회)의 서로 다른 관습, 특히 무발효 빵을 성찬례(미사)에서 사용하는 서방 교회의 관습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1054년의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다. 미하일 1세 시대에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 (재위: 1042년 - 1055년)의 실정과 콘스탄티누스 9세 사후의 내란 등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황제 이삭 1세 콤네노스 (재위: 1057년 - 1059년)는 징세를 강화하고 황제가 하사한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고, 총대주교 미하일 1세는 이에 반발했지만, 황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러한 강경책은 교회 및 민중으로부터 황제가 반발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

제국이 혼미를 더해가는 가운데, 미하일 1세는 1059년에 영면했다.

3. 동서 교회의 분열 (1054년)

미하일 1세는 성찬례에서 무교병 사용 문제[1], 교황 수위권 문제, ''필리오케'' 조항 등 신학적, 문화적 문제에 대해 교황 레오 9세와 대립했다.[1] 1054년,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언급하며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으나,[2] 미하일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교황을 "형제"라고 칭하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교황은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토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교황 사망으로 사절단의 권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도 훔베르토는 미하일 1세와 논쟁을 벌였다. 미하일 1세는 사절단을 무시하고 수개월 간 면담을 거부했다.

훔베르토는 1054년 7월 16일 성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미하일 1세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는 문서(''charta excommunicationis'')를 놓았다. 이 파문은 교황 사망으로 인해 무효였지만, 동서 교회 분열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에 미하일 1세는 1054년 7월 2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훔베르토와 그 일행을 파문했다. 7월 24일, 이 파문은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공식 선포되었다. 이 상호 파문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비잔틴 제국과 교황 사이의 동맹을 종식시켰다. 미하일 1세는 자신의 지역에 있는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여 분열을 더욱 악화시켰다.

훔베르토는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 동방 교회가 임의로 삭제했다고 주장하고, 동방 교회의 성품의 결혼[7]을 비판하는 등 교황 지상주의를 강하게 내세웠다. 미하일 1세는 노르만족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교회 관계 개선을 모색하던[8]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의 뜻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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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교황 레오 9세와의 갈등

미하일 1세는 성찬례에서 무교병 사용 문제로 교황 레오 9세와 다퉜다.[1] 교황 수위권 문제, 필리오케 조항 등 신학적, 문화적 문제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1054년,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근거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미하일 1세에게 편지를 보냈다.[2] 레오 9세는 이 기증이 진실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만이 교회 내에서 으뜸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미하일 1세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교황을 "형제"라고 부르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7] 이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레오 9세는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토 추기경, 로렌의 프레데릭 추기경, 아말피의 페테르 대주교를 교황 사절단으로 보냈으나, 콘스탄티노플 도착 직후 레오 9세가 사망했다. 미하일 1세는 교황 사절단을 만나지 않고 수개월 간 기다리게 했다. 훔베르토 추기경은 미하일 총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는 문서를 성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놓았다.[3]

이에 미하일 1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21명의 주교들과 회의를 열어 훔베르토 추기경과 그의 동료들을 파문했다.[8] 이 파문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야기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교황 사이의 동맹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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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훔베르토 추기경의 파문

미하일 1세는 성찬례에서 무교병 사용 문제[1], 교황 수위권 문제, 필리오케 조항 등 신학적, 문화적 문제로 교황 레오 9세와 대립했다.[1] 레오 9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근거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1054년 미하일에게 편지를 보냈다.[2] 이 편지에서 레오 9세는 라틴 교회와 다른 그리스도의 관습을 비판하고, 콘스탄티노플이 이단의 중심지였다고 비난하며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강조했다.

교황 레오 9세는 미하일을 만나기 위해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토 추기경, 로렌의 프레데릭 추기경, 아말피의 페테르 대주교를 교황 사절단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직후 레오 9세가 사망(1054년 4월 19일)하여 사절단은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훔베르토 추기경은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했고, 미하일 총대주교와 논쟁을 벌였다.

1054년 7월 16일, 훔베르토 추기경은 미하일 총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는 문서(''charta excommunicationis'')를 작성하여 성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놓았다. 이에 미하일 총대주교는 1054년 7월 20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훔베르토 추기경과 그의 동료들을 파문했다. 이 파문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야기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교황 사이의 동맹을 종식시켰다.[3]

미하일 1세가 교황레오 9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 세계 총대주교(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el, Ecumenical Patriarch)"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교황을 "형제"라고 칭한 것이 쟁점이 되었다. 이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훔베르토 추기경은 필리오케 문제에서 동방 교회를 비난하고, 동방의 성품의 결혼[7]을 비판하며, 로마 교황의 권위를 주장했다.

미하일 1세는 훔베르토와의 만남을 거절하고 수개월 간 회견을 미뤘다. 레오 9세 사망 후, 훔베르토는 미하일 1세와 그 동조자들을 파문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한 부제가 훔베르토를 쫓아가 파문장을 가져가 달라고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하일 1세는 훔베르토 일행을 파문했다. 이는 노르만족에 대한 대항을 위해 동서 교회 관계 개선을 모색하던[8]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황제는 미하일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조치를 막지 못했다.

thumb의 야경.]]

3. 3. 미하일 1세의 대응

미하일 1세는 성찬례에서 무교병 사용 문제[1], 교황 수위권 문제, ''필리오케'' 조항 등 신학적, 문화적 문제에 대해 교황 레오 9세와 대립했다.[1] 1054년,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언급하며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으나,[2] 미하일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교황을 "형제"라고 칭하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교황은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토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교황 사망으로 사절단의 권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도 훔베르토는 미하일 1세와 논쟁을 벌였다. 미하일 1세는 사절단을 무시하고 수개월 간 면담을 거부했다.[1]

훔베르토는 1054년 7월 16일 성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미하일 1세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는 문서(''charta excommunicationis'')를 놓았다.[1] 이 파문은 교황 사망으로 인해 무효였지만, 동서 교회 분열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에 미하일 1세는 1054년 7월 2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훔베르토와 그 일행을 파문했다.[1] 7월 24일, 이 파문은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공식 선포되었다.[1] 이 상호 파문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고,[1] 비잔틴 제국과 교황 사이의 동맹을 종식시켰다. 미하일 1세는 자신의 지역에 있는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여 분열을 더욱 악화시켰다.[1]

훔베르토는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 동방 교회가 임의로 삭제했다고 주장하고, 동방 교회의 성품(정교회)의 결혼[7]을 비판하는 등 교황 지상주의를 강하게 내세웠다. 미하일 1세는 노르만족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교회 관계 개선을 모색하던[8]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의 뜻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굽히지 않았다.

thumb의 야경.]]

4. 동서 교회 분열의 유효성 논란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당시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토 추기경이 전달한 파문 문서는 교황 레오 9세가 사망한 이후에 작성되었고, 미하일 1세 키룰라리오스가 선고한 파문은 훔베르토 개인과 그의 동행자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유효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3] 이러한 파문은 교황 수위권 문제, 필리오케 문제 등 여러 신학적, 문화적 문제들로 인해 이미 멀어져 있던 동서 교회 사이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1]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상호 파문을 철회했지만,[3] 완전한 친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1054년의 사건이 동서 교회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던 갈등을 심화시킨 하나의 요인이었음을 시사한다. 동서 교회 분열이 결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1204년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사건이다.

5. 비잔틴 제국 내 정치적 역할

테오도라 재위 기간 동안 미하일은 황위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의혹을 받았다. 미카엘 프셀로스는 초기에는 관계가 좋았지만, 테오도라 즉위 후 미하일이 "로마 제국이 여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갈등을 겪었다고 기록했다.[4] 테오도라는 미하일의 무례함과 반역 행위로 인해 그를 폐위시키려 했으나, 오래 살지 못했다.[4]

케룰라리우스는 미하일 6세 스트라티오티코스의 퇴위에 관여하여, 1057년 8월 31일 이삭 1세 콤네노스에게 양위하도록 설득했다.[5] 이삭 1세는 케룰라리우스의 조언을 수용하여 수도사가 되었다.[5] 이후 케룰라리우스는 이삭 1세를 황제로 옹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교회 재산 몰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미하일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주색 신발을 신는 등의 행동을 하였고, 이삭을 전복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거나, 혹은 친척인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를 황제로 세우려는 반란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1058년, 이삭은 미하일을 프로콘네소스 섬으로 유배보냈고, 미하일이 물러나지 않자 프셀로스에게 이단 및 반역 혐의를 제기하도록 했다.[6] 미하일은 재판을 받기 전 사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 (재위: 1042년 - 1055년)의 실정과 콘스탄티누스 9세 사후의 내란 등으로 쇠퇴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황제 이삭 1세 콤네노스 (재위: 1057년 - 1059년)는 징세를 강화하고 황제가 하사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기에 이르렀다. 총대주교 미하일 1세는 이에 반발했지만, 황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러한 강경책은 교회 및 민중으로부터 황제가 반발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

6. 동서 교회 분열의 영향과 현대적 의의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은 동서 교회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1] 이 사건은 성찬례에 사용되는 빵의 종류(무교병) 문제,[1] 교황 수위권 문제, 필리오케 논쟁 등 신학적, 문화적, 교회 관습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1]

교황 레오 9세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근거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미하일 1세에게 편지를 보냈으나,[2] 미하일 1세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교황을 "형제"라고 칭하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절대적인 권위와 권한을 침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토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으나, 교황 레오 9세의 사망으로 인해 사절단의 권한이 모호해진 상황에서[3], 훔베르토는 미하일 1세와 그 지지자들을 파문하는 문서를 성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놓았다. 이에 미하일 1세는 시노드를 소집하여 훔베르토와 그 일행을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204년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은 동서 교회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1세는 상호 파문을 철회했지만,[3] 완전한 친교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동서 교회 분열은 현재까지도 기독교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서방 교회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동서 교회 분열은 간접적으로 한국 개신교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참조

[1] Catholic Encyclopedia Michael Cærularius http://www.newadvent[...]
[2] 간행물 Migne's Patrologia Latina, Vol. 143 (cxliii), Col. 744-769
[3] 서적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https://books.google[...] Zondervan Academic 2009-09-13
[4] 문서 Psellus
[5] 문서 Norwich
[6] 문서 Psellus
[7] 문서 カトリック教会の司祭は現在でも妻帯が許されないが、正教会の司祭は輔祭に叙聖される前であれば妻帯が許される(但し再婚は不可)。そして主教は妻帯は許されない。詳しくは神品 (正教会の聖職)]]の項を参照。
[8] 문서 「関係改善を模索していた」と言う事は、既に溝が広が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ある。本記事内の「『相互破門』의 有効性」의 項目에도 詳述するように、この時代、東西両教会の距離は既に広がっ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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