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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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노스 9세는 11세기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모노마코스 가문 출신으로, 황후 조에 포르피로게니타와 결혼하여 1042년부터 1055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군사적 위기와 정치적 불안에 직면했으며, 특히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 노르만의 남이탈리아 침략, 페체네그족의 발칸 반도 습격 등이 있었다. 또한 동서 교회의 분열이 발생하여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서로를 파문했다. 그는 문화와 학문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재건하고, 미카엘 프셀로스와 같은 학자들을 후원했으나, 문관을 우대하고 군사력을 약화시켜 제국을 쇠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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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9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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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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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Kōnstantinos Monomachos |
칭호 |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군주 |
재위 기간 | 1042년 6월 11일 – 1055년 1월 11일 |
대관식 | 1042년 6월 12일 |
이전 통치자 | 조이, 테오도라 |
다음 통치자 | 테오도라 |
공동 통치자 | 조이 (1042–1050), 테오도라 (1042–1055) |
배우자 | 바실 스클레로스의 딸, 마리아 스클레라이나, 조이 |
자녀 | 아나스타시아 |
왕조 | 마케도니아 왕조 |
아버지 | 테오도시우스 모노마코스 |
출생 | 기원후 1000년/1004년 경 |
출생지 | 안티오크 |
사망일 | 1055년 1월 11일 (50–55세) |
사망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
매장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망가나 수도원 |
이름 | |
그리스어 | Κωνσταντῖνος Μονομάχος |
통치 | |
시작 | 976년 |
종료 | 1025년 |
2. 생애
콘스탄티노스 9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력 가문인 모노마코스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바실리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 치세의 고위 관료였다.[5]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통해 황제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와 인척 관계를 맺었으나,[7][8] 이후 황후 조이와의 관계로 의심받아 황제 미하일 4세에 의해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기도 했다.[9]
1042년 미하일 5세가 폐위된 후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10] 공동 여제로 즉위했으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이와 테오도라 자매 중 조이의 선택을 받아 그녀와 결혼하고 6월 12일 황제로 즉위했다.[11][13]
문관 귀족 출신이었던 콘스탄티노스는 문관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 관료제를 비대화시켰고, 황실의 사치와 더불어 제국 재정을 악화시켰다. 또한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군축을 단행하여 군사 귀족들의 반발을 사고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정부였던 마리아 스클레라이나와 그 일족의 영향력이 컸으며,[16] 이는 1044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25][26]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재건하고 법학과 철학 부문을 강화하는 등[33] 문화와 학문 진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치세는 내우외환으로 점철되었다. 1043년 장군 게오르기우스 마니아케스의 반란,[17] 같은 해 키예프 루스의 침공,[19] 1047년 조카 레오 토르니키오스의 반란 등 내부 반란과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34][35] 1045년 아니의 아르메니아 왕국을 병합했으나[27] 이는 제국을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에 직접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고,[28] 1048년 카페트론 전투에서 처음 충돌했다.[29] 발칸 반도에서는 페체네그족의 침입과 약탈이 계속되었으며,[37] 남이탈리아에서는 노르만족의 세력 확장을 막지 못하고 영토를 상실해갔다.
1054년에는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결국 동서 교회 분열이라는 기독교 세계의 영구적인 분열이 발생했다.[41] 콘스탄티노스 9세는 남이탈리아 문제 해결을 위해 로마 교회와의 협력을 원했지만,[42]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제국의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노스 9세는 1055년 1월 11일 병으로 사망했다.[43][44] 그의 사후, 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이자 조이의 동생인 노령의 테오도라가 다시 제위에 올랐다.[46]
2. 1. 즉위 배경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호스는 모노마코스 가문 출신으로, 바실리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 치세 동안 유력한 궁정 귀족이었던 테오도시오스 모노마호스의 아들이었다.[5] 그의 어머니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콘스탄티노스는 대략 980년[3] 또는 1000년[4] 경 안티오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테오도시오스는 한때 음모 혐의를 받았고, 이는 콘스탄티노스의 경력에도 영향을 미쳤다.[6]콘스탄티노스는 첫 아내와 사별한 후, 황제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의 조카딸이자 바실리오스 스클레로스의 딸(이름은 헬레나 또는 풀케리아로 전해짐)과 두 번째로 결혼하면서 지위가 향상되었다.[7][8] 그러나 그는 잘생긴 외모 때문에[48] 미하일 4세의 형이자 강력한 환관이었던 요안니스 오르파노트로포스에게 조이 황후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심을 샀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스는 레스보스 섬의 미틸리니로 7년간 유배되었다.[9]
1042년 미하일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이자 양자인 미하일 5세가 황제가 되었다. 미하일 5세는 자신을 황제로 세운 조이 황후를 추방하려 했으나, 오히려 민중과 귀족들의 반발로 폐위되고 눈이 뽑힌 채 추방당했다.[10] 이 사건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유배에서 풀려나 그리스 본토의 판사로 임명되었으나, 임지로 떠나기 전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다.[10]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미하일 5세를 몰아내고 공동 여제로 즉위한 조이와 그녀의 여동생 테오도라가 불안정한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다. 두 자매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특히 조이는 점차 인기를 얻으며 권력을 강화하는 동생 테오도라를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남편을 황제로 세우기로 결심했다.[11]

조이는 처음 고려했던 두 명의 후보자가 각각 황후를 무시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12] 유배에서 돌아온 잘생기고 세련된 콘스탄티노스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1042년 6월 11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알렉시우스 1세 스투디테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이번 결혼이 세 번째라는 이유로 교회법에 따라 결혼식 집전을 거부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다음 날인 6월 12일 황제로 즉위하여 콘스탄티노스 9세가 되었다.[13]
2. 2. 내치
콘스탄티누스 9세는 조에와 테오도라가 시작한 숙청을 이어받아 미하일 5세의 친척들을 궁정에서 몰아냈다.[14] 그는 쾌락을 즐기는 성격이었고[15] 음모 혐의가 있을 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6] 그의 아내 또는 정부였던 마리아 스클레라이나와 그 가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조지 1세의 딸로 추정되는 또 다른 정부 "알란 공주" 구란두흐트도 두었다.
문관 귀족 출신인 콘스탄티누스 9세는 원로원 의원 등 문관을 우대하여 관직을 늘리고 관료제를 비대화시켰으며, 이는 재정 지출 증가로 이어졌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와 조에, 테오도라 자매의 사치스러운 생활도 제국 재정을 압박했다. 그는 수도의 유력 상인을 원로원 의원으로 등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기적으로 지배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장기적으로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제국 금고를 낭비하는 경향이 있었으며,[40] 토지를 부여하고 그 대가로 군사력을 제공받는 ''프로노이아'' 제도를 활용하기도 했다.[39] 군사적으로는 기존의 병농일치제를 폐지하고 용병을 고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으며, 재정난 해소를 위해 군축을 단행했다. 이는 군사 귀족들의 불만을 샀을 뿐 아니라 제국의 군사력 약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정책과 황제의 통치 방식은 여러 반란을 야기했다. 1042년 8월, 콘스탄티누스는 장군 게오르기우스 마니아케스를 이탈리아 남부의 사령관직에서 해임하자, 마니아케스는 9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7]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이동했으나, 1043년 전투 중 부상으로 사망하면서 반란은 종결되었다.[18] 마니아케스 반란으로 남이탈리아의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노르만족이 침입하여 제국 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마니아케스 반란 직후 키예프 루스 함대의 공격을 받았으나,[19] 그리스 화약의 도움으로 격퇴했다.[21] 이후 평화 협상의 일환으로 자신의 딸 아나스타시아를 미래의 키예프 대공 1세 브세볼로드와 결혼시켰다.[22][23]
콘스탄티누스 9세가 마리아 스클레라이나를 특별 대우하자 그녀가 조에와 테오도라를 해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25] 이는 104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봉기로 이어졌으나, 조에와 테오도라가 직접 발코니에 나타나 무사함을 알리자 진정되었다.[26]

1045년, 콘스탄티누스는 아니의 아르메니아 왕국을 제국에 병합했다.[27] 그러나 이는 제국을 새로운 위협인 셀주크 투르크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8] 1046년 비잔티움 제국은 처음으로 셀주크와 접촉했으며,[28] 1048년 카페트론 전투를 치렀다.[29] 이는 훗날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로 이어지는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30]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아르메니아 교회를 박해하며 동방 정교회와의 통합을 강요하려 했다.[31]

문화적으로는 1046년[32]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재건하고 법학과 철학 부서를 신설하여[33] 미하엘 프셀로스와 같은 학자들이 활동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 궁정을 중심으로 법학, 문학, 철학이 발전했으며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기도 했다.[53]
1047년에는 조카인 레온 토르니키오스가 아드리아노폴에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로 선포되었으나,[34][35] 결국 실패하고 체포되었다.[36] 토르니키오스 반란으로 발칸 반도의 방어력이 약화된 틈을 타 1048년부터 페체네그족의 침입이 잦아졌다.[37] 황제는 외교로 이들을 통제하려 했으나 오히려 페체네그 부족 간의 충돌을 야기했고, 발칸 반도 내 정착을 허용한 정책은 이후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38]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이 발생했다. 교황 레오 9세가 파견한 교황 특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미카엘 1세 케룰라리오스가 서방 교회의 관습을 따르지 않자 그를 파문했고, 케룰라리오스 역시 특사들을 파문했다.[41] 콘스탄티누스 9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노르만족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으나,[42]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케룰라리오스 총대주교를 통제하지 못해 결국 교회 분열을 막지 못했다.
미하엘 프셀로스는 콘스탄티누스가 뛰어난 외모를 가졌으며,[51][4] 정의롭고 지혜로우며 너그러운 성격이었다고 기록했다.[52][4] 그러나 쾌락을 즐기고[15] 재정을 낭비하는[40] 측면도 있었다.
1055년 1월 11일, 콘스탄티누스 9세는 병으로 사망했다.[43][44] 그는 임종 직전 측근들의 설득에 따라 테오도라 대신 니키포로스 프로테우온에게 제위를 넘기려 했으나,[45] 결국 테오도라가 다시 여제로 즉위했다.[46]
2. 3. 군사적 위기
콘스탄티노스 9세의 치세는 여러 군사적 위기로 점철되었다. 문관 출신이었던 그는 문관 귀족을 우대하고 군사 귀족을 소홀히 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군사력 약화와 군사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그는 병농(兵農) 겸업의 전통적인 군사 제도를 약화시키고 용병제를 도입했으며, 재정난을 이유로 군축을 단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방위력을 약화시켰다.[14]즉위 직후부터 위기가 시작되었다. 1042년 8월, 콘스탄티노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유능한 장군 요르요스 마니아케스를 해임했다. 이는 마니아케스와 사이가 나빴던 황후 마리아 스클레리나의 오빠 로마노스 스클레로스의 입김 때문이었다. 이에 반발한 마니아케스는 1042년 9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7]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진격하여 콘스탄티노스가 보낸 군대와 맞섰지만, 1043년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면서 반란은 종결되었다.[18]
마니아케스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인 1043년 여름, 키예프 루스 해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했다.[19] 일각에서는 루스 군대가 마니아케스 반란과 연관되었다고 보기도 한다.[20] 동로마 제국군은 그리스의 불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루스 함대를 격퇴했다.[21] 이후 평화 협상의 일환으로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딸 아나스타시아를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인 브세볼로드 1세와 결혼시켰다.[22][23]
1045년, 콘스탄티노스는 아르메니아의 아니 왕국을 제국에 병합했다.[27] 이는 단기적인 영토 확장 효과가 있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제국을 강력한 새로운 적, 즉 셀주크 투르크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046년 비잔틴 제국은 처음으로 셀주크 투르크와 접촉했으며,[28] 1048년에는 아르메니아에서 카페트론 전투가 벌어졌다. 이듬해 휴전이 맺어졌지만,[29] 이는 일시적인 평화에 불과했고, 이는 결국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참패의 전조가 되었다.[30]
1047년, 콘스탄티노스의 조카 레온 토르니키오스가 발칸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지지자들을 모으고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34][35]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9월 25일, 반란군은 수도 성벽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수도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포위에 실패하고 후퇴했으며, 결국 체포되어 실명형을 당했다.[36]
토르니키오스의 반란은 발칸 반도의 방어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1048년부터 페체네그인들이 다뉴브강을 건너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37] 이들의 약탈은 다음 5년 동안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외교를 통해 이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오히려 페체네그 부족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발칸 반도 내 정착을 허용하는 등의 정책은 상황을 악화시켜 위협을 제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38]
한편, 제국 서쪽의 남이탈리아에서는 마니아케스의 부재를 틈타 노르만족의 침략이 거세졌다. 콘스탄티노스 9세의 군사 정책 실패와 계속된 내란으로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의 영지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점차 상실해 갔다. 1054년의 동서 교회 분열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과의 협력을 통한 노르만족 공동 대응 가능성마저 차단했다.[41][42] 콘스탄티노스 9세는 노르만 문제에 개입하려 했지만, 이미 약화된 군사력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 4. 동서 교회의 분열
노르만의 남이탈리아 침략이 계속되자,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로마 교황과 협력하여 이 지역을 탈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일 1세 케룰라리오스는 종교 의례와 전례 문제를 이유로 반대하며 로마 교회를 비판했다. 양측 교회는 이전부터 교리 문제, 성상 파괴 운동, 필리오퀘 문제 등으로 깊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1053년 시작된 갈등은 서로 비방과 모욕이 담긴 편지를 주고받으며 더욱 심화되었다. 갈등 해결을 위해 1054년 4월, 교황 레오 9세의 전권대사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양측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사절단은 총대주교 케룰라리오스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했다. 결국 7월 16일, 교황 특사인 훔베르투스 추기경이 하이아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케룰라리오스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파문장을 놓았다. 이에 케룰라리오스도 민중을 선동하고 황제를 움직여 로마 교회 사절단을 파문했다. 이로써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서로를 공식적으로 파문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노르만의 남이탈리아 침입에 맞서기 위해 양 교회의 관계 개선을 원했지만[42], 의지가 약하여 야심이 컸던 미카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이라는 기독교 세계의 큰 분열을 초래했으며[41],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2. 5. 죽음과 유산
콘스탄티노스 9세의 치세는 계속된 반란과 외침, 교회 분열 등으로 불안정했지만, 황제의 문화적 감각과 교양 중시 덕분에 짧은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그의 후원으로 104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가 재건되었고, 특히 법과대학이 발전하여 학문과 문학이 발달했다.[33] 또한 1042년 이후 칼리프 알-하킴 비-암르 알라에 의해 파괴되었던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 재건을 지원했다.[49][50] 궁정에는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미카엘 프셀로스와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47] 프셀로스는 자신의 저서 《연대기》에서 콘스탄티노스 9세의 통치를 기록하며 그의 외모를 "햇살처럼 붉은 얼굴"로 묘사하기도 했다.[48]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문관 귀족을 우대하고 관직을 늘려 관료제를 비대화시켰으며, 황제와 조에, 테오도라 자매의 사치로 재정 지출이 증가했다. 군사 면에서는 병농(兵農) 겸업의 농민을 납세자로 전환하고 용병제를 도입했으며, 재정난을 이유로 군축을 추진하여 제국의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고 군사 귀족의 반감을 샀다. 또한 일종의 비잔틴 봉건 계약인 ''프로노이아'' 시스템에 의존했으며,[39] 수도의 유력 상인을 원로원 의원으로 삼아 지배층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들이 국가에 기생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반발로 각지에서 게오르기우스 마니아케스(1042년)나 레오 토르니키오스(1047년) 등 군사 귀족 출신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제국은 더욱 쇠퇴했다.[17][34][35]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1043년 남이탈리아 방어를 맡았던 마니아케스의 반란과 사망으로 해당 지역의 방어력이 약화되어 노르만족이 침입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제국 영토는 점차 상실되었다. 또한 1045년 아니의 아르메니아 왕국을 병합했으나,[27] 이는 제국을 새로운 적인 셀주크 투르크에게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046년 비잔틴 제국은 처음으로 셀주크 투르크와 접촉했고,[28] 1048년 아르메니아에서 카페트론 전투를 치렀다.[29] 발칸 반도에서는 페체네그족의 침입과 약탈이 5년간 계속되었으며, 이들을 외교적으로 제압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비잔틴 영토 내에서의 충돌과 정착 문제로 이어져 상황을 악화시켰다.[37][38]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사이의 오랜 갈등은 결국 동서 교회 분열이라는 파국을 맞았다. 교황 특사가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케룰라리오스에 대한 파문장을 놓자, 케룰라리오스 역시 민중을 선동하여 황제를 움직여 로마 교회 사절단을 파문했다.[41] 콘스탄티노스 9세 자신은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침입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양 교회의 관계 개선을 원했지만, 그의 의지는 약했고 결국 분열을 막지 못했다.[42]

콘스탄티노스 9세는 오랫동안 지병인 관절염으로 고생하였는데, 1055년 1월 11일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43][44] 그는 죽기 직전 측근들의 설득으로 니케포로스 프로테우온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했으나,[45] 결국 노령의 테오도라가 은퇴에서 돌아와 여제로 즉위했다.[46]
3. 후손
황녀는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인 프세볼로트 1세와 결혼했다. 프세볼로트 1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콘스탄티노스 9세의 외손자이며, 그의 별칭 "모노마흐"는 "모노마코스의 손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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