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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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렌체 공의회는 1438년부터 1445년까지 페라라와 피렌체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이다. 바젤 공의회에서 분리되어 개최되었으며,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주도하에 동방 교회와의 통합을 시도했다. 동서 교회의 신학적 차이, 특히 필리오케 문제, 교황 수위권, 연옥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1439년에는 동방 교회 대표들과의 연합 교령이 선포되었으나,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반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인해 실질적인 통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공의회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비잔티움 학자들의 이탈리아 이주와 그리스 고전 문헌 연구를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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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황 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회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1414년부터 1418년까지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렸으며, 세 교황을 폐위하고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서방 교회 분열을 종식시켰으나 얀 후스 화형 등의 논란과 공의회주의의 영향력 약화라는 한계도 남겼다. - 세계 공의회 - 예루살렘 시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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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공의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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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공의회 정보 | |
공의회 명칭 |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
공의회 날짜 | 1431년–1449년 |
이전 공의회 | 콘스탄츠 공의회 |
다음 공의회 | 제5차 라테란 공의회 |
소집자 | 교황 마르티노 5세 |
의장 | 추기경 줄리아노 체사리니 이후 교황 에우제니오 4세 |
참석자 | 최초 소집에는 적었으나, 최종적으로 라틴 교회측 117명, 그리스 교회측 31명이 참가 |
주제 | 후스파 동서 교회의 분열 서방 교회의 분열 |
문서 | 몇몇 교황 칙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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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
주요 논의 | 후스파 문제 해결 시도 동방 교회와의 재결합 시도 교황 수위권 논의 |
주요 결과 | 동방 교회와의 재결합 합의 (단기적)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대표단과의 재결합 합의 |
기타 | 여러 교황 칙서 발표 공의회 장소 변경 (바젤 → 페라라 → 피렌체) 공의회 참석자 수 변동 |
2. 역사적 배경
교황령의 교황,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아라곤 왕관의 왕, 프랑스 왕국 왕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는 곳에서 회의를 열고자 했던 것은, 이들 세력의 영향을 피하고자 했던 공의회의 바람 때문이었다. 교회 개혁의 압력을 받던 마르티누스 5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법령(1417년 10월 9일)에 따라 교황청이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했다. 마르티누스 5세는 이 법령에 따라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전염병으로 인해 개최지는 시에나로 옮겨졌고(시에나 공의회 참조), 개혁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을 무렵 해산되었다(1424년). 마르티누스 5세는 7년 후인 1431년에 바젤에서 다음 공의회를 소집하고 율리우스 체사리니 추기경을 의장으로 선출했으나, 공의회 개회 전에 사망했다.[3]
마르티누스 5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법령에 따라 교황청이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승인했다. 그는 이 법령에 따라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전염병으로 인해 시에나로 옮겨졌고, 개혁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을 무렵 해산되었다. 이후 7년 뒤인 1431년에 다시 공의회가 열릴 예정이었고, 마르티누스 5세는 율리우스 체사리니 추기경을 의장으로 선출했으나 공의회 개회 전에 사망했다.[1]
1431년 스위스 바젤에서 공의회가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받고 서유럽 여러 나라의 지원을 요청했던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하네스 8세 팔레올로고스는 동서 화합의 일환으로 동서 교회의 분열 수습을 제안했다. 서방 교회에서도 이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이 협상을 위한 장소를 놓고 바젤 공의회 참가자들과 교황 측 사이의 논의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1437년 9월 18일, 교황 측이 그리스 측의 편의를 도모하여 페라라로 공의회를 이전한다고 발표하자 바젤 공의회 참가자들은 분열되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등 교황을 따라 페라라로 이동한 자들과 바젤에 남은 자들로 나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교황 에우게니오 4세와 협상하여 바젤 공의회 대표들의 참석을 중단시켰다.
바젤에 남은 급진적인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권을 초월하는 공의회의 권위를 주장하며, 이에 반대한 교황을 일방적으로 파면 선언했다. 1439년 6월 25일, 그들은 독자적으로 사보이아 공작 아마데우스를 교황으로 세웠다. 이 인물이 펠릭스 5세로, 마지막 대립 교황이다.
3. 바젤 공의회 (1431년 ~ 1449년)
바젤 공의회는 1431년 12월 14일, 공의회 운동이 강력하고 교황의 권위가 약했던 시기에 소집되었다.[1] 초기에는 몇몇 주교와 수도원장만 참석했지만, 빠르게 성장하여 하급 성직자들이 주교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졌다. 공의회는 반교황적인 태도를 취하고, 교황보다 공의회의 우월성을 선포했으며, 새 교황이 취임할 때마다 선서하게 하는 규정을 제정했다.[1]
공의회는 바젤 대성당에서 열렸으며, 400명 이상의 회원을 위한 좌석이 마련되었고, 총회는 대성당이나 대성당 장원에서 열렸다.[1] 의식 담당 서기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와 미셸 브뤼누였다.[1]
공의회는 민주적 성격을 띠었는데, 신학 박사, 학장 및 장의 대표자, 수도사와 하급 성직자들이 고위 성직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콘스탄츠 공의회처럼 "국가"로 나뉘지 않고, 신부들은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에 따라 신앙, 평화, 개혁, "공동 관심사"를 다루는 네 개의 큰 위원회 또는 "대표단"(deputationes)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들의 영향력은 덜했다.[1] 각 대표단에서 하급 성직자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이들이 내린 모든 결정은 형식상 총회에서 비준을 받았다.
지기스문트 헝가리 국왕이자 보헤미아 국왕은 1431년 8월 후스파에 대한 5차 십자군 원정 중 도마즐리체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의 후원 아래, 공의회는 1433년 1월 후스파의 칼릭스틴파와 평화 협상을 맺었다. 교황 에우제니우스는 5월에 공의회를 승인했고, 지기스문트는 1433년 5월 31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분열된 후스파는 1434년 5월 패배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는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 비잔틴 황제와 그의 대표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교황의 승인을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된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3. 1. 교황과의 갈등 심화
교황 에우제니우스 4세는 이단 확산, 독일의 소란, 오스트리아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 간의 전쟁, 그리고 교황청 대표단의 적은 수 등의 이유로 공의회가 유용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1] 그는 공의회 해산을 명하고 18개월 후 볼로냐를 회의 장소로 지정하여 정교회 대표들과의 회담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명령은 체사리니 추기경을 비롯한 교황청 대표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 이들은 후스파가 교회가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고,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이 개혁을 회피한다고 비난할 것이며, 이 두 가지 모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황은 이유를 설명하고 양보했지만, 교황청 대표들은 완고한 입장을 취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서방교회 분열의 어려움 속에서 특정 경우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했고, 바젤 공의회의 교황청 대표들은 이러한 권한을 주장하며 회의를 지속했다. 이들은 회의를 열고, 법령을 공포하고, 교황령 베네송 백작령의 통치에 간섭하고, 후스파와 협상하며, 보편 교회의 대표로서 교황에게 법을 부과하려 했다.
에우제니우스 4세는 공의회의 최고 권위 주장에 저항했지만, 공의회의 교리를 공개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타협을 시도했지만, 교황청 대표들은 더욱 고집스러워졌고, 결국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생겨났다.
결국 교황은 1433년 12월 15일 교황칙서를 통해 바젤의 교황청 대표들의 해산 교서를 무효로 선언하고 공의회가 정당하게 소집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에우제니우스 4세는 바젤에서 나온 모든 법령을 비준하거나 공의회의 최고 권위에 명확하게 복종하지 않았고, 침묵을 통해 주권 원칙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3. 2. 페라라-피렌체로의 이전과 동방 교회와의 통합 시도
1437년 9월 18일, 교황 측이 그리스 측의 편의를 위해 공의회를 페라라로 이전한다고 발표하면서, 바젤 공의회 참가자들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등 교황을 따라 페라라로 이동한 사람들과 바젤에 남은 사람들로 나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교황 에우게니오 4세와 협상하여 바젤 공의회 대표들의 참석을 중단시켰다.
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1438년 1월 8일에 소집되어 10일부터 개최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받고 서유럽 여러 나라의 지원을 요청했던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하네스 8세 팔레올로고스는 동서 교회 통합을 위해 동서 교회의 분열을 수습하고자 했고, 서방 교회에서도 이를 환영했다. 요하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 황제는 4세 우르바노 교황(Pope Eugene IV)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438년 4월 9일에 열린 동서 교회 합동 회의에는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의 주도하에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세푸스, 에페소스, 니케아, 키예프,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동방 교회의 대표와 서방 교회의 주교들이 참석하여 논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페라라에서는 재정적 어려움과 전염병 유행이라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교황청의 재정을 담당했던 메디치가(코지모 데 메디치)의 제안을 받아들여 1439년에 공의회는 피렌체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공의회 개최는 메디치가에게 피렌체와 교황청에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성대한 행사라는 이점도 있었다.
피렌체에서의 논의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동서 교회 간의 의견 불일치를 다루었고, "필리오케 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겪었지만, 타협안이 마련되어 1439년에는 합동 교령 "" (Laetentur Caeli)이 채택되었다.
합의에서는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의 신학적 차이점(Theological differences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 the Eastern Orthodox Church)(1054년)을 포함한 동서 분열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논의했는데, 여기에는 성령의 강림, 니케아 신경의 ''필리오케(Filioque)'' 조항, 연옥(purgatory), 그리고 교황의 수위권(papal primacy) 등이 포함되었다.[2]
이로써 동서 교회의 전면적인 재통합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였지만,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성직자와 국민들로부터 큰 반발을 사,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모스크바도 합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합동파 대주교는 추방되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켰기(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문에, 이후 동서 교회의 합동을 위한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공의회를 통해 아르메니아 교회의 일부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합동하여 가톨릭교회에 일말의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3. 3. 바젤 잔류파와 대립 교황 선출
페라라로 공의회가 이전된 후에도 바젤에 잔류한 일부는 여전히 자신들이 공의회라고 주장했다.[3] 이들은 알레망 추기경의 주재 하에 계속해서 공의회를 존속시켰다.[3] 1438년 1월 24일, 공의회는 자신의 보편적 성격을 확인하며, 에우제니오 4세를 정지시켰다. 대부분의 강대국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에우제니오 4세의 폐위를 선포했고(1439년 6월 25일),[3] 1439년 11월 4일 사보이 공작 아마데우스 8세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여 새로운 분열을 야기했다. 그는 펠릭스 5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 분열은 10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펠릭스 5세는 자신의 세습 영지(아라곤의 알폰소 5세 영지, 구 스위스 연방 영지, 그리고 일부 대학)를 제외하고는 거의 지지자를 찾지 못했다. 독일은 중립을 유지했고, 프랑스의 샤를 7세는 1438년 7월 13일 법으로 제정된 부르주 프라그마틱 칙령에 따라 바젤에서 제정된 많은 개혁의 혜택을 자신의 왕국에 확보하는 데만 힘썼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는 에우제니오 4세에게 충실했다. 마침내 144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는 에우제니오 4세와의 협상 후, 바젤 시장에게 더 이상 제국 도시에 공의회가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1437년 9월 18일, 교황 측이 그리스 측의 편의를 도모하여 페라라로 공의회를 이전한다고 발표하자 바젤 공의회 참가자들은 분열되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등 교황을 따라 페라라로 이동한 자들과 바젤에 남은 자들로 나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에우제니오 4세와 협상하여 바젤 공의회 대표들의 참석을 중단시켰다.
바젤에 남은 급진적인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권을 초월하는 공의회의 권위를 주장하며, 이에 반대한 교황을 일방적으로 파면 선언했다. 1439년 6월 25일, 그들은 독자적으로 사보이아 공작 아마데우스 8세를 교황으로 세웠다. 이가 펠릭스 5세로, 마지막 대립 교황이다 (이 행위는 공의회주의 역사에서 큰 실책으로 여겨진다).
3. 4. 로잔으로의 이동과 공의회 종결
1448년 바젤에서 쫓겨난 공의회 잔류파는 로잔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아마데우스 8세를 대립교황 펠릭스 5세로 선출했으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1449년 4월 7일에 퇴위했다.[3]
1447년 2월 23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사망하자, 로잔의 공의회 잔류파는 그의 후계자인 니콜라우스 5세를 지지했다. 이들은 니콜라우스 5세가 콘스탄츠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 확립된 공의회 우위설을 수용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1449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에 의해 공의회가 폐회되었고, 펠릭스 5세도 같은 해 4월 7일에 퇴위하면서 공의회는 종결되었다.
4. 주요 쟁점 및 결과
피렌체 공의회는 교황의 권위와 공의회 우위론 간의 갈등, 그리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신학적 이견을 주요 쟁점으로 다루었다.
공의회 초기,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따라 정기적인 공의회 소집을 승인했지만, 교황 에우제니우스 4세는 공의회의 권한을 축소하려 시도했다. 이는 공의회와 교황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결국 공의회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3]
동방 교회와의 통합 문제는 공의회의 중요한 의제였다. 필리오케 문제, 연옥 교리, 교황 수위권 등 여러 신학적 쟁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1439년 천상의 기쁨 (Laetentur Caeli)이라는 문서에서 일시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3] 그러나 이 합의는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에페소의 마르쿠스와 같은 인물은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러시아 정교회 또한 이 합의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3]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동방 교회는 통합을 거부하였고, 서방의 군사적 지원도 충분하지 않아 동서 교회의 재결합은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게미스토스 플레톤과 같은 학자들을 통해 그리스 고전 문학 연구에 기여했다.[13]
5. 영향
피렌체 공의회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여러 이유로 실패했다. 1439년 7월 6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한 8세 팔레올로고스는 "천상의 기쁨 (Laetentur Caeli)"이라는 문서를 통해 연합을 선포했다. 그러나 에페소의 마르쿠스 등 많은 동방 교회 주교들은 이를 거부했다.[3] 특히 러시아 정교회는 연합에 강하게 반대하며, 연합에 동조적인 성직자들을 축출하고 자치적인 교회로 독립했다.[3]
종교적인 연합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군사적 지원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453년)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3] 이는 동서 교회 간의 재결합 시도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바젤 공의회는 교황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바젤에 남은 공의회 참가자들은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더 높다고 주장하며, 1439년 6월 25일 펠릭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이는 교회 역사에서 마지막 대립교황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5. 1. 르네상스에 대한 영향
이 공의회 기간 전후로 이탈리아에는 그리스에서 지식인들이 망명하거나 그리스어 문헌이 전해져, 르네상스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은 당시 플라톤 철학 등 고대 그리스 문헌에 주목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그리스어를 읽을 수 없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어가 공용어였고, 당시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어 연구가 활발한 시기였다. 공의회에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많은 지식인이 참가했기 때문에, 피렌체에서는 그들을 환영하며 많은 지식을 배웠다. 비잔티움 제국의 지식인으로는 요한네스 베사리온,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등이 잘 알려져 있다.[13]-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1360년경? - 1452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행한 플라톤 강의는 피렌체의 플라톤 열기를 고조시켰고, 후에 코지모 데 메디치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플레톤이라는 이름 자체는 플라톤을 따서 개명한 것이다(성인 게미스토스는 플라톤과 동의어이다). 귀국 후에는 미스트라에서 교육·연구 활동을 하였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유골은 이탈리아로 옮겨져 다시 매장되었다.
- 요한네스 베사리온(1403년 - 1472년). 공의회 후에도 피렌체에 남아 고전 문헌을 수집하여 피렌체로 가져왔다.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추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451년 이후 공석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임명되었다. 다만, 이것은 명목상의 것이었다.
6. 평가
바젤 공의회는 교회 개혁과 동서 교회 통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지만, 결국 분열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서유럽의 종교,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 우위론과 교황권 간의 갈등은 이후 종교 개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으며, 동방 교회와의 교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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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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