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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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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젠트리는 서구 사회에서 귀족과 성직자를 기반으로 형성된 계급으로, 역사적으로 군사, 성직, 기사도, 그리고 "젠틀맨"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다. 유럽, 동아시아,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지역에서 젠트리의 형태와 역할이 나타났으며, 각 지역의 사회 구조와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었다. 젠트리는 군사적, 사회적 지위와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책임을 강조했으며, 문장(紋章)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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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
계층 정보
정의높은 사회 계층의 사람들, 특히 토지 소유 사회 계층
어원프랑스어: genterie (젠트리)
프랑스어: gentil (젠틸, 고귀한)
역사적 맥락
기원잉글랜드
역할토지 소유 및 관리
지방 정치 및 사회 주도
군사적 역할 수행
사회적 지위
특징귀족과 평민 사이의 중간 계층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력
사회적 영향력과 지위
교육 수준
관련된 용어
유사 계층로마의 패트리키
관련된 개념젠틀맨

2. 역사적 배경

젠트리는 귀족 계급인 남작 아래에 위치하며, 공식적으로 귀족은 아니었지만 귀족과 함께 영국의 상류 계급을 형성했다. 작위를 가진 귀족과 젠트리 사이에는 실질적인 특권 차이가 거의 없어 하나의 "지주 귀족층"으로 여겨졌으며, 치안 판사 등 지방 행정직을 무보수로 맡는 등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젠트리의 기원은 잉글랜드 왕국노르만 정복 이전 토착 유력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14세기15세기에는 유력 귀족의 가신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장미 전쟁으로 귀족 세력이 약화되자 튜더 왕조 아래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후 봉건제 사회의 변화 속에서 봉건 영주에서 지주로 전환되었고, 20세기 초까지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19세기까지 귀족과 젠트리는 함께 젠틀맨이라는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을 이루었다.

2. 1. 서구 사회

젠트리는 영국의 유산 계층을 총칭하는 말로, 기사보다는 아래 계급이지만 정식 귀족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작위를 가진 귀족과 젠트리 사이에는 칭호나 귀족원 의원 자격 외에 특권적인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둘 다 중세의 봉건영주를 기원으로 하기에 하나의 "지주 귀족층"으로 취급되었다. 젠트리는 치안 판사와 같은 지방 행정직을 무보수로 맡아 지방 행정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중앙 관직에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도 했다. 가문이나 소유지의 규모에 따라 바로넷, 기사, 에스콰이어(Esquire영어), 신사(Gentleman영어) 등으로 분류되었다.

젠트리의 기원은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대부분을 형성한 노르만인보다 앞선,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전부터 존재했던 토착 유력자 및 영주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족 세력이 강했던 14세기에서 15세기에는 귀족의 가신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장미 전쟁을 거치며 많은 귀족 가문이 단절되고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젠트리는 튜더 왕조 아래에서 중용되며 귀족의 빈자리를 메우는 주요 영주 세력으로 부상했다. 백년 전쟁이나 흑사병과 같은 사회적 격변기를 거치며 16세기에는 봉건 영주에서 지주로 전환하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이후에도 단순한 토지 소유자를 넘어 귀족과 함께 "지주 귀족층"으로서 사회적 존경과 영향력을 20세기 초까지 유지했다.

19세기까지 영국에서 작위를 가진 귀족 가문은 유럽 대륙 국가들에 비해 수가 적었으며, 귀족과 젠트리 간의 실질적인 특권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이들은 함께 젠틀맨이라는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을 형성했다. 사교계를 통한 통혼이 활발했으며, '스콰이어러키'(Squirearchy영어)라 불리는 견고한 지주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젠트리가 "젠틀맨"으로서 사회적 존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불로소득자로서 사치를 누리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명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전쟁 시 솔선수범하여 참전하고, 치안 판사 등 무급 관직을 통해 지역 질서 유지와 조세에 기여하며, 자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의 행위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프랑스어)로 불렸다. 이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신흥 부유층과 달리, 젠트리가 사익보다는 공익을 우선시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16세기 사회 변화와 함께 부상한 중간 계층(미들링 소트(middling sort영어))은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사회적 명예를 추구했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 수도원이 해산되고 그 영지가 매각되자(수도원 해산), 성공한 중간 계층은 이 토지를 매입하여 젠트리 계급으로 편입될 기회를 얻었다. 이처럼 사업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토지를 구입하여 젠트리가 되는 경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금융, 무역, 식민지 경영 등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세력 역시 이 경로를 통해 기존 체제에 통합되었다. 이는 영국 사회에 유동성을 부여하고 기존의 지주 지배 체제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젠트리는 본래 영지 경영에 집중하고 상업 활동에는 소극적이었으나, 16세기17세기 이후 사회 발전에 따라 점차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영국의 모직물 산업 발전은 젠트리층이 주도했으며, 이는 산업 혁명에 필요한 자본 축적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수출용 반제품 중심의 '구 모직물'에서 얇은 완제품인 '신 모직물'로 산업 구조가 변화했으며,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 독립 시기 남네덜란드에서 망명해 온 프로테스탄트들의 영향으로 사치품 국산화 등 새로운 산업 시도("실험 기업")가 젠트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는 젠트리 내부에서 양극화가 나타나 소규모 지주는 몰락하고 대지주가 더욱 성장했다. 이는 자유 무역과 산업 발전에 발맞춰 농업 경영 외에 자본주의적 경영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는지 여부에 따른 결과라는 해석과, 중앙 정계 진출 등 다른 요인이 작용했다는 반론이 공존한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 젠트리층이 기업가적 성향을 보이며 자본주의적 경영에 적응해 나갔다는 점이며, 이는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2. 1. 1. 유럽 대륙

발트 귀족의 특권적 지위는 186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 제국 내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 통치 시기부터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발트 지방의 러시아화에 대한 몇몇 산발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후 발트 독일인들은 발트 귀족들을 분리주의자로 비난하고, 러시아와의 언어적 및 행정적 통합을 옹호하는 러시아 민족주의 언론의 격렬한 공격에 직면했다.

사회적 분열은 발트 독일인들이 상류층을 형성하는 반면, '독일인이 아닌 자'라는 의미의 Undeutsch|운데우치de라고 불리는 다수의 원주민(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이 농민 계층을 구성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 1897년의 제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리보니아 현에는 98,573명의 독일인(총 인구의 7.58%), 쿠르란트 현에는 51,017명(7.57%), 에스토니아 현에는 16,037명(3.89%)이 거주했다.[13]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의 사회적, 국가적 해방으로 인한 사회 변화는 발트 독일 귀족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에게 자치를 부여했고, 이는 발트 지역에서 발트 독일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리투아니아 귀족은 주로 리투아니아인으로 구성되었지만, 폴란드와의 강한 유대 관계 때문에 문화적으로 폴란드화되었다.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그들은 리투아니아의 민족 의식을 유지했지만, 폴란드 슐라흐타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2. 2. 동아시아

(내용 없음)

2. 2. 1. 중국

'사민(四民)'은 고대 중국 사회 모델을 가리키는 용어로, 중국 및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교 사회에서 나타난 능력주의 기반의 사회 계급 제도였다.[1] 사민은 사(士, 선비), 농(農, 농부), 공(工, 장인), 상(商, 상인)을 합쳐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부른다.[1]

'''공자 사당의 첫 번째 입구 (칭하이)'''


사(士) 계급, 즉 젠트리는 국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지만, 중국에서는 주로 국가의 관료를 구성하는 유교 학자 계층을 의미했다.[1] 이 계급은 일부 세습적인 귀족적 성격과 함께, 공직 봉사 경험이나 후대의 과거 시험 합격을 통해 지위가 상승하는 능력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1]

순자와 같은 일부 문헌에서는 국가의 복지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는 유교적 관점에 따라 농부를 사(士) 계급보다 우선시하기도 했다.[1] 중국에서 농부의 생활 방식은 유교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군자의 모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했다.[1]

2. 2. 2. 일본

마쓰에 ''다이묘''(1850년대)


봉건 시대 일본에는 다이묘(大名)와 사무라이( 武士|부시일본어 )라는 두 주요 젠트리 계급이 있었다. 일본 문화에 영향을 준 유교 사상은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을 중시했기 때문에, 농부나 어부가 상인보다 더 높은 지위로 여겨졌다.

에도 시대에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 아래 ( 藩|한일본어 ) 제도가 시행되면서 모든 토지가 몰수되었다가 다이묘에게 봉토로 다시 주어졌다.

작은 영주 격인 사무라이들은 칼과 권리를 포기하고 농민으로 남거나, 아니면 성곽 도시로 이주하여 다이묘의 봉급을 받는 가신이 되어야 했다. 극소수의 사무라이만이 시골에 남아 郷士|고시일본어(지주 사무라이)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인구의 약 5%가 사무라이였다. 사무라이만이 제대로 된 성씨를 가질 수 있었으나,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모든 주민에게 의무화되었다(일본의 이름 참조).

메이지 천황은 1873년, 보다 현대적인 서구식 징병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사무라이가 유일한 무장 세력으로서 가지던 특권을 폐지했다. 사무라이는 시족( 士族|시조쿠일본어 )이라는 신분으로 바뀌었지만, 공공장소에서 칼을 차고 다닐 권리와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평민을 처벌할 수 있는 권리(기리스테고멘)는 결국 폐지되었다.

현대 일본의 모습을 구상하면서 메이지 정부 구성원들은 영국독일의 사례를 따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새로운 질서 아래에서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일본의 봉건제는 중국의 유교 도덕에 기반을 둔 반면, 유럽의 봉건제는 로마법에 기반을 두었다는 차이점이 있다.[27]

유교적 가르침을 따른 한국의 ''선비'' (덕망있는 학자)들의 집단, 18세기 그림

2. 2. 3. 한국

한국의 군주제와 양반으로 대표되는 토착 지배 계층은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존재했다. 한국의 귀족 관련 제도는 대체로 중국 귀족의 제도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유럽의 암흑 시대에 수도회가 문화 보존에 기여했던 것처럼, 불교 승려들은 한국의 문학 전통을 전파하고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신라 시대부터 고려 왕조 말기까지 한국의 기록된 역사와 유산을 문서화하는 데 힘썼다. 특히 한국의 불교 승려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개발하고 사용하여, 구텐베르크보다 약 500년 앞서 고대 불교 경전을 인쇄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 승려들은 기록 보관, 식량 저장 및 분배에도 관여했으며, 때로는 고려 왕실에 영향을 미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2. 3. 오스만 제국

1876년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열린 제1차 오스만 의회 개회식


오스만 제국중동 지역에서 젠트리는 아이안(유지)으로 불렸다.[28] 아이안은 도시 젠트리와 농촌 젠트리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도시 엘리트는 전통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투자르),[29] 울라마(성직자), 샤리프, 군인, 정부 관리 등으로 구성되었다.[30][31][32] 농촌 유력자에는 농촌 셰이크와 마을 또는 씨족의 무크타르가 포함되었다. 이들 농촌 유력자 대부분은 펠라흐(농민) 계급 출신이었으며, 제국의 탄지마트 개혁 이후 시골과 신흥 도시에서 하위 계층의 토지 소유 젠트리를 형성했다.[33]

팔레스타인에서는 농촌 유력자들이 엘리트의 다수를 차지했지만, 반드시 가장 부유한 계층은 아니었다.[34] 이들은 변화하는 법적, 행정적, 정치적 조건과 세계화된 경제 현실 속에서 가족 관계, 정략 결혼, 후원 네트워크 등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강화했다.[34] 전반적으로 아이안은 20세기 후반까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35]

3. 젠트리의 가치와 전통

젠트리 계층은 그들만의 독특한 가치관과 전통을 형성하고 유지해왔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지위를 넘어 사회적 역할과 행동 규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주요 가치와 전통으로는 우선 군사적 역할과 성직 진출을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젠트리는 전투 계층에서 유래했으며, 군 복무는 명예로운 경력으로 여겨졌다. 또한 교회는 신분 상승의 통로이자 귀족 자제들의 주요 진로 중 하나였다.

기사도 정신 역시 젠트리 가치관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명예를 중시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기독교적 미덕을 실천하는 것은 이상적인 기사의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이러한 기사도 정신은 후일 젠틀맨의 행동 규범으로 이어졌다.

'젠틀맨'은 좋은 가문 출신으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명예를 중시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의미했다. 이들은 사회적 체면을 지키고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는 모습을 통해 존경을 유지하고자 했다.

또한, 젠트리 계층에게는 noblesse oblige|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어, 즉 '고귀함에 따르는 의무'가 강조되었다. 이는 단순히 특권을 누리는 것을 넘어,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나타났다. 전쟁 시 솔선수범, 무보수 공직 수행, 자선 활동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사회적 기여는 젠트리가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한편, 동아시아유교 문화권에서는 '군자'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도덕적 수양, 예법 준수, 의 실천 등을 통해 사회의 모범이 되는 인물을 의미했다. 서양의 젠트리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사회 엘리트에게 요구되는 도덕성과 책임감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3. 1. 군사 및 성직

역사적으로 유럽귀족들은 군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럽 귀족 계층은 민족 대이동 시기와 중세 시대의 군사 지도자들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오랫동안 영국군은 교회와 더불어 귀족 가문의 젊은 아들들에게 이상적인 직업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관행은 현재 많이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영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애국심을 보여주는 실용적인 형태로 "신사" 계층이 군대에 참여하는 것이 때때로 유행하기도 했다.

헝가리 귀족, 1831년경


젠트리의 기본 개념은 전투원으로서의 본질적인 우월성을 포함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문장 수여를 통해 유지되었다.[36] 항상 칼을 차는 것은 '신사'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시였으며, 이 관습은 오늘날 궁정복과 함께 착용하는 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사는 봉건 영주에게 군사적 봉사를 제공한 중세 봉신이거나, 페이지 및 시종으로 훈련받은 후 군주에 의해 특권적인 군사적 지위로 승격된 중세의 신사-군인을 지칭할 수 있다. 공식적인 의전에서 '(Sir)'은 기사 또는 준남작에게 붙는 올바른 경칭이다.

한편, 젠트리는 중세 사회의 또 다른 주요 신분인 성직자와도 관련이 깊었다. 중세 교회는 능력 있는 인물이 신분적 제약을 넘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제1신분으로 분류된 성직자 집단은 사회 구조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했으며, 고위 성직자는 귀족 출신이거나 낮은 신분 출신이라도 성직 귀족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교회는 군대와 함께 귀족 자제들의 주요 진로 중 하나로 여겨졌다. 절대주의 시대 이전에는 교회가 입법부나 사회 엘리트 같은 다른 기관들과 함께 군주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12] 문장 소유가 신사 지위의 결정적 증거라는 주장이 19세기와 20세기 특정 문장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지만, 문장은 지위를 부여하기보다는 인정하는 것에 가까웠고, 문장 없이도 젠트리로서의 지위는 종종 인정받았다.

3. 2. 기사도

무장한 기사.


기사도중세 기사 작위 제도의 한 용어로, 일반적으로 기사적 미덕, 명예, 궁정 사랑의 이상과 연관된다.

기독교는 기사도의 미덕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기사들은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며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제약을 받았다. 교회는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에 더 관대해졌으며, 정당 방위론을 옹호했다. 11세기에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그리스도의 기사'(miles Christila)라는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37] 이러한 종교적 기사도의 개념은 십자군 전쟁 시대를 거치며 더욱 발전하였다.[37]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부유한 상인 계층 역시 기사도적 태도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는데, 이는 젠트리 계층의 문화적 기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37] 이러한 현상은 기사도의 대중화로 이어졌으며, '신사'의 행동 지침을 담은 예법서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을 촉진했다.[37]

중세 문학에서 나타나는 기사도의 의무는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 동포와 동료 기독교인에 대한 의무

# 에 대한 의무

# 여성에 대한 의무

이 세 영역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때로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기사도를 전사적, 종교적, 궁정 사랑의 요소로 나누어 보기도 하는데, 이 모든 범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명예였다. 명예는 기사도 정신의 핵심이자 기사의 행동을 이끄는 기본 원칙이었다.

3. 3. 젠틀맨

브레이스웨이트의 저서에서 젠틀맨과 관련된 자질을 보여주는 페이지


젠틀맨(gentleman)은 '신사'와 유사한 개념으로, 자신의 명예를 가장 중시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공공장소에서의 무분별한 향락을 진정한 신사의 태도가 아니라고 여겼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지킬 박사는 이러한 젠틀맨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는 내면적으로 향락을 추구하지만, 사회적 체면 때문에 이를 억누르고 대신 하이드라는 또 다른 자아를 통해 욕망을 분출한다. 이는 당시 젠틀맨들이 명예와 체면 때문에 개인적 자유를 제약받았음을 시사한다.

젠틀맨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gentilisla('족' 또는 '씨족'에 속함)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어 gentilhomme프랑스어, 스페인어 gentilhombrees, 이탈리아어 gentil uomoit 또는 gentiluomoit와 같은 어원을 공유한다. 본래 엄격한 의미에서는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를 뜻하며, 라틴어 generosusla와 유사한 의미를 지녔다.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이 용어가 귀족 계급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젠트리'(gentry)라는 용어는 고대 프랑스어 genterise프랑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의 noblesse프랑스어나 독일의 Adelde과 사회 계층적 의미를 공유하지만, 그들만큼 엄격한 기술적 요건(예: 귀족의 문장)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젠틀맨'은 토지 재산, 유산, 또는 다른 소득원을 통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노동할 필요가 없는 남성을 의미했다.

젠트리는 귀족 계급인 남작보다는 아래에 위치했지만, 정식 귀족은 아니면서도 귀족과 함께 상류 계급을 구성했다. 작위를 가진 귀족과 젠트리 사이에는 칭호나 귀족원 의원 자격 외에는 특권적인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하나의 지주 계층으로 간주되었다. 젠트리는 가문이나 소유지의 규모에 따라 바로넷(Baronet), 나이트(Knight), 에스콰이어(Esquire) 등으로 내부적으로 구분되었다.

역사적으로 젠트리는 중세 시대 최하위 영주 계층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대다수가 노르만 정복 시기 윌리엄 1세에 의해 봉해진 노르만인 기원인 반면, 젠트리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토착 유력자 및 영주들이었다. 14세기~15세기에는 귀족 세력이 강성하여 많은 젠트리가 유력 귀족의 가신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장미 전쟁을 거치며 많은 귀족 가문이 단절되고 세력이 약화되자, 젠트리 계급은 전쟁에서 승리한 튜더 왕조 하에서 중용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감소한 귀족의 공백을 메우며 영주 세력으로서 부상했다. 백년 전쟁, 흑사병봉건제 사회의 혼란기를 거쳐 16세기에는 봉건 영주에서 지주로 전환되었지만, 젠트리는 귀족과 함께 "지주 귀족층"으로 여겨지며 사회적 존엄과 영향력을 20세기 초까지 유지했다.

19세기까지 영국에서 작위를 가진 귀족 가문은 유럽 대륙 국가들에 비해 수가 적었고, 귀족과 젠트리 간 특권적 차이도 거의 없었다. 이 두 집단은 "지주 귀족층"으로서 하나의 전통적 엘리트 계층(젠틀맨)을 형성했다. 사교계를 통한 통혼이 활발했으며, 스콰이어러키(squirearchy)라 불리는 견고한 지주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영국 젠트리가 "젠틀맨"으로서 사회적 존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불로소득자로서 사치를 누리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명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시 솔선수범하여 참전하고, 치안 판사와 같은 지방 행정직을 무보수로 맡아 치안 유지와 조세 업무에 기여했으며, 자선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행위는 noblesse oblige프랑스어(고귀한 자의 의무)로 불렸다. 이를 통해 젠트리는 상업적 성공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벼락부자)과 달리, 사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명망 있는 존재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물론 무보수 관직은 실질적으로 불로소득이 없는 계층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이러한 젠트리 사회를 잘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영국 상류 계급은 작위를 가진 귀족과 그 외 유산 계급(젠트리)으로 나뉘었지만, 젠트리 내부에서도 역사적 혈통, 친족 관계, 재산 등에 따라 미묘한 격차가 존재했다. 일상적인 사교에서는 동등하게 대우받았으나, 결혼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이러한 격차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16세기 이후 사회 변화와 함께 상업적으로 성공한 중간 계층(미들링 소트)이 부상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부에 걸맞은 명예와 존경을 갈망하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은 이들에게 젠트리 계급으로 편입될 기회를 제공했다. 수도원 해산으로 가톨릭 수도원의 영지가 왕령지로 편입되었다가 재정 확보를 위해 매각되자, 성공한 중간 계층 인사들이 이 토지를 매입하여 지주가 됨으로써 젠트리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사업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토지를 매입하여 젠트리(상류 계급)가 되는 경로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입신출세의 수단이 금융, 교역, 해외 식민지 무역 및 경영 등으로 변화해도 이 방식은 유지되었다. 영국 사회는 이러한 방식으로 신흥 세력을 기존 체제에 대한 도전자가 아닌 체제 내 구성원(젠트리)으로 흡수함으로써, 경직된 계급 사회에 유동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기존의 지주 지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3. 4. 유교

동아시아에서도 서양의 젠트리와 유사하게 유교 원리에 기반한 신사 개념이 있었다. 유교에서는 ''군자''(君子)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문자 그대로 "지배자의 아들", "왕자", "귀족"을 뜻하는 ''군자''는 "올바른 사람", "모범적인 사람", "완전한 사람"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의미하며, 유교는 모든 사람이 이를 추구하도록 권장한다.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는 "완전한 사람"을 "성인, 학자, 신사의 자질을 결합한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세습적인 엘리트주의가 군자 개념과 연결되기도 했으며, 군자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지침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다음과 같다.

  • 도덕적으로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
  • 의례를 올바르게 수행해야 한다.
  • 마땅한 대상에게 충성을 보여야 한다.
  • (仁)을 함양해야 한다.


''군자''의 반대 개념은 ''소인''(小人)으로, 문자 그대로 "작은 사람" 또는 "소인배"를 의미한다. 이는 마음과 생각이 좁고 자기중심적이며, 탐욕스럽고 피상적이거나 물질주의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3. 5. 노블레스 오블리주

젠트리 계층 사이에서는 noblesse oblige|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어, 즉 "고귀함은 의무를 수반한다"는 관념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이는 "고귀한 혈통은 명예로운 행동을 강제하며, 특권은 책임을 수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단순히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지도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지는 것이 귀족이나 젠트리의 역할로 인식되었다.

귀족 계급인 남작 아래에 위치하며 공식적으로는 귀족이 아니었던 젠트리는 귀족과 함께 상류 계급을 구성했다. 귀족과 젠트리 사이에는 칭호나 귀족원 의원 자격 외에는 특권적인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하나의 "지주 귀족층"으로 간주되었다.

젠트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통해 "젠틀맨"으로서의 존경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불로소득자였지만, 단순히 사치를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명사로 행동하려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솔선하여 전장에 나가고, 치안 판사와 같은 지방 행정직을 보수 없이 맡아 지역의 치안 유지와 조세에 힘썼으며, 자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 등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젠트리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신흥 부유층(벼락부자)과는 달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명사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급 관직이 불로소득자 외의 사람들에게는 정치 참여의 길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젠트리는 이러한 명사로서의 역할을 통해 20세기 초까지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문장(紋章)

1570년에서 1588년경에 작성된 노섬벌랜드, 워크워스와 클라버링의 남작 가문인 드 유로 가문의 엘리자베스 시대 가계도의 예시.


문장(紋章)은 유럽에서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장학(紋章學)적 장치이다. 처음에는 전투에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갑옷 위에 또는 갑옷을 대신하여 착용하는 천으로 된 튜닉이었다.[38] 문장은 문장학적 규칙에 따라 개인, 가족 또는 조직을 위해 그려진다. 가족 문장은 원래 개인 문장에서 파생되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체 가족으로 확장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족 문장은 여전히 개인 문장이며 주로 가족 대표가 사용한다. 문장학에서 문장을 사용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문장 사용자이며, 그들의 가족은 문장을 사용할 권리가 있는 집안이 된다.

4. 1. 교회 문장

교회 문장학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발전시킨 문장학의 한 전통이다. 처음에는 문서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점차 사람과 교구를 식별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교회 문장학은 가톨릭교회 내에서 가장 공식화되어 있으며, 교황을 포함한 대부분의 주교들이 개인 문장을 가지고 있다. 성공회, 루터교, 동방 가톨릭 교회, 그리고 동방 기독교의 성직자들도 유사한 관습을 따른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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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백과사전 2022-06-21
[39] 문서 다만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상류층 중에서 가장 낮을 뿐이지 귀족 신분으로 나오며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하급 귀족과 비슷했다고 한다. 자본가 계층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이들은 하급 귀족이었다.
[40] 서적 Titles of honor http://archive.org/d[...] London : by William Stansby for Iohn Helme 1614
[41] 웹인용 "[역사와 현실]상류층 증가의 미덕" https://m.khan.co.kr[...]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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