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발트 연합공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발트 연합 공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이 점령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지역에 수립하려 했던 괴뢰 국가이다. 1918년 3월, 발트 독일인들은 쿠를란트 공국 복원을 선언했고, 같은 해 4월 연합 지방 의회는 독일 보호령을 요청했다. 1918년 9월, 독일은 발트 연합 공국을 명목상 주권 국가로 인정했으나, 1918년 11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독립을 선포하면서 발트 연합 공국 수립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발트 지역 독일군은 영국의 지휘를 받으며 해체되었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발트 3국의 역사 -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점령한 발트 3국과 벨라루스 지역에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1941년 설립되어 독일화 계획, 강제 노동,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1944년 해체되었다.
  • 발트 3국의 역사 - 발트의 길
    발트의 길은 1989년 8월 23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요구하며 약 2백만 명이 참여하여 세 나라 수도를 인간 띠로 연결한 평화 시위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인한 소련의 불법적인 점령을 규탄하고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사건이며, 관련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 기억 유산에 등재되었다.
  • 에스토니아의 역사 -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점령한 발트 3국과 벨라루스 지역에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1941년 설립되어 독일화 계획, 강제 노동,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1944년 해체되었다.
  • 에스토니아의 역사 - 뉘스타드 조약
    뉘스타드 조약은 대북방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 간에 체결되었으며, 스웨덴은 발트 해 패권을 잃고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양국 모두 국내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라트비아의 역사 - 압레네 지역
    압레네 지역은 한국 사회의 산업화, 민주화, 지방 분권과 관련된 지역으로 정부 주도 개발과 수출 주도형 성장을 통해 발전했으나 환경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 심화라는 문제점에 직면해 있으며 민주당 지지율이 높고 수출 중심 성장 전략에 의존하는 특징을 가진다.
  • 라트비아의 역사 - 쿠를란트
    쿠를란트는 라트비아 서부에 위치한 역사적인 지역으로 리가 만과 발트 해에 접하며, 13세기 초 정복 후 튜턴 기사단의 지배를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봉신국인 쿠를란트 공국으로 형성, 러시아 제국 편입, 라트비아의 일부, 소련을 거쳐 독립 라트비아의 일부가 되었고 현재는 쿠르제메 계획 지역에 해당하며 라트비아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발트 연합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발트 독일인의 깃발
발트 독일인의 깃발
발트의 문장
발트의 문장
연합 발트 공국의 제안된 영토
연합 발트 공국에 제안된 영토
일반 언어독일어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
러시아어
정부 형태군사 점령 하의 임시 정부 반(半)입헌군주제
공작 당선자아돌프 프리드리히
섭정아돌프 필라르 폰 필하우
시대제1차 세계 대전
현재 국가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러시아
역사
시작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시작일1918년 3월 3일
사건 1발트 독일 귀족에 의한 공국 선포
사건 날짜 11918년 4월 12일
사건 2독일의 승인
사건 날짜 21918년 9월 22일
사건 3섭정 위원회 설립
사건 날짜 31918년 11월 5일
사건 4독일 항복
사건 날짜 41918년 11월 11일
종료섭정 위원회 해산
종료일1918년 11월 28일
위치
수도리가
정치
지위독일 제국의 괴뢰 국가
통화
통화파피에르마르크

2.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1915년 가을, 독일 제국 육군은 러시아 제국령의 을 점령했다. 전선은 리가, 듀나부르크, 바라노비치에서 교착 상태에 있었다.[5][13]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1917년 4월 12일 (구력: 3월 30일)에 러시아 임시 정부는 과 북부로부터 에스토니아 자치 현을 창설했다. 10월 혁명 후, 선거로 선출된 에스토니아 지방 의회는 1917년 11월 28일에 스스로 주권을 선언했고, 독일군의 도착 전날인 1918년 2월 24일에는 에스토니아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선언했다. 서방 연합국은 1918년 5월, 에스토니아 공화국을 사실상 승인했다.[5][13]

라트비아 국민 의회가 1917년 11월 16일에 발표되었다. 1917년 11월 30일에 국민 의회는 민족의 분포 영역 내에 라트비아 자치구를 선언했고, 1918년 1월 15일, 라트비아 공화국으로서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다.[5][13]

러시아 혁명 후, 독일군은 쿠를란트에서 진군을 시작하여, 1918년 2월 말까지 구 러시아 제국의 리보니아 현을 군정 하에 두었고, 에스토니아 자치 현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3월 3일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볼셰비키 러시아는 의 포기를 수락했고, 1918년 8월 27일에 베를린에서 체결된 협정에서는 에스토니아 자치 현과 리보니아 현의 포기가 추가되었다.[5][13]

2. 1.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일군의 점령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군은 1915년 가을 러시아 제국의 쿠를란트 현을 점령했다.[5][13] 전선은 리가다우가프필스 – 바라노비치 선을 따라 안정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선출된 에스토니아 임시 의회는 1917년 11월 28일 에스토니아의 주권을 선포했다. 1918년 2월 24일, 독일군이 도착하기 하루 전, 임시 의회의 에스토니아 구국 위원회는 에스토니아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서방 연합국은 1918년 5월에 에스토니아 공화국을 사실상 승인했다.[5]

라트비아 임시 국민 의회는 1917년 7월 5일 러시아 임시 정부가 라트비아에 부여한 자치 정부 법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6] 라트비아 임시 국민 의회는 1917년 11월 16일 발카에서 처음 회의를 열었다. 11월 30일, 의회는 민족학적 경계 내에 자치 라트비아 주를 선언했으며, 1918년 1월 15일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라트비아 공화국을 선언했다.[5]

1918년 초, 독일군은 쿠를란트에서 진격을 시작했고, 1918년 2월 말까지 독일군은 독립을 선언한 에스토니아 영토와 러시아 리보니아 현을 관리했다. 1918년 3월 3일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쿠를란트 현의 상실을, 그리고 1918년 8월 27일 베를린에서 체결된 협정에서 에스토니아 자치 현과 리보니아 현의 상실을 인정했다.[5]

2. 2. 러시아 혁명과 발트 민족의 독립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군은 1915년 가을 러시아 제국의 쿠르란트 현을 점령했다. 전선은 리가다우가프필스 – 바라노비치 선을 따라 안정되었다.[5][13]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에 에스토니아 자치 현의 설립을 선포했는데, 이는 이전의 러시아 에스토니아 현과 리보니아 현의 북부 지역을 통합한 것이었다. 그 해 말 10월 혁명 이후, 선출된 에스토니아 임시 의회는 1917년 11월 28일 에스토니아의 주권을 선포했다. 1918년 2월 24일, 독일군이 도착하기 하루 전, 임시 의회의 에스토니아 구국 위원회는 에스토니아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서방 연합국은 1918년 5월에 에스토니아 공화국을 사실상 승인했다.[5][13]

라트비아 임시 국민 의회는 1917년 7월 5일 러시아 임시 정부가 라트비아에 부여한 자치 정부 법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6] 라트비아 임시 국민 의회는 1917년 11월 16일 발카에서 처음 회의를 열었다. 11월 30일, 의회는 민족학적 경계 내에 자치 라트비아 주를 선언했으며, 1918년 1월 15일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라트비아 공화국을 선언했다.[5][13]

1918년 초, 독일군은 쿠를란트에서 진격을 시작했고, 1918년 2월 말까지 독일군은 독립을 선언한 에스토니아 영토와 러시아 리보니아 현을 관리했다. 1918년 3월 3일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쿠르란트 현의 상실을, 그리고 1918년 8월 27일 베를린에서 체결된 협정에서 에스토니아 자치 현과 리보니아 현의 상실을 인정했다.[5][13]

3. 발트 연합 공국 수립 시도

독일 군정 아래에서, 발트 독일인들은 1917년 9월부터 1918년 3월 사이에 지방 의회를 결성하기 시작했다.[7][14] 1918년 3월 8일, 발트 독일인이 주도한 쿠를란트 지방 의회de는 쿠를란트 공국(Herzogtum Kurland)의 복원을 선언했으며, 이는 1918년 3월 15일 카이저 빌헬름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15]

1918년 4월 12일, 발트 독일인 35명, 에스토니아인 13명, 라트비아인 11명으로 구성된 연합 지방 의회]]/

메클렌부르크의 아돌프 프리드리히 공작, 1910


연합 발트 공국은 1918년 9월 22일에야 빌헬름 2세에 의해 명목상 주권 국가로 인정받았다.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구 러시아 제국의 모든 권한을 독일에 공식적으로 양도한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1918년 11월 5일, 새 국가를 위한 임시 섭정 위원회(Regentschaftsrat)가 남작 아돌프 필라 폰 필라우의 지도 아래 양측 지방 의회에서 공동으로 구성되었다.

새 국가는 리가에 수도를 두고, 일곱 개의 칸톤의 연합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7개의 칸톤은 쿠를란트de(Kurland, 쿠를란트), 리가, 레트갈렌de(Lettgallen, 라트갈레), 쥐들리플란트de(Südlivland, 남리보니아), 노르들리플란트de(Nordlivland, 북리보니아), 외젤de(Ösel, 사레마) 및 에스틀란트de (Estland, 에스토니아) 이다. 앞의 4개 칸톤은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해당하고, 마지막 3개 칸톤은 오늘날의 에스토니아에 해당한다.

연합 발트 공국의 초대 국가 원수는 메클렌부르크의 아돌프 프리드리히 공작이 될 예정이었지만, 주권 군주가 아닌 독일 카이저de의 종속자로서, 독일 제국의 다른 군주 또는 왕들과 유사한 지위였다. 그러나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결코 직위에 오르지 못했다. 4명의 발트 독일인, 3명의 에스토니아인, 3명의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임명된 섭정 위원회는 독일을 제외하고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채 1918년 11월 28일까지 기능을 수행했다.

1918년 10월, 독일 제국 총리 바덴 공자 막시밀리안은 발트 지방의 군정을 민간 당국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새로운 정책은 독일 외무부에서 발트 지방 군정에게 보낸 전보에 명시되었다: "제국의 정부는 발트 국가에 대한 우리의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있으며, 즉, 우선 발트 민족과 함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5][13]

3. 1. 발트 독일인 주도의 정치 운동

독일 군정 아래에서, 발트 독일인들은 1917년 9월부터 1918년 3월 사이에 지방 의회를 결성하기 시작했다.[7][14] 1918년 3월 8일, 발트 독일인이 주도한 쿠를란트 지방 의회de는 쿠를란트 공국(Herzogtum Kurland)의 복원을 선언했으며, 이는 1918년 3월 15일 카이저 빌헬름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15]

1918년 4월 12일, 발트 독일인 35명, 에스토니아인 13명, 라트비아인 11명으로 구성된 연합 지방 의회]]/

연합 발트 공국은 1918년 9월 22일에야 빌헬름 2세에 의해 명목상 주권 국가로 인정받았다.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구 러시아 제국의 모든 권한을 독일에 공식적으로 양도한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1918년 11월 5일, 새 국가를 위한 임시 섭정 위원회(Regentschaftsrat)가 남작 아돌프 필라 폰 필라우의 지도 아래 양측 지방 의회에서 공동으로 구성되었다.

새 국가는 리가에 수도를 두고, 일곱 개의 칸톤의 연합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7개의 칸톤은 쿠를란트de(Kurland, 쿠를란트), 리가, 레트갈렌de(Lettgallen, 라트갈레), 쥐들리플란트de(Südlivland, 남리보니아), 노르들리플란트de(Nordlivland, 북리보니아), 외젤de(Ösel, 사레마) 및 에스틀란트de (Estland, 에스토니아) 이다. 앞의 4개 칸톤은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해당하고, 마지막 3개 칸톤은 오늘날의 에스토니아에 해당한다.

연합 발트 공국의 초대 국가 원수는 메클렌부르크의 아돌프 프리드리히 공작이 될 예정이었지만, 주권 군주가 아닌 독일 카이저de의 종속자로서, 독일 제국의 다른 군주 또는 왕들과 유사한 지위였다. 그러나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결코 직위에 오르지 못했다. 4명의 발트 독일인, 3명의 에스토니아인, 3명의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임명된 섭정 위원회는 독일을 제외하고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채 1918년 11월 28일까지 기능을 수행했다.

1918년 10월, 독일 제국 총리 바덴 공자 막시밀리안은 발트 지방의 군정을 민간 당국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새로운 정책은 독일 외무부에서 발트 지방 군정에게 보낸 전보에 명시되었다: "제국의 정부는 발트 국가에 대한 우리의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있으며, 즉, 우선 발트 민족과 함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5][13]

3. 2. 연합 지방 의회의 결의안

1918년 4월 12일, 발트 독일인 35명, 에스토니아인 13명, 라트비아인 11명으로 구성된 연합 지방 의회]]/독일 황제에게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7][14]

독일 군정 아래에서 1917년 9월부터 1918년 3월 사이에 발트 독일인들은 지방 의회를 결성하기 시작했다.[14] 1918년 3월 8일, 발트 독일인이 주도한 쿠를란트 지방 의회de는 쿠를란트 공국(Herzogtum Kurlandde)의 복원을 선언했으며, 이는 1918년 3월 15일 카이저 빌헬름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15]

1918년 10월, 독일 제국 총리 바덴 공자 막시밀리안은 발트 지방의 군정을 민간 당국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새로운 정책은 독일 외무부에서 발트 지방 군정에게 보낸 전보에 명시되었다: "제국의 정부는 발트 국가에 대한 우리의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있으며, 즉, 우선 발트 민족과 함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5][13]

연합 발트 공국은 1918년 9월 22일에야 빌헬름 2세에 의해 명목상 주권 국가로 인정받았다.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구 러시아 제국의 모든 권한을 독일에 공식적으로 양도한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3. 3. 쿠를란트 공국과 발트국의 독립 선언



1917년 9월부터 1918년 3월 사이에 발트 독일인들은 독일 군정 아래에서 지방 의회를 결성했다. 1918년 3월 8일, 발트 독일인이 주도한 쿠를란트 지방 의회de는 쿠를란트 공국(Herzogtum Kurlandde)의 복원을 선언했으며, 이는 1918년 3월 15일 카이저 빌헬름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14][15]

1918년 4월 12일, 발트 독일인 35명, 에스토니아인 13명, 라트비아인 11명으로 구성된 지방 의회(연합 지방 의회/발트 지방 의회de)는 발트 지방을 군주국으로 인정하고 독일 보호령으로 만들 것을 독일 황제에게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7]

1918년 9월 22일, 빌헬름 2세는 소비에트 러시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구 러시아 제국의 모든 권한을 독일에 공식적으로 양도한 지 반년 만에 발트 지역을 명목상 주권 국가로 승인하였다. 1918년 11월 5일, 남작 아돌프 필라 폰 필라우의 지도 아래 양측 지방 의회에서 공동으로 임시 섭정 위원회(Regentschaftsratde)가 구성되었다.

리가에 수도를 둔 새 국가는 7개의 칸톤 연합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4명의 발트 독일인, 3명의 에스토니아인, 3명의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는 1918년 11월 28일까지 독일을 제외한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기능을 수행했다.

1918년 10월, 독일 제국 총리 바덴 공자 막시밀리안은 발트 지방의 군정을 민간 당국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 외무부는 "제국의 정부는 발트 국가에 대한 우리의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있으며, 즉, 우선 발트 민족과 함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발트 지방 군정에게 전보로 알렸다.[5][13]

3. 4. 섭정 위원회 구성과 국가 형태 구상

1918년 11월 5일, 아돌프 필라 폰 필라우 남작의 주도로 4명의 발트 독일인, 3명의 에스토니아인, 3명의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임시 섭정 위원회(Regentschaftsratde)가 구성되었다.[7][14] 이 위원회는 독일 제국을 제외한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채 1918년 11월 28일까지 기능했다.[15]

섭정 위원회는 리가를 수도로 하고, 7개의 칸톤으로 구성된 연합 국가를 구상했다.[13] 7개의 칸톤은 쿠를란트de(쿠를란트), 리가, 레트갈렌de(라트갈레), 쥐들리플란트de(남리보니아), 노르들리플란트de(북리보니아), 외젤de(사레마) 및 에스틀란트de (에스토니아)였다. 이 중 쿠를란트, 리가, 레트갈렌, 쥐들리플란트는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해당하고, 노르들리플란트, 외젤, 에스틀란트는 오늘날의 에스토니아에 해당한다.[13]

“Poland & The New Baltic States”영어 (폴란드와 새로운 발트 국가) 지도. 1920년 영국 세계 지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리가 평화 조약 이후 국경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 나타나 있다. 발트 연합 공국의 구상은 현재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걸쳐 있는 주황색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세의 리보니아 동맹인 테라 마리아나 지역에 건국하려 했다.


메클렌부르크의 아돌프 프리드리히 공작이 국가 원수로 추대되었으나, 그는 독일 카이저de의 종속자로서 다른 군주들과 유사한 지위였다.[5] 그러나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직위에 오르지 못했다.

4.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독립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포했다.[8] 아우구스트 비닝은 마지막 독일 정부 대표로서 11월 19일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 대표와 에스토니아 영토에서 권력을 이양하는 협정에 서명했다.[8] 1918년 12월 7일, 독일은 칼리스 울마니스가 이끄는 라트비아 국민 정부에 공식적으로 권한을 이양했다.[5]

그러나 이 지역에 있던 군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군정부의 뤼디거 폰 데어 골츠(Rüdiger von der Goltzde) 장군은 독일 본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점령을 계속했다. 발트 육군(Baltische Landeswehr)은 1919년에 주로 1918년 통합 발트 공국을 지지했던 지역 리보니아 및 쿠로니아 귀족 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되었다.[8] 발트 육군de 사령관으로 취임한 알프레드 플레처 소령은 지역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라트비아 출신 병력을 해고하고 발트 독일인과 독일 제국]]/독일 제국de(Reichsdeutsche) 군대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 장교들이 대부분의 지휘직을 맡았다. 저서 『나치즘의 선봉: 1918–1923년 독일 전후 자유군단 운동』에서 저자 로버트 G. L. 웨이트는 "1919년 2월 중순까지 라트비아인은 자국 군대의 5분의 1 미만을 차지했다"고 적고 있다.[8]

군사적 압력으로 영국군이 퇴각하자, 러시아 백군의 군 부대와 자유군단/발트해 자유군단de(Freikorps)은 이동하여 1919년 5월 22일

4. 1. 독일의 항복과 권력 이양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포했다.[13] 아우구스트 비닝은 마지막 독일 정부 대표로서 11월 19일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 대표와 에스토니아 영토에서 권력을 이양하는 협정에 서명했다.[8] 1918년 12월 7일 독일은 칼리스 울마니스가 이끄는 라트비아 국민 정부에 공식적으로 권한을 이양했다.[5]

그러나 이 지역에 있던 군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군정부의 뤼디거 폰 데어 골츠 장군은 독일 본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점령을 계속했다. 발트 육군(Baltische Landeswehr)은 1919년에 주로 1918년 통합 발트 공국을 지지했던 지역 리보니아 및 쿠로니아 귀족 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발트 육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알프레드 플레처 소령은 지역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라트비아 출신 병력을 해고하고 발트 독일인과 독일 제국 군대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 장교들이 대부분의 지휘직을 맡았다. 저서 『나치즘의 선봉: 1918–1923년 독일 전후 자유군단 운동』에서 저자 로버트 G. L. 웨이트는 "1919년 2월 중순까지 라트비아인은 자국 군대의 5분의 1 미만을 차지했다"고 적고 있다.[13]

영국은 군사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후 물러섰고, 백 러시아 부대와 자유군단de(Freikorps)은 이동하여 1919년 5월 22일 리가를 점령했다. 리가 점령 후, 자유군단de옐가바(미타우)에서 300명, 투쿰스(툭쿰)에서 200명, 다우가브그리바(뒨아뮌데)에서 125명, 리가에서 3,000명 이상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1919년 6월, 리가 점령에 참여한 폰 데어 골츠 장군은 연합군이 예상했던 대로 동쪽의 적군을 상대로 진격하는 대신, 북쪽의 에스토니아군을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1919년 6월 19일, 철갑 사단과 국방군de 부대는 체시스(벤덴) 주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고, 발트 육군de페트로그라드로의 진격을 준비하며 에스토니아 해안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발트 육군de은 1919년 6월 19~23일 체시스 전투에서 에르네스트 푀데르가 이끄는 제3 에스토니아 사단과 북 라트비아 여단에 의해 패배했다.[13]

1919년 6월 23일 아침, 독일군은 리가 방향으로 전면적인 철수를 시작했다. 연합군은 다시 독일군에게 라트비아에서 남은 병력을 철수하라고 주장했고, 에스토니아군이 리가로 진격하려 하자 에스토니아군과 자유군단de 사이에 휴전을 강요하기 위해 개입했다. 한편, 허버트 드 라 포어 고프 경(Sir Hubert de la Poer Gough) 장군 휘하의 영국군으로 구성된 연합군 파견대가 독일군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고 발트 국가를 위한 자국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발트해에 도착했다.[13]

4. 2. 발트 육군의 형성과 활동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포했다.[13] 아우구스트 비닝은 마지막 독일 정부 대표로서 11월 19일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 대표와 에스토니아 영토에서 권력을 이양하는 협정에 서명했고,[8] 라트비아에서 독일군은 1918년 12월 7일 칼리스 울마니스가 이끄는 라트비아 국민 정부에 공식적으로 권한을 이양했다.[5]

발트 육군(Baltische Landeswehr)은 1919년에 주로 1918년 통합 발트 공국을 지지했던 지역 리보니아 및 쿠로니아 귀족 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되었다.[13] 발트 육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알프레드 플레처 소령은 지역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라트비아 출신 병력을 해고하고 발트 독일인과 독일 제국de(Reichsdeutsche) 군대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 장교들이 대부분의 지휘직을 맡았다. 로버트 G. L. 웨이트는 저서 『나치즘의 선봉: 1918–1923년 독일 전후 자유군단 운동』에서 "1919년 2월 중순까지 라트비아인은 자국 군대의 5분의 1 미만을 차지했다"고 적고 있다.[13]

영국은 군사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후 물러섰고, 백 러시아 부대와 자유군단de(Freikorps)은 이동하여 1919년 5월 22일 리가를 점령했다.[13] 리가 점령 후, 자유군단de은 미타우(옐가바)에서 300명, 툭쿰(투쿰스)에서 200명, 뒨아뮌데(다우가브그리바)에서 125명, 리가에서 3,000명 이상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13]

1919년 6월, 리가 점령에 참여한 폰 데어 골츠 장군은 연합군이 예상했던 대로 동쪽의 적군을 상대로 진격하는 대신, 북쪽의 에스토니아군을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1919년 6월 19일, 철갑 사단과 국방군de 부대는 벤덴(체시스) 주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고, 발트 육군de은 페트로그라드로의 진격을 준비하며 에스토니아 해안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발트 육군de은 1919년 6월 19~23일 체시스 전투에서 에르네스트 푀데르가 이끄는 제3 에스토니아 사단과 북 라트비아 여단에 의해 패배했다.[13]

1919년 6월 23일 아침, 독일군은 리가 방향으로 전면적인 철수를 시작했다. 연합군은 다시 독일군에게 라트비아에서 남은 병력을 철수하라고 주장했고, 에스토니아군이 리가로 진격하려 하자 에스토니아군과 자유군단de 사이에 휴전을 강요하기 위해 개입했다. 한편, 허버트 드 라 포어 고프 경(Sir Hubert de la Poer Gough) 장군 휘하의 영국군으로 구성된 연합군 파견대가 독일군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고 발트 국가를 위한 자국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발트해에 도착했다.[13]

4. 3. 리가 점령과 학살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포했다.[8] 아우구스트 비닝은 마지막 독일 정부 대표로서 11월 19일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 대표와 에스토니아 영토에서 권력을 이양하는 협정에 서명했다.[8] 1918년 12월 7일, 독일군은 칼리스 울마니스가 이끄는 라트비아 국민 정부에 공식적으로 권한을 이양했다.[5]

그러나 이 지역에 있던 군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군정부의 뤼디거 폰 데어 골츠(Rüdiger von der Goltzde) 장군은 독일 본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점령을 계속했다. 발트 육군(Baltische Landeswehr)은 1919년에 주로 1918년 통합 발트 공국을 지지했던 지역 리보니아 및 쿠로니아 귀족 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되었다.[8] 발트 육군de 사령관으로 취임한 알프레드 플레처 소령은 지역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라트비아 출신 병력을 해고하고 발트 독일인과 독일 제국]]/독일 제국de(Reichsdeutsche) 군대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 장교들이 대부분의 지휘직을 맡았다. 저서 『나치즘의 선봉: 1918–1923년 독일 전후 자유군단 운동』에서 저자 로버트 G. L. 웨이트는 "1919년 2월 중순까지 라트비아인은 자국 군대의 5분의 1 미만을 차지했다"고 적고 있다.[8]

군사적 압력으로 영국군이 퇴각하자, 러시아 백군의 군 부대와 자유군단/발트해 자유군단de(Freikorps)은 이동하여 1919년 5월 22일

4. 4. 체시스 전투와 독일군의 패배

1919년 6월, 리가 점령에 참여한 폰 데어 골츠 장군은 연합군이 예상했던 동쪽의 적군을 향한 진격 대신, 북쪽의 에스토니아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8] 6월 19일, 철갑 사단과 발트 육군/발트 육군de 부대는 벤덴 주변 지역 점령을 위한 공격을 시작했고,[8] 발트 육군de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 위해 에스토니아 해안을 따라 계속 진격했다.[8] 그러나 발트 육군de은 1919년 6월 19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체시스 전투에서 에르네스트 푀데르가 이끄는 제3 에스토니아 사단과 북 라트비아 여단에 패배했다.[8]

6월 23일 아침, 독일군은 리가 방향으로 전면 철수를 시작했다.[8]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라트비아에서 남은 병력을 철수하라고 다시 요구했고, 에스토니아군이 리가로 진격하려 하자 에스토니아군과 자유군단/자유군단de 사이에 휴전을 강요하기 위해 개입했다.[8] 한편, 허버트 드 라 포어 고프 경 장군 휘하의 영국군으로 구성된 연합군 파견대가 독일군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고 발트 국가를 위한 자국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발트해에 도착했다.[8]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골츠 대장의 발트 방위군과 독일 의용군이 제3 에스토니아 사단과 북라트비아 여단에 의해 패배한 결과, 발트 연합 공국의 구상은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8]

4. 5. 영국의 개입과 발트 육군 해체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포했다.[5] 아우구스트 비닝은 마지막 독일 정부 대표로서 11월 19일 에스토니아 영토에서 권력을 이양하는 협정에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 대표와 서명했다.[8] 1919년에 주로 1918년 통합 발트 공국을 지지했던 지역 리보니아 및 쿠로니아 귀족 지도자들에 의해 발트 육군de(Baltische Landeswehr)이 결성되었다.[5]

알프레드 플레처 소령은 발트 육군de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라트비아 출신 병력을 해고하고 발트 독일인과 독일 제국]]/독일 제국de(Reichsdeutsche) 군대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군사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후 물러섰고, 백 러시아 부대와 자유군단/발트해 자유군단de(Freikorps)은 1919년 5월 22일

5. 결과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1919년 라트비아에서 제3 에스토니아 사단과 북 라트비아 여단이 뤼디거 폰 데어 골츠 장군의 Baltische Landeswehrde와 독일 Freikorpsde 부대를 격파하면서 발트 연합공국 수립 시도는 무산되었다. 라트비아가 통제권을 회복하고 안정되자, 발트 지역의 독일군은 영국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19년 7월 중순, Baltische Landeswehrde의 지휘권을 인수한 해롤드 알렉산더 중령은 발트 독일인들을 점차 해고했다. 이후 에스토니아라트비아는 독립하여 공화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6. 한국과 발트 3국

6. 1. 외교 관계

6. 2. 경제 협력

6. 3. 문화 교류

참조

[1] 서적 The Baltic States: The Years of Independence https://books.google[...]
[2] 서적 Baltic Essays https://books.google[...] The Latvian Legation
[3] 서적 Where Nation-States Come From: Institutional Change in the Age of Nationalism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4] 간행물 The Baltic States https://books.google[...]
[5] 서적 The Baltic States and Weimar Ostpolitik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05-02
[6] 서적 Latvia in 1939–1942: Background, Bolshevik and Nazi Occupation, Hopes for Future https://books.google[...] Press Bureau of the Latvian Legation, 1942 2015-06-30
[7] 서적 Griff nach der Weltmacht https://books.google[...]
[8] 웹사이트 World War I http://www.estonica.[...]
[9] 서적 The Baltic States: The Years of Independence By Georg von Rauch https://books.google[...]
[10] 서적 Baltic Essays https://books.google[...] The Latvian Legation
[11] 서적 Where Nation-states Come from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2] 서적 The Baltic Stat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3] 서적 The Baltic States and Weimar Ostpolitik By John Hiden https://books.google[...]
[14] 서적 Griff nach der Weltmacht By Fritz Fischer https://books.google[...]
[15] 서적 The German Army in World War I By Nigel Thomas https://books.googl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