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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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극렴은 1325년 고려 시대에 태어나 왜구 격퇴, 위화도 회군 참여 등 굵직한 사건에 관여한 인물이다. 공민왕 때 관직을 시작하여, 진주 도원수, 경상도도순문사 등을 역임하며 왜구를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이성계 휘하에서 요동 출병에 참여하여 위화도 회군을 지휘했으며, 고려 말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헌, 개국공신 1등으로 성산백에 봉해졌다. 문하좌시중을 지내다 병으로 사직 후 사망했으며, 정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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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는 고려 말 왜구 격퇴에 공을 세운 무신으로 위화도 회군에 가담했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다 생을 마감했고, 그의 공은 조선 태조 때 인정받아 회군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배극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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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배극렴 |
한자 표기 | 裵克廉 |
출생일 | 1325년 |
사망일 | 1392년 12월 10일 (68세) |
출생지 | 고려 경상도 경산부 성산현 성주읍 대황리 |
사망지 | 조선 서해도 송도 |
자(字) | 양가(量可) |
호(號) | 주금당(晝錦堂), 필암(筆菴) |
시호(諡號) | 정절(貞節) |
종교 | 불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순흥 안씨 부인 |
본관 | 경산(京山) |
거주지 | 고려 개경 |
자녀 | 1녀 |
부모 | 배현보(부), 성주 이씨 부인(모) |
형제 | 배극귀(형) |
친인척 | 배신경(할아버지) |
직업 및 경력 | |
직업 | 무관 |
직책 | 무관 |
경력 | 합포 전투 |
복무 기간 | 1376년 ~ 1392년 음력 11월 24일 |
2. 생애
1325년 (충숙왕 12년) 고려 경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에서 위위시소윤 배현보(裵玄甫)와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때 경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으며, 성주 관하리에 살 때는 나무를 심고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농사를 짓게 했다. 백성들은 그의 공을 기려 그곳의 하천을 배천(裵川:白川), 마을 이름을 배리(裵里)라 불렀다.
(고려 관직 생활과 조선 건국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2. 1. 고려에서의 관직 생활
1325년 (충숙왕 12년) 경상도 성주군 성주읍에서 태어났다. 1353년 (공민왕 때 문음으로 천거되어 진주, 상주의 목사, 계림, 화령의 부윤, 합포진첨사 등을 역임했다. 1376년 (우왕 2년) 진주 도원수가 되어, 진주에 쳐들어 온 왜구를 반성현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듬해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하여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 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하여 완성하니,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1]1378년 경상도 원수(慶尙道 元帥)로서 욕지도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삼도원수(三道元帥)로 함양부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또다시 왜구를 격파하였다. 같은 해 겨울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하여 사주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 울주전투와 청도전투·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한 뒤,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1380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 후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왕으로부터 말안장, 의복 및 술을 하사받았다.[1]
1388년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의 휘하에서 위화도 회군을 결행하여 최영 등의 구세력을 추방하였다. 1389년 (창왕 1년) 7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 (공양왕 1년)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 해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독하였다.[1]
이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한몫을 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쌓는 총책을 맡고, 1392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시중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파하고 안렴사(按廉使)를 두고, 절제사(節制使), 경력(經歷), 도사(都事) 등을 파하고 장무록사(掌務錄事)를 두는 등 지방의 관제(官制)를 혁신하는 상소를 올려 이를 혁파(革罷)하고, 이어서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이 되었다.[1]

2. 2. 조선 건국
조준, 정도전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2]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으로 1천 호(千戶)를 받았다.문하좌시중에 올라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정승이 되었다. 12월 8일(음력 11월 24일)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이틀 후 사망하니, 조정에서는 크게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철조(撤朝)],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어 증평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에 예장하였다. 정절(貞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슬하에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영평군(永平君) 반자건(潘自建)에게 시집갔다.
3. 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배유(裵裕) |
조부 | 배신경(裵伸勁) |
아버지 | 배현보(裵玄甫) - 위위시 소윤 |
어머니 | 성주 이씨(星州 李氏) - 이천년의 딸 |
형 | 배극귀(裵克貴) - 진사 |
4. 배극렴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실록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6일 계묘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
실록
조선왕조실록, 태조강헌대왕실록/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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