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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비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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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프 비어만은 독일의 시인이자 작곡가로, 1936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었으며, 동독에서 활동하다가 비판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인해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서독으로 이주하여 음악 활동을 이어갔으며, 통일 이후에도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그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을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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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비어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올리버 마크 - 볼프 비어만, 함부르크 2007
올리버 마크가 촬영한 볼프 비어만, 함부르크 2007
본명카를 볼프 비어만
별칭해당사항 없음
출생일1936년 11월 15일
출생지함부르크, 나치 독일
사망일해당사항 없음
활동 기간1960년 – 현재
음악 스타일
장르포크 음악, 정치적 발라드
악기해당사항 없음
직업싱어송라이터, 시인, 반체제 인사
레이블Broadside Records
관련 활동해당사항 없음
웹사이트볼프 비어만 공식 웹사이트

2. 어린 시절

볼프 비어만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일 공산당 당원이었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볼프가 갓난아기였을 때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35] 1953년, 비어만은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어머니를 서독에 남겨둔 채 동독으로 이주하여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57년부터 2년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설립한 극단 베를리너 안상블에서 연출 조수로 일했다. 이후 대학에서 수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1960년경부터 시 창작을 시작했다.

동독 이주 직후, 비어만은 지역 청년 조직에서 기독교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집회에 참여하여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을 표명하면서 사회주의 정권에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시인이자 작곡가로서 사회 비판적인 활동을 펼쳤으나, 동독 정부의 간섭을 여러 차례 받았다. 비밀경찰 슈타지의 미행과 도청이 계속되었고, 자동차 브레이크에 장난을 당해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30]

2. 1. 출생과 가족 배경

볼프 비어만은 193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아버지 다고베르트 비어만과 어머니 엠마 비어만의 외아들로 태어났다.[35] 아버지 다고베르트는 함부르크 부두 노동자였으며, 어머니 엠마(née 디트리히)는 독일 공산당원이었다.[1]

그의 부모는 모두 독일 공산당원이었다. 유대인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석 달 전 나치에게 체포되었다.[35] 나치 선박을 파괴한 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았고,[1] 1942년 나치가 유대인 정치범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어 1943년 2월 22일 살해당했다.[2][3][4][5] 죄목은 함부르크 조선소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지하 공산주의 신문을 제작, 유포하고 태업을 주도했다는 것이었다.[35]

어머니는 아들이 공산주의자로서 인류를 구원하는데 일조하는 인물이 되길 원했다.[35] 비어만은 함부르크의 하인리히-헤르츠-김나지움(고등학교)에 다닌 몇 안 되는 노동자 자녀 중 한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자유 독일 청년(Freie Deutsche Jugend, FDJ)의 일원이 되었고, 1950년 FDJ의 첫 전국 회의에서 독일 연방 공화국을 대표했다.[6]

2. 2. 동독으로의 이주

17세에 학교를 졸업한 비어만은 자신의 공산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1955년까지 슈베린 근처 기숙학교에 살았고, 그 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7]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베를린 앙상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1963년 논문을 완성할 때까지 볼프강 하이제(Wolfgang Heise) 밑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논문 심사를 성공적으로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명예 박사 학위와 함께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8]

3. 동독에서의 활동

비어만은 동독으로 이주한 후, 훔볼트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다 브레히트가 창설한 베를린 앙상블에서 연출 조수로 일하며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았다. 1961년에는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을 창설하고 <<베를린 결혼식>>을 시연했지만, 당의 검열로 공연이 금지되었다. 1963년에는 사회주의통일당에 의해 비우호적 인물로 분류되어 공산당 당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1965년에는 에리히 호네커에 의해 가택연금 및 공연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비어만은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68년에는 두 번째 시집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혀로>>와 미니 앨범 <네 편의 신곡>을, 1972년에는 세 번째 시집 <<나의 동지들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1973년에는 앨범 <더 나은 시절을 기다리지 말라>로 독일음반상을 받았고, 1974년에는 쾰른 시가 수여하는 자크 오펜바흐상을 받았지만 동독 당국의 협박으로 시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36]

1964년 서독에서 첫 공연을 한 이후, 1965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볼프강 노이스의 카바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LP를 발매했고, 같은 해 시집 "드라하르페"를 출판했다. 그러나 1965년 12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계급 반역자"로 규탄하고 공연 및 출판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슈타지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11] 비어만은 1968년 앨범 "차우세슈트라세 131"을 발표하는 등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안 바에즈 등 많은 예술가들이 1973년 세계청년학생축전 기간 중 비어만의 집을 방문하여 연대 의사를 표현했고, 카르스텐 포이트는 슈타지의 억압에 항의했다. 비어만은 동독에서 금지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갔고, 그의 작품은 녹음 테이프와 종이 조각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3. 1. 학업 및 초기 예술 활동

1953년, 비어만은 자신의 공산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7] 가데부슈(Gadebusch)의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 대학입학자격시험(Abitur)에 합격하고 동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정치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7] 1957년 학업을 중단하고 2년간 브레히트가 창설한 베를린 앙상블의 연출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연극을 학습하며 순수예술보다는 참여예술을 중시하는 브레히트의 계몽주의적 문학관을 습득한다. 1959년 훔볼트 대학에 복학하고 전공을 철학과 수학으로 바꾼다.

1960년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만났고, 아이슬러는 젊은 예술가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비어만은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슬러는 동독 문화계 엘리트들과의 영향력을 이용해 작곡가의 경력을 지원했지만, 1962년 그의 사망으로 비어만은 멘토이자 후원자를 잃었다.

1961년 프렌츨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에 위치한 양계장을 극장으로 개조하여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Berliner Arbeiter- und Studententheater)'을 창설한다. 1962년 처녀작인 <<베를린 결혼식(Berliner Brautgang)>>이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 창단기념연극으로 시연되지만 끝내 공연되지 못하고 당의 검열에 의해 공연금지 조치를 당한다.[8] 12월 동독예술원 시예술분과위원회의 주관으로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서정시의 밤'에 출연해 동독 문학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하지만 이 자리가 동독에서 공식적으로 출연한 마지막 무대가 된다.

1963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에 의해 비우호적 인물로 분류되고 공산당 당원 자격을 박탈당한다.[9] 벤데 이후, 슈타지 기록 보관소 연방 위원의 비어만 파일에서 얻은 문서는 심사관들이 그가 자극제를 상습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하여 그의 신청을 거절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0] 1965년 9월 첫 시집 <<철삿줄 하프(Die Drahtharfe)>>가 간행되었다. 이 시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시집 중 하나이다. 에리히 호네커는 비어만의 첫 시집을 "서투르게 위장된 속물적·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질서와 당조직 체계를 격렬하게 모욕"한 부적절한 사례로 지목하고 비어만을 가택연금시키고 공연금지 처분을 내린다.

2008년 비어만

3. 2.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

1961년 프렌츨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에 있는 양계장을 극장으로 개조하여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Berliner Arbeiter- und Studententheater)'을 창설한다.[8] 1962년 처녀작인 <<베를린 결혼식(Berliner Brautgang)>>이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 창단기념 연극으로 시연되지만 끝내 공연되지 못하고 당의 검열에 의해 공연금지 조치를 당한다.[8] 그해 12월 동독예술원 시예술분과위원회의 주관으로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서정시의 밤'에 출연해 동독 문학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하지만, 이 자리가 동독에서 공식적으로 출연한 마지막 무대가 된다.

3. 3. 작품 활동과 탄압

1961년 비어만은 프렌츨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에 있는 양계장을 극장으로 개조하여 '베를린 노동자 및 대학생극단(Berliner Arbeiter- und Studententheater)'을 창설한다. 1962년 처녀작인 <<베를린 결혼식(Berliner Brautgang)>>을 창단기념 연극으로 시연했지만, 당의 검열로 인해 공연되지 못했다.[8] 같은 해 12월, 동독예술원 시예술분과위원회의 주관으로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서정시의 밤'에 출연하여 동독 문학계에 공식 데뷔했지만, 이것이 동독에서 그의 마지막 공식 출연이 된다.

1963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는 비어만을 비우호적 인물로 분류하고 공산당 당원 자격을 박탈한다.[9] 1965년 9월, 그의 첫 시집 <<철삿줄 하프(Die Drahtharfe)>>가 간행된다. 이 시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시집 중 하나였다. 에리히 호네커는 비어만의 첫 시집을 "서투르게 위장된 속물적·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질서와 당조직 체계를 격렬하게 모욕"한 부적절한 사례로 지목하고 비어만을 가택연금시키고 공연금지 처분을 내렸다.[11]

1968년 두 번째 시집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혀로(Mit Marx- und Engelszungen)>>가 출간되고, 첫 번째 미니 앨범 <네 편의 신곡(Vier neue Lieder)>이 출시된다. 1972년에는 세 번째 시집 <<나의 동지들을 위하여>>가 출간된다. 1973년 음악저널 포노 포름(Fono Forum)에서 세 번째 정규앨범 <더 나은 시절을 기다리지 말라>로 독일음반상을 받는다. 1974년에는 서독의 쾰른 시가 수여하는 자크 오펜바흐상(Jacques-Offenbach-Pries)을 받지만, 동독 문화관료들은 서독으로 가려면 동독시민권을 포기하거나 영원히 동독을 떠나라고 협박하여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한다.[36]

1960년 비어만은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비어만은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고, 아이슬러는 동독 문화계 엘리트들과의 영향력을 이용해 비어만의 경력을 지원했지만, 1962년 아이슬러가 사망하면서 비어만은 멘토이자 후원자를 잃게 된다.

비어만은 공산주의자였지만, 그의 비순응적인 견해는 곧 동독 당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1963년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가입을 거부당했다.[9]

1964년 비어만은 서독에서 처음으로 공연한다. 1965년 4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볼프강 노이스의 카바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공연을 녹음했고, "볼프 비어만(동)과 볼프강 노이스(서)의 만남"(Wolf Biermann (Ost) zu Gast bei Wolfgang Neuss (West))이라는 제목의 LP로 발매되었다. 같은 해 말 비어만은 서독 출판사 클라우스 바겐바흐(Klaus Wagenbach)를 통해 시집 "드라하르페"(Die Drahtharfe)를 출판했다. 1965년 12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계급 반역자"로 규탄하고 공연 및 출판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이때 슈타지는 그의 인격을 "훼손"하거나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20개 항목의 계획을 세웠다.[11]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안에도 비어만은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작곡했으며, 1968년에는 베를린 중심부인 미테의 차우세슈트라세 131(Chausseestraße 131)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서쪽에서 밀반입한 장비로 녹음한 앨범 "차우세슈트라세 131"(차우세슈트라세 131)을 발표했다.

이러한 고립을 깨기 위해 조안 바에즈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1973년 세계청년학생축전 기간 중 그의 집을 방문했다. 서독 사회민주주의 청년(Jusos) 의장인 카르스텐 포이트는 국가 안전 기관에 의한 의견과 정보의 자유 억압에 항의했다.

비어만은 동독 정부에 의해 공적 활동과 출판이 금지되었지만, 이후에도 창작 활동을 계속하여 그의 작품은 녹음 테이프와 종이 조각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3. 4. 저항과 연대

비어만은 공산주의자였지만, 그의 비순응적인 견해는 곧 동독 당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1963년 그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가입을 거부당했는데, 당시에는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다.[9] 이후 독일 통일 과정에서 공개된 슈타지 기록 보관소 연방 위원의 비어만 파일을 통해, 심사관들이 그가 자극제를 상습적으로 사용한다고 판단하여 가입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0]

1964년 비어만은 서독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다. 1965년 4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볼프강 노이스의 카바레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이 공연은 녹음되어 "볼프 비어만(동)과 볼프강 노이스(서)의 만남"(Wolf Biermann (Ost) zu Gast bei Wolfgang Neuss (West))이라는 제목의 LP로 발매되었다. 같은 해 말, 비어만은 서독 출판사 클라우스 바겐바흐(Klaus Wagenbach)를 통해 시집 "드라하르페"(Die Drahtharfe)를 출판했다. 1965년 12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계급 반역자"로 규탄하고 공연 및 출판을 금지했다. 이때 슈타지는 그의 인격을 훼손하거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20개 항목의 계획을 세웠다.[11]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안에도 비어만은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작곡했다. 1968년에는 베를린 중심부 미테의 차우세슈트라세 131(Chausseestraße 131)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서독에서 밀반입한 장비로 앨범 "차우세슈트라세 131"(차우세슈트라세 131)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립을 깨기 위해 조안 바에즈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1973년 세계청년학생축전 기간 중 그의 집을 방문했다. 서독 사회민주주의 청년(Jusos) 의장인 카르스텐 포이트는 국가 안전 기관에 의한 의견과 정보의 자유 억압에 항의했다.

1965년 동독 정부에 의해 공적 활동과 출판이 금지되었지만, 이후에도 비어만은 창작 활동을 계속하여 그의 작품은 녹음 테이프와 종이 조각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1976년 서독에서의 연주 여행 중 동독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가족과 함께 서독에 남았다. 정부 결정 당일에는 동독 작가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볼커 브라운(Volker Braun), 자라 키르슈(Sarah Kirsch) 등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서독에서도 항의 집회가 열렸다. 당시 비어만을 감시하던 슈타지 장교 볼프강 슈미트(Wolfgang Schmidt)는 추방 결정을 들었을 때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31]

4. 동독 시민권 박탈

1976년 11월 13일, 볼프 비어만은 서독 독일 금속노조(IG-Metall)의 초청으로 쾰른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이 콘서트는 독일연방공영방송국(ARD)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11월 16일, 동독 정부는 '독일민주공화국 시민권에 관한 법률' 13조를 근거로 비어만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추방령을 발표했다.[37] 비어만은 다음 공연 장소인 보쿰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11월 19일, 비어만은 시민권 박탈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동독 귀환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은 동독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동독 국민들은 정부에 크게 실망했으며, 슈테판 헤름린, 슈테판 하임 등 동독 문단의 저명 작가 12명은 추방령에 반대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37] 이들은 비어만이 "까다로운 시인"이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그의 비판적인 발언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8] 100명이 넘는 작가, 지식인, 문화인들이 항의문에 서명하며 구명 운동을 벌였고, 서방 세계에서도 비어만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동독 당국은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고, 항의에 참여한 문인들을 탄압했다.[39][40]

이 사건으로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망명했으며, 비어만 시민권 박탈 사건은 동독 몰락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41]

4. 1. 쾰른 콘서트와 추방령

1976년 11월 13일, 볼프 비어만은 서독 금속노조(IG-Metall)의 초청으로 쾰른 시 체육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이 콘서트에는 6,500명의 청중이 모였으며, 독일연방공영방송국(ARD)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7] 11월 16일, 동독 정부는 비어만의 시민권을 강제로 박탈하는 추방령을 발표했다.[7] 당시 비어만은 다음 공연 장소인 보쿰으로 이동하는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추방령의 근거는 '독일민주공화국 시민권에 관한 법률' 13조로, 시민의 의무를 현저히 위반한 시민에게는 시민권을 취소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11월 19일, 비어만은 시민권 박탈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동독 귀환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7]

1977년 함부르크에서의 비어만


비어만의 추방은 아민 뮬러 슈탈, 크리스타 볼프 등 동독의 저명한 지식인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7] 동독 작가 크리스타 볼프, 하이너 뮐러, 볼커 브라운, 자라 키르슈 등도 비어만의 추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비어만을 감시하던 슈타지 장교 볼프강 슈미트는 추방 결정을 듣고 실책이라고 놀랐으며, 그대로 되었다고 회상했다.[31]

4. 2. 동독 내외의 항의

볼프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은 동독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37] 1976년 11월 17일, 슈테판 헤름린, 슈테판 하임, 에리히 아렌트, 폴커 브라운, 크리스타 볼프, 게르하르트 볼프, 자라 키르쉬, 프란츠 퓌만, 하이너 뮐러, 롤프 슈나이더, 유렉 베커, 권터 쿠너트 등 동독 문단을 대표하는 저명 작가 12명이 비어만의 추방에 반대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이들은 서한에서 "볼프 비어만은 까다로운 시인"이며, "우리 사회주의 국가"는 그의 "듣기 불편한 발언들을 심사숙고하며 견뎌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또한 비어만의 모든 말과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비어만을 둘러싼 사태를 동독에 해를 가하려고 악용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추방당하게 된 데 대하여 항의하며, 결정된 조처를 한 번 더 고려해 볼 것을 바랍니다."라고 요구했다.[38]

이 성명이 발표되고 5일 만에 100명이 넘는 작가, 지식인, 베를린 문화인들이 시민권 박탈 항의문에 서명하며 구명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동독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으며, 당과 지식인 사이의 유대감이 파괴되는 계기가 되었다.[39] 서방의 언론과 정당들도 비어만을 지지하고 동독 당국을 비판했다. 그러나 동독 당국은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항의문에 서명한 문인들을 가택연금하거나 투옥했다.[40]

이후 라이너 쿤체, 유렉 베커 등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망명했다. 여러 학자들은 비어만 시민권 박탈 사건을 동독 몰락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평가한다. 동독 출신 작가 권터 발라프는 "이런 추방과 절단조치, 그리고 바로 뒤따른 문화적 출혈, 즉 작가들의 대탈주를 통해 이미 동독의 종말은 시작되었다. 아니 적어도 그것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41]

4. 3. 동독 지식인 사회의 분열

볼프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은 동독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37] 1976년 11월 17일, 슈테판 헤름린, 슈테판 하임, 에리히 아렌트, 폴커 브라운, 크리스타 볼프, 게르하르트 볼프, 자라 키르쉬, 프란츠 퓌만, 하이너 뮐러, 롤프 슈나이더, 유렉 베커, 권터 쿠너트 등 동독 문단을 대표하는 12명의 작가들은 비어만의 추방에 반대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이들은 서한에서 "볼프 비어만은 까다로운 시인"이며, "우리 사회주의 국가가 ... 듣기 불편한 발언들을 심사숙고하며 견뎌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또한 비어만의 모든 말과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비어만을 둘러싼 사태를 동독에 해를 가하려고 악용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해서도 거리감을 취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추방 결정의 재고를 촉구했다.[38]

이 성명 발표 후 5일 만에 100명이 넘는 작가, 지식인, 베를린 문화인들이 시민권 박탈에 항의하는 서명에 동참하여 구명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동독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으며, 당과 지식인 사이의 유대감이 파괴되는 계기가 되었다.[39] 서방의 언론과 정당들도 비어만을 지지하며 동독 당국을 비판했다. 그러나 동독 당국은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항의문에 서명한 문인들을 가택 연금하거나 투옥했다.[40]

이후 라이너 쿤체, 유렉 베커 등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이주했다. 여러 학자들은 비어만 시민권 박탈 사건을 동독 몰락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평가한다. 동독 출신 작가 권터 발라프는 "이런 추방과 절단조치, 그리고 바로 뒤따른 문화적 출혈, 즉 작가들의 대탈주를 통해 이미 동독의 종말은 시작되었다. 아니 적어도 그것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41]

5. 시민권 박탈 이후의 활동

비어만은 시민권 박탈 이후에도 동독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다. 1977년 서방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시낭독회와 콘서트를 열었고, 1980년에는 독일 사민당 홍보대사로서 선거전에 참여하여 독일 각지를 돌며 선거 캠페인을 벌였다. 1981년에는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프랑스 파리에 2년간 체류하기도 했다. 1983년에는 오하이오 주립대학 객원교수로서 미국에 체류하며 여러 도시에서 콘서트를 열었다.[7]

1989년 12월, 동독 당국의 반체제 인사 복권 결정에 따라 동독 라이프치히 박람회장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1991년에는 독일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그는 함부르크와 프랑스에 거주하며, 10명의 자녀를 두었다.[15] 그중 세 명은 두 번째 부인인 파멜라 비어만(옛 성씨 뤼셰)과의 사이에서 낳았다.[16] 네 명의 여성과의 사이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고, 관계를 가진 여성 중에는 슈타지의 여성 스파이도 있었다고 한다.[33][34]

5. 1. 서독에서의 활동

비어만은 서독으로 이주한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동독의 스탈린주의 정책을 비판했다.[7] 1989년 12월 1일과 2일, 벤데(독일 통일) 기간 동안 동독에서 다시 공개적으로 공연할 수 있었다.[7] 1998년에는 독일 국가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9년 NATO코소보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13]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반유대주의적 견해의 영향 아래 독일인 대다수가 이스라엘 측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14]

5. 2. 통일 이후의 활동

비어만은 동독의 스탈린주의 정책을 계속 비판했다. 1989년 12월 1일과 2일, 벤데(독일 통일) 기간 동안 동독에서 다시 공개적으로 공연할 수 있었다.[7] 1991년 독일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독일 국가상을 수상했다. 1999년 코소보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는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13][32]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반유대주의적 견해의 영향 아래 독일인 대다수가 이스라엘 측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14]

5. 3. 한국과의 인연

2005년 방한하여 한국 저항 문화의 상징인 김민기의 소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6. 수상 경력

연도상 이름
1969베를린 시 폰타네 상[20]
1971자크 오펜바흐 상[20]
1973독일 음반 상[17][18]
1975독일 음반 상[18]
1977독일 음반 상[18]
1979샹송 부문 독일 소예술 상[19]
1989바트 홈부르크 시 프리드리히 휠덜린 상[20]
1991펠바흐 시 외리케 상[20]
1991게오르크 뷔히너 상[20]
1993뒤셀도르프 시 하인리히 하이네 상[20]
1998독일 국가 상[20]
2001하인츠 갈린스키 상[21]
2006요아힘 링겔나츠 서정시 상[22]
2006독일 연방 공로 훈장 대십자 훈장[23]
2007베를린 명예 시민[24]
2008테오도어 레싱 상[25]
2008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26]
2017포인트 알파 상[27]
2018에른스트 톨러 상[28]
2020코블렌츠-란다우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29]


7. 작품 목록


  • Wolf Biermann zu Gast bei Wolfgang Neuss|볼프 비어만, 볼프강 노이스를 방문하다de (LP, 1965)[1]
  • 차우스세슈트라세 131 (LP, 1969): 동베를린 자택에서 녹음되어 서독에서 발매되었다. 가정에서 녹음한 매력이 있으며, 거리의 소음도 들린다. 독일어 가사는 매우 풍자적이고, 반어적이며, 간결하다. 이 음반은 서독에서 밀반입한 녹음기로 녹음되었으며, 음반 제목은 당시 그의 주소였는데, 이를 통해 정치 경찰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리게 되었다.[1]
  • 아아-자! (LP, 1974)[1]
  • ヴォルフ・ビーアマン詩集|볼프 비어만 시집일본어 (野村修|노무라 오사무일본어 역, 晶文社|쇼분샤일본어, 1972년)[1]
  • ビーアマンは歌う|비어만은 노래한다일본어 (野村修|노무라 오사무일본어 역, 晶文社|쇼분샤일본어, 1986년)[1]

8. 참고 문헌


  • ヴォルフ・ビーアマン詩集일본어 (볼프 비어만 시집, 노무라 오사무(野村修) 역, 쇼분샤(晶文社), 1972년)
  • ビーアマンは歌う일본어 (비어만은 노래한다, 노무라 오사무(野村修) 역, 쇼분샤(晶文社), 1986년)

참조

[1] 웹사이트 Atlas https://books.google[...] Atlas Communications. 1967-12-30
[2] 서적 Gedenkbuch - Opfer der Verfolgung der Juden unter der nationalsozialistischen Gewaltherrschaft in Deutschland 1933–1945 German Federal Archives
[3] 문서 Liste der Opfer aus Auschwitz. Auschwitz-Todesregister, Staatliches Museum Auschwitz-Birkenau Staatliches Museum Auschwitz-Birkenau
[4] 사진 Photo of Wolf Biermann, with description http://germanhistory[...] 2010-03-26
[5] 서적 Repainting the Little red Schoolhouse: A History of Eastern German Education, 1945–199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Gerade auf LeMO gesehen: LeMO Biografie: Wolf Biermann http://www.dhm.de/le[...] 2017-12-30
[7] 웹사이트 Biermann, Wolf * 15.11.1936 Liedermacher http://www.bundessti[...] Bundesstiftung zur Aufarbeitung der SED-Diktatur: Biographische Datenbanken 2014-12-09
[8] 뉴스 Wolf Biermann erhält den Ehrendoktor der Humboldt-Universität – und endlich auch sein Diplom https://www.berliner[...] 2008-11-08
[9] 뉴스 Das Schlimmste war die Entmündigung. https://www.spiegel.[...] 2006-11-13
[10] 서적 Ausgebürgert https://books.google[...] Schwarzkopf & Schwarzkopf Verlag
[11] 웹사이트 Heimatkunde https://web.archive.[...] 2006-11-00
[1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German Intelligence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09-09-01
[13] 뉴스 Brachiale Friedensliebe http://www.spiegel.d[...]
[14] 뉴스 Deutschland verrät Israel https://www.zeit.de/[...] 2006-10-26
[15] 웹사이트 The eternal dissident: Singer-songwriter Wolf Biermann turns 80 http://www.dw.com/en[...] 2018-01-21
[16] 웹사이트 Liedermacher Wolf Biermann: "Die Zeit des Fremdgehens ist vorbei!" https://www.focus.de[...] 2018-01-21
[17] 웹사이트 Wolf Biermann – dissidenten.eu – Biografisches Lexikon https://dissidenten.[...]
[18] 웹사이트 Im Osten war ich Drachentöter, im Westen Wolf, doch niemals Köter. Liedermacher Wolf Biermann https://www.nemcina.[...] 2023-09-13
[19] 뉴스 Biermanns West-Alltag https://www.zeit.de/[...] 1980-04-11
[20] 웹사이트 Wolf Biermann https://www.literatu[...]
[21] 웹사이트 Galinski-Preis für Wolf Biermann und Arno Lustiger | DW | 19.11.2001 https://www.dw.com/d[...]
[22] 뉴스 Dichterpreis für Biermann https://www.welt.de/[...] 2006-06-16
[23] 뉴스 Mit Ecken und Kanten https://www.spiegel.[...] 2006-11-15
[24] 뉴스 Biermann ist Ehrenbürger Berlins https://www.tagesspi[...] 2007-03-26
[25] 웹사이트 Lessing-Preis für Biermann https://www.bz-berli[...] 2008-03-07
[26] 웹사이트 Diplom und Ehrendoktor für Wolf Biermann — Presseportal https://www.hu-berli[...]
[27] 웹사이트 Wolf Biermann mit Point-Alpha-Preis ausgezeichnet https://pointalpha.c[...] 2017-06-20
[28] 웹사이트 Preisträgerinnen Archive https://www.ernst-to[...] 2021-09-20
[29] 뉴스 Wolf Biermann erhält Ehrendoktorwürde der Universität Koblenz-Landau https://www.nmz.de/k[...] 2020-08-05
[30] 뉴스 【ストーリー/旧東独・秘密警察の爪痕(1)】世界最大級の監視網 人気歌手の旧東独追放でほころび https://mainichi.jp/[...] 毎日新聞朝刊 2017-04-02
[31] 뉴스 【ストーリー/旧東独・秘密警察の爪痕(1)】弾圧に想像を超えた批判 https://mainichi.jp/[...] 毎日新聞朝刊 2017-04-02
[32] 뉴스 Brachiale Friedensliebe http://wissen.spiege[...]
[33] 뉴스 【ストーリー/旧東独・秘密警察の爪痕(1)】不問にされた深い闇 https://mainichi.jp/[...] 毎日新聞朝刊 2017-04-02
[34] 뉴스 【ストーリー/旧東独・秘密警察の爪痕(2)】統一後も新たな悲劇 https://mainichi.jp/[...] 毎日新聞朝刊 2017-04-09
[35] 뉴스 ‘독일의 김민기’ 볼프 비어만 - 류신 대담 http://www.hani.co.k[...] 한겨레 2005-06-01
[36] 서적 장벽 위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 한울 아카데미 2011
[37] 서적 독일 통일 15년의 작은 백서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8
[38] 서적 동독문학 연구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39] 뉴스 동독 대규모 반정시위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6-11-23
[40] 뉴스 동독, 반정부운동에 보복 소설가 푹스를 불심검문 체포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6-11-22
[41] 서적 장벽 위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 한울 아카데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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