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작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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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공작 루이는 1682년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받았으며, 프랑스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다. 1697년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공주와 결혼했으며, 1702년 최고 평의회에 입회하여 군사 및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나, 오데나르데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군사적 어려움을 겪었다. 1711년 왕태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아내와 함께 홍역에 걸려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위는 손자인 루이 15세가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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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작 루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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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루이 |
작위 | 프랑스의 도팽 부르고뉴 공작 |
프랑스어 표기 | Louis, duc de Bourgogne |
출생일 | 1682년 8월 6일 |
출생지 | 프랑스,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
사망일 | 1712년 2월 18일 |
사망지 | 프랑스, 마를리르루아, 마를리 성 |
매장일 | 1712년 2월 23일 |
매장지 | 프랑스, 생드니, 생드니 대성당 |
배우자 |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1697년 결혼, 1712년 사망) |
자녀 | 루이, 브르타뉴 공작 루이, 브르타뉴 공작 루이 15세 |
가문 | 부르봉 가문 |
아버지 | 루이, 그랑 도팽 |
어머니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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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초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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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루이는 독실한 신앙인들인 '데보'(dévots)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옛 스승 프랑수아 페넬롱, 폴 드 보빌리에, 생테냐 공작, 매형 샤를 오노레 달베르, 뤼인 공작, 그리고 회고록 작가로 유명한 루이 드 루브루아, 생시몽 공작 등 '부르고뉴 파'(faction de Bourgogne)로 불리는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다.
1711년 아버지 부친의 사망으로 프랑스의 도팽이 되었다.[1] 1712년 2월, 그의 아내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는 홍역에 걸려 2월 12일에 사망했다.[1] 아내를 몹시 사랑했고 병간호에 힘썼던 루이 역시 같은 병에 감염되어, 아내가 사망한 지 6일 만인 2월 18일, 마를리 성에서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2]
루이
루이는 1682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의 도팽 루이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훗날 '르 그랑 도팽'으로 불렸으며, 당시 국왕 루이 14세와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이었다. 루이는 태어나면서 부르고뉴 공작(duc de Bourgogne) 칭호를 받았고, 국왕의 손자이자 도팽의 아들로서 ''프랑스의 왕자'' 신분이었다. 할아버지 루이 14세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위에 해당했다.
루이는 동생들인 앙주 공작 필리프(훗날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베리 공작 샤를과 함께 왕실 보모 루이즈 드 프리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그는 8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의 아버지는 게으르고 둔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3. 결혼
15세의 나이에 그는 그의 사촌이자, 사보이 공작 빅토르 아메데우스 2세와 오를레앙의 안마리의 딸인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공주와 결혼했다. 그녀는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이중 사촌 관계이기도 했다. 이 결혼은 아홉 해 전쟁 동안 프랑스와 사보이 공국 간의 갈등을 끝내기 위한 토리노 조약의 일환으로 결정되었다. 결혼식은 1697년 12월 7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다.
4. 군사 경력 및 정치
1702년, 20세가 된 루이는 할아버지인 루이 14세에 의해 종교, 외교, 전쟁 관련 국가 기밀을 다루는 최고 평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아버지보다 10년이나 빠른 입회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루이는 조부 루이 14세의 뜻에 따라 네덜란드와 라인강 전선에 파견되었다. 1707년에는 툴롱 포위전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1708년, 루이는 플랑드르 주둔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방돔 공작이 그를 보좌하게 되면서 지휘권 문제가 발생했다. 누가 실질적인 지휘관인지 명확하지 않아 군사 작전 결정이 지연되었고, 중요한 결정 사항은 베르사유의 루이 14세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우유부단함과 전선과 베르사유 간의 소통 지연은 프랑스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이어졌고, 결국 동맹군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오데나르데 전투에서는 루이와 방돔 공작 간의 의견 충돌이 극심했다. 루이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뿐 아니라 방돔 공작을 돕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패배를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어진 릴 공방전에서도 루이는 방돔 공작 및 베릭 공작과 함께 포위된 릴을 구원하기 위한 외곽 공격에 나섰으나,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아 결국 릴이 함락되는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동맹군은 처음으로 프랑스 영토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루이는 '데보'(dévots, 독실한 신앙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주변에는 '부르고뉴 파'(faction de Bourgogne)로 알려진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는 그의 옛 스승인 프랑수아 페넬롱, 옛 가정교사였던 폴 드 보빌리에, 매형인 샤를 오노레 달베르, 그리고 유명한 회고록 작가 생시몽 공작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루이 14세 시대의 절대주의와 중앙집권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왕권이 다소 제한되고 각 지방에 더 많은 자율성이 부여되는 군주제를 지향했다. 또한, 정부 운영에 있어 왕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평의회와 같은 중간 기구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 평의회는 루이 14세가 중용한 부르주아 출신 평민 관료가 아닌, 귀족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귀족들이야말로 백성을 대표하며 왕의 통치를 보좌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루이가 왕위에 올랐다면, 이러한 정치 구상을 실현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5. 부르고뉴 파
이들은 루이 14세 시대의 절대주의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에서 벗어나, 각 지방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군주제를 지향했다. 이들은 왕과 백성 사이에 귀족들로 구성된 평의회와 같은 중간 기구를 두어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평의회는 루이 14세가 중용한 부르주아 출신 관료가 아닌, 스스로를 백성의 대표자이자 왕의 조력자로 여기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루이가 왕위에 올랐다면, 이러한 구상을 실제 정치에 적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6. 사망과 유산
루이 부부의 비극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두 아들 또한 홍역에 감염되었는데, 형인 루이, 브르타뉴 공작은 병세가 악화되어 3월 8일에 사망했다.[1] 당시 두 살이었던 동생 앙주 공작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훗날 루이 15세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1][2]
루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프랑스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73세의 고령인 증조부 루이 14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된 어린 루이 15세의 건강 상태가 불안정하여 왕위 계승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1]
또한, 루이를 중심으로 개혁을 도모했던 '부르고뉴 파'의 정치적 희망도 그의 죽음과 함께 좌절되었다.[1] 이후 루이 15세의 섭정이 된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의 구상 중 일부를 반영하여, 각 부처를 귀족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대체하는 다위정치(Polysynody)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귀족들의 무관심과 무능, 그리고 내부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고, 결국 1718년 폐지되어 프랑스는 다시 절대 왕정 체제로 돌아갔다.[1]
루이는 1697년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딸이자 사촌인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와 결혼했다.[2] 부부는 세 아들을 두었으나, 1704년에 태어난 장남은 1살이 되기 전에 요절했고, 1707년에 태어난 차남 루이, 브르타뉴 공작은 1712년 부모와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1710년에 태어난 삼남만이 살아남아 루이 15세가 되었다.[2]
7. 자녀
사진 이름 생몰년 비고 브르타뉴 공작 루이 1704년 6월 25일 ~ 1705년 4월 13일 경련으로 요절. 브르타뉴 공작 루이 1707년 1월 8일 ~ 1712년 3월 8일 홍역으로 요절. 루이 15세 1710년 2월 15일 ~ 1774년 5월 10일 처음에는 앙주 공작 작위를 가졌으며, 이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약혼했으나 파혼하고,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하여 슬하 2남 8녀를 두었다. 천연두로 사망.
8. 가계도
할아버지:
루이 14세증조부:
루이 13세[1]증조할머니:
안할머니:
마리 테레즈증조부:
펠리페 4세증조할머니:
이사벨[1]어머니:
마리 안할아버지:
페르디난트 마리아 (바이에른 선제후)증조부:
막시밀리안 1세 (바이에른 선제후)증조할머니:
마리아 안나[2]할머니:
헨리에테증조부: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사보이아 공작)증조할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