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왕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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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왕은 고조선 시기에 활동한 군주로,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재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명목상 속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의 아들 준왕은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기자조선과 관련된 논란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기자의 후손으로 여겨졌으나, 근대 이후에는 특정 혈통을 상정하지 않고 부왕으로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환단고기》에는 부왕 이전의 고조선 역사와 관련된 내용이 있으나, 사료로서의 가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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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국왕 - 준왕
준왕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위만의 반란으로 남쪽으로 피신하여 한왕을 칭하며 마한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기자조선의 후손으로 기록된다. - 기자조선의 왕 - 경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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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왕 (고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한글 | 부왕 |
| 한자 | 否王 |
| 로마자 표기 | Bu Wang |
| 기타 이름 | 비왕(丕王) |
| 통치 정보 | |
| 재위 기간 |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0년 |
| 개인 정보 | |
| 본명 | 기부(箕否) |
| 출생지 | 고조선 |
| 사망지 | 고조선 |
| 자녀 | 준왕(準王) |
| 가문 | 기자의 가문 |
2. 생애
부왕의 정확한 즉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재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4년 진나라가 몽염을 시켜 만리장성을 요동까지 확장하자 침공을 우려하여 명목상 복종하였으나, 직접 조회하지는 않았다. 이후 부왕이 사망하고 아들 준왕이 왕위를 이었다.
2. 1. 즉위와 진나라와의 관계
부왕이 즉위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로 추정된다.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4년 시황제가 몽염에게 명하여 만리장성을 쌓아 요동 지역까지 확장하자, 부왕은 진나라의 침공을 우려하여 형식적으로 복종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부왕이 직접 진나라에 가서 조회하지는 않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실질적인 종속 관계라기보다는 명목상의 복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왕은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준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2. 2. 혈통 논란과 기자조선
《삼국지》에는 부왕의 아들 준왕을 기자의 40여 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어[3], 이는 기자조선의 실존 문제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기록을 받아들여 부왕을 기자의 후손으로 보고 '기부(箕否)'라고 칭하기도 했다.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기자조선의 실존 가능성이 낮게 평가되면서, 부왕의 혈통을 기자와 직접 연결하기보다는 특정한 혈통을 상정하지 않은 채 '부왕'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다른 관점에서, 기자가 고조선의 삼한(三韓) 중 하나인 번한(番韓)의 군주가 되었으며, 부왕과 준왕은 그 기자의 후손으로서 번한의 군주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부 재야사학계에서 주목하는 《환단고기》[3][4][5][6][7]는 기씨(箕氏) 왕들의 계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이들이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렸다고 기록한다. 그 계보는 다음과 같다.
| 순서 | 이름 | 관계 | 비고 |
|---|---|---|---|
| 1 | 기대(箕詡) | - | 기원전 323년 번조선왕 즉위 기록[4] |
| 2 | 기욱(箕煜) | 기대의 아들 | |
| 3 | 기석(箕釋) | 기욱의 아들 | |
| 4 | 기윤(箕潤) | 기석의 아들 | |
| 5 | 기비(箕丕) | 기윤의 아들 | |
| 6 | 기준(箕準) | 기비의 아들 |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패배 기록[6][7] |
《환단고기》는 부왕 이전 고조선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에 대해 논란이 있다.[3][4][5][6][7] 《환단고기》에 따르면, 부왕 이전 시기 번조선은 연나라의 침략에 시달렸다. 임오년(壬午), 연나라가 안촌홀(安寸忽)과 험독(險瀆)을 공격해왔을 때, 수유(須臾) 사람 기대(箕代)가 자제 5천 명을 이끌고 와 진한과 번한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이에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공자를 인질로 보냈다.[3]
부왕의 정확한 즉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 250년경부터 기원전 200년경으로 추정된다.
[1]
서적
《환단고기》에 따르면, 초대 번조선왕인 기대(箕詡)는 본래 기자조선 계통의 수유인(須臾人)이었으나[4], 기원전 323년경 군사를 동원하여 번한(番韓) 지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번조선왕(番朝鮮王)을 칭했다고 한다.[4] 이후 기씨 가문이 왕위를 이어가다가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 때, 기원전 194년 연(燕)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망명하면서 번조선이 멸망했다고 기록한다.[6][7] 다만, 《환단고기》는 위서 논란 등으로 인해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사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3. 《환단고기》의 기록
《환단고기》는 기대(箕詡)의 번조선왕 즉위 과정에 대해 두 가지 기록을 전한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에 따르면, 수한(水韓)이 후사 없이 죽자 무술년(戊戌, 기원전 323년 추정[4])에 기대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했으며, 연나라의 축하를 받았다. 같은 해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침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기대 역시 명을 받아 정식으로 번조선왕(番朝鮮王)을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에 거처하며 대비했다고 한다.[3] 반면, 〈마한세가 하〉에서는 무술년에 수유 사람 기대가 군사를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근거지를 삼고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칭했다고 기록했다.[4] 《환단고기》는 기대를 기자조선과 연관된 인물로 묘사하며[4], 그의 후손들이 번조선을 통치했다고 본다.
기대 이후 번조선의 왕위는 다음과 같이 계승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왕 재위 기간 (추정) 주요 기록 (《환단고기》 기준) 기대(箕詡) 기원전 323년 ~ ? 번조선왕 즉위, 번한성(番汗城) 거주 기욱(箕煜) ? ~ ? 기대의 아들 기석(箕釋) ? ~ ? 기욱의 아들. 현량 270명 천거, 교외에서 친경(親耕), 연나라로부터 공물 받음 기윤(箕潤) ? ~ ? 기석의 아들 기비(箕丕) ? ~ 기원전 221년? 기윤의 아들. 종실 해모수와 밀약하여 그가 대권을 잡도록 도움. 기준(箕準) 기원전 221년? ~ 기원전 194년 기비의 아들. 위만에게 패배하여 번조선 멸망.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기비(箕丕)는 종실 해모수와 밀약을 맺고 그가 북부여를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해모수에 의해 번조선왕으로 봉해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켰다고 한다.[5]
기준(箕準)의 시대인 병오년(기원전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漢)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흉노로 도주하자, 그의 부하였던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번조선으로 망명해왔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당시 북부여의 해모수는 위만의 망명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병으로 인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번조선왕 기준이 기회를 놓치고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상하운장(上下雲障) 지역을 봉해주었다고 한다.[7] 결국 정미년(기원전 194년), 기준은 위만에게 속아 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바다로 망명하였고 돌아오지 못했으며[3][6][7], 이로써 기씨 번조선은 멸망하였다.
4. 연표
아래는 부왕 및 관련 인물들의 활동 시기를 나타내는 연표이다. 주로 《삼국지》와 《환단고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특히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번조선(番朝鮮) 왕계는 기씨(箕氏) 성을 사용하며, 부왕 이전부터 기준(箕準)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제시하고 있다.연도 사건 관련 인물 출처 기원전 323년 《환단고기》에 따르면, 수유인(須臾人) 기대(箕詡)가 번한(番韓) 지역에 들어가 스스로 번조선왕(番朝鮮王)을 칭하며 번조선을 수립했다. 이는 기자조선 계통이 번한을 통합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4] 기대(箕詡) 《환단고기》 기원전 315년 《환단고기》에 따르면, 기대의 아들 기욱(箕煜)이 즉위했다.[3] 기욱(箕煜) 《환단고기》 기원전 290년 《환단고기》에 따르면, 기욱의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했다.[3] 기석(箕釋) 《환단고기》 기원전 284년 연(燕)의 장수 진개가 침략하여 서쪽 영토 약 천 리를 상실하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환단고기》는 이를 번조선(동호)의 후퇴로 기록하고 있다.[8] 기석(箕釋), 진개 《환단고기》 기원전 251년 《환단고기》에 따르면, 기석의 아들 기윤(箕潤)이 즉위했다.[3] 기윤(箕潤) 《환단고기》 기원전 250년 ~ 기원전 200년 (추정) 부왕(否王)의 재위 기간으로 추정된다. 부왕 - 기원전 231년 《환단고기》에 따르면, 기윤의 아들 기비(箕丕 또는 箕否)가 즉위했다.[3] 기비(箕丕/箕否) 《환단고기》 기원전 221년 《환단고기》에 따르면, 기비의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했다.[3] 기준(箕準) 《환단고기》 기원전 214년 진시황이 몽염을 시켜 만리장성을 요동까지 쌓자, 부왕은 진(秦)의 침략을 우려하여 명목상 복속하였다. 그러나 직접 진나라에 조회하러 가지는 않았다. 부왕, 진시황, 몽염 《삼국지》 기원전 194년 연(燕)의 망명객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번조선왕 기준(箕準)은 위만에게 패배하여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망명하였다.[3][6][7] 기준(箕準), 위만 《환단고기》, 《삼국지》 등
참조
[2]
서적
隋唐帝国と古代朝鮮
中央公論新社
1997-01
[3]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4]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5]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6]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7]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8]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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