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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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융은 의양군 출신으로, 촉한의 장수이다. 221년 유비를 따라 오나라를 공격하는 이릉 대전에 참전하여 후방을 지키다 전사했다. 오군에 포위되어 항복 권유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여 충절을 인정받았다. 그의 아들 부첨 또한 위나라의 촉 정복 때 촉나라 장수로 복무하다 전사하여 부자 모두 충의를 지켰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부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정봉에게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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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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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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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신양, 허난성 |
사망일 | 222년 |
사망지 | 이창, 후베이성 |
자녀 | 부천 |
직업 | 군사 장군 |
2. 생애
222년 6월, 이릉 대전에서 유비가 육손의 계략에 넘어가 효정(猇亭)에서 크게 패했을 때, 부융은 후방을 지키며 싸우다가 부하들을 모두 잃었다. 오나라 군대는 부융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했으나, 부융은 "오나라의 개들아! 어찌 한(漢)나라의 장수가 항복하겠느냐!"라고 외치며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오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1] 《삼국지연의》의 기록 또한 유사하다.
촉나라에서는 부융의 충절을 기려 그해 10월 그의 아들 부첨을 좌중랑장(左中朗將)으로 임명했다.[1] 부첨은 263년 위나라의 촉 정복 당시 위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부자가 모두 촉한에 대한 충의를 지켰다.[2] 서진 무제(사마염)는 부융, 부첨 부자의 충의를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다.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부융은 '''부동'''(傅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21년 유비가 오나라를 침공했을 때 별독(別督)으로 임명되어 창을 들고 각지에서 오군을 물리치는 등 활약했다.[1] 이릉 전투에서 유비가 패배한 후, 부융은 추격하는 적군으로부터 후방을 지키기 위해 자원했다. 오나라 장수 정봉이 항복을 권유하자, "나는 (촉)한의 장수인데, 어찌 오나라의 개들에게 항복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1] 나관중은 작품 속 시에서 부융의 충의를 "부동은 한나라 장군에 부끄럽지 않다"라고 칭송했다.[9]
[1]
서적
Sanguozhi vol. 45
부융은 현재의 신양시 허난성에 위치한 의양군 출신이었다. 221년, 그는 유비를 따라 손권의 군대에 맞서 싸우는 원정에 참여하여 이릉 전투에 참전했다. 222년, 육손은 이릉과 샤오팅에서 유비 군대를 격파하고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부융은 촉나라 군대의 후퇴 시 후방을 지원하는 역할을 자원했다. 그는 모든 동료가 이미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적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오나라 군인들이 그에게 항복할 기회를 제안하자 그는 "오나라의 개들아! 어찌 한나라 장수가 항복하겠느냐?"라고 답했다. 결국 그는 전투에서 사망했다.[1] 진 무제는 진나라를 건국한 황제로서, 그의 칙령에서 이 사건을 특별히 언급했다.[2]
장무 원년부터 2년(221년 - 222년)[5]에 걸쳐 벌어진 이릉 전투에서 별독[6]으로 임명되었다. 촉군이 육손의 화공(火攻)에 의해 크게 패하자[7], 유비를 탈출시키기 위한 후군이 되었다. 부하 병사들은 전멸했고, 적장으로부터 항복을 권유받은 부융은 "오의 개들아! 한의 장군이 항복할 줄 아느냐!"라고 외치며 거부하고 전사했다.
이후 아들 부첨도 촉한 멸망에 순절했다. 또한 후대에 서진의 무제(사마염)는 부융, 부첨 부자의 충성심과 의리를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다.
3. 사후
4. 《삼국지연의》 속 부융
5. 가족 관계
관계 이름 아들 부첨 참조
[2]
서적
Sanguozhi vol. 45
[3]
서적
Sanguo Yanyi ch. 84
[4]
문서
『華陽国志』や『三国志演義』では傅'''彤'''、『三国志』では傅'''肜'''とする。本記事中では前者で統一する。
[5]
서적
三国志』蜀書 先主伝
s:zh:三國志/卷32
[6]
서적
『正史 三国志 7』
ちくま学芸文庫
[7]
서적
三国志』呉書 陸遜伝
s:zh:三國志/卷58
[8]
서적
三國演義/第081回
s:zh:三國演義/第081回
[9]
서적
三國演義/第084回
s:zh:三國演義/第084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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