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량
1. 개요
마량은 촉한의 인물로, 유비가 형주 자사로 추대될 무렵 종사로 등용되었다. 그는 제갈량과 친분이 있었으며, 손권과의 외교 임무를 수행하고 시중을 역임했다. 이릉 대전에서 전사했지만, 재능 있는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백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진수는 마량을 훌륭한 인재로 평가했고,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참모 역할과 외교적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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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년 출생 -
조비
조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조조 사후 위왕과 승상 자리를 이어받아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는 등 내정을 정비했으나 오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요절했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장경국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
촉한의 시중 -
관흥
관흥은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관우의 아들이며, 아버지 사후 한수정후 작위를 계승하고 제갈량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시중·중감군에 임명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인물이다. -
촉한의 시중 -
제갈첨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자 촉한의 장군 겸 정치가로, 무향후 작위를 계승하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충신으로 칭송받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
후베이성 출신 -
구쯔하오
구쯔하오는 6세에 바둑을 시작해 2010년 프로 입단 후 삼성화재배 우승 등 여러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 정상급 기사로 인정받았고, 특히 2023년 구저우란커배 우승과 중국 랭킹 1위를 통해 최정상 기사임을 입증했으며, 공격적인 기풍으로 신진서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주목받는 중국 바둑 기사이다. -
후베이성 출신 -
장거정
장거정은 명나라 만력제 시기의 정치가이자 개혁가로, 수보의 자리에 올라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여 명나라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생애
209년(건안 14년)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될 무렵 종사(從事)로 등용되었다. 서촉 공방전에 참여한 제갈량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익주가 평정된 후 성도(成都)로 불려가 좌장군연(左將軍掾)이 되었고 손권과의 친선을 위한 사신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마량은 유비의 동맹인 손권을 만나기 위해 사신으로 임명되었다. 오나라로 떠나기 전 제갈량에게 자신을 손권에게 소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제갈량은 마량에게 직접 소개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마량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작성했다.
> "저희 현명하신 군주께서는 저 마량을 보내 존경을 표하고, 선물을 가져다 우정을 증진하여 곤오(昆吾)와 시위(豕韋)의 칭찬받을 유산을 이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형초 지역의 재능 있는 행운의 사나이입니다. 드물게도 저는 행동에 경솔하지만, 일을 끝까지 처리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당신을 향해 머리를 돌려 당신이 저를 받아들여 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손권은 마량을 정중하게 대접했다.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여 촉한을 건국하자 마량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유비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마량도 종군하였다. 222년(장무 2년), 무릉군 5계의 이민족을 회유하여 아군으로 삼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릉 대전에서 촉한군이 대패하면서 전사하였다. 향년 36세였다. 유비는 그의 아들 마병(馬秉)에게 기도위를 주었다.
2.1. 초기 생애와 유비와의 만남
마량은 현재의 후베이성 이청 시인 의성현(宜城縣), 샹양시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마속 등이 있었는데, 마량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재능 있는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눈썹에 흰 머리카락이 있어 고향에서 "마씨 가문의 오상(五常) 중 백미(白眉)가 가장 '량(良)'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같은 종류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백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209년, 유비가 형주(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포함)를 장악하면서 마량을 종사(從事)로 등용했다. 마량은 제갈량과 친한 친구였으며, 의형제였다.
마량은 익주에 있던 제갈량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칭찬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편지에서 마량은 제갈량을 "존경하는 형님"이라고 불렀으며, 제갈량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제갈량은 마량의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그들과의 친밀한 유대감을 소중히 여겼다.
유비의 익주 점령 이후, 마량은 좌장군(左將軍)부의 원(掾)으로 승진했다.
자의 "계(季)"에서 마량은 넷째 아들로 추측된다(백중숙계). 마속 외의 형제들의 성명이나 사적에 대해서는 불명이다.
유비가 형주를 지배하게 되자, 마량은 마속과 함께 종사로 임명되었다. 유비는 입촉 시에 마속을 수행하게 하고 마량을 형주에 머물게 했다. 이후 제갈량도 유비를 수행하기 위해 형주를 떠났지만, 그 때도 마량은 계속 형주에 머물렀다.
2.2. 촉한에서의 활동과 외교적 역할
209년(건안 14년),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될 무렵 마량은 종사(從事)로 등용되었다. 서촉 공방전에 참여한 제갈량과 편지 교류를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익주가 평정된 후 성도(成都)로 불려가 좌장군연(左將軍掾)이 되었고, 손권과의 친선을 위한 사신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마량은 유비의 익주 점령 이후 좌장군부의 원(掾)으로 승진했다. 그는 유비의 동맹인 손권을 만나기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었다. 오나라로 떠나기 전, 마량은 제갈량에게 "이제 저는 두 국가 간의 조화와 우정을 가져오라는 국가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당신을 통해 손권 장군에게 소개될 기회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제갈량은 "당신이 직접 무언가를 써보는 것이 좋겠소."라고 답했다. 마량은 다음과 같은 초안을 썼다.
손권은 마량을 받아들여 매우 존경스럽게 대했다.
221년, 동한 왕조가 붕괴된 후 유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촉한을 건국했다. 마량은 촉한의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말, 유비는 손권에 대항하는 원정을 시작했고, 이릉 전투가 벌어졌다. 마량은 무릉군(武陵; 현재의 후난성 창더 시, 우링 구 주변)의 부족들을 설득하여 유비에 가담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는 임무에 성공했다. 군대는 이도(宜都)의 샤오팅(Xiaoting)에 도착할 때까지 진군했고, 그곳에서 유비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자신의 진영을 확장했다. 마량은 무릉으로 가는 길을 따라 유비를 따라갔고, 이전에 유비에 합류했던 이(夷)와 만(蠻) 부족들의 일을 감독하고 관리하도록 추가로 파견되었다. 222년 이릉 전투에서 유비는 육손에게 대패했고, 마량은 전투 중 사망했다. 이후 백제성(현재의 충칭시 펑제 현)으로 안전하게 후퇴한 후, 유비는 마량의 아들 마병(馬秉)을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했다.
2.3. 이릉 전투와 죽음
209년(건안 14년),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될 때 종사(從事)로 등용되었다.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222년(장무 2년), 유비가 오나라를 공격할 때 종군하여 무릉군 5계의 이민족을 회유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릉 대전에서 촉한군이 크게 패하면서 전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유비는 그의 아들 마병(馬秉)에게 기도위를 주었다.
3. 평가
진수는 마량을 지조 있고 성실하며 훌륭한 선비라고 평하였다. 양희 역시 비슷하게 썼다. 고향에서는 마량 5형제가 모두 재주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마량이 특출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백미라는 고사가 유래하였다.
배잠은 마량은 형주 지방 최고의 명사였으며 유비군에 합류하여 내정과 외교에서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면서 이후 유비가 형주와 익주, 한중까지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마량의 전기를 쓰면서 "마량은 청렴하고 정직하며 훌륭한 인재로 칭찬받았다. 그는 '령사'(令士; 덕망 있는 학자)라 불릴 만했다... 그는 동화, 유파, 진진, 동윤과 함께 촉한의 훌륭한 신하 중 한 명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진수는 마량을 성실하고 촉의 훌륭한 신하라고 칭찬했다.
양희가 지은 계한보신찬에서는, 마량의 성실함을 칭찬하며, 널리 뜻을 펼치고 형초의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4.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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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 마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