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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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자이는 16세기 후반 여진족 여허부의 지도자였다. 칭기야누와 양기누가 이성량에게 살해된 후, 부자이는 나림불루와 함께 여허부의 세력을 강화하고 하다부에 보복하려 했다. 그는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칙서를 요구하고, 건주여진과의 갈등 속에서 구러산 전투에서 사망했다. 부자이는 아들 부양구에게 지도자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그의 가족은 후금에 투항하거나 정략 결혼을 통해 세력 관계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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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이 | |
---|---|
기본 정보 | |
만주어 | Manju |
중국어 | 滿洲 |
몽골어 | Манж |
한국어 | 만주 |
역사 | |
성립 | 1616년 |
멸망 | 1644년 이후 |
주요 사건 |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통일 후금 건국 홍타이지의 국호 변경 (청)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허투알라 (1616년 ~ 1621년) 랴오양 (1621년 ~ 1625년) 선양 (1625년 ~ 1644년) |
주요 인물 | 누르하치 홍타이지 도르곤 |
인구 | |
민족 구성 | 만주족 한족 몽골족 |
문화 | |
언어 | 만주어 중국어 |
기타 | |
존속 기간 | 1616년 ~ 1644년 이후 |
2. 생애
만력(萬曆) 12년(1584), 아버지 칭기야누와 숙부 양기누(楊吉砮|양길노중국어)가 명 장수 이성량(李成梁)에게 살해된 후, 사촌 나림불루(Narimbulu|나림불루mnc)와 함께 여허의 버일러(貝勒)로 즉위하였다. 그는 흩어진 부족 세력을 모으고 하다(哈達)를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조공 칙서(敕書)를 요구하며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시도했다.
만력 16년(1588), 이성량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성이 포위되자 나림불루와 함께 항복하였다. 이들은 조공 칙서를 독점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하다와 칙서를 나누어 갖기로 약속하며 위기를 넘겼다.
이후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Nurhaci|누르하치mnc)가 세력을 키우자 그와 대립하게 되었다. 만력 21년(1593), 부자이는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를 비롯한 9개 부족 연합군의 맹주가 되어 건주여진 정벌에 나섰다(구러산 전투). 그러나 누르하치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구러산(古勒山)에서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은 여허 세력 약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아들 부양구(布揚古|포양고중국어)가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여허부 지도자 즉위
만력 12년(1584), 아버지인 여허의 지도자 칭기야누와 양기누가 명나라 장수 이성량에게 살해되자, 부자이는 양기누의 아들인 나림불루와 함께 여허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즉위하였다.[1] 이들은 흩어진 부족 세력을 모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하다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나림불루는 몽골의 이아등 세력과 연합하여 위원보를 공격했고, 황홀태 세력과 함께 하다부의 하다나라 다이샨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마침 하다부 내부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이 기회를 이용해 하다를 침략하여 왕타이의 아들 캉구루를 사로잡고, 명나라에게 조공을 허가하는 칙서를 요구하였다.[1][2]만력 16년(1588) 음력 2월, 요동순무 고양겸은 이성량에게 군대를 이끌고 여허를 정벌하도록 명령했다. 명나라 군대가 다가오자 부자이는 서쪽 성을 버리고 동쪽 성의 나림불루에게 합류하려 했으나, 이동 중 명군과 만나 교전을 벌인 뒤 동쪽 성으로 후퇴했다. 여허성은 매우 견고하여 명나라 군대는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이성량은 거대한 포를 동원하여 성벽을 공격했고, 마침내 성벽 일부를 무너뜨렸다. 명군은 수레에 운제(사다리차)를 싣고 와 성벽 높이까지 올린 뒤, 그 위에 포를 설치하여 성 안을 직접 공격했다. 큰 위협을 느낀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결국 성을 나와 항복했다. 이들은 명나라에게 조공 칙서를 독점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하다부와 칙서를 나누어 명나라에 조공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성량은 군대를 철수시켰고, 명나라는 이성량에게 499도의 칙서를 내려주었다.[1][2]
2. 2. 하다부 공격과 명나라와의 관계
만력(萬曆) 12년(1584), 여허의 지도자였던 칭기야누와 양기누( 楊吉砮|양길노중국어 )가 명나라 장수 이성량( 李成梁|이성량중국어 )에게 살해되자, 그들의 아들인 부자이와 나림불루( 納林布祿|납림포록중국어 )가 뒤를 이었다. 이들은 힘을 합쳐 하다( 哈達|합달중국어 )부에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나림불루는 몽골 세력과 연합하여 명나라의 위원보(威遠堡)를 공격하는 한편, 다른 세력과 함께 하다부의 다이샨( 歹商|대선중국어 )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마침 하다부 내부에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이 기회를 틈타 하다를 침략하고 왕타이( 王台|왕태중국어 )의 아들 캉구루(康古魯)를 사로잡았다. 이후 이들은 명나라에 조공 무역을 허가하는 문서인 칙서(敕書)를 요구하였다.만력 16년(1588) 음력 2월, 명나라의 요동순무(遼東巡撫) 고양겸( 顧養謙|고양겸중국어 )은 이성량에게 군대를 이끌고 여허를 정벌하도록 명령했다. 명나라 군대가 접근하자 부자이는 서쪽 성을 버리고 나림불루가 있는 동쪽 성으로 이동하려다 명군과 교전 후 후퇴하였다. 여허의 동쪽 성은 방비가 견고하여 명군이 이틀간 공격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이성량은 대포를 동원하여 성벽을 공격했고, 마침내 성벽 일부를 무너뜨렸다. 명군은 수레에 운제(雲梯, 사다리)를 싣고 세운 뒤, 그 위에 대포를 설치하여 성벽과 같은 높이에서 포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큰 위협을 느낀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결국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그들은 칙서를 독점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하다부와 칙서를 나누어 가지며 명나라에 조공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성량은 군대를 철수시켰고, 명나라는 이성량에게 499도(道)의 칙서를 지급하여 여허와 하다에 분배하도록 했다.
2. 3. 이성량의 여허 정벌과 일시적 굴복
만력 12년(1584), 여허의 버일러(貝勒)였던 칭기야누와 양기누가 명나라 장수 이성량에게 살해되자, 두 사람의 아들인 부자이와 나림불루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들은 흩어진 부족 세력을 모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하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나림불루는 몽골의 이아등(以兒鄧)과 연합하여 명나라의 위원보(威遠堡)를 공격하였고, 황홀태(恍惚太)와 연합하여 하다부의 하다나라 다이샨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마침 하다에서는 내부적으로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하다를 침략하였다. 이들은 왕타이의 아들 캉구루(康古魯)를 사로잡고, 명나라에게는 조공을 허가하는 칙서(敕書)를 요구하였다.만력 16년(1588) 음력 2월, 명나라의 요동순무(遼東巡撫) 고양겸은 이성량에게 군대를 이끌고 여허를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다가오자 부자이는 자신이 머물던 서성(西城)을 버리고 동성(東城)의 나림불루에게 합류하려 했으나, 이동 중에 명군과 마주쳐 교전을 벌인 끝에 동성으로 후퇴하였다. 여허성은 매우 견고하여 명군이 이틀 동안 공격했지만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이성량은 거대한 포를 동원하여 성벽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마침내 성벽에 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명군은 포를 실은 수레를 운제(雲梯) 위에 올려 성벽과 같은 높이로 만든 뒤 포격을 가했다. 이러한 강력한 공격에 큰 두려움을 느낀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결국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이들은 명나라 조공 칙서를 독점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앞으로는 하다와 칙서를 나누어 명나라에 조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성량은 여허의 항복을 받아낸 후 군대를 철수시켰고, 명나라 조정은 이 공로로 이성량에게 499도의 칙서를 하사하였다.
2. 4. 건주여진과의 갈등과 구러산 전투
만력 19년(1591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Nurhaci, Nurhaci|누르하치mnc)가 여허에게 토지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만력 21년(1593년), 해서여진의 훌룬(Hūlun gurun, Hūlun gurun|훌룬 구룬mnc) 4부, 즉 울라(Ula, Ula|울라mnc), 하다, 여허, 호이파(Hoifa, Hoifa|호이파mnc) 연합군은 건주여진의 후부차채(胡卜察寨)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같은 해 음력 6월, 해서여진 4부는 몽골의 코르친, 시버, 괄차(卦爾察) 3부, 그리고 골민 샹기얀 알린 지역의 주셔리(朱舍里)와 너연(Neyen, Neyen|너연mnc) 2부와 연합하여 총 9부의 대규모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부자이와 나림불루(Narimbulu, Narimbulu|나림불루mnc)를 공동 맹주로 추대한 연합군은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구러산 전투이다.
부자이는 직접 여허의 군대를 지휘하여 건주여진의 허지거성(赫濟格城)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누르하치는 휘하의 용장 어이두(Eidu, Eidu|어이두mnc)에게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주어 거짓으로 패주하게 함으로써 부자이를 유인하는 계책을 세웠다. 동시에 건주군의 주력은 구러산(古勒山) 일대에 매복시켜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부자이는 누르하치의 계책을 간파하지 못하고, 달아나는 어이두의 군대를 추격하여 구러산 인근까지 깊숙이 들어갔다가 건주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건주군은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통나무(곤목, 滾木) 등을 굴려 공격하였고, 부자이는 이 공격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이때 건주군의 병사 오담(吳談)이 달려들어 부자이를 살해하였다.
총지휘관인 부자이가 전사하자 9부 연합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감행하여 연합군을 대파하였다. 전투 후, 여허로 도주한 나림불루는 누르하치에게 부자이의 시신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누르하치는 부자이의 시신을 둘로 잘라 그 절반만을 돌려보내는 모욕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는 누르하치의 여허에 대한 깊은 적개심과 그의 단호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부자이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부양구가 여허의 버일러 자리를 계승하였다.
2. 5. 죽음과 여파
만력 19년(1591), 건주여진이 해서여진에게 토지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만력 21년(1593) 해서여진의 Hūlun gurun|훌룬 구룬mnc(扈倫) 4부(울라, 하다, 여허, 호이파) 연합군은 건주의 후부차채(胡卜察寨)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같은 해 음력 6월, 훌룬 4부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시버(錫伯), 괄차(卦爾察) 3부 및 골민 샹기얀 알린(長白山)의 주셔리(朱舍里), 너연(訥殷) 2부와 연합하여 총 9개 부족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부자이와 나림불루를 맹주로 삼아 건주여진 정벌에 나섰다(구러산 전투). 부자이는 직접 여허 군대를 이끌고 허지거성(赫濟格城)을 포위 공격하였다.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누르하치는 어이두에게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주어 부자이를 유인하도록 지시했다. 어이두 부대는 거짓으로 패하며 부자이 군대를 구러산(古勒山) 쪽으로 유인했고, 건주군은 미리 구러산에 매복하여 공격을 준비했다. 부자이는 계책을 간파하지 못하고 어이두 군대를 추격하다가 구러산의 매복 지점에 이르렀고, 건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부자이는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滾木)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고, 건주군 병사 오담(吳談)에게 살해되었다.
총지휘관 부자이가 전사하자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건주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히 공격하여 9부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나림불루는 여허로 도주하여 누르하치에게 부자이의 시신 반환을 요구했으나, 누르하치는 부자이의 시신을 반으로 잘라 그 절반만 돌려보냈다. 부자이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부양구(布揚古)가 여허의 버일러 자리를 계승하였다.
3. 가족
- '''처''': 성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들 불항구(布爾杭古)를 따라 후금(後金)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누르하치의 형수로 여겨졌으며, 천명 10년(1625) 누르하치가 연회에 초청한 기록이 있다.[2] 부양구의 모친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3]
- '''아들''': 부양구(Buyanggū, 布揚古)
- '''아들''': 불항구(布爾杭古), 후금에 귀순한 후 어푸(efu, 額駙, 청나라 부마)가 되었다.[2]
- '''딸''': 부양구의 친여동생으로, 다이샨(Daišan, 代善)의 계복진(繼福晉)이 되었다.[3][4]
- '''딸''': 부양구의 여동생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북관로녀(北關老女)이다.
4. 평가 및 의의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만주실록(滿洲實錄)』 卷2
中華書局
[2]
문서
『[[만문로당]](滿文老檔)』 「제64책(第六十四冊)」, "天命十年正月至三月, ……, 又烏拉外姑及葉赫國諸媼, 與我爲敵, 煩苦於我, 何益有之? 然我以孝悌之禮迎來宴請之. 請拜珠虎伯父•郭興阿伯父及烏拉外姑•葉赫布爾杭古額駙之母•德勒格爾阿哥之母•察木布之母(원주 : 烏拉外姑, 乃烏拉國滿泰汗之妻, 汗之岳母. 察木布之母, 乃常柱貝勒之妻, 汗之姐. 布爾杭古之母, 德勒格爾之母, 乃葉赫布寨貝勒•錦泰希貝勒之妻, 汗之嫂.)入中房. 二伯父坐于上炕, 汗以年禮叩拜二伯父, 叩拜四媼."
[3]
문서
『[[청사고]](淸史稿)』 卷223 「열전10(列傳十)」, "諸貝勒圍西城, 布揚古聞東城破, 與布爾杭古使請降, 并請盟無死. 大貝勒曰, 汝輩畏死, 盍以汝母先, 汝母我外姑也, 我寧能殺之. 布揚古母至軍, 大貝勒以刀劃酒, 誓, 飲其半, 使送布揚古•布爾杭古飲其半."
[4]
문서
『[[애신각라종보]](愛新覺羅宗譜)』, 6冊乙二, 3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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