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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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는 1948년에 개최되었으며, 김일성은 이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내 국내 파벌의 파벌주의와 반당 활동을 비판했다. 김일성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당의 규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오기섭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계 인사들이 김일성을 지지하며 국내파를 공격했고, 항일 유격대 파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제2차 당대회 당시 북조선로동당의 당원은 725,762명이었으며, 999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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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회의 - 예리코 회담
1948년 12월 1일 예리코에서 열린 예리코 회담은 제1차 중동 전쟁 이후 압둘라 1세의 주도로 팔레스타인 잔여 영토의 요르단 합병을 결의했으나, 아랍 연맹의 반발과 팔레스타인 내부 이견으로 논란이 된 사건이다. -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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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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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 | |
개요 | |
대회 명칭 |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 |
개최 장소 | 평양 |
개최 기간 | 1948년 3월 27일 ~ 1948년 3월 30일 (4일) |
참가자 | 999명의 대표자 (990명 참석) |
결과 | 제2기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출 제2기 북조선로동당 중앙감사위원회 선출 |
2. 창당 배경 및 초기 역사
朝鮮勞動黨중국어의 기원은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분국은 원래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직되었는데, 이 대회는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원래 8월 20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소련의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제1차 대회(1946년)와 제2차 대회(1948년)가 개최되었다. 제2차 대회에는 당원 725,762명, 당세포 29,763개, 대의원 999명(노동자 446명, 농민 270명, 지식인 234명, 기타 29명)이 참가했으며, 당원의 인구 비는 8%였다.
초기에는 김일성이 아닌 오기섭이 당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시에 도착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결성에 참여했다. 그는 10월 회의에서 북조선분국의 지도자로 선출되지 않았지만, 소련의 지원을 받아 12월 18일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1946년 7월 22일, 북조선분국은 북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과 함께 북조선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다. 이후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북조선신민당과 북조선분국은 합당 대회를 열고,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북조선로동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당을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초대 위원장으로는 김두봉이 선출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김일성에게 있었다. 창당 당시 당원은 366,0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1946년 말에는 40만 명을 넘어섰고, 1947년에는 50만 명, 1948년에는 70만 명 이상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3. 당대회 및 대표자회
3. 1. 제1차 대회 (1946년)
제1차 회의는 김두봉 제1차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제1차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용하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첫 번째 의안은 대회의 임원 선출이었다. 57명의 집행위원회, 7명의 자격 심사 위원회, 9명의 사무국, 당 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15명의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이전 대회와 마찬가지로, 소련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이 대회 명예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의 업적을 찬양하는 결의안이 곧 채택되었다. 3개 조항의 의사일정이 대표단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나머지 시간은 다른 대중 조직과 정당의 축하 메시지로 채워졌다(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남조선로동당에서 온 것으로, 허정숙이 낭독했다). 총 5,287통의 편지와 5,515통의 전보가 대회의 소집을 축하하기 위해 접수되었다.
3. 2. 제2차 대회 (1948년)
김일성은 제2차 당대회에서 제1차 중앙위원회의 사업 보고와 함께 국제 정세를 언급했다. 보고서는 민주 개혁 도입을 칭찬하고 대한민국의 비민주적인 상황을 비난하며, 당 사업의 결함과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설의 주된 내용은 김일성이 구 조선공산당 (CPK) 국내 파벌을 파벌주의와 반당 활동 혐의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국내 공산주의자 대다수는 조선로동당(WPNK) 설립과 조선공산당(CPK)의 분할에 반대했다. 김일성은 당 내 다수가 이를 지지했음에도 불구,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당의 규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오기섭은 현준혁의 후임이자 국내 파벌의 비공식적 수장으로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고, 당대회에서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정달현, 최용달, 이순근, 장시우, 장순명 등도 파벌주의 혐의로 비판받았으며, 이들 대부분은 고위 관리였다.
한일무 등 여러 소련계 한국인들은 오기섭을 "개인 영웅주의"로, 정달현을 파벌주의로 비난하고, 최용달과 이주하가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며, 조중화의 횡령 혐의를 제기하며 이들에게 잘못을 뉘우칠 것을 요구했다. 소련계 한국인 김열은 오기섭과 정달현이 북한에 독립적인 공산당 창설에 반대하고 조선공산당(CPK) 중앙 지도부의 지시를 받았다고 비난하며, 이들이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부르주아처럼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김열은 장순명이 제1차 중앙 검사 위원회 위원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김일성의 당내 지위 강화에 기여했으며, 연안파는 중립을 유지했다.
오기섭은 압박을 받아 실수를 "인정"했지만, 박창옥의 비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노동 조합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 몰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장시우와 이순근은 사과하고 김일성의 지도력에 충성을 맹세했다. 최용달은 잘못을 인정했지만, 파벌주의 혐의는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허가이는 사과를 비판하며, 개인적 존엄성을 옹호하고 당의 이미지를 희생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공산주의자 조용하는 오기섭을 옹호하며, 그의 입장이 과도기적 단계의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정달현은 모든 혐의를 수용했고, 장순명은 더 나아가 모든 혐의와 실수를 인정했다.
김일성은 결론에서 오기섭, 최용달, 정달현의 "자기 비판에는 내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오기섭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신경제정책 관련 저작물을 표절했다는 비난과 함께 "허세와 오만"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일성은 최달현의 북조선 분국 반대 역시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최용달이 "전 일본 협력자[점령 기간 동안 일본에 의해 투옥된 사람들]"를 끌어들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북한과 남한의 노동자당을 대립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소련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내파를 공격했다. 국내파 간부 대다수는 서울의 당에 친밀감을 느끼고 김일성의 지도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연안파는 침묵했고, 무정은 비난에 대답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국내파는 그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어려웠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과 그의 동맹들은 일본과 협력했던 모든 북조선로동당(WPNK) 구성원들을 숙청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국내파였다.
허가이의 제안에 따라, 11명의 위원회(5명의 정치위원회 위원과 6명의 도 위원장으로 구성)는 제2차 중앙위원회 후보자 명단을 작성했다. 김일성은 정위원 63명, 후보위원 20명을 제안했고, 위원회는 뛰어난 간부, 직책, 새로운 간부, 과거 징계 여부 등 4가지 기준에 따라 후보자를 선택했다. 후보자들은 이력 공개 후 선출되었으며, 오기섭을 제외한 모든 정위원 후보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김두용만이 한 표의 반대로 후보위원에 선출되지 못했다. 7명의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제2차 중앙위원회는 총 63명의 신임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30명이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최용달과 정달현은 재선되지 않았다. 강건, 김광협, 김경석, 박금철이 중앙위원회에 선출되면서 항일유격대 파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제2차 중앙위원회 내에서 가장 큰 단일 그룹은 국내파였다.
3. 3. 대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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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 조직 및 구조
북조선로동당은 중앙위원회와 그 아래 여러 위원회를 두어 당을 운영했다. 중앙위원회는 당의 주요 의사 결정을 담당하는 핵심 기구였다.
제2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자들을 선정하기 위해 11명의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후보자를 선택할 때 다음과 같은 기준을 고려했다.
- 뛰어난 간부인지 여부
- 정부, 군대, 당 기구 등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여부
- 새로운 간부인지 여부
- 과거 징계를 받은 공산주의자인지, 그리고 "훌륭한 공산주의자"로 판단되는지 여부
이러한 기준에 따라 선정된 후보자들은 대회에서 투표를 거쳐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 1. 중앙위원회
허가이의 제안에 따라, 5명의 정치위원회 위원과 6명의 도 위원장으로 구성된 11명의 위원회가 제2차 중앙위원회 후보자 명단을 작성했다. 작업이 완료되자 김일성은 정위원 63명, 후보위원 20명을 제안했다. 김일성에 따르면, 위원회는 다음의 4가지 기준에 따라 후보자를 선택했다.- 뛰어난 간부인지
- 정부, 사회주의 군대 또는 당 기구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 새로운 간부인지
- 과거에 징계를 받은 공산주의자인지, "기본적으로 훌륭한 공산주의자"로 결론이 났는지
후보자들은 개인적인 이력을 대회에 밝힌 후 주어진 순위대로 선출되었다. 오기섭을 제외한 모든 정위원 후보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참석한 990명의 대의원 중 5명이 그의 후보에 반대표를 던졌다. 후보위원 선출에서도 김두용만이 한 표의 반대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지 않았다. 7명의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이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제2차 중앙위원회는 총 63명의 신임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30명이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재선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최용달과 정달현이 있었다. 강건, 김광협, 김경석, 박금철이 중앙위원회에 선출되면서 항일유격대 파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중앙위원회 내에서 가장 큰 단일 그룹은 국내파였다.
제2차 당대회 이후 3월 30일에 제2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절차에 따라 7명으로 구성된 제1기 정치위원회를 선출했으며, 당 위원장과 2명의 부위원장이 정치위원회에서 활동해야 했다. 김두봉이 위원장으로 재선출되었으며, 김일성과 주영하가 부위원장으로 재선출되었다. 허가이, 최창익을 포함한 제1기 정치위원회 위원들은 모두 재선출되었으며, 김책, 연안파 출신인 박일우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4. 2. 정치국
당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당의 일상 사업을 지도한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정치국의 핵심 권력 기구이다. 제2차 당대회 이후 3월 30일에 제2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절차에 따라 제1기 정치위원회(7명으로 구성)를 선출했으며, 당 위원장과 2명의 부위원장이 정치위원회에서 활동해야 했다. 김두봉이 위원장으로 재선출되었으며, 김일성과 주영하가 부위원장으로 재선출되었다. 제1기 정치위원회 위원들은 모두 재선출되었으며(나머지 2명은 허가이와 최창익이었다), 김책, 연안파 출신인 박일우가 새롭게 추가되었다.4. 3. 비서국
당의 행정 및 실무는 57명의 집행위원회, 7명의 자격 심사 위원회, 9명의 사무국, 그리고 당 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15명의 위원회 선출을 통해 담당하게 되었다.4. 4. 검사위원회
김두봉 제1차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최용하 제1차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제1차 회의에서는 57명의 집행위원회, 7명의 자격 심사 위원회, 9명의 사무국, 당 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15명의 위원회가 선출되었다.5. 통계
항목 | 수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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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수 | 725,762명 |
당세포 수 | 29,763개 |
대의원 수 | 999명 (9명 불참) |
대의원 구성 | 노동자 446명, 농민 270명, 지식인 234명, 기타 29명 |
당원의 인구비 | 8% |
6. 파벌 투쟁
김일성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사업 보고에서 구 조선공산당 (CPK)의 국내 파벌이 파벌주의와 반당 활동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파를 동원하여 국내파를 공격하게 했으며, 연안파는 중립을 지켰다.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파는 김일성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어려웠다.
허가이의 제안에 따라, 11명의 위원회(5명의 정치위원회 위원과 6명의 도 위원장)는 제2차 중앙위원회 후보자 명단을 작성했다. 김일성은 정위원 63명, 후보위원 20명을 제안했다. 후보자들은 개인 이력을 밝힌 후, 오기섭을 제외한 모든 정위원 후보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990명의 대의원 중 5명이 오기섭 후보에 반대표를 던졌다. 김두용은 후보위원 선출에서 한 표의 반대표를 받았다. 7명의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제2차 중앙위원회는 총 63명의 신임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30명이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재선되지 않은 사람 중에는 최용달과 정달현이 있었다. 강건, 김광협, 김경석, 박금철이 중앙위원회에 선출되면서 항일유격대 파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6. 1. 국내파
김일성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사업 보고에서 구 조선공산당 (CPK)의 국내 파벌이 파벌주의와 반당 활동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에 남아있던 대다수의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로동당(WPNK)의 설립과 조선공산당(CPK)을 북부와 남부로 분할하는 것에 대체로 반대했다. 김일성은 비록 당 내 다수가 WPNK와 WPSK의 설립을 지지했지만,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당의 규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국내 파벌의 비공식적 수장인 오기섭은 현준혁의 후임으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당대회에서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파벌주의 혐의를 받은 다른 사람으로는 정달현, 최용달, 이순근, 장시우, 장순명이 있었다. 비난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고위 관리였는데, 예를 들어 정용달은 사법국장, 이순근은 농림국장, 장시우는 상업국장을 역임했다.
김일성의 첫 비판 이후, 여러 소련계 한국인들이 공격을 이어갔는데, 한일무는 오기섭을 "개인 영웅주의"로 비난하고, 정달현을 파벌주의로 비난했으며, 최용달과 이주하가 중앙 당 지도부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고, 조중화의 횡령 혐의를 제기하며, 그들 모두에게 당대회에서 잘못을 뉘우칠 것을 요구했다. 소련계 한국인 김열은 오기섭과 정달현이 북한에 독립적인 공산당을 창설하는 것에 반대하는 동시에 조선공산당(CPK) 중앙 지도부의 지시를 받았다고 비난했다. 그는 두 사람이 북한에서 공산주의에 유리한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반봉건적인 소부르주아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열은 연설 후반부에서 장순명에 대해 비난을 이어가며 그가 제1차 중앙 검사 위원회 위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오기섭은 압박을 받아 당대회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는 1946년 2월에 열린 북조선 분국의 제4차 전체 회의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인정했으며, 1946년 김일성에게 한 사과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 이후로 이중적인 행동을 해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창옥의 자신에 대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노동국장으로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 조합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 몰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오기섭은 김열의 자신에 대한 비판이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 장시우와 이순근은 오기섭과 마찬가지로 당대회에 사과했지만, 그와 달리 비판을 수용하고 김일성의 지도력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최용달은 잘못을 인정했지만, 파벌주의에 참여하고 중앙 당 지도부로부터 독립적인 권력 중심지를 만들었다는 혐의는 완전히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회의가 재개되었을 때, 허가이 (소련계 한국인)는 모든 사과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충격적인 연설"을 했는데 (오기섭과 최용달의 사과에 초점을 맞춤), 그들이 당의 이미지를 희생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존엄성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공산주의자인 조용하는 오기섭을 옹호하며, 그의 노동조합에 대한 입장은 북한 사회가 겪고 있는 과도기적 단계의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사과에서 정달현은 "변호나 반박" 없이 모든 혐의를 수용했다. 그러나 장순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혐의를 수용하고 자신이 비난받았던 실수를 인정했다.
김일성은 오기섭, 최용달, 정달현을 지명하여 비판하며, 그들이 한 "자기 비판에는 내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오기섭은 많은 비판의 중심이 되었는데, 김일성은 오기섭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아이디어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신경제정책에 초점을 맞춘 저작물에서 표절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그의 인격을 비판하며, "허세와 오만"했고, 북조선 분국장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 없이 북조선 분국의 사업에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최달현의 북조선 분국 반대 역시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최용달이 "전 일본 협력자[점령 기간 동안 일본에 의해 투옥된 사람들]"를 끌어들였다고 비판했다.
김일성은 경쟁자들과의 첫 대립에서, 소련계들을 동요하여 국내파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국내파에 속한 간부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서울의 당에 친밀감을 느끼고 김일성의 지도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연안파에 속한 간부들은 대회 기간 동안 발언하지 않았으며, 김두봉과 최창익과 같은 주요 인물들은 침묵을 지켰다. 오기섭은 그들을 개입시키려 무정을 "개인 영웅주의" 혐의로 비난했지만, 무정은 대답하지 않았고 김일성은 오기섭이 무정을 자신에 대한 논쟁으로 끌어들였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파가 김일성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이는 어느 정도 그를 제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번 대회에서 김일성과 그의 동맹들은 점령 기간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일본과 협력했던 모든 북조선로동당(WPNK) 구성원들을 숙청했다. 다른 파벌들은 점령 기간 동안 해외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국내파에 속했다.
제2차 중앙위원회 내에서 가장 큰 단일 그룹은 국내파였다.
6. 2. 소련파
김일성의 첫 비판 이후, 여러 소련계 한국인들이 공격을 이어갔다. 한일무는 오기섭을 "개인 영웅주의"로 비난하고, 정달현을 파벌주의로 비난했으며, 최용달과 이주하가 중앙 당 지도부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고, 조중화의 횡령 혐의를 제기하며, 그들 모두에게 당대회에서 잘못을 뉘우칠 것을 요구했다. 소련계 한국인 김열은 오기섭과 정달현이 북한에 독립적인 공산당을 창설하는 것에 반대하는 동시에 조선공산당 중앙 지도부의 지시를 받았다고 비난했다. 그는 두 사람이 북한에서 공산주의에 유리한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반봉건적인 소부르주아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열은 연설 후반부에서 장순명에 대해 비난을 이어가며 그가 제1차 중앙 검사 위원회 위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이 시점에서 소련계 한국인들은 김일성의 당내 지위를 공고히하는 데 기여하고 있었는데, 김일성과 그의 동맹 세력이 국내 파벌에 대항하는 투쟁 동안 연안파는 중립을 유지했다.허가이 (소련계 한국인)는 모든 사과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충격적인 연설"을 했는데(오기섭과 최용달의 사과에 초점을 맞춤), 그들이 당의 이미지를 희생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존엄성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경쟁자들과의 첫 대립에서, 소련계들을 동요하여 국내파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6. 3. 연안파
제2차 대회에서 김일성과 그의 동맹 세력은 국내파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연안파는 중립을 지켰다.6. 4. 항일빨치산파
김일성은 제2차 대회에서 구 조선공산당 국내파가 파벌주의와 반당 활동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에 남아있던 사람들로, 조선로동당(WPNK) 설립과 조선공산당(CPK)의 북부와 남부 분할에 대체로 반대했다. 국내파의 비공식적 수장인 오기섭은 현준혁의 후임으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정달현, 최용달, 이순근, 장시우, 장순명 등이 파벌주의 혐의를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고위 관리였다.한일무 등 여러 소련파 인사들은 오기섭을 "개인 영웅주의"로, 정달현을 파벌주의로 비난하고, 최용달과 이주하가 당 지도부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김열은 오기섭과 정달현이 북한에 독립적인 공산당을 창설하는 것에 반대하는 동시에 조선공산당(CPK) 중앙 지도부의 지시를 받았다고 비난하며, 이들이 반봉건적인 소부르주아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압박을 받은 오기섭은 당대회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박창옥의 비판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 조합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 몰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장시우와 이순근은 사과하고 김일성의 지도력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최용달은 파벌주의 혐의를 부인했다. 허가이는 사과를 비판하며, 이들이 당의 이미지를 희생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존엄성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오기섭, 최용달, 정달현의 "자기 비판"에 내용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기섭의 노동조합주의 아이디어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신경제정책에서 표절된 것이라고 비난하며, "허세와 오만"하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최달현의 북조선 분국 반대 역시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최용달이 "전 일본 협력자"를 끌어들였다고 비판했다.
김일성은 소련파를 동원하여 국내파를 공격하게 했다. 연안파는 중립을 지켰다.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파는 김일성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어려웠다. 이번 대회에서 김일성과 그의 동맹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과 협력했던 모든 북조선로동당(WPNK) 구성원들을 숙청했다. 다른 파벌들은 해외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국내파에 속했다.
강건, 김광협, 김경석, 박금철이 중앙위원회에 선출되면서 항일유격대 파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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