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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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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스마르크 해 해전은 1943년 3월 2일부터 4일까지 비스마르크 해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일본군이 뉴기니의 라에 지역으로 병력을 수송하려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전투이다. 연합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군의 수송 계획을 파악하고, 반사 폭격 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 수송선단을 격멸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병력 손실과 전략적 실패를 겪었고, 연합군은 동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서 주도권을 강화했다. 전투 이후 연합군은 생존자들을 공격하는 등 논란이 있었으며, 일본군은 이 작전의 실패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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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해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명칭비스마르크해 해전
영어 명칭Battle of Bismarck Sea
일본어 명칭ビスマルク海海戦 (비스마르크 해 해전)
전투 정보
시기1943년 3월 2일 ~ 1943년 3월 4일
장소비스마르크해, 라에 근방
결과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연합군
지휘관
연합군에니스 화이트헤드
조 휴이트
조지 케니
모턴 C. 멈마
배리 K. 앳킨스
일본군미카와 군이치
기무라 마사토미
이마무라 히토시
구사카 진이치
아다치 하타조
나카노 히데미츠
이타하나 요시카즈
기무라 쇼후쿠
이치마루 리노스케
전력
연합군중폭격기 39대
중형 폭격기 41대
경폭격기 34대
전투기 54대
어뢰정 10척
일본군구축함 8척
수송선 8척
항공기 100대
(구원 부대) 구축함 1척
(구원 부대) 대발동정 부대
(구원 부대) 잠수함 부대
피해 규모
연합군폭격기 2대 파괴
전투기 4대 파괴
13명 사망
일본군수송선 8척 침몰
구축함 4척 침몰
전투기 20대 파괴
2,890명 이상 사망
관련 정보
전쟁태평양 전쟁
전역뉴기니 전역
남서 태평양 전역

2. 배경

1942년 12월 23일, 일본 고위장성은 뉴기니의 라에 지역 병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서 약 105,000명의 병력을 수송하기로 결정했다.[82] 이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패배하여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1943년 2월 말, 제20사단 및 40사단은 웨와크와 뉴기니섬으로 안전하게 후송되었다. 1942년 12월과 1943년 1월에 제51보병사단이 라바울로 무사히 당도하였고, 원래 강화하려던 일본 병력은 과달카날섬에 있었으나, 일본군의 퇴각으로 51사단은 뉴기니섬의 라에로 수송하는 것이 결정되었다.[15] 이 수송 작전은 연합군 공군이 매우 강했던 비티아즈 해협을 통과해야 했기에 위험한 작전이었다.

2월 28일, 호위선단은 여덟 대의 구축함과 여덟 대의 수송선, 그리고 라바울의 심슨항에서 출발한 약 100대의 전투기로 구성되어 작전을 위해 집결했다. 제51사단장 나카노 히데미쓰 중장은 구축함 유키카제를, 제3구축함 비행편대 지휘관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은 구축함 시라유키를 탔다.

과달카날 전투와 부나-고나 전투를 검토한 일본군은 두 곳 모두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본영제2차 세계 대전 남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아오키 주세이중장의 제20사단을 한국에서 과달카날로, 아베 헤이스케중장의 제41사단을 중국에서 라바울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11] 이마무라 히토시중장은 아다치 하타조중장의 제18군에게 뉴기니의 마당, 웨와크, 툴루부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12월 29일, 아다치는 오카베 토루소장 지휘 하의 제102보병연대와 다른 부대들에게 라바울에서 로 이동하여 내륙으로 진격, 와우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5] 1월 4일 과달카날 철수 결정 후,[6] 일본군은 우선 순위를 솔로몬 제도에서 뉴기니로 전환하고 제20사단과 제41사단을 웨와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11]

박물관에 전시된 프로펠러 항공기. 날개 끝이 접혀 있다.


1943년 1월 5일, 오카베 부대를 태운 수송선 5척과 구축함 5척으로 구성된 호송선단은 라바울에서 레로 출발했다. 울트라의 사전 경고를 받은 미국 육군 항공대 (USAAF)와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RAAF) 항공기가 호송선단을 발견, 추적하여 공격했다.[68] 연합군은 일본기 69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8] RAAF 컨솔리데이티드 PBY 카탈리나가 수송선 를 격침시켰다.[9] 구축함이 탑승자 1,100명 중 739명을 구조했지만, 배는 오카베의 모든 의약품을 싣고 침몰했다. 는 USAAF 노스 아메리칸 B-25 미첼의 공격으로 레에서 심하게 파손되어 해변으로 좌초되었다. 호송선단은 1월 7일 레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켰지만, 오카베는 와우 전투에서 패배했다.[10]

제20사단의 대부분은 1943년 1월 19일 해군 고속 수송선을 통해 웨와크에 상륙했다. 제41사단의 주력 부대는 2월 12일에 뒤따랐다.[11] 이마무라 히토시중장미카와 군이치중장은 3월 3일 제18군 사령부와 제51사단의 주력을 라바울에서 레로 이동시키고, 3월 10일 제20사단의 잔여 병력을 마당으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세웠다.[12] 이 계획은 연합군 공군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위험했다. 제18군 참모들은 수송선 10척 중 4척 손실과 항공기 30~40대 손실을 예측하는 군사 시뮬레이션 모의 전쟁을 실시, 작전 성공 확률을 50%로 예상했다. 병력을 마당에 상륙시키면 도로가 없는 험난한 늪지, 산악, 정글 지형을 140 마일 (230 킬로미터) 이상 행군해야 했다.[13] 호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제국 해군은 항공모함 의 전투기 부대 소속 전투기 18기를 트루크에서 카비엥으로 임시 파견했다.[14]

1942년(쇼와 17년) 12월 31일 대본영 어전 회의에서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서의 철수를 정식으로 결정했다. 과달카날섬 철수 후, 북부~중부 솔로몬 열도의 방비를 강화함과 동시에, 동부 뉴기니에서의 작전도 중시하게 되었다. (다음 해 1월 4일, 대륙명 제732호, 대해령 제23호 등) 쇼와 천황은 "단지 과섬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어딘가에서 공세에 나서야 한다."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대본영은 뉴기니 작전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대본영 육군부는 육지로 연결된 뉴기니 전선이라면 질 리가 없고, 포트모르즈비 포위도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하다고 보았다.

1943년(쇼와 18년) 2월 1일부터 2월 7일에 걸쳐,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했다. (과달카날 섬 철수 작전) 동시기, 연합군은 뉴기니 섬 방면에서도 공세를 취했고, 일본군은 파푸아뉴기니 방면 전투에서도 궁지에 몰렸다.

일본군은 대본영(쇼와 천황 참석) 지시 하에, 연합군의 다음 공격 목표로 예측되는 파푸아뉴기니의 각 거점에 육군 부대를 보내 침공에 대비하기로 했다.[82] 이 작전에 투입된 제51사단은 과달카날 섬 공방전 투입을 예정하고 12월 중순에 중국 대륙에서 라바울에 도착했다.(8호 훈련 수송) 과달카날섬 공방전의 전황 변화 및 종결에 따라 라바울에서 발이 묶여 있던 부대였다.

팔십일호 작전은 일본 육군 제18군 (사령관 아다치 니쥬산 육군 중장) 휘하의 제20사단, 제41사단, 제51사단을 가지고 동부 뉴기니 요충지 (라에, 사라모아, 마단, 웨와크)를 증강하는 작전이다. 작전을 입안한 제8방면군 참모 스기타 이치지 육군 대좌는 "8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가 있어서 팔십일호 작전이라고 이름 붙였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팔십일호 작전은 3단계 작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육군 제41사단을 뉴기니 중부 북안 웨와크로 수송하는 "병호 수송" (해군 측 호칭은 "병3호 작전") (2월 하순)
  • 육군 제51사단을 라에로 수송 선단을 가지고 수송하는 '팔십일호 작전 라에 수송' (본 항목)
  • 육군 제20사단 (사단장 아오키 시게마사 육군 중장) 을 뉴기니 섬 북안 마단으로 수송하는 작전이다.


2월 13일, 제8방면군과 남동 방면 부대 사이에 팔십일호 작전에 관한 현지 협정이 체결된다. '팔십일호 작전'의 호칭명은 이 현지 협정으로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항공 작전에 대해서도 현지 협정이 맺어졌다.

팔십일호 작전의 가장 큰 과제는 선단의 항공 호위였다. 당시 남동 방면에서는, 뉴기니 방면의 보급 수송의 엄호는 일본 육군이, 남동 방면 전역에서의 해상 작전과 솔로몬 제도 방면 항공 작전은 일본 해군의 분담이었다 (1월 3일, 중앙 육해군 협정에 의함).

일본군의 작전에서는, 2월 28일 (3월 1일 오전 0시 0분)에 라바울을 출항하여 3월 3일 저녁에 라에에 도착·양륙 예정이었다. 일본 육군 선박 부대가 라에에 선행하여, 사전에 양륙 준비를 한다. 동시에 적 항공 전력을 공폭에 의해 약화시키는 계획이었으며, 야간 폭격이 실시되었다.

한편, 연합군은 일본군이 라에 지구의 방어를 굳힐 것으로 예상했고, 일본군 수송선단이 라에와 사라와에 무사히 도착하여 일본군이 증강되면 뉴기니 방면의 연합군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었다. 이에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제5공군 사령관 조지 케니 중장에게 대응을 명령했다.

연합군은 일본군 수송선단 격멸을 위해 반사 폭격(skip bombing영어) 전술을 활용했다.[94] 이 전술은 저공에서 해면에 폭탄을 투하하여 해면에서 점프시켜 목표에 명중시키는 방식으로, 수평 폭격에 비해 명중률이 높았다.[94] 저공 비행으로 대공 포화를 받을 확률도 높아지지만, 증설된 기총으로 적 함선의 대공 능력을 약화시켜 피해 감소를 꾀했다.

멜버른워싱턴 D.C.의 해군 암호 해독자들은 일본이 웨왁, 마당, 라에에 호송대를 상륙시키려는 의도를 밝히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했다.[15] 암호 해독자들은 구축함과 6척의 수송선이 3월 5일경 라에에 도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 제11 항공 함대의 메시지를 해독했다. 또 다른 보고서는 그들이 3월 12일까지 라에에 도착할 것이라고 나타냈다.[15]

조지 케니는 2월 2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사무실에서 이 울트라 정보를 읽었다. 케니는 준장 에니스 화이트헤드, 제5공군 부사령관, 그리고 뉴기니에 있는 진격 전대(ADVON) 사령관에게 전달될 명령서를 작성했다.[18] 제5공군의 특이한 지휘 체계에 따라 화이트헤드는 뉴기니에 있는 모든 유형의 연합군 공군 부대를 통제했다.[16] 여기에는 No. 9 작전 그룹 RAAF로 편성된 RAAF 부대도 포함되었으며, 공군 준장 조 휴잇이 지휘했다.[17]

케니는 화이트헤드에게 호송대 예정일을 알리고, 통상적인 일본의 호송대 사전 공습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또한 호송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허용하기 위해 비행 시간을 줄이고, 가능한 한 많은 항공기를 전진 배치하여 인근의 점령된 도보두라 주변 비행장에 가깝게 배치하도록 지시했으며, 그곳에서는 오웬 스탠리 산맥 상공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18] 케니는 2월 26일 포트모르즈비로 날아가 화이트헤드를 만났다. 두 장군은 이 지역의 전투기 및 폭격기 부대를 시찰하고 비티아즈 해협에서 일본 호송대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케니는 2월 28일 브리즈번으로 돌아왔다.[19]

연합군은 2월 29일에 일본군의 라에 수송에 대한 경보를 발령했다. 3월 5일경에 일본군이 라에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 미국 육군 항공대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포트모르즈비와 부나에 항공기를 집결시켜 3월 1일에는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또한 연합군은 파푸아뉴기니의 밀른 만에 모턴 C. 맘마 해군 중령이 이끄는 어뢰정 부대를 배치하여 일본군 수송 선단 격멸에 투입했다.

2. 1. 연합군의 반격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한 지 6개월 만에,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2] 전략적 주도권을 잡은 미국과 연합군은 1942년 8월 남부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솔로몬 제도 전역을 시작했다.[2] 과달카날 전투는 1943년 2월 초 일본군이 섬에서 철수하면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2] 동시에, 뉴기니의 호주군과 미군은 일본의 코코다 트랙을 따라 진행된 육상 공세를 격퇴했다.[2] 공세로 전환한 연합군은 부나-고나를 점령하여 그 지역의 일본군을 섬멸했다.[3]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연합군의 반격 작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에 있는 주요 일본 기지를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후에 작전명 휠로 공식화되어 궁극적으로 필리핀을 재정복하는 길을 열었다.[4] 한편, 연합군은 일본군이 라에 지구의 방어를 굳힐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군 수송선단이 라에와 사라와에 무사히 도착하여 일본군이 증강되면, 간신히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뉴기니 방면의 연합군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휘하의 제5공군에 대응을 명령한다.

일본군 수송선단 격멸을 목표로 하는 연합국군 항공 부대는(비스마르크 해 해전, 전투 서열) 반사 폭격(skip bombing영어)을 통해 일본군 수송 작전을 저지하려 했다. 이것은 저공·근거리에서 해면에 폭탄을 투하하여 해면에서 점프시켜 목표에 명중시키는 전법이다. 수평 폭격에 비해 명중률이 높다. 반면, 저공 비행으로 대공 포화를 받을 확률도 높아지지만, 증설된 기총으로 적 함선의 대공 능력을 약화시켜 피해 감소를 꾀했다.

연합군은 일본군의 선단 운항에 대해서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2월 19일에 연합군의 정보 기관은 일본군의 라에 지구에 대한 새로운 증원에 대해 경고했고, 2월 28일에는 연합군의 정보 담당자가 라에 증원 부대 상륙일을 3월 5일, 마당 증원 부대 상륙일을 3월 12일경으로 예보했다.[94] 연합군은 2월 29일에 일본군의 라에 수송에 대한 경보를 발령했다. 3월 5일경에 일본군이 라에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 미국 육군 항공대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포트 모레스비와 부나에 항공기를 집결시켜 3월 1일에는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또한 연합군은 파푸아뉴기니의 밀른 만에 모턴 C. 맘마 해군 중령이 이끄는 어뢰정 부대를 배치하여, 제50임무부대 제1군이라고 칭했다. 이 어뢰정 부대도 일본군 수송 선단 격멸에 투입되었다.

2. 2. 일본군의 뉴기니 증원 계획

1942년 12월 23일, 일본 고위장성은 뉴기니의 라에 지방 병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서 약 105,000명의 병력을 차출하여 수송하기로 결정했다.[82] 다음 주, 과달카날 해전 패배로 일본군의 퇴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연합국이 공격할 것으로 예상한 라에 근방에 병력을 배치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병력 재배치는 일본 해상 수송력에 큰 부담이었지만, 고위장성은 군사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43년 2월 말, 제20사단 및 40사단은 웨와크와 뉴기니섬으로 안전하게 후송되었다. 1942년 12월과 1943년 1월에 라바울에 도착한 제51보병사단은 원래 과달카날섬에 증원될 예정이었으나, 일본군이 섬에서 퇴각함에 따라 뉴기니섬의 라에로 수송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 사단의 병력 수송은 연합군 공군이 매우 강했던 비티아즈 해협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위험한 작전이었다.

과달카날 전투와 부나-고나 전투를 검토한 일본군은 두 곳 모두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본영제2차 세계 대전 남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아오키 주세이중장의 제20사단을 한국에서 과달카날로, 아베 헤이스케중장의 제41사단을 중국에서 라바울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11] 이마무라 히토시중장은 아다치 하타조중장의 제18군에게 뉴기니의 마당, 웨와크, 툴루부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12월 29일, 아다치는 오카베 토루소장 지휘 하의 제102보병연대와 다른 부대들에게 라바울에서 로 이동하여 내륙으로 진격, 와우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5] 1월 4일 과달카날 철수 결정 후,[6] 일본군은 우선 순위를 솔로몬 제도에서 뉴기니로 전환하고 제20사단과 제41사단을 웨와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11]

1943년 1월 5일, 오카베 부대를 태운 수송선 5척과 구축함 5척으로 구성된 호송선단은 라바울에서 레로 출발했다. 울트라의 사전 경고를 받은 미국 육군 항공대 (USAAF)와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RAAF) 항공기가 호송선단을 발견, 추적하여 공격했다.[68] 연합군은 일본기 69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8] RAAF 컨솔리데이티드 PBY 카탈리나가 수송선 를 격침시켰다.[9] 구축함이 탑승자 1,100명 중 739명을 구조했지만, 배는 오카베의 모든 의약품을 싣고 침몰했다. 는 USAAF 노스 아메리칸 B-25 미첼의 공격으로 레에서 심하게 파손되어 해변으로 좌초되었다. 호송선단은 1월 7일 레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켰지만, 오카베는 와우 전투에서 패배했다.[10]

제20사단의 대부분은 1943년 1월 19일 해군 고속 수송선을 통해 웨와크에 상륙했다. 제41사단의 주력 부대는 2월 12일에 뒤따랐다.[11] 이마무라 히토시중장미카와 군이치중장은 3월 3일 제18군 사령부와 제51사단의 주력을 라바울에서 레로 이동시키고, 3월 10일 제20사단의 잔여 병력을 마당으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세웠다.[12] 이 계획은 연합군 공군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위험했다. 제18군 참모들은 수송선 10척 중 4척 손실과 항공기 30~40대 손실을 예측하는 군사 시뮬레이션 모의 전쟁을 실시, 작전 성공 확률을 50%로 예상했다. 병력을 마당에 상륙시키면 도로가 없는 험난한 늪지, 산악, 정글 지형을 140 마일 (230 킬로미터) 이상 행군해야 했다.[13] 호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제국 해군은 항공모함 의 전투기 부대 소속 전투기 18기를 트루크에서 카비엥으로 임시 파견했다.[14]

1942년(쇼와 17년) 12월 31일 대본영 어전 회의에서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서의 철수를 정식으로 결정했다. 과달카날섬 철수 후, 북부~중부 솔로몬 열도의 방비를 강화함과 동시에, 동부 뉴기니에서의 작전도 중시하게 되었다. (다음 해 1월 4일, 대륙명 제732호, 대해령 제23호 등) 쇼와 천황은 "단지 과섬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어딘가에서 공세에 나서야 한다."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대본영은 뉴기니 작전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대본영 육군부는 육지로 연결된 뉴기니 전선이라면 질 리가 없고, 포트모르즈비 포위도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하다고 보았다.

1943년(쇼와 18년) 2월 1일부터 2월 7일에 걸쳐,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했다. (과달카날 섬 철수 작전) 동시기, 연합군은 뉴기니 섬 방면에서도 공세를 취했고, 일본군은 파푸아뉴기니 방면 전투에서도 궁지에 몰렸다.

일본군은 대본영(쇼와 천황 참석) 지시 하에, 연합군의 다음 공격 목표로 예측되는 파푸아뉴기니의 각 거점에 육군 부대를 보내 침공에 대비하기로 했다.[82] 이 작전에 투입된 제51사단은 과달카날 섬 공방전 투입을 예정하고 12월 중순에 중국 대륙에서 라바울에 도착했다.(8호 훈련 수송) 과달카날섬 공방전의 전황 변화 및 종결에 따라 라바울에서 발이 묶여 있던 부대였다.

2월 28일, 호위선단은 여덟 대의 구축함과 여덟 대의 수송선, 그리고 라바울의 심슨항에서 출발한 약 100대의 전투기로 구성되어 작전을 위해 집결했다. 제51사단장 나카노 히데미쓰 중장은 구축함 유키카제를, 제3구축함 비행편대 지휘관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은 구축함 시라유키를 탔다.

팔십일호 작전은 일본 육군 제18군 (사령관 아다치 니쥬산 육군 중장) 휘하의 제20사단, 제41사단, 제51사단을 가지고 동부 뉴기니 요충지 (라에, 사라모아, 마단, 웨와크)를 증강하는 작전이다. 작전을 입안한 제8방면군 참모 스기타 이치지 육군 대좌는 "8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가 있어서 팔십일호 작전이라고 이름 붙였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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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제8방면군과 남동 방면 부대 사이에 팔십일호 작전에 관한 현지 협정이 체결된다. '팔십일호 작전'의 호칭명은 이 현지 협정으로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항공 작전에 대해서도 현지 협정이 맺어졌다.

팔십일호 작전의 가장 큰 과제는 선단의 항공 호위였다. 당시 남동 방면에서는, 뉴기니 방면의 보급 수송의 엄호는 일본 육군이, 남동 방면 전역에서의 해상 작전과 솔로몬 제도 방면 항공 작전은 일본 해군의 분담이었다 (1월 3일, 중앙 육해군 협정에 의함).

일본군의 작전에서는, 2월 28일 (3월 1일 오전 0시 0분)에 라바울을 출항하여 3월 3일 저녁에 라에에 도착·양륙 예정이었다. 일본 육군 선박 부대가 라에에 선행하여, 사전에 양륙 준비를 한다. 동시에 적 항공 전력을 공폭에 의해 약화시키는 계획이었으며, 야간 폭격이 실시되었다.

2. 3. 연합군의 정보 입수 및 대응

1942년 12월 23일, 일본 고위장성은 뉴기니의 라에 지역 병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서 약 105,000명의 병력을 수송하기로 결정했다.[15] 이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패배하여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1943년 2월 말, 제20사단 및 40사단은 웨와크와 뉴기니섬으로 안전하게 후송되었다. 1942년 12월과 1943년 1월에 제51보병사단이 라바울로 무사히 당도하였고, 원래 강화하려던 일본 병력은 과달카날섬에 있었으나, 일본군의 퇴각으로 51사단은 뉴기니섬의 라에로 수송하는 것이 결정되었다.[15] 이 수송 작전은 연합군 공군이 매우 강했던 비티아즈 해협을 통과해야 했기에 위험한 작전이었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라에 지구의 방어를 굳힐 것으로 예상했고, 일본군 수송선단이 라에와 사라와에 무사히 도착하여 일본군이 증강되면 뉴기니 방면의 연합군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었다. 이에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제5공군 사령관 조지 케니 중장에게 대응을 명령했다.

연합군은 일본군 수송선단 격멸을 위해 반사 폭격(skip bombing영어) 전술을 활용했다.[94] 이 전술은 저공에서 해면에 폭탄을 투하하여 해면에서 점프시켜 목표에 명중시키는 방식으로, 수평 폭격에 비해 명중률이 높았다.[94] 저공 비행으로 대공 포화를 받을 확률도 높아지지만, 증설된 기총으로 적 함선의 대공 능력을 약화시켜 피해 감소를 꾀했다.

멜버른워싱턴 D.C.의 해군 암호 해독자들은 일본이 웨왁, 마당, 라에에 호송대를 상륙시키려는 의도를 밝히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했다.[15] 암호 해독자들은 구축함과 6척의 수송선이 3월 5일경 라에에 도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 제11 항공 함대의 메시지를 해독했다. 또 다른 보고서는 그들이 3월 12일까지 라에에 도착할 것이라고 나타냈다.[15]

조지 케니는 2월 2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사무실에서 이 울트라 정보를 읽었다. 케니는 준장 에니스 화이트헤드, 제5공군 부사령관, 그리고 뉴기니에 있는 진격 전대(ADVON) 사령관에게 전달될 명령서를 작성했다.[18] 제5공군의 특이한 지휘 체계에 따라 화이트헤드는 뉴기니에 있는 모든 유형의 연합군 공군 부대를 통제했다.[16] 여기에는 No. 9 작전 그룹 RAAF로 편성된 RAAF 부대도 포함되었으며, 공군 준장 조 휴잇이 지휘했다.[17]

케니는 화이트헤드에게 호송대 예정일을 알리고, 통상적인 일본의 호송대 사전 공습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또한 호송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허용하기 위해 비행 시간을 줄이고, 가능한 한 많은 항공기를 전진 배치하여 인근의 점령된 도보두라 주변 비행장에 가깝게 배치하도록 지시했으며, 그곳에서는 오웬 스탠리 산맥 상공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18] 케니는 2월 26일 포트모르즈비로 날아가 화이트헤드를 만났다. 두 장군은 이 지역의 전투기 및 폭격기 부대를 시찰하고 비티아즈 해협에서 일본 호송대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케니는 2월 28일 브리즈번으로 돌아왔다.[19]

연합군은 2월 29일에 일본군의 라에 수송에 대한 경보를 발령했다. 3월 5일경에 일본군이 라에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 미국 육군 항공대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포트 모레스비와 부나에 항공기를 집결시켜 3월 1일에는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또한 연합군은 파푸아뉴기니의 밀른 만에 모턴 C. 맘마 해군 중령이 이끄는 어뢰정 부대를 배치하여 일본군 수송 선단 격멸에 투입했다.

3. 전투 경과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솔로몬해비스마르크해에서 발생한 두 번의 태풍으로 인해 일본군 호위선단은 최고 속도 7노트(13km/h)로 이동하며 며칠 동안 탐지를 피할 수 있었다.[41] 그러나 3월 1일 15시경, 홀맨 곶 북쪽을 정찰하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조종사가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하였다.[42] 미국 중폭격기가 파견되었으나 호위선단을 발견하는데 실패하였다.

3월 2일 오전 10시경, 다른 리버레이터가 호위선단을 발견하였고,[43] 맑은 날씨 덕에 미국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몇몇이 공격하여 ''코쿠세이 마루''를 포함한 세 척의 상선을 침몰시켰다.[36][44] B-17은 뉴브리튼섬에서 발진한 A6M 제로 전투기에게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일본군 조종사는 몇몇 B-17 조종사가 낙하하는 동안 기관총을 발사했고 그들이 착지한 후에도 물에서 공격했다.[45]

''코쿠세이 마루''에 탑승했던 1,500명 이상의 병력 중 800명은 구축함 유키카제와 아사구모에 의해 구조되었다.[44] 이 두 구축함은 호위선보다 빨랐기 때문에 대열에서 이탈하여 라에에 생존자들을 내려놓았다.[44] 다음 날 구축함들은 호위 임무를 계속했다. 호위선은 이송 병력과 두 구축함이 없을 때인 3월 2일 저녁에 다시 공격받았고, 한 대의 수송선이 작은 피해를 입었다.[43]

일본 육군이 방공을 담당하고 있던[95] 3월 1일 오후 2시 15분, 연합군의 B-24 폭격기가 비스마르크 해에서 선단을 발견하고 접촉을 계속했다.[96] 육군 전투기는 접촉기를 격추하지 못했다.[40] 포트모르즈비에는 B-17 중폭격기 약 55대, B-24 중폭격기 60대, B-25 중폭격기 약 50대, B-26 중폭격기 약 40대, A-20 경폭격기 약 30대, 전투기 총 330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여기서 전투기 154대, 경폭격기 34대, 중폭격기 41대, 중폭격기 39대, 총 268대가 출격 준비를 마쳤다.[50] 3월 1일 단계에서는 일본군 수송 선단의 위치가 공격 권외에 있다고 판단되었다.[50] 수색 공격에 출발한 B-17 중폭격기 8대는 악천후로 인해 접촉할 수 없었다.[96] 오후 7시부터 8시 사이에 연합군기가 조명탄을 투하했지만, 선단에 대한 야간 공격은 없었다.[40]

3월 2일의 일본군 수송선단 상공 경계는 11시 45분까지 해군기, 그 이후는 육군기가 예정되어 있었다.[96] 같은 날 아침, 일본군 선단은 뉴브리튼 섬 서쪽 끝 글로스터 곶 북동 해면을 항해하고 있었다.[47] 오전 8시 이후, B-17 폭격기 십여 대와 호위 전투기가 습격했고, B-17대(제64폭격비행대)는 고도 2000m에서 수평 폭격을 감행했다.[40] 수송선 1척(아사히모리마루)이 오전 8시 16분에 직격탄 2발을 맞아 대화재가 발생했고, 오전 9시 26분에 침몰했다.[40] 아이요마루와 겐부마루가 근접탄으로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40]

구축함 아사구모 (제9구축대)와 구축함 유키카제 (제16구축대, 제51사단장 승함)가 아사히모리마루 병원 1,500명 중 약 900명을 구조했다.[40] 구축함 2척은 제9구축대 사령관 고니시 요닌 대좌(아사구모 탑승)의 지휘 아래 선단에서 선행하여[96], 라에로 향했다[40] B-17은 1대가 격추되었고, 14대가 손상되었다. 제로센의 손해는 1대였다.[96]

이 사태를 받아 제8함대 사령장관 미카와 군이치 중장(외남양부대 지휘관)은 대기하고 있던 구축함 하츠유키 (제11구축대)에 출격과 구조를 명령했다.[98] 제8함대 사령부(미카와 장관, 오니시 참모장, 신시게노리 참모 등)에서는 작전 실시 전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으로, 비관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96]

오후 2시 20분 이후, B-17 폭격기 6대에 의한 공격이 있었고, 직위 전투기가 응전했다.[40] 폭격과 기총 소사에 의해 각 함선에서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40] 오후 4시 25분 이후, B-17 폭격기 8대에 의한 공격이 있었다.[40] 수송함 1척 (노지마)이 근접탄으로 손상되어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전투 항해에는 지장이 없었다.[99] 해군 항공 부대는 총 42대가 출동하여, 적기 4대 격추를 보고했다.[40]

연합국군은 첫 출격 부대 8대가 수송선 2척 격침, 후속 20대가 수송선 3척 염상, 밤중에 1대가 명중탄 2발을 보고했다.[50] 어느 쪽이든 2일 오후~야간에 일본군 수송 선단의 손해는 경미했다. 아사구모와 유키카제는 해질 무렵 라에에 도착하여, 나카노 사단장과 병력의 양륙에 성공했다.[82] 한편 일본군 수송 선단은 예정보다 2시간 일찍 진행되었기 때문에, 시간 조정과 위장을 위해 일단 뱃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해질 무렵 비디아스 해협(롱 섬과 움보이 섬 사이)을 통과했다.[47] 그러나 호주군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은 야간에도 접촉을 계속했고, 일본군 수송 선단의 행동을 차례로 보고했다.[96]

3. 1. 3월 1일: 일본군 수송선단 발견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솔로몬해비스마르크해에서 발생한 두 번의 태풍으로 인해 일본군 호위선단은 최고 속도 7노트(13km/h)로 이동하며 며칠 동안 탐지를 피할 수 있었다.[41] 그러나 3월 1일 15시경, 홀맨 곶 북쪽을 정찰하던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조종사가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하였다.[42] 미국 중폭격기가 파견되었으나 호위선단을 발견하는데 실패하였다.

3월 2일 오전 10시경, 다른 리버레이터가 호위선단을 발견하였고,[43] 맑은 날씨 덕에 미국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몇몇이 공격하여 ''코쿠세이 마루''를 포함한 세 척의 상선을 침몰시켰다.[36][44] B-17은 뉴브리튼섬에서 발진한 A6M 제로 전투기에게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일본군 조종사는 몇몇 B-17 조종사가 낙하하는 동안 기관총을 발사했고 그들이 착지한 후에도 물에서 공격했다.[45]

''코쿠세이 마루''에 탑승했던 1,500명 이상의 병력 중 800명은 구축함 유키카제와 아사구모에 의해 구조되었다.[44] 이 두 구축함은 호위선보다 빨랐기 때문에 대열에서 이탈하여 라에에 생존자들을 내려놓았다.[44] 다음 날 구축함들은 호위 임무를 계속했다. 호위선은 이송 병력과 두 구축함이 없을 때인 3월 2일 저녁에 다시 공격받았고, 한 대의 수송선이 작은 피해를 입었다.[43]

일본 육군이 방공을 담당하고 있던[95] 3월 1일 오후 2시 15분, 연합군의 B-24 폭격기가 비스마르크 해에서 선단을 발견하고 접촉을 계속했다.[96] 육군 전투기는 접촉기를 격추하지 못했다.[40] 포트모르즈비에는 B-17 중폭격기 약 55대, B-24 중폭격기 60대, B-25 중폭격기 약 50대, B-26 중폭격기 약 40대, A-20 경폭격기 약 30대, 전투기 총 330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여기서 전투기 154대, 경폭격기 34대, 중폭격기 41대, 중폭격기 39대, 총 268대가 출격 준비를 마쳤다.[50] 3월 1일 단계에서는 일본군 수송 선단의 위치가 공격 권외에 있다고 판단되었다.[50] 수색 공격에 출발한 B-17 중폭격기 8대는 악천후로 인해 접촉할 수 없었다.[96] 오후 7시부터 8시 사이에 연합군기가 조명탄을 투하했지만, 선단에 대한 야간 공격은 없었다.[40]

3월 2일의 일본군 수송선단 상공 경계는 11시 45분까지 해군기, 그 이후는 육군기가 예정되어 있었다.[96] 같은 날 아침, 일본군 선단은 뉴브리튼 섬 서쪽 끝 글로스터 곶 북동 해면을 항해하고 있었다.[47] 오전 8시 이후, B-17 폭격기 십여 대와 호위 전투기가 습격했고, B-17대(제64폭격비행대)는 고도 2000m에서 수평 폭격을 감행했다.[40] 수송선 1척(아사히모리마루)이 오전 8시 16분에 직격탄 2발을 맞아 대화재가 발생했고, 오전 9시 26분에 침몰했다.[40] 아이요마루와 겐부마루가 근접탄으로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40]

구축함 아사구모 (제9구축대)와 구축함 유키카제 (제16구축대, 제51사단장 승함)가 아사히모리마루 병원 1,500명 중 약 900명을 구조했다.[40] 구축함 2척은 제9구축대 사령관 고니시 요닌 대좌(아사구모 탑승)의 지휘 아래 선단에서 선행하여[96], 라에로 향했다[40] B-17은 1대가 격추되었고, 14대가 손상되었다. 제로센의 손해는 1대였다.[96]

이 사태를 받아 제8함대 사령장관 미카와 군이치 중장(외남양부대 지휘관)은 대기하고 있던 구축함 하츠유키 (제11구축대)에 출격과 구조를 명령했다.[98] 제8함대 사령부(미카와 장관, 오니시 참모장, 신시게노리 참모 등)에서는 작전 실시 전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으로, 비관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96]

오후 2시 20분 이후, B-17 폭격기 6대에 의한 공격이 있었고, 직위 전투기가 응전했다.[40] 폭격과 기총 소사에 의해 각 함선에서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40] 오후 4시 25분 이후, B-17 폭격기 8대에 의한 공격이 있었다.[40] 수송함 1척 (노지마)이 근접탄으로 손상되어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전투 항해에는 지장이 없었다.[99] 해군 항공 부대는 총 42대가 출동하여, 적기 4대 격추를 보고했다.[40]

연합국군은 첫 출격 부대 8대가 수송선 2척 격침, 후속 20대가 수송선 3척 염상, 밤중에 1대가 명중탄 2발을 보고했다.[50] 어느 쪽이든 2일 오후~야간에 일본군 수송 선단의 손해는 경미했다. 아사구모와 유키카제는 해질 무렵 라에에 도착하여, 나카노 사단장과 병력의 양륙에 성공했다.[82] 한편 일본군 수송 선단은 예정보다 2시간 일찍 진행되었기 때문에, 시간 조정과 위장을 위해 일단 뱃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해질 무렵 비디아스 해협(롱 섬과 움보이 섬 사이)을 통과했다.[47] 그러나 호주군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은 야간에도 접촉을 계속했고, 일본군 수송 선단의 행동을 차례로 보고했다.[96]

3. 2. 3월 2일: 연합군의 선제 공격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솔로몬해비스마르크해에서 발생한 두 번의 태풍으로 인해 호위선단은 수일간 탐지되지 않았다.[42] 그러나 3월 1일 15시경,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조종사가 호송선단을 발견했다.[42] 미국 중폭격기가 파견되었으나 호위선단을 발견하는데 실패하였다.[42]

3월 2일 10시경, 다른 리버레이터가 호위선단을 발견하였고,[43] 맑은 날씨 덕에 미국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몇몇이 공격하여 코쿠세이 마루를 포함한 세 척의 상선이 침몰했다.[43] B-17은 뉴브리튼섬에서 발진한 A6M 제로 전투기에게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일본군 조종사는 몇몇 B-17 조종사가 낙하하는 동안 기관총을 발사했고 그들이 착지한 후에도 물에서 공격했다.

항해 중인 선박과 양쪽에 물보라가 튀는 모습


코쿠세이 마루로 이송되었던 1500명 이상의 병력 중, 800명은 구축함 유키카제와 아사구모로 구출되었다.[44] 이 두 구축함은 호위선보다 빠르므로, 대열에서 이탈하여 라에에 생존자들은 내려놓았다.[44] 다음 날 구축함들은 호위 임무를 계속했다.[44] 호위선은 이송 병력과 두 구축함이 없을 때인 3월 2일 저녁에 다시 공격받았고,[43] 한 대의 수송선이 작은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11 비행대 소속의 PBY 카타리나 비행정은 추적을 계속하고,[43] 3월 2일과 3월 3일 3시 25분 경 야간에 때때로 폭탄투하를 시도했는데, 호위선단이 밀니 만에 주둔하는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100 비행대 소속 브리스톨 뷰폴트 뇌격기의 사정권에 들 때였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인해 두 대의 뷰폴트만 호위선단을 발견하였고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호위선단은 판단이 확실히 설 때까지 후온 반도 주위를 맴돌았다. 90대의 연합군 공군이 케이프 월드 헌트를 향해 모즈비섬에서 이륙하였다.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 더글러스 A-20 22대가 라에에 있는 일본 전투기 기지를 공격했는데, 호위선단의 대공 방어를 약하게 만들 목적이었다. 기지 공격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10시 정각에 꼬리번호 8160번이 이끄는 B-17 13대가 호위선단에 도달하였고 배를 분산시키고 항로를 이탈하도록 중고도에서 폭격하였다.

그 후 뷰포트 기의 어뢰 공격으로 충격을 주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30 비행대 소속의 브리스톨 뷰파이터기 13대가 저공에서 접근하였다. 배는 그들을 향해 선체를 돌려 4개의 20밀리미터 대포와 윙-mounted 303인치 기관총이 빗발치는 동안, 뷰파이터기는 배 위의 대공화기, 다리, 승무원에게 최대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 후 즉시, 미 공군 소속 미첼기 13대가 750미처 상공에서 폭격하였다. 이후 미첼기 12대는 물수제비 폭격을 감행했고, 반복하여 17회의 명중을 보고했다. 이 공격으로 절반의 호송선박이 가라앉았다. 뷰파이터 기와 미첼 기가 폭격을 함에 따라 미 공군 소속 A-20기도 공격에 가세했다. B-17기의 더 높은 고도로 부터의 5번 명중을 했다.

배의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미 공군 소속 P-38 라이트닝기가 수비를 했고, 3대의 라이트닝이 격추되는 동안 20대의 일본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그 중 2대는 39 전투 비행기였다. 이 작전에서 에이스 파우롯과 호이트 이슨이 전사하였다. 오후동안 미첼기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 보스톤기가 추가 공격을 했다.

일본에서는 3월 2일 오전 8시 이후, B-17 폭격기 십여 대와 호위 전투기의 공격을 시작으로, B-17 대(제64폭격비행대)는 고도 2000m에서 수평 폭격을 감행하여 수송선 아사히모리마루가 침몰하고, 구축함 아사구모와 유키카제가 구조 후 라에로 향했다.[96] 오후 2시 20분 이후, B-17 폭격기 6대에 의한 공격이 있었고, 직위 전투기가 응전하여 각 함선에서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40] 오후 4시 25분 이후, B-17 폭격기 8대에 의한 공격으로 수송함 1척 (노지마)이 근접탄으로 손상되어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전투 항해에는 지장이 없었다.[99]

3. 3. 3월 3일: 연합군의 집중 공격과 일본군 수송선단 괴멸

3월 1일, 최고 속도 7노트로 이동하던 일본군 호위선단은 솔로몬해비스마르크해에서 발생한 두 번의 태풍 덕분에 며칠 동안 연합군에게 발견되지 않았다.[48] 그러나 3월 1일 15시경,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가 홀맨 곶 북쪽에서 순찰하던 중 호위선단을 발견했다.[48] 미군 중폭격기가 파견되었으나 호위선단을 찾지 못했다.[48]

3월 2일 10시경, 또 다른 리버레이터가 호위선단을 발견했고, 맑은 날씨 덕분에 미군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들이 공격하여 코쿠세이 마루를 포함한 세 척의 상선을 침몰시켰다.[48] B-17 리버레이터는 뉴브리튼섬에서 발진한 A6M 제로 전투기에게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했다.[48] 일본군 조종사는 B-17 조종사들이 낙하하는 동안 기관총을 발사했고, 이들이 착지한 후에도 물에서 공격했다.[48]

코쿠세이 마루에 탑승했던 1,500명 이상의 병력 중 800명은 구축함 유키카제와 아사구모에 의해 구조되었다.[48] 이 두 구축함은 호위선보다 빨랐기 때문에 대열에서 이탈하여 라에에 생존자들을 내려놓고 다음 날 호위 임무를 재개했다.[48] 호위선은 병력과 두 구축함이 없을 때인 3월 2일 저녁에 다시 공격받았고, 한 대의 수송선이 작은 피해를 입었다.[48]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11 비행대 소속의 PBY 카타리나 비행정은 추적을 계속하며 3월 2일과 3월 3일 3시 25분경 야간에 때때로 폭탄 투하를 시도했다.[48] 호위선단이 밀니 만에 주둔하는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100 비행대 소속 브리스톨 뷰폴트 뇌격기의 사정권에 들어왔을 때였으나, 기상 악화로 두 대의 뷰폴트만 호위선단을 발견했고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48]

호위선단은 후온 반도 주위를 맴돌았고, 90대의 연합군 공군이 모르즈비섬에서 이륙하여 케이프 월드 헌트를 향했다.[48][49]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 더글러스 A-20 22대가 라에에 있는 일본 전투기 기지를 공격하여 호송대의 대공 방어를 약화시켰고, 이 공격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48][49] 10시 정각, B-17 13대가 호위선단에 도달하여 배를 분산시키고 항로를 이탈하도록 중고도에서 폭격하였다.[48]

작은 조종석에 있는 조종사. 그는 낙하산과 가죽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데미안 파레르가 촬영한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이다.
제30비행대 RAAF 소속의 조종사 토치 유렌 중위가 전투 중 자신의 비행기 조종석에서 물통으로 물을 마시고 있다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30 비행대 소속의 브리스톨 뷰파이터기 13대가 저공에서 접근하여 뷰포트 기의 어뢰 공격으로 충격을 주기 위해 배를 향해 선체를 돌렸다. 뷰파이터기는 배 위의 대공화기, 다리, 승무원에게 최대 피해를 입혔다.[46][48]

두 대의 항공기가 매우 낮은 고도에서 선박을 따라 비행한다
연합군 항공기가 일본 선박에 대한 저고도 공격을 수행한다


곧이어 미 공군 소속 미첼기 13대가 750미터 상공에서 폭격하였고, 이후 미첼기 12대는 물수제비 폭격을 감행하여 17회의 명중을 보고했다.[48][49] 이 공격으로 절반의 호송선박이 가라앉았다. 뷰파이터 기와 미첼 기가 폭격을 함에 따라 미 공군 소속 A-20기도 공격에 가세했다. B-17기의 더 높은 고도로 부터의 5번 명중을 했다.[52]

배의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미 공군 소속 P-38 라이트닝기가 수비를 했고, 3대의 라이트닝이 격추되는 동안 20대의 일본 전투기가 격추되었다.[45][48][49][68] 오후동안 미첼기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 보스톤기가 추가 공격을 했다.[52]

선미에서 불타는 배가 물에 가라앉고 있다.
공격을 받고 있는 일본 선박 ''겐부 마루''


구축함 시라유키, 아라시오 및 토키츠카제를 제외한 남은 일곱 척 수송선 모두 침몰했다.[51] 구축함 중 네 척은 가능한 모든 생존자를 데리고 라바울로 퇴각했고, 나머지 세 척은 후속 타격을 받고 침몰했다.[51]

3월 3일 오전 7시 30분 이후, 일본군 수송선단을 향해 P-38 라이트닝 쌍발 전투기와 커티스 P-40 전투기에 호위받는 연합국군기 대부대가 돌입했다.[96] 우선 브리스톨 보퍼트 약 10기가 공격을 시도했으나, 0식 전투기에 저지되었다.[96] 이어서 브리스톨 보파이터 13기가 저공으로 진입하여 기관총 사격을 가했고, B-17 폭격기 13기가 고고도에서 폭격을 가했으며, 이를 연합국군 전투기 약 50기가 엄호했다.[96]

결국, 피해의 대부분은 저공에서 침입한 폭격기의 반동 폭격에 의한 것이었다.[96] 약 20분간의 공습으로, 수송선 7척과 구축함 3척(시라유키, 아라시오, 시즈카제)이 피탄되어 전투 불능이 되었다.[96] 겐부마루(建武丸), 아이요마루(愛洋丸) 및 구축함 시라유키(제3수뢰전대 기함)가 침몰했다.[96] 기무라 사령관은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중상을 입어, 시키나미로 이승(移乗)하여 기함을 변경했다.[96]

연합군기는 일본군기 20기의 격추를 보고했고, B-17 중폭격기 1기와 P-38 라이트닝 3기를 잃었다.[96]

오후 1시 15분경부터, 연합군기 약 40기가 내습했다.[96] B-17 폭격기 16기, A-20 공격기 12기, B-25 폭격기 10기, 브리스톨 보파이터 5기, P-38 전투기 11기의 공격으로, 신아이마루(神愛丸), 타이메이마루(太明丸), 테이요마루(帝洋丸), 노지마가 피탄 침몰했다.[96] 피탄되어 항행 불능이 된 오이가와마루(大井川丸)는 그날 밤, 미국 어뢰정의 공격으로 침몰했다.[96]

3. 4. 3월 4일: 생존자 공격 논란

3월 4일,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생존자들에 대한 공격 논란이 있었다. 켄니의 후속 명령에 따라,[68] 연합군 정찰선과 비행기는 일본 구조선뿐만 아니라 침몰한 선박의 생존자들을 공격했다.[55] 이는 구조된 일본군 병사들이 신속하게 군사 목적지로 복귀하여 즉시 현역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55] 또한, 격추된 B-17 폭격기 승무원을 공격한 일본 전투기에 대한 보복이라는 주장도 있었다.[68]

일본 구축함 시키나미, 유키카제, 우라나미, 아사구모는 최대한 많은 생존자를 구조한 후 라바울로 후퇴했다. 3월 4일 새벽, 10척의 미국 해군 PT보트 부대가 호송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항했고, ''PT-143''과 ''PT-150''은 어뢰를 발사하여 일본 수송선 ''오이가와 마루''를 침몰시켰다.[53] 아침에는 B-17이 500파운드 폭탄으로 일본 구축함 ''아사시오''를 침몰시켰다.[53]

약 2,700명의 생존자가 구축함에 의해 라바울로 이송되었고, 1,000명 정도는 뗏목에 표류했다.[51] 3월 3일부터 5일까지 PT보트와 비행기는 일본 구조선뿐만 아니라 구명 뗏목에 있거나 바다에서 헤엄치는 생존자들을 공격했다.[55] 많은 연합군 공군 승무원들이 이러한 공격이 필요하다고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꼈다.[56][46]

3월 6일, 일본 잠수함 과 이 170명의 생존자를 구조했고,[51] 이틀 후, ''I-26''은 54명을 더 발견하여 라에에 상륙시켰다.[51] 수백 명의 일본군이 여러 섬으로 갔는데, 일부는 키리위나에 상륙하여 ''PT-114''에 의해 포획되었고, 다른 일부는 과달카날로 갔지만 미국 순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57]

일본군은 3월3일과 그 이후에도 구조작업을 실시하였지만 미군기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일본 잠수함 려101은 44명을 구조하여 3월 9일 라바울로 귀환했다. 3월 8일에서 14일 사이에는 굿이너프 섬에서 일본군 72명이 사살되고 42명이 포획되었으며, 뗏목에서 9명의 사망자가 발견되었다. 한 순찰대는 평저선에 상륙한 일본군 8명을 사살했는데, 그 배에서 일본 육군의 모든 장교의 이름과 부임지가 포함된 일본 육군 목록 사본이 발견되었다.[58][59]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비스마르크해 해전은 일본군에게는 재앙이었다. 뉴기니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6,900명 이상의 병력 중 단 800명만이 라에에 도착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기념관에는 2,890명의 일본군과 선원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0] 맥아더 장군은 "자비로운 신의 의지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다"라고 말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연합국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유럽에서는 독일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등 추축국의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일본도 이 전쟁으로 세력이 많이 꺾이고 자신들의 식민지를 빼앗겼다.

뉴기니 지도, 일본군이 와웨크와 마당에서 라에 지역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해안 노선 표시.
1942–1944년 동부 뉴기니의 일본군 이동 요약


연합 공군은 233,847발의 탄약을 사용했고, 500파운드 폭탄 261발과 1,000파운드 폭탄 253발을 투하했다. 저고도 공격에서 투하된 137발의 폭탄 중 48발(35%)이 명중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중고도에서 투하된 387발의 폭탄 중 29발(7.5%)만이 명중했다.[66] 이는 1942년 8월과 9월에 투하된 폭탄의 3%만이 명중했던 것에 비해 긍정적인 결과였다.[67]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항공기는 일본 방어군을 혼란시키고 압도하여 사상자를 줄이고 폭격을 더 정확하게 만들었다.[66]

이마무라 참모장은 황궁으로 날아가 이 재앙을 보고했다. 라에에 병력을 상륙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결정되었다.[70] 비스마르크 해에서의 손실은 라에라바울의 안전에 심각한 우려를 야기했으며 전략의 변화를 가져왔다. 3월 25일, 남서부 작전 지역에 대한 육군-해군 중앙 합의에 따라 솔로몬 제도 전역의 작전보다 뉴기니에서의 작전을 우선시했다.[71] 제18군은 와우 또는 한사 만으로 보내진 추가적인 수송선, 병기 및 대공 부대를 할당받았다.[73]

제20사단의 마당 이동 계획은 비스마르크 해에서의 사건을 고려하여 수정되었다. 작전은 이틀 연기되었고, 목적지는 마당에서 서쪽의 한사 만으로 변경되었다.[73] 3월 9일 와우의 연합군 비행장을 폭격했고, 3월 11일에는 도보두라의 비행장을 폭격하여 지상에서 연합군 항공기 3대가 파괴되었고, P-40 1대가 공중에서 손실되었지만, 연합군 전투기는 일본 항공기 9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72] 제20사단은 이후 라무와 마크햄 계곡을 통해 마당에서 라에까지 도로를 건설하려는 시도에 참여했지만, 뉴기니의 날씨와 피니스테르 산맥의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결국 좌절되었다.[73]

몇몇 잠수함이 라에로의 보급 작전에 투입되었지만, 그들만으로는 그곳의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다. 3월 29일, 4척의 구축함이 800명의 병력을 핀슈하펜으로 수송하는 작전이 수행되었지만, 연합군 항공기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마당에서 핀슈하펜으로 가는 뉴기니 해안을 따라, 그리고 뉴브리튼 북부 및 남부 해안을 따라 핀슈하펜으로, 거기서 육군 상륙정을 이용하여 라에로 가는 노선이 개발되었다. 제51사단의 나머지 병력이 마침내 5월에 라에로 이동한 것은 이 방법을 통해서였다.[73] 전쟁 후, 라바울의 일본 장교들은 라바울에서 뉴기니로 이동하는 동안 약 20,000명의 병력이 손실되었다고 추산했는데, 이는 뉴기니 전역에서 일본의 최종 패배에 중요한 요인이었다.[74]

4월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제1차 이-고 작전에서 라바울에 할당된 추가 항공 자원을 사용하여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연합군 선박과 항공기를 파괴함으로써 상황을 개선하려고 시도했다.[75]

4. 1. 일본군의 전략적 실패

비스마르크해 해전은 일본군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를 안겨주었다. 뉴기니에 증원될 예정이었던 6,900명 이상의 병력 중 단 800명만이 라에에 도착했으며,[60]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기념관에는 2,890명의 일본군과 선원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1][62][63] 이 전투로 인해 연합국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추축국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연합군은 적은 피해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명의 공군 승무원을 잃었고, 항공기 손실은 전투에서 B-17 1대와 P-38 3대, 사고로 B-25 1대와 Beaufighter 1대였다.[64][65] 반면 일본군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연합군에게 선전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한 뉴스릴은 일본이 22척의 선박, 15,000명의 병력, 102대의 항공기를 잃었다고 주장했고,[64] 1943년 3월 4일자 ''뉴욕 타임스''는 1면에 일본이 22척의 선박, 15,000명의 병력, 5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고 보도했다.[65]

연합 공군은 233,847발의 탄약을 사용했고, 500파운드 폭탄 261발과 1,000파운드 폭탄 253발을 투하했다. 저고도 공격의 명중률은 35%였고, 중고도 공격은 7.5%였다.[66] 이는 1942년 8월과 9월의 3% 명중률에 비해 향상된 결과였다.[67] Beaufighter의 기총 소사는 일본 선박의 대공 방어력을 파괴하는 데 효과적이었고,[68]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전술은 일본 방어군을 혼란시켜 사상자를 줄이고 폭격을 더 정확하게 만들었다.[66]

이마무라 참모장은 황궁에 이 재앙을 보고했고, 이후 라에에 병력을 상륙시키려는 시도는 중단되었다.[70] 비스마르크 해에서의 손실은 일본군의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3월 25일, 남서부 작전 지역에 대한 육군-해군 중앙 합의에 따라 솔로몬 제도 전역보다 뉴기니에서의 작전을 우선시하게 되었다.[71] 제18군은 와웨크 또는 한사 만으로 보내진 추가적인 수송선, 병기 및 대공 부대를 할당받았다.[73]

제20사단의 마당 이동 계획은 수정되었고, 목적지는 마당에서 서쪽의 한사 만으로 변경되었다.[73] 연합군의 항공 위협을 줄이기 위해 일본군은 3월 9일 와우, 3월 11일 도보두라의 연합군 비행장을 폭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72] 제20사단은 라무와 마크햄 계곡을 통해 마당에서 라에까지 도로를 건설하려 했으나, 뉴기니의 날씨와 피니스테르 산맥의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실패했다.[73]

일본군은 잠수함을 통해 라에로의 보급 작전을 시도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병력을 지원하기에 부족했다. 결국 일본군은 구축함, 상륙정 등을 이용하여 뉴기니 해안을 따라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야 했고, 이는 연합군의 추가 진격을 막는 데 큰 어려움을 야기했다.[73] 전쟁 후, 라바울의 일본 장교들은 라바울에서 뉴기니로 이동하는 동안 약 20,000명의 병력이 손실되었다고 추산했는데, 이는 뉴기니 전역에서 일본의 패배에 중요한 요인이었다.[74]

4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제1차 이-고 작전을 통해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연합군 선박과 항공기를 파괴하려 했으나, 이 작전은 결정적이지 않았고, 야마모토는 1943년 4월 18일 전사했다.[75][76]

수송선단의 전멸은 쇼와 천황에게 즉시 보고되었고, 천황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123]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은 천황에게 "실패의 원인을 잘 연구하여 화를 복으로 바꾸도록 하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123]

일본군 내부에서는 이 작전의 실패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남동 방면 함대는 연합군 기지에 대한 항공 격멸전 불철저를 지적했고,[81] 나카하라 요시마사 남동 방면 함대 참모장은 사전 항공 격멸전의 불철저, 도착 시간 검토 부족, 대공 전투 능력 부족 등을 패전의 교훈으로 삼았다.[85] 미와 요시오 제11항공 함대 참모는 적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실패라고 인정했다.[85] 오쿠미야 마사타케는 일본군 항공 전력 부족을 주된 원인으로 지적했다.

제8방면군은 연구회를 통해 "현 상황에서 어떤 방책을 강구해도 저런 결과를 얻는 것 외에는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제18군 사령관 아다치 23세 중장은 적정 판단 소홀과 희망적 관측에 입각한 작전 수행을 큰 오류로 지적했다.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은 전투기 집중 부족, 적 비행장 공격 미실시, 적정 판단 미흡 등을 실패 원인으로 분석했다.[124] 사나다 조이치로 육군 참모 본부 작전 과장은 일본 해군의 항공력 집중 부족을 비판하며, 작전 실패의 원인으로 적 기지 항공의 공격 성공, 적의 소적 초계 우위, 일본 해군 항공의 열세를 꼽았다.[125]

결론적으로, 비스마르크해 해전은 항공 전력의 열세 속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일본군의 수송 작전이 실패한 사례로, 연합군의 효과적인 저고도 공격 전술과 일본군의 전략적 판단 오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4. 2. 연합군의 전략적 우위 확보

이 전투는 일본군에게 재앙이었다. 뉴기니에 반드시 필요했던 6,900명 이상의 병력 중 단지 800명만이 라에에 도착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기념관에는 2890명의 일본군과 선원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0] 맥아더 장군은 "자비로운 신의 의지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다"라고 말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연합국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게 됐고, 유럽에서는 독일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등 추축국의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일본도 이 전쟁으로 세력이 많이 꺾이고 자신들의 식민지를 빼앗겼다.

연합 공군은 233,847발의 탄약을 사용했고, 500파운드 폭탄 261발과 1,000파운드 폭탄 253발을 투하했다. 저고도 공격에서 투하된 137발의 폭탄 중 48발(35%)이 명중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중고도에서 투하된 387발의 폭탄 중 29발(7.5%)만이 명중했다.[66] 이는 1942년 8월과 9월에 투하된 폭탄의 3%만이 명중했던 것에 비해 긍정적인 결과였다.[67]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항공기는 일본 방어군을 혼란시키고 압도하여 사상자를 줄이고 폭격을 더 정확하게 만들었다.[66]

이마무라 참모장은 황궁으로 날아가 이 재앙을 보고했다. 라에에 병력을 상륙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결정되었다.[70] 비스마르크 해에서의 손실은 라에라바울의 안전에 심각한 우려를 야기했으며 전략의 변화를 가져왔다. 3월 25일, 남서부 작전 지역에 대한 육군-해군 중앙 합의에 따라 솔로몬 제도 전역의 작전보다 뉴기니에서의 작전을 우선시했다.[71] 제18군은 와우 또는 한사 만으로 보내진 추가적인 수송선, 병기 및 대공 부대를 할당받았다.[73]

제20사단의 마당 이동 계획은 비스마르크 해에서의 사건을 고려하여 수정되었다. 작전은 이틀 연기되었고, 목적지는 마당에서 서쪽의 한사 만으로 변경되었다.[73] 3월 9일 와우의 연합군 비행장을 폭격했고, 3월 11일에는 도보두라의 비행장을 폭격하여 지상에서 연합군 항공기 3대가 파괴되었고, P-40 1대가 공중에서 손실되었지만, 연합군 전투기는 일본 항공기 9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72] 제20사단은 이후 라무와 마크햄 계곡을 통해 마당에서 라에까지 도로를 건설하려는 시도에 참여했지만, 뉴기니의 날씨와 피니스테르 산맥의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결국 좌절되었다.[73]

몇몇 잠수함이 라에로의 보급 작전에 투입되었지만, 그들만으로는 그곳의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다. 3월 29일, 4척의 구축함이 800명의 병력을 핀슈하펜으로 수송하는 작전이 수행되었지만, 연합군 항공기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마당에서 핀슈하펜으로 가는 뉴기니 해안을 따라, 그리고 뉴브리튼 북부 및 남부 해안을 따라 핀슈하펜으로, 거기서 육군 상륙정을 이용하여 라에로 가는 노선이 개발되었다. 제51사단의 나머지 병력이 마침내 5월에 라에로 이동한 것은 이 방법을 통해서였다.[73] 전쟁 후, 라바울의 일본 장교들은 라바울에서 뉴기니로 이동하는 동안 약 20,000명의 병력이 손실되었다고 추산했는데, 이는 뉴기니 전역에서 일본의 최종 패배에 중요한 요인이었다.[74]

4월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제1차 이-고 작전에서 라바울에 할당된 추가 항공 자원을 사용하여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연합군 선박과 항공기를 파괴함으로써 상황을 개선하려고 시도했다.[75]

4. 3. 한국의 관점

4. 4. 생존자 공격 문제

켄니의 후속 명령에 따라, 3월 3일 저녁부터 5일까지 연합군 정찰선과 비행기는 일본 구조선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구조된 병사가 군사적 목적지에 착륙하여 즉시 임무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사람을 공격했다.[93] 3일 해가 진 후, 시키나미, 아사구모, 유키카제 3척은 조난 현장으로 돌아가 생존자를 수색했다.[93]

선단이 큰 피해를 입은 직후부터 연합군 측 항공기에 의한 일본 측 구명정 및 표류자에 대한 기총 소사 및 폭탄 투하가 이루어졌다.[114] 이어서 연합군의 어뢰정 부대도 조난자를 공격했다. 3월 4일 시점에서 시츠카제 표류 지점 주변에는 약 1,000명의 인원과 20~30척의 단정이 표류하고 있었다.[114] 그러나 일본군 잠수함(이17)을 쫓아낸 미국군 어뢰정 여러 척이 구조 작업 중인 일본군 소형정을 격침시킨 후, 기총 소사를 가했다.[114]

일본 육군은 라에에 대기하고 있던 선박 부대에서 대발동정 부대를 파견했지만, 3월 3일 구조는 미군기의 방해로 실패했고, 3월 4일 이후 구조를 실시했다. 같은 날, 일본 해군은 표류하는 시츠카제의 뇌격 처분 및 생존자 구조를 위해 잠수함을 파견했다.[115] 이17은 3월 4일 심야 현장에 도착했다.[116] 려101은 노지마 함장 이하 44명(총 45명)을 수용하여 3월 9일 라바울로 귀환했다.[117] 려103은 좌초 사고를 일으켜 되돌아갔고,[117] 3월 17일에 귀환했다. 이17[118]과 이26[119]는 같은 날도 구조 활동을 실시했다. 이26은 3월 8일 굿 이너프 섬 서쪽 작은 섬에서 54명, 3월 9일 40명을 수용했으며, 그 이후에도 침몰 선박 승무원 및 육군 병사 소수가 육안에 표착했다.

예를 들어, 오이가와마루가 침몰했을 때, 승선 중인 보병 제115연대는 군기·육군 병사·오이가와마루 선원 합계 31명이 구조정으로 탈출, 기총 소사 및 쇠약으로 15명이 전사한 후 4월 2일이 되어 뉴브리튼 섬 마커스 곶 서쪽 10km 해역의 부츠마텔레 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육상에 표착한 자의 대부분은 현지 주민이나 수비대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유키카제 항해사의 증언에 따르면, 라바울에 귀환한 구축함 4척(시키나미, 우라나미, 유키카제, 아사구모) 중, 아사구모 함장 이와하시 토오루 중좌는 제8함대 사령부에 들이닥쳐 "이런 무모한 작전을 세운다는 것은, 결국 일본 민족을 멸망시키는 것과 같다. 잘 생각하고 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120]

4. 5. 일본군의 전쟁 범죄 은폐 시도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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