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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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나다 마사유키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다케다 신겐의 측근으로 성장하여 뛰어난 전략과 전술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여러 다이묘 세력 사이에서 가문의 생존을 위해 유연하게 대처하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두 번이나 곤경에 빠뜨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지략과 통솔력은 '표리부동(겉과 속이 다름)'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차 우에다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도쿠가와 군을 격파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말년에는 유배 생활을 했지만, 아들 노부유키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유지했으며,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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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마사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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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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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 |
원어 이름 | 真田 安房守 昌幸 |
출생 | 1547년 |
사망 | 1611년 7월 13일 |
사망 장소 | 구도야마 |
관직 | |
직책 | 사나다 씨 당주 |
임기 시작 | 1575년 |
임기 종료 | 1600년 |
전임자 | 사나다 노부쓰나 |
후임자 | 사나다 노부유키 |
가족 | |
배우자 | 야마노테-도노 |
자녀 | 무라마쓰-도노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유키무라 기쿠히메 (1580년 출생) |
아버지 | 사나다 유키타카 |
친척 | 사나다 노부쓰나 (형제) 사나다 마사테루 (형제) 고마쓰히메 (며느리) 지쿠린인 (며느리) 세이인인 (조카이자 며느리) |
군사 정보 | |
소속 | [[File:Japanese Crest Takeda Hisi.svg|15px]] 다케다 씨 [[File:Oda emblem.svg|15px]] 오다 씨 [[File:Japanese Crest Houjou Uroko.svg|15px]] 후호조 씨 [[File:Mitsubaaoi.svg|15px]] 도쿠가와 씨 [[File:Japanese Crest Uesugi Sasa.svg|15px]] 우에스기 씨 [[File:Goshichi no kiri inverted.svg|15px]] 도요토미 씨 [[File:大一大万大吉.svg|15px]] 서군 |
부대 | [[File:Japanese_Crest_rokumonsen.svg|15px]] 사나다 씨 |
주요 전투 | 오다와라 성 포위전 (1569년) 미마세토게 전투 (1569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1573년) 나가시노 전투 (1575년) 가미가와 전투 (1585년) 마쓰이다 성 공방전 (1590년) 우에다 성 공방전 (1600년) |
기타 정보 | |
가명 | 사나다 겐고로 (유명), 무토 기헤에, 사나다 마사유키 |
관위 | 종5위하, 아와노카미 |
씨족 | 사나다 씨 (자칭 시노 씨), 미나모토 성 무토 씨 → 사나다 씨 |
묘소 | 사나다 산 조코쿠지(나가노현나가노시) 사나다 산 조코쿠지(나가노현 우에다시) 젠묘쇼인(와카야마현구도야마 정) |
2. 생애
1547년 사나다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일은 알 수 없다. 어린 시절 이름은 겐고로(源五郎)였다. 두 형인 노부츠나와 마사테루가 있었기에 태어날 당시 아버지를 계승할 권리는 없었다.
1553년 일곱 살 때 인질로서 가이에 있는 다케다 씨의 본거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다케다 신겐과 가까운 여섯 명의 어린 시종으로 구성된 '오쿠킨쥬슈'(奥近習衆)의 일원이 되었다. 『고요군칸』에 따르면, 신겐은 마사유키의 재능과 통찰력이 아버지 유키타카의 재능과 통찰력에 필적한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고 총애했다고 한다. 그는 때때로 아버지와 두 형과 함께 24장에 포함되기도 한다.
1558년 신겐의 어머니가 계통을 이어받은 오이 씨의 분가인 무토 가문의 양자가 되어 무토 키헤이(武藤喜兵衛)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2. 1. 다케다 가신 시대
덴분 16년 (1547년), 사나다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 시절 이름은 겐고로(源五郎)였다.[11]센고쿠 무장들은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주군에게 가족을 인질로 보내는 일이 잦았다. 1553년 8월, 유키타카는 당시 7살이던 마사유키를 다케다 가에 인질로 보냈다. 마사유키는 다케다 하루노부(다케다 신겐)의 시동이 되었다. 신겐은 다케다 가문 안에서도 뛰어난 무장이었던 아버지 유키타카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마사유키의 재능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마사유키를 자신의 '눈'에 비유할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16] 마사유키는 이 당시 신겐으로부터 전략, 전술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 당시의 경험은 훗날 '전국시대 제일의 모장(謀將)' 마사유키의 밑거름이 되었다.
마사유키는 에이로쿠 연간(1558년 ~ 1570년)에 신겐의 외가쪽 가문인 무토 가문의 양자가 되어, '''무토 기헤에'''(武藤喜兵衛)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13] 에이로쿠 7년(1564년)에는 도토미의 토착영주였던 우다 요리타다(宇多頼忠)의 딸 야마테도노를 아내로 맞는다.
《고요군감》에 따르면, 마사유키가 처음으로 참전한 전투는 에이로쿠 4년(1561년)의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과 벌인 전투)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는 설도 있다).[15]
에이로쿠 12년(1569년)에 호조 가와 싸운 미마세 고개 전투에서는 전령장교 역할을 맡는다. 겐키 3년(1572년) 신겐이 상락작전(다이묘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쿄토로 올라가는 것. 교토를 장악하면 쇼군과 천황으로부터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었지만, 교토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중의 많은 세력들과 싸워야 했다)을 시작하자 이에 참가하고, 그해 12월에 벌어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상락작전 도중 겐키 4년(1573년) 4월에 다케다 신겐이 급작스럽게 병사하였고, 다케다 가쓰요리가 뒤를 이었다.
주군인 신겐의 뒤를 이어 다음 해인 덴쇼 2년(1574년)에는 아버지 유키타카가 사망한다. 사나다 가문의 가독(가문의 우두머리의 권한)은 마사유키의 형인 노부쓰나가 계승한다. 그러나 다음 해인 덴쇼 3년(1575년)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에서 맏형인 노부쓰나와 둘째형인 마사테루가 한꺼번에 전사함으로써, 마사유키가 사나다 가문의 가독을 잇게 되었다.
2. 2. 도요토미 정권 시대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다케다 가문의 옛 영토는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호조 우지나오 등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침략해 왔고, 이 분쟁을 덴쇼 임오의 난이라 한다. 마사유키는 오다 가문의 가신이었으나 간나가와 전투에서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패배하자 호조 우지나오에게 돌아섰다. 그러나 곧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회유에 넘어가 호조를 배반했고, 호조는 도쿠가와와 화친하게 된다.하지만 이에야스는 호조와의 동맹 조건으로 코즈케의 사나다 영지를 호조에게 넘겨주기로 했고, 마사유키는 이에 반대하여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의탁했다. 우에스기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고 도쿠가와-호조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1585년, 이에야스와 우지나오는 사나다를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7천 명의 적군에 맞서 마사유키는 2천 명의 병력으로 우에다 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제1차 우에다 전투). 이 승리로 사나다 가문은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고, 마사유키의 이름은 도요토미 세력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해 마사유키는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고, 차남 노부시게는 히데요시의 인질이 되었다. 1586년 마사유키는 사쿠를 침공하여 호조 가문의 누마타 성 침공을 초래했고, 이에야스와의 대립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와 호조에게 사나다 공격을 금지시켰고, 시나노의 다이묘들은 이에야스의 휘하에 배속되어 분쟁은 일시적으로 멈추게 되었다.
1587년 마사유키는 슨푸에서 이에야스와 회견했고, 함께 오사카로 상경하여 히데요시를 알현했다. 이로써 마사유키는 명실상부한 도요토미 가신이 되었다. 1589년 히데요시는 도네가와 강을 기준으로 동쪽 지방을 호조에게 양도하고, 마사유키에게는 이나군 미노와 지방을 주었다.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의 명령을 어기고 호조 가문의 가신이 사나다 가문을 공격했고, 이는 1590년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의 구실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마사유키는 히젠 나고야성에 주둔했다.
2. 3. 서군 참가와 구도 산 칩거
게이초 5년(1600년) 7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소환 명령에 불응하자 군사를 일으켜 관동으로 진격했는데, 당시 교토에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도 이에 동참했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교토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여러 다이묘들에게 이에야스를 탄핵하는 편지를 보냈다. 마사유키는 시모쓰케에서 이 편지를 받고, 처가인 우다 가문과의 혼인 관계로 미쓰나리와 인척이었던 점을 활용하여 차남 노부시게와 함께 서군(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군대)에 참가한다. 마사유키는 본거지인 우에다 성으로 돌아가 동군(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하는 군대)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동군의 선봉이었던 약 3만 8천 명의 도쿠가와 히데타다 부대는 에도를 출발하여 나카센도로 진입했고, 10월 12일에는 우에다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사유키는 불과 2천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여 이에 맞서 싸웠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에 해당하는 제2차 우에다 성 전투이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미노로 오도록 재촉했고,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 공격을 포기한다. 히데타다 군은 우에다 성 전투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후에야 본진에 합류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하자, 서군에 속해있던 다이묘들에 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우에다 성의 영지를 몰수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으나,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의 탄원으로 목숨을 구하고, 우에다 성의 영지는 노부유키가 계승하게 되었다. 12월에는 기이 고야 산 기슭의 구도 산에 칩거하도록 하는 처분이 내려졌다.[54]
3. 평가 및 일화
사나다 마사유키는 다른 다이묘들처럼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는 못했지만, 불운과 그의 영지 주변의 불리한 지형 때문에 좌절된 재능 있는 다이묘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사유키를 속과 겉이 다른 인물이자, 충성심이 변덕스러워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안정한 동맹 관계는 사나다 가문이 적대적인 씨족들의 공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에도 시대 이후로는 비난받기보다는 칭송받는 인물이 되었다.
다케다 신겐은 마사유키의 아버지 유키쓰나 못지않은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다. 『군감(軍鑑)』에 따르면, 1570년에 다케다 군이 이즈(伊豆)에 침공하여 니라야마 성을 공격하고 있을 때, 호조 우지마사가 원군의 지휘를 맡고 하코네를 넘어 미시마에 진을 쳤다. 신겐은 결전을 주장했고, 이에 신중론을 펼친 바바 노부하루에게 "내 눈과 같은 자들을 정찰병으로 파견했다"라고 대답했다. 여러 장수들이 신겐의 눈에 비견될 만한 장수가 누구인지 의아해하고 있자, 곧 센네 마사요와 마사유키가 돌아와 보고를 하였고, 그 두 사람이 바로 그 눈과 같은 존재임이 밝혀졌다.[16]
이 이야기에 나오는 마사요처럼, 마사유키도 아버지와 형인 노부쓰나, 마사테루와 함께 다케다 24장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아버지와 형제 3명이 모두 다케다 24장에 이름을 올린 집안은 사나다 가문뿐이다.
1572년 10월부터 다케다 신겐의 서상작전에 참전하여 12월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도 참가하였다.[17] 이때 마사유키는 하마마쓰 성으로 패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추격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갑양군감』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무토 키헤이에이, 기마 15기, 아시가루 30명"을 지휘하여 출진했다고 한다. 당시 마사유키의 영지 위치와 규모는 명확하지 않지만, 다케다 가문의 친족인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사네가 마사유키와 거의 같은 규모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노부사네는 397관문을 지행으로 받았으므로, 마사유키도 그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신겐의 말년에는 다케다 씨의 봉행(奉行)에 임명되었으며, 1572년 2월 4일 사쿠 군 이와무라다의 류운사에 보낸 용주인장(竜朱印状)의 봉자(奉者)로 확인할 수 있다.[17]
마사유키는 글을 잘 쓰고 편지를 자주 쓰는 사람이었다.[65] 다이묘 시대부터 노부유키, 가신인 가와하라 씨 등에게 보낸 서장이 확인되고, 유배 시절에는 노부유키나 근신에게 자주 서장을 보냈다.[65] 유배 시절에는 그들로부터 생활 원조를 받고 사례를 기록한 것도 있지만, 서장 안에서는 옛 주군으로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마사유키의 강한 심지를 엿볼 수 있다. 한편 마사유키는 자식을 사랑했고, 사망 1개월 전에는 노부유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토로하는 서장을 보냈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우에다 성 공격이 지체되자, 선봉에게 연락하기 위해 시마다 헤이시로라는 자를 전령으로 보냈다. 헤이시로는 우에다 성 정문 앞에서 "에도 중나언(히데타다)의 가신 시마다 헤이시로다. 군령을 받들어 선봉까지 연락을 가는 중이니, 성 안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외쳤다. 적대 중인 적의 성을 통과하게 해달라는 것도 모자라 아군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니,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수비병들이 마사유키에게 보고하자, 마사유키는 "참으로 배짱이 두둑한 무사로구나. 통과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의 옹졸함이 드러날 것이다. 성문을 열어 주어라"라고 지시했다. 헤이시로는 성 안을 질주하여 뒷문을 빠져나가면서 "돌아올 때도 다시 오겠으니, 또 통과시켜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다시 돌아왔을 때, 마사유키는 그를 만나 성 안을 자세히 보여주고, 성문을 열어 돌아가게 해주었다.[66]
마사유키의 장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67] 사후, 시신은 구도야마에서 화장되었고, 1612년 8월에 유골을 우에다로 운반했다고 한다. 묘소는 나가노시 마쓰시로정 마쓰시로의 사나다야마 조코쿠지이며, 우에다시의 사나다 가 묘소인 사나다야마 조코쿠지에 안치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33] 또한 구도야마의 사나다안에도 법탑이 세워져 마사유키의 묘소로 여겨지며, 후에 니테라인 사라다산 젠묘쇼인이 개원되었다.
3. 1.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
表裏比興の者일본어라고 불렸다. 이는 1586년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상락(上洛)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칭찬하는 내용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같은 날짜에 도요토미 가문의 봉행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마스다 나가마사가 가게카츠에게 보낸 첨서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락에 관해 이에야스와 적대하고 있던 마사유키의 처우가 문제가 되어, 이에야스의 사나다 공격에서 가게카츠가 마사유키를 후원하는 것을 금지했을 때의 표현이다. "비흥(比興)"은 현재는 "비겁(卑怯)"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꾸며낸 것" 또는 "노회(老獪)"와 같은 의미로 쓰이며, 무장으로서는 칭찬의 말이다.[6] 이는 지방의 소세력에 불과한 마사유키가 주변의 대세력 사이를 넘나들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간 기량(지모·책략)과 경우에 따라서는 대세력과의 충돌(우에다 전투 등)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함(무용)을 합쳐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마사유키를 "비흥의 자"라고 평가했다고 여겨지는 미쓰나리는 사나다 가문과 인연을 맺고 있다.3. 2. 지략과 통솔력
表裏比興の者일본어라고 불렸다. 이는 1586년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의 상락(上洛)을 히데요시가 치하하는 내용의 문서에 기록된 표현이다. 같은 날 도요토미 가(豊臣家) 봉행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마스다 나가마사(増田長盛)가 가게카쓰에게 보낸 첨서조(添書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에야스 상락에 관해 이에야스와 적대하고 있던 마사유키의 처우가 문제가 되어, 이에야스의 사나다 공격에서 가게카쓰가 마사유키를 후원하는 것을 금지했을 때의 표현이다. "비흥(比興)"은 “비겁(卑怯)”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꾸며낸 것” 또는 “노회(老獪)”와 같은 의미로, 무장으로서는 칭찬의 말이다. 이는 지방 소세력에 불과했던 마사유키가 주변 강대 세력 사이를 넘나들며 세력을 확장해 나간 지략과 책략, 경우에 따라서는 대세력과의 충돌(우에다 전투 등)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함을 함께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마사유키를 “비흥의 자”라고 평가한 미쓰나리는 사나다 가와 인연을 맺고 있다.[62]마사유키는 현대 역사 소설에서 “모략가(謀略家)”, “모장(謀將)”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인물상은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인 1731년에 성립된 마쓰시로 번(松代藩)사 타케우치 키요사다(竹内軌定)의 『신무내전(真武内伝)』에 기초한 것이다.[62] 그러나 이 자료의 신뢰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마사유키의 인물상이나 개성에 관해서는 불명확한 점도 많다.[62] 마사유키의 저작이나 시가(詩歌)에 관련된 것은 전무하다.[62]
『신무내전』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 노부시게(信繁)에게 이에야스가 가까운 장래에 도요토미 씨를 멸망시킬 것을 예측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와 거의 같은 지점인 아오노가하라(青野ヶ原)에서 도쿠가와 군을 요격하는 책략 등을 구상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군이 공격해 온다면 교묘하게 후퇴하면서 틈을 타 반격하고, 마지막으로 세타의 당교(瀬田の唐橋)를 함락시켜 지키고, 많은 다이묘(大名)를 자기편으로 만들도록 하는 책략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62] 그러나 이 작전은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 채용했던 책략과 유사하여, 마사유키가 실제로 이러한 유언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62]
『신무내전』에서는 마사유키의 책략이 항상 소수의 아군으로 대병력을 거느린 적을 무찌르는 데 있었다고 평가한다. “고금(古今)의 영웅으로, 무략(武略)은 손자 오자(孫子呉子)의 심오함을 꿰뚫어 보고, 과(寡)로써 중(衆)을 제압하고, 신카와(神川)의 군전(軍前)에서는 바둑을 두면서 강적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용기는 천둥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칭송하며, 마사유키가 책략에 있어서 항상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62] 또한 책략뿐만 아니라 가신이나 영민(領民)을 규합하여 대적(大敵)에 맞선 마사유키의 통솔력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63]
3. 3. 도쿠가와 가문을 두려워하게 한 존재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일본어는 우에다 전투에서 두 번이나 마사유키에게 패배했기에 그를 대단히 두려워했다. 오사카 전투 때 사나다가 오사카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에야스는 "아비 쪽이냐, 아들 쪽이냐?"라고 되물으며 심하게 덜덜 떨었다고 《진무내전》(1731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오사카 겨울 전투 때, 마사유키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마사유키는 구도 산에 유폐되어 있을 때 이에야스가 머지않아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킬 것을 예측하고, 아오노가하라를 중심으로 서미노 일대에서 도쿠가와 군을 요격할 방책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사유키는 열세한 병력으로 2번이나 도쿠가와의 정예군단에 대승을 거둔 전적이 있기에, 만약 오사카 겨울 전투 당시에 살아있었다면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67]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병 소식을 전해 듣고 미쓰나리에게 "어째서 좀 더 빨리 알려주지 않았는가"라고 쓴 편지가 남아 있다.
마사유키 사후, 노부유키는 그의 장례에 대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에게 문의했다. 그에 대해 마사노부는 "마사유키는 중죄인이므로 막부의 의향을 확인한 후에 대응하도록" 하고 충고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의 진에 앞서 "사나다가 대판성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버지 쪽인가? 아들 쪽인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대 최고의 전술가인 마사유키의 군사력을 이에야스를 비롯한 당시 무장들이 경계했음을 시사한다. 또 그때 이에야스의 손이 떨었다고 전해지며, 이에야스가 그만큼 마사유키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마사유키가 아니라 당시 무명이었던 노부시게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고도 전해진다.
이에야스와는 화합할 수 없는 관계에 있었고, 가문 존속을 위해 노부유키를 보냈지만, 일정한 거리는 유지했다. 두 차례의 우에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서도 마사유키의 자존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64]
4. 가족 관계
사나다 마사유키일본어는 1547년에 사나다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알 수 없다. 어린 시절 이름은 겐고로(源五郎)였다. 노부츠나와 마사테루, 두 형이 있었기에 태어날 당시 아버지를 계승할 권리는 없었다.
5. 대중문화
- 사나다 태평기 (1985년 TV 시리즈, 탄바 테츠로 분)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드라마, 쿠사카리 마사오 분)
- 사나다 유키무라의 모략 (1979년 영화, 카타오카 치에조 분)
- 전국자위대 (1979년 영화, 각가와 하루키 분)
- 강담 드라마 사루토비 사스케 (1963년, 이치카와 추샤 분)
- 사나다 유키무라 (1966년, 나카무라 타케야 분)
- 사루토비 사스케 (일본텔레비전, 1980년, 시모토 벤 분)
- 풍신의 문 (NHK, 1980년, 미야구치 세이지 분)
- 세키가하라 (TBS, 1981년, 타마가와 이사오 분)
- 사나다 태평기 (NHK 신대형시대극, 1985년, 탄바 테츠로 분), 원작은 위와 동일
- 여풍림화산 (TBS, 1986년 - 1987년, 야마오카 하치코 분)
- 풍운! 사나다 유키무라 (텔레비전 도쿄, 1989년, 히가시무라 타케시 분)
- 가콘이 가장 두려워한 남자 사나다 유키무라 (텔레비전 도쿄, 1998년, 탄바 테츠로 분)
- 풍림화산 (NHK 대하드라마, 2007년, 코바야시 카이토 분)
- 천지인 (NHK 대하드라마, 2009년, 이와마츠 료 분)
- 강~공주들의 전국~ (NHK 대하드라마, 2011년, 후지나미 타츠지 분)
- 사나다마루 (NHK 대하드라마, 2016년, 쿠사카리 마사오 분)
- 도쿠가와 이에야스 (NHK 대하드라마, 2023년, 사토 코이치 분)
- 사나다 쥬유시 (NHK 인형극, 1975년, 성우: 나고야 아키라)
- 사나다 전국사 비흥의 자 (원작: 미야자키 카츠, 그림: 켄 츠키카게, 전2권, 아키타 서점, 2006년-2007년)
- 사나다혼 (시게노 나오키)
- 네코네코 일본사 (소니시 켄지, 지쓰교 니혼샤)
- 신석 사나다 쥬유시 (2005년, 성우: 타니구치 세츠)
- 네코네코 일본사 (2016년-, E텔레, 성우: 키우치 타로)
- 전국 BASARA 렬전 시리즈 사나다 유키무라 전 (2016년, 성우: 오츠카 호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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