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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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는 1663년 영국 왕 찰스 2세가 8명의 귀족에게 토지를 하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캐롤라이나 식민지로 불렸으며, 찰스턴에 행정부가 있었다. 1712년 노스캐롤라이나가 분리되었고, 1719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식민지 영주로부터 왕실로 통치권이 넘어갔다. 식민지 시대에는 스페인, 원주민과의 갈등, 쌀 플랜테이션 농업과 노예 제도, 인구 구성의 변화를 겪었다. 1729년 노스캐롤라이나와 함께 왕령 식민지가 되었으며, 1775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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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 캐롤라이나 식민지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1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잉글랜드가 북아메리카에 건설한 식민지로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일부를 포함하며, 1663년 찰스 2세가 8명의 영주 소유주에게 헌장을 발급하여 운영을 맡겼으나 1729년 왕령 식민지로 전환 후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었다. -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설립 이전의 역사 - 야마시 전쟁
야마시 전쟁은 1715년부터 1717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야마시족을 비롯한 원주민 부족 간에 벌어진 무력 충돌로, 백인 상인과의 갈등과 노예 무역 쇠퇴 등의 요인으로 발생하여, 체로키족과의 동맹 등을 통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설립 이전의 역사 - 앵글로 체로키 전쟁
앵글로-체로키 전쟁은 1758년 영국군의 불공정한 대우와 약속 불이행으로 시작되어 체로키족과 영국 식민지 간의 무력 충돌로 전개되었으며, 1761년 평화 조약 체결로 종결되었다. - 미시시피주 설립 이전의 역사 - 미시시피 준주
미시시피 준주는 1798년부터 1817년까지 미국에 존재했던 자치령으로, 스페인과의 분쟁 지역에서 시작하여 조지아주의 영유권 포기 지역과 서플로리다 일부를 합병하며 확장되었고, 미시시피주와 앨라배마 준주로 분할되어 미시시피주는 미국의 20번째 주가 되었다. - 미시시피주 설립 이전의 역사 - 버번군 (조지아주)
버번군 (조지아주)은 1785년 조지아 주에 신설되었으나 1788년 폐지된 역사적인 행정 구역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서 명칭이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스페인의 반대와 연방 정부의 압력으로 짧게 존속되었고, 이는 조지아 주의 서부 영토 확장 시도와 관련된 외교적 갈등 및 연방 정부의 영향력 확대를 보여준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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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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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Province of South Carolina) |
일반 명칭 | 사우스캐롤라이나 |
국가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국가 | 영국 |
국왕 찬가 | 국왕 폐하 만세 |
역사 | |
시작 | 캐롤라이나 식민지 분할 (1712년 1월 24일) |
조지아 식민지 헌장 | 1732년 6월 9일 |
종말 | 미국 독립 선언 (1776년 7월 4일) |
정치 | |
정치 체제 | 자영 식민지 (1712년-1729년) |
입법부 | 총회 |
상원 | 평의회 |
하원 | 의회 |
군주 | 앤 여왕 (1712년–1714년) |
군주 | 조지 1세 (1714년–1727년) |
군주 | 조지 2세 (1727년–1760년) |
군주 | 조지 3세 (1760년–1776년) |
총독 | 로버트 깁스 (1712년, 최초) |
총독 | 윌리엄 캠벨 경 (1775년–1776년, 마지막) |
행정 | |
수도 | 찰스타운 |
시대 | |
시대 | 조지 시대 |
현재 | |
현재 | 미국 앨라배마주 미시시피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테네시주 노스캐롤라이나주 조지아주 |
2. 역사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탐험대를 보내 식민지화를 시도했지만, 16세기 말에는 포기했다.
식민지 캐롤라이나는 야마시 족, 애팔라치 족, 체로키 족 등 원주민들과 잦은 분쟁을 겪었다. 특히 1715년부터 1717년까지 벌어진 야마시 전쟁에서는 인디언들의 공격으로 궤멸 직전에 놓이기도 했다. 캐롤라이나 오지에는 펜실베이니아와 버지니아에서 온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계 개척자들이 많았고, 해안 저지대에는 부유한 농장 소유주들이 많았다. 식민지 시대 말, 오지 사람들은 차별과 천대를 받았고, 저지대 사람들이 영국에서 부과된 세금에 불만을 품자 왕당파를 지지했다. 이는 미국 독립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카리브해 바베이도스 섬의 개척자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유럽의 봉건 제도와 노예를 이용한 설탕 플랜테이션 방식을 전했다. 서아프리카에서 쌀 재배 경험이 있던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요 환금 작물 중 하나인 쌀 재배에 큰 역할을 했다.
1680년, 알베마릴 포인트가 가혹하고 방어하기 어렵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일부 개척자들은 북쪽의 오이스터 포인트로 이동했다. 오이스터 포인트는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오는 공격을 쉽게 감지할 수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같은 해 5월, 식민지 영주는 총독과 행정 위원회에 오이스터 포인트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저지대 농원주들은 조수 간만의 차가 있는 크릭을 이용하여 찰스턴 항까지 상품을 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1680년대에는 프랑스 개신교 신자인 위그노들이 이민 오기 시작했다. 1685년 프랑스가 퐁텐블로 칙령으로 비 가톨릭 신자에 대한 신교의 자유를 폐지하면서 이들의 이민이 가속화되었다.
1775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에는 6만 명의 유럽계 미국인과 8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살고 있었다. 다른 식민지들은 저지대 캐롤라이나가 누리는 부를 따라가지 못했다. 잦은 전쟁은 식민지 주민들의 군사적 능력을 강화하고 독립을 지향하게 만들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마지막 총독은 윌리엄 캠벨 경이었다.
2. 1. 초기 탐험과 식민지화
1629년, 영국 왕 찰스 1세가 법무장관 로버트 히스 경에게 북위 31도선에서 36도선 사이의 모든 것에 대해 공인장을 발급했다. 1663년, 찰스 2세는 8명의 귀족을 식민지 영주로 임명하여 이 땅을 주었다. 당초는 현재 노스캐롤라이나를 포함하여 캐롤라이나 식민지로 불렸고, 찰스턴에 행정부를 두고 있었다. 1712년, 노스캐롤라이나에 다른 행정부가 구성되었다. 1719년 국왕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를 실제로 식민지에 가지 않았던 식민지 영주에게서 매입하여, 그곳을 지배하는 총독을 임명했다. 1729년까지 8명의 식민지 영주 중 7명으로부터 매입을 끝내고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두 직할 식민지가 구성되었다.
찰스 타운은 1670년에 설립된 최초의 정착지였다.[3][4] 찰스 2세 국왕은 이 땅을 영주라고 불리는 8명의 귀족에게 주었고, 그들은 기독교인 식민지를 계획했다. 원래 단일 영주 식민지였던 북부와 남부 지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리되었는데, 이는 원래 영주들의 상속자의 방치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지방 통치에 대한 불화로 인해 1691년 캐롤라이나 식민지 북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부지사가 임명되었다. 1712년에는 식민지가 노스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완전히 분할되었다.[5]
야마시 전쟁 (1715–1717)은 식민지의 후방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앤 여왕 전쟁 (1702–1713) 동안 영주들이 인디언이나 인근 스페인인으로부터 지방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많은 주민들에게 영주 통치를 종식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시켰다. 1719년에는 영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주민들의 청원에 따라 조지 1세 국왕은 그해 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을 임명했다(노스캐롤라이나의 총독은 1729년까지 영주에 의해 계속 임명되었다). 영국 왕실이 영주들을 찾아 매입하려 한 거의 10년 후,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729년에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1663년, 바베이도스의 개척자가 윌리엄 힐튼을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으로 보내 정착에 적합한 장소를 찾게 했지만, 힐튼 헤드 섬을 발견하고 명명한 것 외에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짧은 기간 동안 케이프 피어 강 어귀에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거기에서 남쪽으로 포트 로열 지역의 탐험대가 보내졌지만, 그곳에서는 프랑스가 단기간 찰스포트 기지를 건설했고, 스페인은 산타 엘레나를 건설한 적이 있었다. 산타 엘레나는 1566년부터 폐기될 때까지인 1587년까지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수도였다. 1666년, 로버트 샌포드 선장이 우호적인 에디스토 인디언을 방문했다. 케이프 피어를 향해 귀로에 오를 때 헨리 우드워드 박사가 남아서 내륙과 원주민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1669년 8월, 3척의 배, ''캐롤라이나'', ''포트로열'' 및 ''앨버말''이 잉글랜드에서 바베이도스로 향했다. 이 선단의 ''앨버말''이 바베이도스 해안 근처에서 침몰했다. 선단은 캐롤라이나의 식민지 영주가 지시한 물자를 운반했고, ''앨버말'' 대신 ''쓰리 브라더스''를 용선하여 다시 출항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폭풍을 만나 선단이 흩어졌고, ''포트로열''은 6주 동안 헤매다가 바하마에서 난파했을 때 식수가 바닥났다. 44명의 사람들이 해안에 도착했지만, 선장이 새로운 배를 마련하여 가장 가까운 식민지로 보내기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다. 새로운 배로 뉴 프로비던스 섬으로 가서, 거기에서 새로운 배를 사서 버뮤다까지 가서 겨우 ''캐롤라이나''와 합류할 수 있었다.
버뮤다에서는 80세의 청교도이자 버뮤다 개척자인 윌리엄 세일이 캐롤라이나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1670년3월 15일, 세일의 지휘하에 겨우 포트 로열에 도착했다. 한 승선자의 증언에 따르면, 인디언은 우호적이었고, 상륙에 적합한 장소를 몸짓으로 나타냈으며, 서툰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왔다. 스페인은 이 시기에도 캐롤라이나를 자국 영토로 간주했다. 스페인의 주요 기지가 있는 세인트 오거스틴은 그리 멀지 않았고, 스페인의 전도소가 있는 과레와 모카마는 사바나 강과 포트 로열 남쪽에 위치한 해안에 있었다. 에디스토 인디언은 영국인이 그곳에 영구적인 개척지를 건설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북부 해안을 따라 살고 있던 키아워 인디언의 추장이 와서 키아워 인디언의 장소에 영국인이 정착하는 것과 버지니아에 노예를 구하러 습격을 가해오는 웨스트족으로부터 영국인을 보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추장의 이름은 휴지배트 쿼티였다.
선원들이 합의하여 현재 웨스트 애슐리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향했다. 일행은 4월 초에 애슐리 강가, 앨버말 포인트에 상륙하여 국왕의 영예를 기리는 찰스타운(현재의 찰스턴)이라고 명명한 개척지를 건설했다. 5월 23일에 ''쓰리 브라더스''가 찰스타운 만에 도착했지만, 11-12명의 승무원은 물과 물자를 구하기 위해 세인트 캐서린스 섬에 상륙했고,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의 땅에 길을 잃었다. 세인트 캐서린스는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과레 식민지의 수도였다. 잉글랜드와 바베이도스를 출발한 수백 명의 사람들 중에서 3명의 아프리카인 노예를 포함한 148명만이 살아남아 찰스타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페인이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의 영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새로운 개척자들은 스페인과 그 동맹인 인디언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1670년 8월, 세인트어거스틴의 주민들이 찰스턴을 파괴하기 위해 인디언을 보냈다. 헨리 우드워드 박사가 외교 여행에서 돌아와 여러 부족에게 영국과의 동맹을 설득하여 스페인에 대한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도착한 스페인과 그 동맹 인디언은 이 사실을 알고 결국 공격을 포기하고 세인트어거스틴으로 돌아가 그 도시의 방어를 강화하게 되었다.
1671년 2월, 바베이도스에서 개척에 합류하기 위해 온 세일 총독이 사망하고, 일시적으로 조셉 웨스트가 총독이 되었다. 바베이도스의 존 예먼 총독이 1671년 9월 1일 500명의 바베이도스 사람들과 함께 도착하여 조셉 웨스트를 대신하여 총독이 되었다.
2. 2. 노스캐롤라이나와의 분리
1663년, 찰스 2세는 8명의 귀족을 식민지 영주로 임명하여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를 포함하는 캐롤라이나 식민지를 하사했고, 찰스턴에 행정부를 두었다. 1712년, 노스캐롤라이나에 다른 행정부가 구성되었다.[5] 1719년 국왕은 식민지에 실제로 가지 않았던 식민지 영주에게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를 매입하여, 그곳을 지배하는 총독을 임명했다. 1729년까지 8명의 식민지 영주 중 7명으로부터 매입을 끝내고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두 왕령 식민지가 구성되었다.원래 단일 영주 식민지였던 북부와 남부 지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리되었는데, 이는 원래 영주들의 상속자의 방치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지방 통치에 대한 불화로 인해 1691년 캐롤라이나 식민지 북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부지사가 임명되었다. 1712년에는 식민지가 노스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완전히 분할되었다.[5]
야마시 전쟁 (1715–1717)은 식민지의 후방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앤 여왕 전쟁 (1702–1713) 동안 영주들이 인디언이나 인근 스페인인으로부터 지방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많은 주민들에게 영주 통치를 종식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시켰다. 1719년에는 영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주민들의 청원에 따라 조지 1세 국왕은 그해 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을 임명했다(노스캐롤라이나의 총독은 1729년까지 영주에 의해 계속 임명되었다). 영국 왕실이 영주들을 찾아 매입하려 한 거의 10년 후,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729년에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영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 시작 초기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특히 재산을 찾아 식민지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자치권도 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통치의 기반으로 캐롤라이나의 상세하고 이상적인 기본 헌법 대신 짧고 유연한 왕실의 칙허를 선호했다. 게다가 많은 잉글랜드 국교회 신도들은 식민지 영주가 비국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719년 11월, 캐롤라이나는 제임스 무어를 총독으로 선출하고 영국 국왕에게 대표단을 보내 캐롤라이나를 국왕이 지명하는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 식민지로 할 것, 그리고 영국 정부로부터 직접 식민지에 지원과 안전 보장을 요청하는 청원을 했다. 국왕은 캐롤라이나의 수출 상품에 관심이 있었고, 식민지 영주로는 식민지를 적절히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식민지의 청원에 동의했다. 식민지 영주 시대의 마지막 총독이 된 로버트 존슨이 첫 번째 총독이 되었다.
한편,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천천히 두 개로 갈라졌다. 처음 50년 동안 대부분의 개척지는 찰스턴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식민지 북부에는 수심이 깊은 항구가 없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초기에 개척이 진행된 지역인 올버마얼 개척지는 버지니아와 연관이 깊은 버지니아 개척자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1712년, 캐롤라이나의 북쪽 절반은 자체 정부를 갖는 것을 인정받아 "노스캐롤라이나"로 불렸다.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는 1729년까지 식민지 영주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인구가 많고 상업적으로도 더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유럽인들은 캐롤라이나라고 부를 때 주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가리켰으며, 노스캐롤라이나를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미국 독립 전쟁 즈음에 사우스캐롤라이나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2. 3. 원주민과의 갈등
식민지 캐롤라이나는 야마시 족, 애팔라치 족, 체로키 족 등 원주민과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3] 1715년부터 1717년까지 이어진 ‘야마시 전쟁’에서는 인디언의 공격으로 궤멸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3]1670년 8월, 세인트어거스틴 주민들이 찰스턴을 파괴하기 위해 인디언을 보냈지만, 헨리 우드워드 박사가 여러 부족을 설득하여 영국과의 동맹을 맺어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했다.[3] 스페인과 그 동맹 인디언은 공격을 포기하고 세인트어거스틴으로 돌아갔다.[3]
1671년 2월, 세일 총독이 사망하고 조셉 웨스트가 일시적으로 총독이 되었다.[3] 1671년 9월 1일, 존 예먼 총독이 500명의 바베이도스 사람들과 함께 도착하여 조셉 웨스트를 대신하여 총독이 되었다.[3] 초기 식민지 경제는 인디언 노예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3] 1675년부터 1680년까지 웨스터 족은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과라와 모카마 부족을 습격하여 붙잡은 노예 무역으로 이익을 올렸다.[3] 노예는 찰스턴에서 배를 타고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갔다.[3] 1679년 웨스터 족과의 전쟁이 발발하여 웨스터 족은 궤멸되었다.[3]
역사학자 앨런 갤레이에 따르면, 1670년부터 1715년까지 찰스턴에서 수출된 인디언 노예의 수는 24,000명에서 51,000명 사이로 추정되며, 그 대부분은 스페인령 플로리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3]
1760년 1월 19일, 체로키족은 영국인이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하여 개척자와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개척자의 토지를 빼앗고 오지의 백인 개척자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체로키 전쟁으로 이어졌다.[3]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윌리엄 헨리 리틀턴 지사는 1,100명의 군대를 소집하고 저지대 마을로 진격하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3] 평화 조약의 조건으로 29명의 체로키족 추장이 프린스 조지 요새에 인질로 수감되었다.[3]
1760년 2월, 체로키족은 인질 석방을 목표로 프린스 조지 요새를 공격했고, 요새 지휘관이 전사했다.[3] 후임 지휘관은 인질 처형을 명령하고 공격 부대를 몰아냈다.[3] 리틀턴 지사는 캐나다의 군정 장관 제프리 애머스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애머스트는 아치볼드 몽고메리에게 1,200명의 영국군 정규병과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연대를 붙여 파견했다.[3] 몽고메리 부대는 체로키 미들타운 지구로 진격했지만, "에토코파스"에서 기습을 받아 패배하고 찰스턴으로 철수했다.[3]
1761년, 제임스 그랜트 장군이 2,6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체로키족 토벌에 나섰다.[3] 여기에는 카토바족 인디언도 정찰병으로 종군했다.[3] 체로키족은 에토코파스에서 다시 싸웠지만, 그랜트 부대를 막을 수 없었고, 그랜트 부대는 미들타운 지구의 마을과 밭의 곡물을 불태웠다.[3]
1761년 9월, 아타클라클라에 인도된 체로키족 추장들이 평화를 요구했다.[3] 평화 조건은 저지대 마을을 포함하여 체로키족 영토의 동부 대부분을 할양하는 것이었다.[3]
2. 4. 내륙 지역 개척과 갈등
야마시 전쟁(1715–1717)은 식민지의 후방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5] 앤 여왕 전쟁(1702–1713) 동안 영주들이 인디언이나 인근 스페인인으로부터 지방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커지면서, 많은 주민들은 영주 통치를 종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19년에는 영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주민들의 청원에 따라 조지 1세 국왕은 그해 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을 임명했다(노스캐롤라이나의 총독은 1729년까지 영주에 의해 계속 임명되었다).[5] 영국 왕실이 영주들을 찾아 매입하려 한 거의 10년 후,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729년에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 총독은 찰스턴 항구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을 공격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완충 지대를 마련하기 위해 서부 변경 개척을 장려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은 유럽의 개신교 신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했다. 이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노예를 포함한 가족의 수에 따라 넓은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함께 정착한 100가구마다 교구가 설정되었고, 식민지 의회에 2명의 대표를 보낼 수 있었다. 10년 이내에 항해 가능한 강 유역을 따라 8개의 군구가 형성되었다. 독일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및 웨일스인에 의해 건설된 오렌지버그(Orangeburg)나 서세고타(Saxe-Gotha, 후일의 케이시)와 같은 마을을 찰스턴의 주민들은 인디언의 습격에 대비한 방어선, 또는 노예 반란 발생 시 예비군으로 생각했다.
1750년까지 피드몬트(Piedmont) 지역은 대형 수레 도로를 이용하여 남하한 변경 개척자 가족들로 채워졌다. 내륙 지역의 칼뱅주의 신봉 농부와 저지대의 성공회 신자로 특권 계층인 플랜테이션 경영자 사이의 생각 차이는 두 지역 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을 낳았다. 미국 독립 전쟁 시점까지 내륙 지역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백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만에서 3만 명이 거주했으며, 대부분 비국교도였다. 최초 헌법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성공회 신자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은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성공회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공식 교회로 지정했다.
프랜시스 니콜슨 총독은 선물로 체로키 족과의 융화를 도모했지만, 체로키족은 식민지 정부와의 약속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알렉산더 커밍 경이 1730년에 체로키족과 협상하여 개척을 위한 토지에 손을 댔다. 제임스 글렌 지사가 크릭 족과 체로키족 사이의 평화를 중재했기 때문에, 체로키족은 그 보상으로 수천 에이커의 토지를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위해 인정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기지와 교역의 중심지로서 퀴위 강 근처에 프린스 조지 요새를 건설했다. 2년 후, 체로키족의 지도자인 올드 호프가 글렌과 찰스턴과 인디언 퀴위 마을의 중간에 있는 살다 올드타운에서 조약을 맺고, 현재는 10개의 군에 상당하는 96개의 구역을 캐롤라이나에 양도했다.
1760년 1월 19일까지 체로키족은 영국인이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하여 개척자와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점차 개척자의 토지를 빼앗고 오지의 백인 개척자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체로키 전쟁이라고 불리는 분쟁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윌리엄 헨리 리틀턴 지사는 1,100명의 군대를 소집하고 저지대 마을로 진격하여 즉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 조약의 조건 중 하나로, 29명의 체로키족 추장을 프린스 조지 요새에 인질로 수감했다. 리틀턴은 찰스턴으로 돌아갔지만 체로키족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개척자에 대한 습격을 계속했다. 1760년 2월, 체로키족은 인질의 석방을 목표로 프린스 조지 요새 그 자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요새의 지휘관이 전사했다. 그 후임 지휘관은 즉시 인질 처형을 명령하고 공격 부대를 몰아냈다. 리틀턴 지사는 반란을 감당하지 못하고 캐나다의 군정 장관 제프리 애머스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애머스트는 아치볼드 몽고메리에게 1,200명의 영국군 정규병과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연대를 붙여 파견했다. 몽고메리 부대는 체로키족이 포기한 저지대 마을 몇 곳을 불태우고 체로키 미들타운 지구로 진격했다. 몽고메리 부대는 "에토코파스"에서 기습을 받아 패배하고 찰스턴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761년, 체로키족 토벌의 세 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다. 제임스 그랜트 장군이 2,6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격했다. 여기에는 카토바 족 인디언도 정찰병으로 종군했다. 체로키족은 다시 에토코파스에서 싸웠지만 이번에는 그랜트 부대를 막을 수 없었고, 그랜트 부대는 미들타운 지구의 마을과 밭의 곡물을 불태웠다.
1761년 9월, 아타쿨라쿨라에 인도된 체로키족 추장들이 평화를 요구해 왔다. 평화 조건은 저지대 마을을 포함하여 체로키족 영토의 동부 대부분을 할양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사는 체로키족은 머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미들타운이나 더 오지로 이주하게 되었다.
체로키족의 패배와 동부 영토가 할양되면서, 현재는 랭커스터 군이라고 불리는 왁스호우를 통해 오지에 새로운 개척자가 쇄도했다. 곧 무법 상태가 되었고, 도난, 방화 및 약탈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오지의 주민들은 자경단인 "레귤레이터즈"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토지에 법을 가져오기로 했다. 오지 주민 중에는 식민지 백인의 50%가 있었고, 패트릭 칼훈과 다른 대표를 찰스턴 의회에 보내 법원, 도로, 교회 및 학교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내 칼훈과 모세스 커클랜드가 오지에서 선출된 식민지 의원 의원이 되었다.
3. 사회와 경제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초기 경제는 인디언 노예 수출이 중심이었다. 웨스터 족은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을 공격하여 노예로 팔았고, 이후 사바나 지역과 야마시 족 인디언들이 이 역할을 대신했다. 역사학자 앨런 갤레이에 따르면, 1670년부터 1715년까지 찰스턴에서는 수입되는 노예보다 수출되는 인디언 노예가 더 많았으며, 그 수는 24,000명에서 51,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스페인령 플로리다 출신이었으며, 서인도 제도뿐만 아니라 북부 영국령 식민지로도 팔려나갔다. 당시 아프리카 노예는 인디언 노예보다 비쌌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자들은 주변 인디언 부족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아프리카 노예를 선호했다.[1]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치카소족, 크릭족, 체로키족과 동맹을 맺고 노예 외에도 사슴 가죽, 송진, 쌀 등을 거래하며 번영했다. 초기 이민자들은 대부분 바베이도스 출신 농장주를 위해 일하는 연공 노동자나 노예였으며, 강과 씨 제도에 플랜테이션을 건설했다.[1]
1715년경, 유럽계와 아프리카계 인구의 90%가 찰스턴에서 약 48.28km 이내에 거주했다. 쌀 재배는 작은 면적에서도 높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었고, 토지를 황폐화시키지 않아 찰스턴 주변에 인구가 밀집되었다. 버지니아와 달리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 수가 비노예 인구의 10배에 달했고, 영국인 정착민들은 플랜테이션 노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바베이도스 출신들은 노예를 활용한 경제 모델이 성공적이라고 주장했다.[1]
식민지 영주나 왕실은 노예 제도 자체보다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수출되는 상품에 더 관심이 있었다. 쌀과 인디고는 영국 제국에 귀중한 자원이었으며, 특히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1730년대, 영국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플랜테이션을 보호하기 위해 조지아 식민지를 완충 지대로 설립했다. 조지아 해안은 과거 스페인령이었으나, 노예 사냥과 전쟁으로 인구가 급감하여 저항할 힘이 없었다.[1]
3. 1. 인구 구성
스페인이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의 영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새로운 개척자들은 스페인과 그 동맹인 인디언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1670년 8월, 세인트어거스틴 주민들이 찰스턴을 파괴하기 위해 인디언을 보냈다. 헨리 우드워드 박사는 외교 여행에서 돌아와 여러 부족에게 영국과의 동맹을 설득하여 스페인에 대한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했다.1671년 2월, 바베이도스에서 개척에 합류하기 위해 온 세일 총독이 사망하고, 일시적으로 조셉 웨스트가 총독이 되었다. 1671년 9월 1일 바베이도스의 존 예먼 총독이 500명의 바베이도스 사람들과 함께 도착하여 조셉 웨스트를 대신하여 총독이 되었다.
초기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경제는 인디언 노예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1675년부터 1680년까지, 웨스터 족은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과라와 모카마 부족을 습격하여 붙잡은 노예 무역으로 이익을 올렸다. 노예는 찰스턴에서 배를 타고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갔다. 1679년 웨스터 족과의 전쟁이 발발하여 웨스터 족은 궤멸되었다.
역사학자 앨런 갤레이에 따르면, 1670년부터 1715년까지 수입되는 노예보다 찰스턴에서 수출되는 노예의 수가 더 많았다. 찰스턴에서 수출된 인디언 노예는 24,000명에서 51,000명 사이로 추정되며, 그 대부분은 스페인령 플로리다에서 왔다. 많은 수가 서인도 제도로 운송되었지만, 버지니아,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및 매사추세츠와 같은 북부의 영국령 식민지에서 팔린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의 가격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인디언 노예보다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자들은 인디언 노예보다 아프리카 노예를 선호했다.
동시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내부의 치카소족, 크릭족 및 체로키족과 동맹을 맺어, 노예뿐만 아니라 사슴 가죽, 선박용 송진 및 쌀을 거래했다. 이 거래로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인구와 번영을 빠르게 늘려갔다.
1715년경,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유럽과 아프리카 사람들의 90%는 찰스턴에서 약 48.28km 이내에 살았다.
1680년, 알베마릴 포인트가 가혹하고 지키기 어렵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몇몇 개척자들은 북쪽의 오이스터 포인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680년 5월, 식민지 영주는 총독과 행정 위원회에 오이스터 포인트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프랑스의 개신교인 위그노는 1680년대에 이민자로 오게 되었다. 1685년 프랑스가 비 가톨릭 신자에 대한 신교의 자유를 퐁텐블로 칙령으로 폐지한 것이 이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4. 정치와 행정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총독 목록 참고
국왕 재판소와 일반 소송 법원은 1725년경에 설립되었으며, 찰스 타운에 위치했다. 대법원장 목록은 다음과 같다.[6]
재임자 | 재임 기간 | 비고 | ||
---|---|---|---|---|
취임 | 퇴임 | |||
에드먼드 보훈 | 1698 | 1699 | 열병으로 사망 | |
니콜라스 트로트 | c.1702 | 1718 | 반란으로 해임 | |
리처드 알레인 | 1719 | 불확실 | ||
로버트 라이트 | 1730 | 1739 | 재임 중 사망 | |
토마스 데일 | 1739년 10월 17일 | 1739년 11월 | 불확실 | |
벤자민 휘태커 | 1739년 11월 7일 | 1749 | 마비로 인해 해임 | |
제임스 그레임 | 1749년 7월 6일 | 1752년 8월 29일[7] | 재임 중 사망[8] | |
찰스 핀크니 | 1752 | 1753 | ||
피터 레이 | 1753 | |||
제임스 미치 | 1759년 9월 1일 | 1760년 7월 16일 | 재임 중 사망, 영국 런던 | |
윌리엄 심슨 | 1761년 1월 24일 | |||
찰스 스키너 | 1762 | |||
토마스 녹스 고든 | 1771년 5월 13일 | |||
윌리엄 헨리 드레이튼 | 1776년 4월 13일 | |||
존 러틀리지 | 1791년 2월 16일 | 1795 | 사임 후 미국 대법원장 역임 | |
1791년 이후 대법원장은 더 이상 임명되지 않았다. |
식민지 영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 초기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특히 재산을 찾아 식민지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자치권도 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통치의 기반으로 캐롤라이나의 상세하고 이상적인 기본 헌법 대신 짧고 유연한 왕실의 칙허를 선호했다. 게다가 많은 잉글랜드 국교회 신도들은 식민지 영주가 비국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719년 11월, 캐롤라이나는 제임스 무어를 총독으로 선출하고 영국 국왕에게 대표단을 보내 캐롤라이나를 국왕이 지명하는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 식민지로 할 것과 영국 정부로부터 직접 식민지에 지원과 안전 보장을 요청하는 청원을 했다. 국왕은 캐롤라이나의 수출 상품에 관심이 있었고, 식민지 영주로는 식민지를 적절히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식민지의 청원에 동의했다. 식민지 영주 시대의 마지막 총독이 된 로버트 존슨이 첫 번째 총독이 되었다.
한편,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천천히 둘로 갈라졌다. 처음 50년 동안 대부분의 개척지는 찰스턴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식민지 북부에는 수심이 깊은 항구가 없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초기에 개척이 진행된 지역인 올버마얼 개척지는 버지니아와 연관이 깊은 버지니아 개척자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1712년, 캐롤라이나의 북쪽 절반은 자체 정부를 갖는 것을 인정받아 "노스캐롤라이나"로 불렸다.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는 1729년까지 식민지 영주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인구가 많고 상업적으로도 더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유럽인들은 캐롤라이나라고 부를 때 주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가리켰으며, 노스캐롤라이나를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미국 독립 전쟁 즈음에 사우스캐롤라이나라는 명칭이 정착되었다.
로버트 존슨 총독은 찰스턴 항구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을 공격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완충 지대를 마련하기 위해 서부 변경 개척을 장려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은 유럽의 개신교 신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했다. 이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노예를 포함한 가족의 수에 따라 넓은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함께 정착한 100가구마다 교구가 설정되었고, 식민지 의회에 2명의 대표를 보낼 수 있었다. 10년 이내에 항해 가능한 강 유역을 따라 8개의 군구가 형성되었다. 독일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및 웨일스인에 의해 건설된 오렌지버그나 서세고타(후일의 케이시)와 같은 마을을 찰스턴의 주민들은 인디언의 습격에 대비한 방어선, 또는 노예 반란 발생 시 예비군으로 생각했다.
1750년까지 피드몬트 지역은 대형 수레 도로를 이용하여 남하한 변경 개척자 가족들로 채워졌다. 내륙 지역의 칼뱅주의 신봉 농부와 저지대의 성공회 신자로 특권 계층인 플랜테이션 경영자 사이의 생각 차이는 두 지역 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을 낳았다. 미국 독립 전쟁 시점까지 내륙 지역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백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만에서 3만 명이 거주했으며, 대부분 비국교도였다. 최초 헌법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성공회 신자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은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성공회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공식 교회로 지정했다.
참조
[1]
뉴스
National Anthem
https://www.royal.uk[...]
2016-01-15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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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1877
[3]
서적
The History of South Carolina Under the Proprietary Government, 1670-1719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22-04-09
[4]
서적
The Indian Slave Trade: The Rise of the English Empire in the American South, 1670-1717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22-04-09
[5]
서적
The Statutes at Large of South Carolina
https://books.google[...]
A.S. Johnston
[6]
서적
The Statutes at Large of South Carolina
https://books.google[...]
A.S. Johnston
[7]
서적
Death Notices in the South-Carolina Gazette 1732-1775/Death Notices in the South Carolina Gazette, 1766-1774
https://books.google[...]
Genealogical Publishing Com
2012-03-21
[8]
서적
St. Philip's Church of Charleston: An Early History of the Oldest Parish in South Carolina
https://books.google[...]
Arcadia Publishing
2015-05-04
[9]
서적
Colonial America to 1763
https://archive.org/[...]
Infobase Publishing
[10]
서적
Revolutionary America 1763 to 1800
https://archive.org/[...]
Infobase Publishing
[11]
웹사이트
Colonial and Pre-Federal Statistics
https://www2.census.[...]
United States Census Bureau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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