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케 요시노부 (15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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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타케 요시노부(1570년)는 사타케 요시시게의 맏아들로, 히타치국 오타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영지를 보전받았으며, 히타치국 내 적대 세력을 제거하고 유키씨 영지를 제외한 54만 석 영지를 확보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6대장으로 불렸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움을 받아 데와국 구보타 번으로 삭감 전봉되었다. 이후 구보타 번에서 내정을 펼치고 가문을 재건했으며,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적자가 없어 동생을 양자로 삼았으나 폐적하고, 다른 동생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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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노부 (157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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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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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타케 요시노부 |
일본어 이름 | 佐竹 義宣 |
로마자 표기 | Satake Yoshinobu |
출생 | 1570년 8월 17일 |
출생지 | 히타치국 |
사망 | 1633년 3월 5일 |
사망지 | 에도 |
관직 | |
가문 | 사타케 씨 당주 |
재임 시작 | 1589년 |
재임 종료 | 1633년 |
이전 | 사타케 요시시게 |
다음 | 사타케 요시타카 |
영지 | 구보타 번 초대 번주 |
영지 시작 | 1602년 |
영지 종료 | 1633년 |
이전 영주 | - 없음 - |
다음 영주 | 사타케 요시타카 |
가계 | |
아버지 | 사타케 요시시게 |
배우자 | 쇼도인 |
소속 | |
가문 | 사타케 씨 |
소속 세력 | 도요토미 씨, 도쿠가와 막부 |
군사 | |
지휘 | 구보타 번 |
참전 전투 | 히토토리바시 전투(1586), 스리아게하라 전투(1589), 오시 공성전(1590), 이마후쿠 전투(1614) |
생애 |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어릴적 이름 | 도쿠주마루 |
별칭 | 지로, 히타치지쥬 |
관위 | 종사위상, 좌근위중장, 우쿄다이부 |
막부 | 에도 막부 |
섬긴 주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씨족 | 사타케 씨 |
부모 |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 어머니: 다테 하루무네의 딸・호주인 |
형제자매 | 요시노부, 아시나 요시히로, 에도 사네미치 부인, 이와키 사다타카, 이와키 노부타카, 요시나오 |
배우자 | 정실: 나스 스케타네의 딸・쇼도인계실: 다가야 시게쓰네의 딸・다이주인측실: 아시나 모리요시의 딸・이와세고다이 |
자녀 | 남자 2명 (어머니는 다이주인, 모두 요절)양자:요시나오(동생),요시타카(동생・이와키 사다타카의 아들)'모리야스(동생・아시나 요시히로의 아들) |
기타 정보 | |
묘소 | 아키타현아키타시 이즈미미타케네 텐토쿠지교토부교토시 다이토쿠지교쿠린인 |
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
2. 생애
사타케 요시시게의 맏아들로 히타치국 오타성에서 태어났다. 1589년 아버지 요시시게가 은거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당시 사타케 씨는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 남쪽의 호조 우지나오에게 압박받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을 개시하자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오시성 전투에 참가하여 영지를 보전받았다. 오슈 처분 이후 도쿠가와씨, 마에다씨, 시마즈씨, 모리씨, 우에스기씨와 함께 도요토미 정권의 6대장으로 불렸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힘을 배경으로 히타치 국내의 적대 세력을 몰아내고 유키씨 영지를 제외한 히타치 54만 석 영지를 획득, 히타치 국을 통일하였다. 1599년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려 하자, 미쓰나리와 친분이 있던 요시노부는 우키타 히데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력하여 미쓰나리를 구출하였다.[2]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아버지 요시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을 드는 등 가문의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결국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전투 후 1601년 이에야스의 질책을 받고 히타치 미토 54만 석에서 데와 구보타 21만 석으로 삭감 전봉되었다.[2]
데와로 전봉된 후 구보타 번 통치에 힘썼다. 미나토성을 폐하고 구보타성, 가쿠노다테성, 요코테성, 오다테성을 거점으로 삼아 내정을 펼쳤다.[2] 시부에 마사미쓰, 우메즈 마사카게 등 옛 다이묘들의 유신들과 사타케 가문의 옛 가신들을 등용하고 개간 정책을 펴는 등 가문 재건에 힘써 에도 중기 구보타 번의 실제 고쿠다카는 45만 석을 상회하였다.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군 측에 참전하여 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군과 싸웠다. 이마후쿠 전투에서 시부에 마사미쓰가 전사하기도 하였으나, 승리하여 막부의 평가를 받았다.[2]
적자가 없었던 요시노부는 동생 요시나오를 양자로 맞이했으나 1626년 폐적시키고, 다시 동생 이와키 사다타카의 아들 요시타카를 양자로 들였다. 간에이 10년(1633년) 1월 25일, 에도 간다 저택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요시타카가 그 뒤를 이었다.[2]
2. 1. 어린 시절
사타케 요시시게의 맏아들로 히타치국 오타성에서 태어났다.[3] 요시노부가 태어났을 무렵, 아버지 요시시게는 나스씨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1572년에 나스씨와 화해했다. 이 화해는 나스씨 당주 나스 스케타네의 딸을 요시노부의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으며, 당시 요시노부는 3세였다.1585년 4월, 사타케씨가 우쓰노미야씨와 함께 미부씨를 공격했을 때 첫 출진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미부씨는 사타케씨의 산하에 있었고, 같은 해 말에 호조씨에게 배반했기 때문에, 실제 전투는 다음 해인 1586년 4월이었으며, 요시노부의 첫 출진도 이때로 여겨진다.[4] 그는 15세가 되기 직전인 1586년 히토토리바시 전투에 처음으로 참전했다.
2. 2. 가독 상속과 오다와라 정벌
사타케 요시시게의 맏아들로 덴쇼 17년(1589년)에 아버지 요시시게가 은거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5]당시 사타케 씨는 북쪽으로는 다테 마사무네, 남쪽으로는 호조 우지나오의 압박을 받는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을 개시하자, 요시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오시성 전투에 참가했다.[6] 오시성 물공격 때 제방 구축에 종사하기도 했다.
오슈 처분에 따라 영지 소유를 인정받았으며, 도쿠가와씨, 마에다씨, 시마즈씨, 모리씨, 우에스기씨와 함께 도요토미 정권의 6대장으로 불렸다. 이후 도요토미의 힘을 배경으로 히타치국 내에서 적대 세력을 몰아내고, 유키씨 영지를 제외한 히타치 54만 석 영지를 획득했다.
2. 3. 히타치 국 통일
사타케 요시시게의 맏아들로 태어난 요시노부는, 덴쇼 17년(1589년)에 아버지 요시시게가 은거하자 가문을 계승하였다. 덴쇼 연간 말, 사타케 씨는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와 남쪽의 호조 우지나오에게 압박받아 멸망 위기에 놓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을 시작하자 히데요시 휘하로 출진하여 오시성 전투에 참가했다. 오슈 처분에 따라 영지 소유를 인정받으면서, 도쿠가와씨, 마에다씨, 시마즈씨, 모리씨, 우에스기씨와 함께 도요토미 정권의 6대장으로 불렸다.[2]그 후, 도요토미의 힘을 배경으로 히타치국 내에서 적대하던 에도 시게미치를 몰아내고, 남방 33관의 고쿠진들을 모살하여, 유키씨 영지를 제외한 히타치 54만 석 영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덴쇼 18년(1590년) 8월 1일에 히데요시로부터 안도된 히타치 및 시모츠케의 일부 영지 21만 6,758관문(25만 5,800석)은 다음과 같다.[7]
대상 | 석고 |
---|---|
사타케 요시노부 | 11만 석 |
사타케 요시시게 | 1만 석 |
사타케 요시히사 | 1만 석 |
요리키 가신 분 | 12만 8,800석 |
사타케씨와 요리키 가신 분의 비율은 50.2대 49.8로, 영주 권력으로서는 약했다. 이들 영지나 가신에는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지 않고 독립을 인정받지 못한 세력이 사타케씨의 부하로 편입된 경우가 포함되어 가신화는 불충분했다. 이후 요시노부는 히데요시의 권위를 배경으로 에도씨·히타치 남부에 할거하는 다이죠씨 부하의 구니진들 (소위 남방 33관, 주로 료코 두 군의 쓰카하라씨·나메가타씨·우라베씨·아소씨·가시마씨 등 만석 미만의 토호)를 토벌하는 등 영주 권력 강화를 진행했다.[7]
요시노부는 덴쇼 18년(1590년) 12월 23일, 히데요시의 거성에 의해 종4위 하의 위를 받고, 시종·우쿄다이후에 임명되었으며, 덴쇼 19년(1591년) 1월 2일에는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을 받았다.
요시노부는 주인장에 의한 소령 안도 직후부터 히타치국 전역에 지배를 미치려 하여, 우선 거성을 오타성에서 미토성으로 옮기기로 했다. 당시 미토성의 성주는 오다와라 정벌 때 참진하지 않았던 에도 시게미치였다. 요시노부는 상락 중이었으므로, 미토성 공략은 아버지 요시시게가 행하여, 덴쇼 18년(1590년) 12월 20일, 미토성을 함락하고, 같은 달 22일에는 후추(훗날의 이시오카시)에 거점을 둔 다이죠 기요모토를 공격하여 다이죠씨를 멸망시켰다.[9]
덴쇼 19년(1591년) 2월 9일, 교토에서 돌아온 요시노부는 가시마군 및 나메가타군에 흩어져 있던 "남방 33관"의 구니진 무리 중, 아직 살아남아 있던 세력을 모살하여, 히타치국 전역의 지배권 확립에 성공했다.[9]
덴쇼 19년(1591년) 3월 21일, 요시노부는 미토성으로 옮겨, 사타케 요시히사에게 미토성의 정비 확장을 명했다. 미토성에 본거지를 옮긴 직후 6월, 도요토미 정권은 요시노부에게 오슈 출병 2만 5,000명이라는 매우 무거운 군역을 명령했고, 이 동원은 10월까지 약 4개월간 계속되었다.[7]
2. 4. 임진왜란 참전
1591년(덴쇼 19년) 9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위해 각국의 다이묘에게 출병을 명했고, 요시노부도 5,000명의 출병을 명령받았다. 이 군역은 분로쿠 원년(1592년) 1월부터 이듬해 분로쿠 2년(1593년) 윤 9월까지 약 21개월간 이어졌으며, 당초 5,000명의 군역은 도중에 3,000명으로 감해졌고, 나고야성 진중에서는 "어군역역 2,869인"으로 보고되었다.[7]요시노부는 분로쿠 원년(1592년) 1월 10일, 미토 성을 출발하여 같은 해 4월 21일, 나고야성에 도착했다. 분로쿠 2년(1593년) 5월 23일, 요시노부는 조선으로 건너갈 것을 명받았고, 6월 13일, 선봉인 사타케 요시히사가 1,440명을 이끌고 나고야를 출발했다. 그러나 7월 7일, 요시노부에게 도해를 보류하라는 연락이 와서 요시노부는 조선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 요시노부는 임진왜란 때 정비한 군역 체제를 활용하여 미토 성 보수를 진행했고, 분로쿠 3년(1593년)에 보수는 일단락되었다.
분로쿠 3년(1594년) 1월 19일, 요시노부는 히데요시로부터 후시미 성 보수를 명받았고, 후시미 성 준공 후에는 후시미 성 아래에 저택을 받았다. 이 후시미 성 보수는 3,000인 역으로 약 10개월간 이어졌다.[7]
분로쿠 4년(1595년) 6월 19일, 당시의 태합검지에 의해 제후들의 석고가 확정된 것을 받아, 요시노부는 54만 석을 안도한다는 취지의 주서장을 히데요시로부터 수령했다. 이를 받아 요시노부는 분로쿠 4년(1595년) 7월 16일 이후, 가문의 지행 할당을 일제히 전환하고, 영주와 영민과의 전통적인 주종 관계를 단절시켜 사타케 종가의 통솔력을 강화했다. 분로쿠 3년(1594년)에 실시된 태합검지 결과, 이듬해 분로쿠 4년에 사타케 씨 영국에 54만 5,765석이라는 새로운 석고가 설정되었고, 아래와 같이 지행 할당이 이루어졌다.[10]
영지 | 석고 |
---|---|
사타케 요시노부 | 25만 석 |
사타케 요시시게 | 5만 석 |
사타케 요시히사 | 6만 석 |
요리키 가신 분 | 16만 8,800석 |
도요토미 창입 분 | 1만 석 |
대관 분 (사타케 요시히사) | 1,000석 |
이시다 미쓰나리 분 | 3,000석 |
마스다 나가모리 분 | 3,000석 |
이 결과, 사타케 씨와 요리키 가신 분의 비율은 66대 33이 되어 영주 권력이 대폭 강화된 한편, 일문의 사타케 요시히사가 도요토미 정권 쪽에 가까운 특수한 지위에 놓이게 되거나, 도요토미 창입지의 설치로 금산이 장악되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통제도 강화되었다.[7]
2. 5. 이시다 미쓰나리 구출
1599년 가토 기요마사 등 일곱 장수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려 하자, 미쓰나리와 친분이 있던 사타케 요시노부는 우키타 히데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력하여 미쓰나리를 구출하였다.[2] 요시노부는 미쓰나리를 여자 가마에 태워 탈출시키고 우키타 히데이에의 저택으로 피신시켰다.이러한 요시노부의 행동에 대해 그의 다도 스승이었던 후루타 시게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해명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미쓰나리는 공명(公命)을 거역한 적도 없는데, 가토 기요마사 등은 미쓰나리를 치려고 했다. 자신은 전에 미쓰나리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미쓰나리의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걸고 구했을 뿐이다."라고 답하며, 이에야스에게 사죄해야 한다면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시게나리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중재를 의뢰했고, 이에야스는 타다오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요시노부가 목숨을 걸고 옛 은혜에 보답한 것은 의(義)라고 해야 한다. 이견이 없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요시노부가 실제로 미쓰나리의 궁지를 구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2. 6.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 미쓰나리와 친분이 있어, 1599년 가토 기요마사 등 일곱 장수들이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우키타 히데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미쓰나리를 구출하였다. 1600년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우애와 의리를 중시하여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쓰나리의 서군 측에 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가 이에야스의 동군 편을 드는 등, 가문의 의견이나 태도를 확실히 하지는 않았다. 동군이 기후성을 함락시키자 이에야스 앞으로 축하 사자를 파견하고, 휘하에 있던 사타케 요시히사의 군대가 도쿠가와 히데타다 쪽으로 나아간 일 외에는 중립을 유지했다. 전투가 끝난 1601년 그러한 애매모호한 태도에 관하여 이에야스의 질타를 받고, 히타치노쿠니 미토의 54만 석에서 데와 구보타의 21만 석으로 삭감 전봉되었다.[2]1600년 5월 3일,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위해 도고쿠(東国, 동쪽 지방)의 여러 다이묘(영주)들을 교토(京都)에 소집했다. 요시노부(義宣)도 이에 응하여 같은 해 5월 중순에 교토에 도착했다. 같은 해 6월 6일, 소집된 여러 다이묘들의 진격로가 발표되었고, 요시노부는 센도구치(仙道口)를 맡게 되어 미토로 돌아갔다.
1600년 7월 24일, 오야마(小山)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미토에 있던 요시노부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다시 한번 게이쇼(景勝)의 토벌을 명했다. 이때, 이에야스의 사자는 인질을 상락(上洛, 교토로 올라옴)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요시노부는 아이즈 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실시되는 것이며, 자신은 히데요리를 거스를 의사가 없으므로 새로운 인질을 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이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야스는 사타케 씨에게 맡겨져 있던 하나부사 미치카네(花房道兼)를 불러내어, 요시노부의 동향을 확인했다.
이 시기의 사타케 씨는 가신단 내에서 의견이 갈려 동군에 붙을지 서군에 붙을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요시노부는 1600년 7월 19일경, 게이쇼와 우에스기 측에 가담한다는 밀약을 맺은 것으로 보이며[12],자신의 군대가 아카타테(赤館) 이북으로 진군하는 것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요시노부 자신은 밀약을 맺었지만, 사타케 씨 내부에는 적극적으로 이시다 측에 붙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고, 요시노부는 내부의 의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밀약을 맺었다는 지적도 있다.[13]
1600년 8월 25일, 요시노부는 갑자기 미토 성으로 철수했다. 요시노부는 이에야스에게 중신인 오누마 요리히사를 사자로 파견하여, 미토 성으로 돌아간 이유를 해명했다. 또한 사타케 가문 내에서 동군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라는 주장 (특히 아버지 요시시게는 동군 가담을 강력하게 주장했다)에 굴복하지 못한 요시노부는 우에다 성에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를 공격하고 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원군으로 요시히사(義久)가 이끄는 300기의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요시노부 자신은 적극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돕지는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자, 서군 패배 후, 아버지 요시시게는 즉시 이에야스에게 승전을 축하하는 사자를 보내고, 더 나아가 상락하여 이에야스에게 불전을 사죄했다. 이에 대한 히데타다의 답장은 도착했지만, 이에야스로부터의 답장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14]。그러나 요시노부는 거성인 미토 성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2년이 지났다. 우에스기 씨, 시마즈 씨의 처분도 결정되었고, 처분이 끝나지 않은 것은 요시노부뿐이었다. 요시노부는 그 위에 사죄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요시노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요시시게의 설득에 의해 1602년 4월에 상락하여, 드디어 이에야스에게 사죄했다.
이때, 요시노부는 이에야스에게 사죄하기 위해 후시미로 가는 도중, 사가미 국에서 만난 히데타다에게 사죄하고, 후시미에 도착한 후, 이에야스를 만나 사죄 및 가문의 존속을 간청했다[14]。
『도쿠가와 실기』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요시노부를 "'''지금 세상에 사타케 요시노부만큼 율의(律儀, 성실)한 자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너무 율의해도 곤란하다'''"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이즈 정벌에서의 요시노부의 태도를 염두에 둔 것이다.
2. 7. 데와 국으로의 전봉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타케 요시노부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측에 가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을 드는 등, 가문의 입장이나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동군이 기후성을 함락시키자 이에야스에게 축하 사절을 파견하고, 사타케 요시히사의 군대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로 향한 것 외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2]요시시게와 많은 사무라이들은 이에야스와 동군을 강력하게 지지했지만, 요시노부는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오랜 관계와 우에스기 씨족과의 비밀 조약 때문에 망설였다. 그는 군대를 보내는 대신, 사나다 씨족에 대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공격에 소수의 기병을 증원군으로 보냈지만,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토 성에 머물면서 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전투가 끝난 후 게이초 6년(1601년), 이러한 애매모호한 태도에 대해 이에야스의 질책을 받고, 히타치 미토의 54만 석에서 데와 구보타 21만 석으로 삭감 전봉되었다.[2]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친 도쿠가와 세력의 승리와 그에 따른 도쿠가와 막부의 수립으로, 사타케 씨족은 ''고쿠다카''가 180,000 ''고쿠''로 감축되고, 히타치 국의 조상 땅을 새로운 데와 국의 구보타 번에 양도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처벌을 받았다.[2]
미나모토 씨족의 직계 후손이었던 사타케 가문은 도쿠가와 씨족보다 ''쇼군''의 자리에 대한 더 정당한 세습적 주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문을 의심하고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한 또 다른 이유였다.
경장 7년(1602년) 3월,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의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에게 알현했다. 그 직후인 같은 해 5월 8일, 요시노부는 이에야스로부터 구니가에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전봉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따라서 전봉 후의 고쿠다카도 불명이었다. 그래서 요시노부는 가로인 와다 아키타메에게 보낸 서신에서, 대대로 섬겨온 가신들에게도 이전과 같은 부양을 할 수 없을 것이며, 50석 또는 100석을 받는 급인에 대해서는 전봉지에 데려가지 않을 것 등을 언급하고 있다.
5월 17일, 전봉지가 데와국아키타군으로 결정되었다. 54만 석에서 20만 석으로의 감봉이었다. 다만, 사타케 씨의 정식 석고가 결정된 것은 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의 대가 되어서였다.
사타케 씨의 처우 결정이 다른 다이묘 가문에 비해 대폭 늦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이 시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우에스기 씨와의 밀약이 발각되었다는 설과, 시마즈 씨에 대한 처분을 선행시킴으로써 시마즈 씨의 반란을 억누르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사타케 씨가 감봉된 이유로는, 무상으로 대병력을 온존하고 있던 사타케 씨를 에도에서 멀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2. 8. 구보타 번 통치
사타케 요시노부는 데와 구보타 번으로 전봉된 이후, 미나토성을 폐하고 구보타성, 가쿠노다테성, 요코테성, 오다테성을 거점으로 삼아 내정을 펼쳤다.[2] 시부에 마사미쓰, 우메즈 마사카게, 스다 모리히데 등 간토 지방, 무쓰국의 옛 다이묘들의 유신들과 사타케 가문의 옛 가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개간 정책을 펴는 등 가문의 재건에 힘썼다. 이로써 에도 중기 구보타 번의 실제 고쿠다카는 45만 석을 상회하였다.요시노부는 센보쿠 지방에서 일어난 일규를 평정하여 영내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후 쓰치자키 미나토성은 폐지되고, 1603년 5월부터 축성이 시작된 구보타성을 본성으로 삼았다. 아버지 요시시게는 요코테성을 본성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요시노부는 구보타성을 본성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러나 다른 가문의 가신이었고 나이도 젊은 시부에 마사미쓰를 중용한 것이 대대로 사타케 가문을 섬긴 가신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요시노부와 마사미쓰를 암살하려는 모의가 생겨났으나, 오히려 요시노부가 이를 적발하여 암살 기도를 한 가신들을 숙청하였으니 이를 가와이 사건이라 부른다.
요시노부는 아키타로의 감봉 전봉을 계기로 일문 및 대대로 섬겨온 가신의 지행을 감소시키고, 그 세력을 약화시켜 당주의 권력을 강화하여 새로운 정책의 실시와 인재 등용을 가능하게 했다.
2. 9. 오사카 전투 참전
사타케 요시노부는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 측에 참전하였다. 겨울 전투에서는 도요토미군의 기무라 시게나리, 고토 모토쓰구에게 고전하여 이마후쿠 전투에서 시부에 마사미쓰가 전사하기도 하였다.[2]요시노부는 다마쓰쿠리구치에 진을 치고,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함께 기무라 시게나리 및 고토 모토쓰구가 이끄는 군세와 맞붙었다. 이마후쿠 전투에서의 승리는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막부에서의 사타케 군의 평가는 높아졌다. 오사카 전투(겨울의 진)에서 막부로부터 감장을 받은 것은 불과 12명이었지만, 그중 5명을 사타케 가문 사람들이 차지했다.[2]
2. 10. 후계자 문제
사타케 요시노부는 적자가 없어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요시노부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모두 아들을 일찍 잃었다.[2]처음에는 동생 아시나 요시히로의 장남인 아시나 모리야스를 양자로 삼았으나, 모리야스는 1616년에 22세의 나이로 요시노부보다 먼저 사망했다.
1621년, 요시노부는 사타케 북가 당주였던 자신의 막내 동생 사타케 요시나오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요시나오는 1626년에 폐적되었는데, 에도 성에서 열린 사루가쿠 공연 중에 졸다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주의를 받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15] 요시나오는 출가하여 사타케 가문에서 이혼했다.
요시나오가 폐적된 후,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허락을 받아 가메다 번 주였던 사타케 요시타카(요시노부의 동생 이와키 사다타카의 아들)를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다. 다른 가문의 번주를 후계자로 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요시노부가 히데타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시노부는 1626년 고미즈노오 천황의 니조 성 행차에 동행했는데, 이때 시녀였던 사나다 노부시게의 다섯째 딸 오타에게 반하여, 자신의 중개로 친동생이자 가메다 번의 2대 번주가 된 이와키 노부타카의 측실로 들였다.
2. 11. 만년
사타케 요시노부는 간에이 10년(1633년) 1월 25일, 에도 간다 저택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타케 요시타카가 그 뒤를 이었다.[2]요시노부는 겐나 7년(1621년)에 적자가 없어 넷째 동생 요시나오를 양자로 맞이했으나, 간에이 3년(1626년)에 폐적시켰다. 그해 다시 둘째 동생 이와키 사다타카의 아들 요시타카를 양자로 들였다.
요시노부의 법명은 죠코인덴켓토텐에이다이코지이며, 묘소는 아키타현아키타시 이즈미 산가네 텐토쿠지에 있다. 교토시의 다이토쿠지교쿠린인 (다도의 스승인 후루타 오리베가 묻힌 곳)에도 요시노부의 묘소가 있다.
3. 인물
4. 유품
참조
[1]
서적
常陸・秋田 佐竹一族
Shinjinbutsu Oraisha
2001
[2]
문서
Saga, pp. 16–17.
[3]
기타
[4]
서적
中世東国の政治と経済
岩田書院
[5]
서적
伊達政宗と南奥の戦国時代
吉川弘文館
[6]
기타
[7]
간행물
豊臣期大名序説-東国大名を例として-
[8]
간행물
戦国期常陸大掾氏の位置づけ
[8]
서적
常陸平氏
戒光祥出版
[9]
기타
[10]
문서
斉藤司「文禄期「太閤検地」に関する一考察 -文禄3年佐竹氏検地を中心に-」、『関東近世史研究』19号、1964年4月。
[11]
문서
「佐竹文書」(『栃木県史』史料編中世三、十一号)
[12]
서적
フィールドワーク関ヶ原合戦
朝日新聞社
[13]
서적
関ヶ原合戦の深層
高志書院
[14]
기타
[15]
기타
[16]
웹사이트
天徳寺
https://www.akitafan[...]
一般社団法人秋田県観光連盟
2020-11-07
[17]
웹사이트
ザ・AZABU 第44号
https://www.city.min[...]
港区麻布地区総合支所
2020-11-07
[18]
문서
도쿄의 중심으로 한 관동 지방
[19]
문서
인색피포 불동흑사위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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