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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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에다 씨는 일본의 씨족으로, 미노 마에다 가, 가가 마에다 가 등으로 나뉜다. 미노 마에다 가는 후지와라 북가의 사이토 씨의 분가로, 도요토미 정권의 오봉행 마에다 겐이가 주요 인물이다. 가가 마에다 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가가, 노토, 엣추를 다스리는 다이묘로 성장했고, 에도 시대에는 가가번의 영주 가문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후작 가문이 되었으며, 도야마, 다이쇼지, 나노카이치 등의 분가도 존재했다.
2. 미노 마에다 가
미노국의 슈고다이 마에다 일가는 후지와라노 도시히토의 아들 후지와라노 노부모치를 조상으로 두고있다. 그의 자손으로는 도요토미 정권의 오봉행 중 한 명인 마에다 겐이가 있다.
2. 1. 개요
'''마에다 씨'''(일본어: 前田氏 (まえだし))는 후지와라 북가 도시히토류 계통으로, 미노국안파치군 마에다 촌에서 시작된 씨족이다.[1]
도시히토의 일곱째 아들이자 사이토 씨의 시조인 노리모치의 후손 스에모토가 미노국 슈고다이 사이토 씨의 서가로서, 같은 국의 안파치 군 마에다 촌에 거주하며 마에다 씨를 칭한 것이 시작이라고 여겨진다.[1]
마에다 도시이에나 마에다 겐이의 마에다 씨도 이 미노 마에다 씨의 서류라는 설이 존재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마에다 겐이를 배출한 마에다 가문은 겐이 이전의 정확한 계보가 불분명하여 출신이 확실하지 않지만, 미노 마에다 씨의 후예로 전해진다. 겐이의 계보 중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후예로 하는 것도 있다.[1]
겐이는 히에이 산에서 득도한 것으로 전해지는 승려로, 오다 노부타다에게 7000석의 지행으로 섬겼다. 혼노지의 변 당시에는 노부타다의 아들 산호시(오다 히데노부)를 맡아 오와리로 도망친 후, 산호시를 데리고 기요스로 향했다. 그 공적으로 오다 노부오에 의해 교토 봉행으로 임명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권을 장악한 후에도 교토의 서정을 담당하여 중용되었으며, 1585년에 단바 가메야마 5만 석을 영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 말년에는 고부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했으나 도쿠가와 측에 통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 후 본령 안도되었으나, 가독을 이은 차남 시게카츠는 1602년에 단바국 야상으로 이봉된 후, 1608년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개역되었다.
시게카츠의 형제인 한에몬 마사카츠(겐이의 셋째 아들)는 아이즈 정벌 때 시모쓰케국 오야마에서 이에야스에게 속했기 때문에, 1602년에 단바국에서 1000석을 영하는 하타모토에 서열되었다. 그 아들 한에몬 마사노부가 무사시국에 200석을 가증받아 모두 1200석이 되었으며, 그 아들 아키노카미 나오카츠는 킨리츠키, 교토 마치 부교, 오메츠케 등을 역임하고, 단바 국내(후에 무사시 국으로 변경)에 1000석을 가증받아 모두 2200석이 되었다.[1] 막말 유신기(메이지 유신)의 당주는 마타고로 다카요시이며, 막말의 가록은 2500석이었다. 유신 후 사족이 되었다.
2. 2. 주요 인물
이름 | 출생-사망 |
---|---|
마에다 겐이 | ? |
마에다 나가타네 | 1550년-1631년 |
마에다 나오토모 | 1586년-1630년 |
마에다 나오마사 | 1605년-1631년 |
마에다 다카사다 | 1628년-1707년 |
마에다 다카유키 | 1663년-1721년 |
마에다 다카스케 | 1683년-1753년 |
마에다 다카마사 | 1723년-1777년 |
마에다 다카토모 | 1759년-1832년 |
마에다 다카모토 | 1808년-1856년 |
마에다 다카나카 | 1840년-1857년 |
마에다 다카노리 | 1847년-1888년 |
마에다 코 | ? |
마에다 다카유키 | ? |
마에다 다카야 | ? |
마에다 도시타카 | ? |
마에다 도시마사 | ? |
마에다 도시이에 | ? |
마에다 도시나가 | ? |
마에다 도시쓰네 | ? |
마에다 미쓰타카 | ? |
마에다 쓰나노리 | ? |
마에다 요시노리 | ? |
마에다 무네토키 | ? |
마에다 시게히로 | ? |
마에다 시게노부 | ? |
마에다 시게미치 | ? |
마에다 하루나가 | ? |
마에다 나리나가 | ? |
마에다 나리야스 | ? |
마에다 요시야스 | ? |
마에다 도시쓰구 | 1858년-1900년 |
마에다 도시나리 | 1885년-1942년 |
마에다 도시타쓰 | 1908년-1989년 |
마에다 도시야스 | 1935년 출생 |
마에다 도시노리 | 1963년 출생 |
마에다 도시유키 | ? |
마에다 도시요시 (이노다 커피 회장 당선자, 사장 및 CEO) | ? |
고히메 | ? |
마에다 지요 | ? |
마에다 마쓰 | ? |
마에다 리쿠 | ? |
마에다 도시마사 (1578) | ? |
마에다 도시이에를 시조로 하는 가가번 마에다 가는 에도 시대를 거쳐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후작 가문이 되었다.
3. 가가 마에다 가
오와리국 아이치군의 호족 마에다 도시마사의 넷째 아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하여 공적을 세우고 노토국을 영지로 한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가 된 딸 고히메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정실이 되었고, 도시이에는 도요토미 정권의 오대로 중 한 명이 되어 가가국과 엣추국을 추가로 받았다. 장남 도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속해 영지가 더 늘어나 에도 시대에 119만 석 대다이묘(가가번) 지위에 올랐다. 도시이에의 서자(4남) 도시쓰네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녀 다마히메와 혼인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였고, 이후 마에다 가 당주들은 고산케, 고카몬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가가번 마에다 가의 분가로는 도야마번(도시쓰구를 시조, 10만 석), 다이쇼지번(도시하루를 시조, 7만 석), 나노카이치번(도시타카를 시조, 1만 석), 도사노카미가(도시마사의 가계, 마쓰의 후손)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가가번 종가는 후작, 도야마번 가문은 백작, 다이쇼지번, 나노카이치번 가문은 자작, 도사노카미 가문은 남작을 수여받았다.[2]
3. 1. 개요
'''마에다 씨'''(일본어: 前田氏 (まえだし))는 무가・화족이었던 일본의 씨족이다. 전국 시대에는 오와리국아이치군아라코 촌을 영유하는 토호에 불과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마에다 도시이에가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가가・노토・엣추를 지배하는 대다이묘로 성장했다. 자손은 에도 시대에 가가번의 영주 가문, 유신 이후 화족의 후작 가문이 되었다.
오와리국 아이치군의 호족 마에다 도시마사의 4남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하여 공적을 세우고 노토국을 영지로 한 다이묘가 되었다. 후에 도시이에의 딸 고히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우키타 히데이에의 정실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에서 오대로 중 한 명이 되어 가가국과 엣추국을 추가로 받았고, 도시이에의 장남 도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속해 부친 사후보다 영지가 더 늘어나 에도 시대의 마에다 가는 119만 석 대다이묘(가가번)의 지위에 올랐다. 도시이에의 서자(4남) 도시쓰네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녀 다마히메와 혼인하여 마에다 가의 가문 등급은 더욱 높아졌고, 이후의 마에다 가 당주들은 고산케, 고카몬과 혼인 관계를 맺게 된다.
가가번 마에다 가의 분가로는 도시쓰네의 차남 도시쓰구를 조상으로 하는 도야마번(10만 석) 가문, 3남 도시하루를 조상으로 하는 다이쇼지번(7만 석) 가문, 도시쓰네의 동생 도시타카를 조상으로 하는 나노카이치번(1만 석) 가문, 도시나가의 동복동생 도시마사의 가계인 도사노카미가(도시이에의 정실 마쓰의 후손)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가가번 종가는 후작, 도야마번 가문은 백작, 다이쇼지번, 나노카이치번 가문은 자작, 도사노카미 가문은 남작을 수여받았다.
3. 2. 출자 및 기원
오와리국 아이치군의 호족 마에다 도시마사의 넷째 아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하여 공적을 세우고 노토국을 영지로 한 다이묘가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오대로 중 한 명이 되어 가가국과 엣추국을 추가로 받았고, 도시이에의 장남 도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속해 부친 사후보다 영지가 더 늘어나 에도 시대 마에다 가는 119만 석의 대다이묘(가가번) 지위에 올랐다.[2] 도시이에의 서자(넷째 아들) 도시쓰네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녀 다마히메와 혼인하여 마에다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이후 마에다 가문 당주들은 고산케, 고카몬과 혼인 관계를 맺게 된다.[2]
가가번 마에다 가문의 분가로는 도시쓰네의 차남 도시쓰구를 시조로 하는 도야마번(10만 석) 가문, 셋째 아들 도시하루를 시조로 하는 다이쇼지번(7만 석) 가문, 도시쓰네의 동생 도시타카를 시조로 하는 나노카이치번(1만 석) 가문, 도시나가의 동복동생 도시마사의 가계인 도사노카미가(도시이에의 정실 마쓰의 후손)가 있다.[2]
메이지 유신 이후 가가번 종가는 후작, 도야마번 가문은 백작, 다이쇼지번, 나노카이치번 가문은 자작, 도사노카미 가문은 남작을 수여받았다.[2] "마에다"는 서부 오와리국 가이토 군에 위치한 지명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마에다 씨 종가의 거점이었다.[3] 마에다 나가타네(1550-1631)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섬겼으며, 그의 후손들은 가가 번 마에다 씨의 세습 가신이 되었다.[3] 이 분가는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작위인 ''단샤쿠''(남작)를 받았다.[3]
오와리 마에다 씨의 방계는 현재의 나고야시 나카가와구 일부인 아라코 성을 받았다. 마에다 토시마사(사망 1560)는 오다 노부히데를 섬겼으며, 오다 노부히데는 키요스 성을 거점으로 오와리국을 명목상 통치했다. 그의 아들 마에다 토시히사(사망 1587) 또한 오다 씨를 섬겼으며, 동생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자리를 물려주도록 명령받았다.[3]
가문의 또 다른 저명한 인물은 일반적으로 마에다 케이지로 알려진 마에다 토시마스였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아들이었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형인 마에다 토시히사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유명한 무사로 인정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우에스기 씨를 위해 싸운 전투에서 단 8명의 기병을 이끌고 모가미 씨의 전선을 돌파했다고 한다.[3]
3. 3.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
마에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 장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소년 종자로 경력을 시작하여, 노부나가의 개인 지휘 하에 있는 ''아카호로슈''(赤母衣衆)의 일원으로 계급을 올렸고, 나중에는 보병 대장(足軽大将)이 되었다.[1]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부나가의 측근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구였다. 아사쿠라씨를 격파한 후, 그는 시바타 가쓰이에 휘하에서 호쿠리쿠 지역에서 잇코잇키를 진압하는 데 참여했으며, 1570년 아네가와 전투와 1577년 테도리가와 전투에 참전했다.[1] 그는 결국 엣추국의 후추 영지(3만 ''곡'')를 받았으며, 1581년에는 노토국 (23만 ''곡'')을 받았고, 여기에 가가국의 다른 영토를 더하여 가가 번을 형성했다.[1] 노부나가의 사후,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의 영토는 노토, 가가, 엣추의 세 국을 모두 포함하도록 확장되었으며, 100만 ''곡''이 넘는 고쿠다카를 가지게 되었다.[1]
오와리국 아이치군의 호족 마에다 도시마사의 4남 도시이에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하여 공적을 세우고 노토국을 영지로 한 다이묘가 되었다. 후에 도시이에의 딸 고히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며 우키타 히데이에의 정실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에는 오대로 중 한 명이 되어 가가국과 엣추국을 가증받았다. 도시이에의 장남 도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속해 부친 사후보다 영지가 더 늘어나게 되어 에도 시대의 마에다 가는 119만 석 대다이묘(가가번)의 지위에 올랐다.
도시이에는 자신의 영지를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남인 마에다 도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했고, 가나자와성을 건설했다.[1] 그는 또한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가가 번의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도시이에의 서자(4남) 도시쓰네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녀 다마히메와의 혼인으로 마에다 가의 가격은 더욱 높아졌고 이후의 마에다 가 당주들은 고산케, 고카몬과의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마에다씨는 혼인을 통해 도쿠가와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비록 도자마 가문이었지만, 명예로운 성씨로서 "마쓰다이라"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가가번 마에다가의 분가로는 도시쓰네의 차남 도시쓰구를 조상으로 하는 도야마번(10만 석) 가문, 3남 도시하루를 조상으로 하는 다이쇼지번(7만 석) 가문, 도시쓰네의 동생 도시타카를 조상으로 하는 나노카이치번(1만 석) 가문, 도시나가의 동복동생 도시마사의 가계인 도사노카미가(도시이에의 정실 마쓰의 후손)가 있다.
마에다씨는 1583년부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까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있는 본거지에서 가가 번을 계속 통치했다. 마에다 도시쓰네는 도야마 번과 다이쇼지 번에 가문의 두 분가를 세웠다.[1] 마에다 도시이에의 다섯째 아들인 마에다 도시타카는 고즈케국의 나노카이치 번에 또 다른 가문의 분가를 세웠다.[1] 이 모든 분가 또한 메이지 유신까지 마에다씨에 의해 계속 통치되었다. 그러나 마에다씨는 종종 ''오이에 소도'' 사건에 시달렸고, 많은 가문의 수장들이 젊거나 후계자 없이 죽었다. 이 가문은 메이지 유신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
3. 4. 분가
오와리국 아이치군의 호족 마에다 도시마사의 넷째 아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하여 공을 세워 노토국을 영지로 받은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에서 오대로 중 한 명이 되었고, 가가국과 엣추국을 추가로 받았다. 그의 장남 도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편에 서서 영지가 더욱 늘어나, 에도 시대에 119만 석을 다스리는 대다이묘(가가번)가 되었다.
가가번 마에다가의 분가는 다음과 같다.
가문 | 설명 |
---|---|
도야마번 | 도시이에의 서자(4남) 도시쓰네의 차남 도시쓰구를 시조로 하며 10만 석을 다스렸다. |
다이쇼지번 | 도시쓰네의 3남 도시하루를 시조로 하며 7만 석을 다스렸다. |
나노카이치번 | 도시쓰네의 동생 도시타카를 시조로 하며 1만 석을 다스렸다. |
도사노카미가 | 도시나가의 동복동생 도시마사의 가계로, 도시이에의 정실 마쓰의 후손이다. |
메이지 유신 이후 가가번 종가는 후작, 도야마번 가문은 백작, 다이쇼지번과 나노카이치번 가문은 자작, 도사노카미 가문은 남작이 되었다.[1]
3. 5.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가가 번 종가는 후작, 도야마 번 가문은 백작, 다이쇼지 번, 나노카이치 번 가문은 자작, 도사노카미 가문은 남작을 받았다.[3]3. 5. 1. 마에다 후작 가
마에다 도시이에를 시조로 하는 가가번주 가문은 에도 시대를 거쳐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후작 가문이 되었다.[3]마지막 가나자와번주 마에다 요시야스는 보신 전쟁에서 호쿠리쿠 평정에 공을 세워 메이지 2년(1869년) 6월 2일에 1만 5000석의 상전록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17일 판적봉환으로 가나자와 번지사가 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재직했다.[3]
판적봉환 당시 가록은 현미 6만 3688석으로 모든 다이묘 중 가장 많았다.[3]
메이지 7년(1874년) 5월 요시야스가 사망하고 장남 도시쓰구가 가독을 상속했다.[3]
메이지 9년(1876년) 금록공채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6만 3688석)과 상전록(실액 3750석)의 합계 6만 7438석 대신 지급된 금록공채 액수는 119만 4076엔 91전으로 시마즈 가 다음으로 2번째로 많았다.[3]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에 의해 화족이 오작제로 개정되면서 도시쓰구는 후작에 봉해졌다.[3]
메이지 33년(1900년) 6월 도시쓰구가 사망하고 사위 양자인 도시나리가 후작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3] 도시나리는 육군 군인의 길을 걸어 육군사관학교에서 육군대학교로 진학, 보병 제2여단장, 참모본부 제4부장, 육군대학교장, 제8사단장 등을 역임했다.[3]
마에다 후작가는 화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메이지 31년(1898년) 당시 고액 소득자 순위에서 마에다 후작가의 연간 소득은 26만 6442엔으로 3위였으며, 구 다이묘 화족 중에서는 1위였다.[3]
마에다 후작가는 혼고의 도쿄 제국대학에 인접한 토지에 대저택을 지었다. 같은 부지에 2층짜리 일본식 건물과 3층짜리 지하가 있는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의 서양관을 건설했다.[3]
메이지 39년(1906년) 영국 왕족 코넛 공 아서가 방문했을 때 코넛 공을 초청하여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3] 메이지 43년(1910년) 7월 8일에는 마에다 후작 저택에 메이지 천황이 행차하여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3]


도시나리는 다이쇼 15년에 혼고의 토지 1만 2606평을 메구로구고마바의 도쿄 대학 농학부 토지 4만 평과 그에 인접한 요요기 연습림 부지 1만 1543평과 등가 교환했다.[3] 그 광대한 토지 중 1만 3000평을 저택 용지로 하고, 튜더 양식의 저택을 주문했다.[3] 쇼와 4년(1929년)에 서양관이 완성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쇼와 17년) 9월 5일 도시나리는 보르네오 수비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쿠칭에서 미리로 비행 중 실종되었다.
아들 마에다 도시타테가 후작위를 계승하여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전후에는 마에다 이쿠토쿠회 이사 및 북해척식주식회사 회장 등을 역임했다.[3]
점령 중인 1946년(쇼와 21년) 11월 12일 GHQ 지령으로 제정된 재산세로 인해 많은 화족이 경제적으로 몰락했고, 마에다 후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마바의 본저택, 가마쿠라, 가루이자와, 가나자와에 있던 별장, 홋카이도의 목장과 산림, 교토나 조선의 소유지 등을 매각해야 했고, 그 경제 규모는 급격히 작아졌다.[3]
3. 5. 2. 마에다 백작 가 (도야마)
마에다 도시쓰네의 차남 도시쓰구를 시조로 하는 도야마 번 (10만 석) 가문이다.메이지 유신 이후 도야마 번 가문은 백작 작위를 받았다.
역대 도야마 번주 및 당주는 다음과 같다.
대수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1 | 마에다 도시쓰구 | 1617년 ~ 1674년 | |
2 | 마에다 마사토시 | 1649년 ~ 1706년 | |
3 | 마에다 도시요키 | 1678년 ~ 1733년 | |
4 | 마에다 도시타카 | 1690년 ~ 1745년 | |
5 | 마에다 도시유키 | 1730년 ~ 1762년 | |
6 | 마에다 도시토모 | 1737년 ~ 1794년 | |
7 | 마에다 도시히사 | 1762년 ~ 1787년 | |
8 | 마에다 도시노리 | 1768년 ~ 1801년 | |
9 | 마에다 도시쓰요 | 1772년 ~ 1836년 | |
10 | 마에다 도시야스 | 1800년 ~ 1859년 | |
11 | 마에다 도시토모 | 1834년 ~ 1854년 | |
12 | 마에다 도시카타 | 1835년 ~ 1904년 | |
13 | 마에다 도시야쓰 | 1856년 ~ 1921년 | |
14 | 마에다 도시요 | 1886년 ~ 1966년 | 귀족원 의원 |
15 | 마에다 도시노부 | ||
16 | 마에다 아키토시 | 현 당주 |
3. 5. 3. 마에다 자작 가 (다이쇼지, 나노카이치)
마에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하여 공적을 세우고 노토국을 영지로 한 다이묘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가 된 딸 고히메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정실이 되었다. 도시이에는 도요토미 정권의 오대로 중 한 명이 되어 가가국과 엣추국을 추가로 받았고, 장남 마에다 도시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속해 영지가 더 늘어났다. 에도 시대 마에다 가는 119만 석의 대다이묘(가가번) 지위에 올랐다. 도시이에의 서자(4남) 마에다 도시쓰네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녀 다마히메와 혼인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였고, 이후 마에다 가 당주들은 고산케, 고카몬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가가번 마에다 가의 분가로는 도시쓰네의 차남 마에다 도시쓰구를 시조로 하는 도야마번(10만 석), 3남 마에다 도시하루를 시조로 하는 다이쇼지번(7만 석), 도시쓰네의 동생 마에다 도시타카를 시조로 하는 나노카이치번(1만 석), 도시나가의 동복동생 도시마사의 가계인 도사노카미가(도시이에의 정실 마쓰의 후손)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가가번 종가는 후작, 도야마번 가문은 백작, 다이쇼지번, 나노카이치번 가문은 자작, 도사노카미 가문은 남작을 받았다.
- '''다이쇼지번(大聖寺藩) 마에다 가'''
대수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1 | 마에다 도시하루 | 1618년 ~ 1660년 | |
2 | 마에다 도시아키 1세 | 1638년 ~ 1692년 | |
3 | 마에다 도시나오 | 1672년 ~ 1711년 | |
4 | 마에다 도시아키라 | 1691년 ~ 1737년 | |
5 | 마에다 도시미치 1세 | 1733년 ~ 1781년 | |
6 | 마에다 도시아키 2세 | 1758년 ~ 1791년 | |
7 | 마에다 도시타네 | 1760년 ~ 1788년 | |
8 | 마에다 도시야스 | 1779년 ~ 1806년 | |
9 | 마에다 도시코레 | 1785년 ~ 1837년 | |
10 | 마에다 토시나카 | 1812년 ~ 1838년 | |
11 | 마에다 토시히라 | 1824년 ~ 1849년 | |
12 | 마에다 토시노리 | 1833년 ~ 1855년 | |
13 | 마에다 도시미치 2세 | 1835년 ~ 1855년 | |
14 | 마에다 토시카 | 1841년 ~ 1920년 | |
15 | 마에다 토시미츠 | 1905년 ~ ? | |
16 | 마에다 토시히로 | 1929년 ~ 현재 |
- '''나노카이치번(七日市藩) 마에다 가'''
대수 | 이름 | 생몰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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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마에다 도시타카 | ||
2 | 마에다 도시모토 | 1625년 ~ 1685년 | |
3 | 마에다 도시히로 | 1645년 ~ 1693년 | |
4 | 마에다 도시요시 | 1670년 ~ 1695년 | |
5 | 마에다 도시후다 | 1689년 ~ 1708년 | |
6 | 마에다 도시타다 | 1699년 ~ 1756년 | |
7 | 마에다 도시히사 | 1762년 ~ 1787년 | |
8 | 마에다 도시아키라 | 1691년 ~ 1737년 | |
9 | 마에다 도시모치 | 1768년 ~ 1828년 | |
10 | 마에다 도시요시 | 1791년 ~ 1839년 | |
11 | 마에다 도시아키라 | 1823년 ~ 1877년 | |
12 | 마에다 도시카키 | 1850년 ~ 1896년 | |
13 | 마에다 도시사다 | ||
14 | 마에다 도시타미 | ||
15 | 마에다 후미사다 |
3. 5. 4. 마에다 남작 가 (도사노카미, 쓰시마노카미, 도시타케)
마에다 도시이에의 정실 마쓰의 후손으로 구성된 도사노카미가는 메이지 유신 이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3]가가 팔가 중 하나인 마에다 대마노카미 가의 유타카(효케이)는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국사에 힘썼다.[3]
1884년 (메이지 17년) 화족령에 의해 화족이 오작제로 개정되면서, 다카시(유타카의 장남)는 아버지 유타카의 유신 공적에 의해 남작에 봉해졌다.[3]
다카유키는 오야마 신사에서 신관을 맡았다.[3] 쇼와 시대 전기,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다카오카정에 거주했다.[3]
3. 6. 그 외의 마에다 가문
마에다 도시이에의 마에다 씨나, 마에다 겐이의 마에다 씨도, 이 미노 마에다 씨의 서류라는 설이 존재하지만, 확실하지 않다.[1]가가 팔가(加賀八家) 중 하나였던 마에다 도사노카미 가(前田土佐守家)의 막말에서 메이지 시대의 당주 나오노부(直信)는 보신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고,[2] 군정료 지사, 가나자와 번 대참사 등을 역임했다.[3] 메이지 12년에 나오노부가 사망한 후, 장남인 나오유키가 가독을 상속했다.[4] 나오유키는 메이지 32년에 마에다 후작가의 가령이 되었고, 이듬해 메이지 33년에 부친 나오노부의 유신 공로로 화족의 남작에 서임되었다.[5][6] 나오유키 대의 쇼와 전기 남작가의 저택은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 나가도보리에 있었다.[7] 나오유키가 쇼와 18년에 사망한 후, 손자인 나오아키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8]
마에다 겐이를 배출한 마에다 가문은 겐이 이전의 정확한 계도가 불분명하여 출신이 확실하지 않지만, 미노 마에다 씨의 후예로 전해진다.[9] 겐이의 계도 중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후예로 하는 것도 있다.[10] 겐이는 히에이 산에서 득도한 것으로 전해지는 승려로, 오다 노부타다에게 7000석의 지행으로 섬겼고, 혼노지의 변 당시에는 노부타다의 아들 산호시(오다 히데노부)를 맡아 오와리로 도망친 후, 산호시를 데리고 기요스로 향했다. 그 공적으로 오다 노부오에 의해 교토 봉행으로 임명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권을 장악한 후에도 교토의 서정을 담당하여 중용되었으며, 덴쇼 13년(1585년)에 탄바 가메야마 5만 석을 영지로 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 말년에는 고부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했으나 도쿠가와 측에 통하여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 후 본령이 안도되었으나, 가독을 이은 차남 시게카츠는 게이초 7년(1602년)에 탄바 국 야상으로 이봉된 후, 게이초 13년(1608년)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개역되었다.[11]
시게카츠의 형제인 한에몬 마사카츠(겐이의 셋째 아들)는 아이즈 정벌 때 시모츠케 국 오야마에서 이에야스에게 속했기 때문에, 게이초 7년에 탄바 국에서 1000석을 영지로 하는 하타모토에 서열되었고, 그 아들 한에몬 마사노부가 무사시 국에 200석을 가증받아 모두 1200석이 되었으며, 그 아들 아키노카미 나오카츠는 킨리츠키, 교토 마치 부교, 오메츠케 등을 역임하고, 탄바 국내(후에 무사시 국으로 변경)에 1000석을 가증받아 모두 2200석이 되었다.[12][13] 막말 유신기의 당주는 마타고로 타카요시이며, 막말의 가록은 2500석이었다.[14] 유신 후 사족이 되었다.
후지와라 북가간인류의 공가인 우대신산조니시 사네나리의 부인이 마에다 겐이의 장녀였던 인연으로, 권대납언 오시코지 기미토 (사네나리의 장남 산조니시 기미카쓰의 차남. 산조니시 가문에서 분가하여 오시코지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의 차남이 에도로 내려가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하타모토로 섬기게 되었을 때 마에다 겐초로 개명하여, 고케 하타모토 후지와라 씨 마에다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15] 영지는 무사시 국 다마 군에 900석, 사가미 국 아이코 군에 500석으로 총 1400석이었다.[16][17] 막말 유신기의 당주는 마에다 나가노리이다. 메이지 유신에 즈음하여 조정에 조기 귀순하여, 막신에서 조정 신하로 전향하여 전 고케로서 주대부의 자리를 받았다.[18] 메이지 2년 12월에 주대부 이하의 칭호가 폐지되어 사족에 편입되었다.[18] 메이지 17년 (1884년)에 시행된 화족령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었을 때 정해진 '서작 내규'의 이전 안인 '화족령' 안이나 '서작 규칙' 안에서는 전 고케가 남작에 포함되어 있어, 이 마에다 가문도 남작 후보로 이름을 올렸지만, 최종적인 '서작 내규'에서는 구 고케는 대상 외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 가문은 사족으로 남았다.[19]
스가와라 씨 적류의 공가 다카쓰지 나가카즈의 차남 나가야스가 호에이 6년(1709년)에 에도로 내려와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섬기게 되었을 때, 스가와라 씨를 칭하는 가가 번주 마에다 씨와의 인연으로 마에다 나가야스로 개명하여, 고케 하타모토 스가와라 씨 마에다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20] 영지는 무사시국다마군에 1000석이었다.[21][22] 막말 유신기의 당주는 마에다 나가노리이다. 메이지 유신에 즈음하여 조정에 조기 귀순하여 막신에서 조정 신하로 전향하여 전 고케로서 주다이후 자리를 받았다.[23] 메이지 2년 12월에 주다이후 이하의 칭호가 폐지되어 사족에 편입되었다.[23] 메이지 17년(1884년)에 시행된 화족령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었을 때 정해진 '서작 내규'의 전 안인 '화족령' 안 및 '서작 규칙' 안에서는 전 고케가 남작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 마에다 가문도 남작 후보로 이름을 올렸으나, 최종적인 '서작 내규'에서는 구 고케는 대상 외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 가문은 사족으로 남았다.[24]
마에다 마사나는 에도 시대 말기에 사쓰마 번 의사 마에다 젠안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유학을 거쳐 주불 공사관에 근무했고, 메이지 14년에는 농상무성 및 대장성의 대서기관이 되어 대장경 오쿠마 시게노부의 브레인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마쓰가타 마사요시가 대장경에 취임하자 '흥업 의견'을 편찬하여 식산흥업 자금의 추가 공급에 의한 산업 보호주의를 주장하며 마쓰가타 재정을 비판했다. 메이지 18년 12월에 일시적으로 파면된 후, 메이지 21년에는 야마나시현 지사, 메이지 22년에는 농상무성 공무국장, 농무국장에 취임했고, 메이지 23년에는 농상무 차관이 되었으나, 같은 해 농상무상이 된 무쓰 무네미쓰와 대립하여 하야했다. 원로원 의관, 귀족원 칙선 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각지를 순회하며 지방 산업 단체의 육성에 힘썼으며, '포의의 재상'으로 불렸다. 다이쇼 10년 8월 12일 사망했을 때 훈공에 의해 화족의 남작에 서임되었다.[25]
마사나의 장남 마사카즈가 남작위와 가독을 상속했지만, 마사카즈도 다음 해 11년 10월 30일 자녀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마사나의 삼남으로 분가했던 산스케의 장남 유고가 남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26] 유고가 쇼와 11년 7월 27일에 사망한 후, 아버지 산스케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지만, 쇼와 14년 1월 24일에 사망했고, 장녀 에어코가 가독을 상속하면서 실작했다.[27]
마에다 다카노리는 야마토국토츠카와 고우시 출신으로 막말에 텐추구미에 참가하는 등 국사에 분주하게 활동했으며, 보신 전쟁에서도 관군으로 종군하여 활약했다. 메이지 5년 육군 중위로 육군에 입대하여, 누진하여 메이지 32년 육군 소장. 보병 제18여단장을 역임했으며, 더 나아가 대만 수비 혼성 제2여단장으로 전임되었다. 러일 전쟁에서는 제22보병여단장으로 출정했으나, 메이지 38년 3월 26일 봉천 회전 시 부상으로 사망하여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양자 유(勇)가 양부 다카노리의 훈공으로 인해 메이지 40년 10월에 화족의 남작에 서임되었다. 유는 후쿠오카현 출신인 카토 켄지의 3남이며, 육군 대좌까지 승진한 육군 군인이었다. 쇼와 3년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쇼와 12년에 귀족원 남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또한 오카모토 공업 회사 고문도 역임했다. 그의 대(代)인 쇼와 전기(前期)에 남작가의 주거는 도쿄시시부야구 나가스미초에 있었다.
4. 계보
(오와리 아라코 영주 → 가가 번주 가문 → 후작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