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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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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수 대첩은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제2차 여수 전쟁에서 고구려가 수나라 별동대를 상대로 거둔 대승을 의미한다. 수나라는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을지문덕의 유인 작전과 고구려군의 끈질긴 방어에 막혀 패퇴했다. 특히 살수에서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며 수나라 군 30만 5천 명 중 2,700명만 살아 돌아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는 고구려가 국가의 존립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수나라의 멸망에도 영향을 미쳤다. 살수 대첩에서 둑을 터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은 근대 기록에 등장하며,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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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대첩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살수 대첩 기록화
고구려 612년(영양왕 23)에 살수에서 강을 건너는 수나라 군사들을 섬멸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일부제2차 여수전쟁
시기612년 7월 (음력)
장소살수(薩水), 현재의 청천강
결과고구려의 대승
교전 세력
교전국 1고구려
교전국 2수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고구려을지문덕
수나라우문술
병력 규모
고구려10,000명
수나라305,000명
피해 규모
고구려기록 없음
수나라302,300명
관련 정보
한자 표기薩水大捷
로마자 표기Salsu Daecheop

2. 역사적 배경

612년, 수 양제는 113만 8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6][10]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의 다른 요새에서 굳건한 고구려의 방어를 뚫지 못한 수 양제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직접 공격하게 했다.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의 야전 사령관 을지문덕의 옛 초상화


수나라 군대는 지휘부 내의 불화와 열악한 보급선으로 인해 고구려 수도로 진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군인들에게는 행군 기간 동안 사용할 많은 양의 물품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결국 지친 군인들이 도중에 버리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11]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은 항복하는 척하며 수나라 진영을 둘러보는 방식으로 수나라 군대의 사기와 피로도를 측정했다.[11] 수나라 사령관 우문술은 양제로부터 을지문덕을 생포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다른 장군 유실룡은 을지문덕의 석방을 권고하여 고구려 영양왕과 항복 조건 협상을 하도록 했다.[12]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의 혼란을 완전히 인지한 후, 수나라 군대를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하여 피로를 가중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전략을 펼쳤다.[13]

수나라 군대는 평양에 접근했지만, 더 이상의 보급 없이 요새화된 수도를 포위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나라 해군 부대가 평양에 도착하면 보급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들은 이미 왕의 이복 동생인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배한 상태였다.[11]

2. 1. 수나라의 침략

612년 1월(음력), 수 양제는 113만 3,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여 제2차 여수 전쟁이 발발했다.[6][10] 수 양제는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에서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몇 달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고 피해만 늘어났다. 이에 6월(음력)에 수군(水軍)과 육군으로 편성된 별동대를 조직하여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 했다.

육군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 좌효위대장군(左驍衛―) 형원항(荊元恒), 우익위장군[17] 설세웅, 우둔위장군 신세웅, 우어위장군(右禦衛―) 장근(張瑾), 우무후장군(右武侯―) 조효재(趙孝才), 탁군태수 겸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 최홍승(崔弘昇), 검교우어위대장군[18] 위문승이 지휘하였다. 수군(水軍)은 우효위대장군[19] 내호아, 좌무위장군[20] 주법상이 지휘하였다.

육군보다 먼저 패수(지금의 대동강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주류 의견이나, 일부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에 도착한 내호아는 부총관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했다. 이로써 평양성으로 향하는 별동대는 약 30만 5,000명의 육군만 남게 되었다.

수나라 군대는 군사 지휘부 내의 불화와 열악한 보급선으로 인해 고구려 수도로 진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군인들에게는 행군 기간 동안 사용할 많은 양의 물품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결국 지친 군인들이 도중에 버린 무거운 짐이 되었다.[11]

2. 2. 고구려의 방어 전략

612년, 수 양제가 113만 8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 요새에서 고구려는 굳건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6][10] 고구려의 야전 사령관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의 사기와 피로도를 측정하기 위해 항복하는 척하며 수나라 진영을 둘러보았다.[11]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의 혼란을 완전히 파악한 후, 수나라 군대를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하여 그들의 피로를 가중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수나라 군대는 군사 지휘부 내의 불화와 열악한 보급선으로 인해 고구려 수도 평양으로 진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1] 군인들에게는 행군 기간 동안 사용할 많은 양의 물품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무거운 짐이 되어 지친 군인들이 도중에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나라 해군 부대가 평양에 도착하여 보급을 지원할 예정이었으나, 이들은 이미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배한 상태였다.[11]

3. 전투의 전개



612년, 수 양제는 113만 8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6][10]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 요새에서 고구려의 방어가 굳건하여 이를 뚫지 못하자, 수 양제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직접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수나라 군대는 군사 지휘부 내 불화와 열악한 보급선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군인들에게는 많은 양의 물품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결국 지친 군인들이 도중에 버리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11]

이후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했고, 청천강에서 벌어진 살수대첩에서 크게 승리했다.

3. 1. 을지문덕의 유인 작전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하며 수나라 군영에 들어가 군대의 허점을 파악하였다. 수나라 장수 우문술우중문수 양제의 밀지에 따라 을지문덕을 체포하려 했으나, 유사룡이 을지문덕을 풀어주고 영양왕과의 항복 협상을 진행하도록 권고하여 그를 놓아주었다.[11][12]

을지문덕은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수나라 군대의 혼란을 완전히 인지한 후, 수나라 군대를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하여 수나라 군인들의 피로를 더욱 심화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렸다.[13] 또한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조롱하는 (을지문덕 한시)를 보내 도발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에 접근했지만, 보급 없이 요새화된 수도를 포위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호아가 지휘하는 해군 부대가 평양에 도착하면 보급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들은 이미 영양왕의 이복 동생인 고건무에 의해 평양 내 매복에서 패배한 상태였다.[11] 결국 수나라 지휘관들은 을지문덕의 퇴각을 권하는 시에 자극받아 요동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3. 2. 살수에서의 전투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파악하고, 그들을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 매번 싸울 때마다 달아나는 유도 작전을 펼쳤다. 수나라 군대는 지칠 대로 지쳐 평양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을 명분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21]

수나라 군대가 7월(음력) 살수(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러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수나라 후군을 공격했다. 수나라군은 신세웅이 전사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고, 하루 밤낮 만에 450리 떨어진 압록수까지 달아났다.[21] 왕인공(王仁恭)이 이끄는 부대가 고구려군을 막아냈고, 평양 밖 포구에 주둔하던 내호아는 살수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21]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와 현대 대중 매체는 을지문덕이 댐을 사용해 수나라 군대에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지만,[14][15] 이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자료는 없다.

살아남은 수나라 군대는 요동반도로 퇴각해야 했다. 많은 병사들이 식량 부족으로 질병이나 기아로 사망했다.[16] 30만 5천 명의 수나라 군대 중 2,700명만이 살아남아, 살수대첩은 세계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6][12][7][16]

4. 전투의 결과

평양성으로 파견된 군대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와 요동성에서의 진전 부족으로 인해, 수 양제는 큰 소득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휘관 우중문우문술은 쇠사슬에 묶여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우중문은 수나라로 돌아온 직후 사망했으며 우문술은 결국 미래의 작전을 위해 군사 임무에 복귀했다. 유사룡을지문덕을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여 처형되었다.[22] 수 양제는 613년과 614년에 두 번 더 침략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결국, 이 작전의 막대한 인적, 재정적 비용은 여러 반란을 초래했고 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내부 분열로 인해 멸망했고, 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당은 고구려-당 전쟁에서 고구려에 대한 작전을 계속 진행했다.

4. 1. 수나라의 패배와 멸망

아홉 군이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305,000명이었으나 요동반도로 다시 돌아온 자는 겨우 2,700명이었다. 수많은 군수물자와 공성병기는 모두 잃어버렸다.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7월 25일(음력)에 본대 병력을 이끌고 철수하니 제2차 여수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22]

우문술 등 살아남은 장수들은 모두 작위가 박탈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다만 설세웅은 분전한 점이 감안되어 면직으로 그쳤고, 위문승은 홀로 전력을 보전한 채 퇴각한 공이 있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승진했다. 을지문덕을 잡을 기회를 놓치게 했던 유사룡참수되었다.[22] 양제는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듬해 우중문을 제외한 모든 장수를 복권시키며 제3차 여수전쟁을 일으킨다.

평양으로 파견된 군대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와 요동에서의 진전 부족으로 인해, 수 양제는 어떤 주요한 소득도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쇠사슬에 묶여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우중문은 수나라로 돌아온 직후 사망했으며 우문술은 결국 미래의 작전을 위해 군사 임무에 복귀했다. 유사룡을지문덕을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여 처형되었다.[22] 수 양제는 613년과 614년에 두 번 더 침략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결국, 이 작전의 막대한 인적, 재정적 비용은 여러 반란을 초래했고 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내부 분열로 인해 멸망했고, 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당은 고구려-당 전쟁에서 고구려에 대한 작전을 계속 진행했다.

4. 2. 고구려의 승리와 영향

평양으로 파견된 군대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와 요동에서의 진전 부족으로 인해, 수 양제는 큰 소득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휘관 우중문우문술은 쇠사슬에 묶여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우중문은 수나라로 돌아온 직후 사망했으며 우문술은 결국 미래의 작전을 위해 군사 임무에 복귀했다. 유실룡은 을지를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여 처형되었다.[19] 수 양제는 613년과 614년에 두 번 더 침략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19] 결국, 이 작전의 막대한 인적, 재정적 비용은 여러 반란을 초래했고 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내부 분열로 인해 멸망했고, 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당은 고구려-당 전쟁에서 고구려에 대한 작전을 계속 진행했다.[19]

5. 을지문덕의 시 (을지문덕 한시)

다음은 을지문덕우중문에게 보낸 시이다.


  •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이 시는 수나라 군대의 오만함을 비판하고 그들의 패배를 예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둘러본 후 수나라 군대의 사기와 피로도를 파악하고 그들을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하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다.[11]

6. 역사적 평가 및 논란

살수 대첩은 귀주 대첩과 함께 수공(水攻)을 사용한 전투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삼국사기, 수서, 자치통감 등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는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23] 이는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며,[23] 민간 전설이었던 칠불전설(七佛傳說)[24]이 변형되어 기록된 것이다.[25]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와 현대 대중 매체는 을지문덕이 댐을 사용하여 수나라 군대에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지만,[14][15] 당대 자료에는 댐이나 수공 공격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다.

6. 1. 수공(水攻) 논란

살수 대첩은 귀주 대첩과 함께 수공(水攻)을 사용한 전투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삼국사기, 수서, 자치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는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23] 이는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는데,[23] 민간 전설이었던 칠불전설(七佛傳說)[24]이 변형되어 기록된 것이다.[25] 실제로 수공을 활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뿐이다.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와 현대 대중 매체는 을지문덕이 댐을 사용하여 수나라 군대에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지만,[14][15] 당대 자료에는 댐이나 수공 공격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다.

참조

[1] 서적 Kuzey Hanedanlar Tarihi
[2] 서적 Tzu chih t'ung chien
[3] 서적 Suei Shu
[4] 웹사이트 The Three Kingdoms http://www.opensourc[...] National Assembly of South Korea 2007-02-12
[5] 서적 Book of Sui
[6]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7] 서적 A Panorama of 5000 Years: Korean History https://archive.org/[...] Hollym International Corporation 2005
[8] 서적 Book of Sui
[9] 웹사이트 Battle of Salsu https://web.archive.[...] 2011-07-16
[10] 웹사이트 King Yeongyang (2) https://web.archive.[...] 2016-06-27
[11] 웹사이트 살수대첩 https://terms.naver.[...] 2021-04-04
[12] 서적 Samguk Sagi 1145
[13] 웹사이트 여수전쟁(麗隋戰爭) https://encykorea.ak[...] 2023-03-06
[14] 서적 Joseon Sanggosa 1931
[15] 방송 Yeon Gaesomun, Episode 46 Seoul Broadcasting System 2007
[16] 웹사이트 The forgotten glory of Koguryo https://web.archive.[...] Korea WebWeekly 2016-06-27
[17] 서적 삼국사기, 수서, 북사, 자치통감
[18] 서적 수서, 북사, 자치통감, 삼국사기
[19] 서적 삼국사기, 수서, 북사, 자치통감, 수서
[20] 서적 수서
[21] 서적 수서
[22] 서적 자치통감
[23] 서적 조선상고사
[24]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25] 논문 살수대첩에서의 칠불전설과 조선조 한시에의 수용 양상 우리한문학회 2011
[26] 서적 고구려대수당전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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