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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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주 대첩은 1019년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한 전투이다. 고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대립했고,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개경을 향해 남하했고, 강감찬은 귀주에서, 강민첨은 연주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고려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로 거란은 고려에 대한 무력 침략을 포기하고, 고려는 외교적 안정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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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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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귀주 대첩 |
관련 전쟁 | 제3차 고려-거란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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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019년 3월 10일 |
장소 | 귀주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
결과 | 고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요나라 |
교전국 2 | 고려 |
지휘관 | |
지휘관 1 | 소배압 |
지휘관 2 |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
병력 | |
병력 1 | 100,000명 |
병력 2 | 208,3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90,000명 이상 |
사상자 2 | 수천 명 |
기타 | |
로마자 표기 | Gwiju Daecheop 또는 Guju Daecheop |
한자 표기 | 龜州大捷 |
다른 이름 | 귀주 대첩 또는 구주 대첩 |
2. 전쟁의 배경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과 대립하게 되었다. 거란은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고려를 침공하였다.[1]
993년(성종 12) 소손녕이 이끈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며 끝났고, 1010년(현종 1)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한 2차 침입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1018년~1019년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과 강민첨이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2. 1. 고려의 북진 정책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기 때문에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1] 거란 입장에서는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1]2. 2. 거란의 고려 견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은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하여 자신들의 후방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3. 전쟁의 전개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은 고려의 정책과 송나라와 고려의 연합 가능성을 우려하여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이 패배한 후, 서희가 담판을 벌여 고려가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갔다. 1018년~1019년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이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3. 1. 3차 침입 (1018년 ~ 1019년)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원수로, 김종현을 병마판관으로 임명하고 20만 8천 명의 대군으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을 막게 했다. 강민첨은 흥화진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승리했으나[1], 거란군은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남하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자주 내구산에서 강민첨이 이끄는 기병 1만 4천 명에게 대패하고, 대동강 가 마탄에서도 조원에게 패하면서 1만 명의 군사를 잃게 된다.[1]결국 거란군은 수도 개경에서 약 100리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신은현에 도착했지만, 고려군의 청야 작전에 당하고, 개경의 방어가 왕성하다는 첩보를 들은 소배압은 후퇴를 결심하게 된다. 추격하는 고려군을 막기 위해 배치한 약 300명 정도의 거란 기병대는 금교역에서 고려군의 습격에 전멸하고 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퇴각하던 거란군은, 연주에서 또다시 강민첨이 이끄는 기병대에게 대패한다.[1]
며칠 뒤, 거란군은 귀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상원수 강감찬은 귀주에서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1]
3. 1. 1. 귀주대첩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을 막기 위해 20만 8천 명의 대군을 편성했다. 강민첨은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했으나[1], 거란군은 개경을 목표로 계속 남하했다. 그러나 강민첨의 기병대와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1]결국 거란군은 개경 인근까지 진출했지만, 고려군의 청야 전술에 고전하고 개경의 방어가 튼튼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퇴를 결정했다. 퇴각하는 거란군은 고려군의 추격에 계속 피해를 입었고, 연주에서 강민첨의 기병대에게 또다시 대패했다.[1]
귀주에서 강감찬은 거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측은 치열하게 싸웠고, 김종현의 기병대가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연주에서 승리한 강민첨의 기병대까지 합류하여 거란군을 포위 섬멸했다.[1] 거란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주했으며, 살아남은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1]
《요사》에는 이 전투에서 거란군 지휘관 다수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 성종은 패전 소식에 크게 분노하며 소배압을 질책했다고 한다. 귀주 대첩의 승리로 고려는 거란의 침략 야욕을 꺾고,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 요구를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1]
4. 전쟁의 결과
귀주 대첩에서 고려가 거란에 대승을 거두면서, 거란은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3] 거란은 끈질기게 요구했던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 6주 반환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3]
4. 1. 고려-거란 관계 재정립
전투 후 평화 협상이 이어졌고, 요나라(遼)는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3][7] 고려는 송(宋)과의 관계를 끊고 요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는 데 동의했지만, 압록강에서 새로 얻은 영토는 유지했다.[8] 그러나 역사가 비엘렌슈타인(Bielenstein)에 따르면,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며, 현종은 자신의 즉위 연호를 유지했고, 고려와 요나라는 1022년에 동등한 입장에서 평화를 맺었다. 갈등이 끝난 후 고려는 압록강을 사이에 둔 주변 국가들과 오랜 평화 시대에 접어들었다.4. 2. 동아시아 정세 변화
요나라(遼)는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3][7] 고려는 송나라(宋)와의 관계를 끊고 요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는 데 동의했지만, 압록강에서 새로 얻은 영토는 유지했다.[8] 그러나 역사가 비엘렌슈타인(Bielenstein)에 따르면,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며, 현종은 자신의 즉위 연호를 유지했고, 고려와 요나라는 1022년에 동등한 입장에서 평화를 맺었다. 갈등이 끝난 후 고려는 압록강을 사이에 둔 주변 국가들과 오랜 평화 시대에 접어들었다.5. 역사적 의의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국방력을 강화하고 외교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New History of Korean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iUniverse
2016-07-30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07-30
[3]
웹사이트
Battle of Guju - Naver encyclopedia
http://100.naver.com[...]
[4]
서적
China Among Equals: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th-14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6-07-30
[5]
간행물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3 > 顯宗元文大王 > 顯宗 九年 > 12월 > 강감찬 등이 거란의 소손녕에게 맞서 대승을 거두다
http://db.history.go[...]
고려사절요
[6]
서적
The New History of Korean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iUniverse
2016-07-30
[7]
서적
China Among Equals: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th-14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6-07-30
[8]
서적
China Among Equals: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th-14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6-07-30
[9]
간행물
거란군이 귀주(龜州)를 통과하자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 와 원수 강민첨 대장군 등이 요격해 대패시키니 겨우 수천 명만 살아 돌아갔다.
고려사
1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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