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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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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4세는 카페 왕조의 마지막 프랑스 왕으로, 1322년부터 1328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형 필리프 5세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잉글랜드와의 분쟁, 십자군 계획,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 등 다양한 문제에 관여했다. 샤를 4세는 세 번 결혼했으나 아들을 얻지 못하고 사망하여 카페 왕조의 직계 계승을 단절시켰다. 그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는 복잡한 상황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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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샤를 4세의 지상 (기념상)
샤를 4세의 지상, 1372년경
칭호프랑스 왕
재위1322년 1월 3일 – 1328년 2월 1일
대관식1322년 2월 21일
대관식 종류프랑스
이전 군주필리프 5세
다음 군주필리프 6세
칭호 (나바라)나바라 왕
재위 (나바라)1322년 1월 3일 – 1328년 2월 1일
이전 군주 (나바라)펠리페 2세
다음 군주 (나바라)호아나 2세 및 펠리페 3세
배우자블랑슈 드 부르고뉴 (1307년 결혼, 1322년 이혼)
마리 드 뤽상부르 (1322년 결혼, 1324년 사망)
잔 데브뢰 (1324년 결혼)
자녀블랑슈, 오를레앙 공작부인
왕가카페 왕가
아버지필리프 4세
어머니호아나 1세
출생일1294년 6월 18/19일
출생지클레르몽, 프랑스
사망일1328년 2월 1일 (33세)
사망지뱅센, 프랑스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별칭(미남왕)
기타
참고최초로 서수사를 사용한 프랑스 왕은 1364년의 샤를 5세임.

2. 생애

샤를 4세는 형 필리프 5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위를 계승했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외교적 활동에 관여했다.

1324년에는 아키텐 영유권을 두고 매형인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2세와 충돌했다. 숙부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도움으로 승리하여 프랑스에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맺었다. 이후 1328년에는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에드워드 3세와 다시 화평을 맺었다.

1323년에는 파리 궁정으로 보내진 보헤미아 왕 요한의 아들 벤체슬라우를 맡아 양육했다. 벤체슬라우는 훗날 샤를 4세의 이름을 따 샤를로 개명하고, 1346년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한 뒤 13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로 즉위하게 된다.

또한 샤를 4세는 십자군 원정을 재개하려 시도했다. 1323년 숙부 샤를을 교황 요한 22세에게 사절로 보내 형 필리프 5세가 중단했던 계획을 되살리려 했으나, 교황의 불신과 잉글랜드와의 문제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1326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내분에 개입하려 했지만, 이 역시 안드로니코스 3세의 반란이 격화되면서 좌절되었다.

1328년, 샤를 4세는 아들 없이 사망했다. 왕자가 요절하고 공주만 있었기 때문에 카페 왕조의 직계 남성 후계가 끊겼다. 왕위는 그의 사촌이자 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인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가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샤를 4세의 사망과 후계 문제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하여 백년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내용 없음)

2. 1. 1. 첫 번째 결혼: 부르고뉴의 블랑슈

샤를 4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인 1307년[46]에 부르고뉴 백작 오토 4세의 딸인 부르고뉴의 블랑슈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러나 1314년, 블랑슈는 필리프 4세에 의해 ''네슬 탑 사건''에 연루되어 간통 혐의로 투옥되었다.[6]

1322년 샤를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블랑슈는 풀려나지 못하고 계속 구속된 상태였다. 샤를 4세는 블랑슈의 석방을 거부했고[6], 같은 해 5월 교황 요한 22세는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결국 블랑슈는 수녀원으로 물러났다.[6]

샤를 4세와 블랑슈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사망했다.

이름출생사망
필리프1314년1322년
1315년1320년


2. 1. 2. 두 번째 결혼: 룩셈부르크의 마리

샤를 4세와 룩셈부르크의 마리의 결혼, 장 푸케의 작품.


1322년 5월, 교황 요한 22세는 샤를 4세와 그의 첫 부인 블랑슈 드 부르고뉴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했다.[46] 블랑슈는 1314년 네슬 탑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상태였고, 샤를 4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녀를 석방하지 않았다.[6]

같은 해인 1322년 9월, 샤를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이자 보헤미아 왕 요한의 여동생인 마리 드 뤽상부르(Maria von Luxemburg)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7] 마리와의 사이에서는 1323년 딸 마리(Marie)가 태어났으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

1324년, 마리는 임신 중 교통사고로 인해 중상을 입었다. 당시 급히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아들 샤를(Charles)을 출산했으나, 안타깝게도 마리와 갓 태어난 아들 모두 이 사고의 여파로 사망했다.[7] 이로써 샤를 4세는 다시 후계자를 잃게 되었다.

2. 1. 3. 세 번째 결혼: 에브뢰의 잔

두 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계자가 없던 샤를 4세는 1325년에 세 번째 결혼을 했다.[2] 이번 상대는 그의 사촌이자 에브뢰 백작 루이의 딸인 에브뢰의 잔이었다. 가까운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이 결혼은 교황 요한 22세의 승인이 필요했다.[2]

잔은 1326년에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는데, 이는 프랑스 대관식 역사상 가장 기록이 잘 된 행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8] 이 대관식은 단순한 의례를 넘어 정치적 메시지 전달, 사교 행사, 그리고 당시의 "호화로운 패션 선언"이 결합된 복합적인 성격을 띠었다.[9] 행사에 사용된 음식, 모피, 벨벳, 보석 등의 비용은 막대하여, 관련 비용 협상이 1329년까지 이어질 정도였다.[9] 또한 이 대관식은 후대에 유명한 중세 요리사 기욤 티렐이 젊은 시절 하인으로 처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자리이기도 했다.[9]

샤를 4세와 잔 사이에서는 세 명의 딸이 태어났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잔 (Jeanne)1326년1327년요절
마리 (Marie)1327년1341년요절
블랑슈 (Blanche)1328년1382년[47]샤를 4세 사후 출생. 필리프 6세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필리프와 결혼.



결국 샤를 4세는 세 번째 결혼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고 딸만 두게 되었다.

2. 2. 내정

필리프 5세의 사후 왕위를 이어받은 샤를 4세는 1322년 2월 21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형의 치세 동안 약화된 국가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롬바르디 출신 재정 관료들을 엄벌에 처하고, 필리프 5세의 재정 책임자였던 Girard de la Guette|지라르 드 라 게트프랑스어를 횡령 혐의로 체포하는 등 전반적으로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펼쳤다.

샤를 4세의 투르누아 주화; 샤를은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주화를 평가절하하여 일부 반감을 샀다.


샤를 4세는 그의 형 필리프 5세재정 정책 개혁에 저항하던 남부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해당 지역을 순방하던 중 병사하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12] 그는 즉위 후 자신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는데, 문제가 되었던 남부 귀족인 레슬르-주르댕 백작을 처형하고 직접 왕실 행차를 진행했다.[2]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았던 샤를 4세는 퐁텐블로에 유명한 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했다.[13]

그러나 6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샤를 4세의 행정부는 점차 인기를 잃었다.[2]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관직을 팔았으며,[2] 세금을 인상하고 과도한 관세를 부과했으며, 정적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했다.[3] 또한 이 시기 유대인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의 아버지 필리프 4세는 1306년에 많은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샤를 4세는 이와 관련된 기독교인들의 채무를 회수하기 위해 강력하지만 반발을 사는 조치를 취했다.[2] 1321년 나병 공포 사건 당시 많은 유대인이 지역 나병 환자들과 공모하여 프랑스 전역의 우물에 독을 타려 했다는 혐의로 벌금을 부과받았는데, 샤를 4세는 이 벌금을 철저히 징수하려 했다.[2] 결국 샤를 4세는 나병 공포 사건 이후 많은 유대인을 프랑스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최소한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명령했을 가능성이 있다.[14]

2. 3. 외교

샤를 4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외교적 활동에 관여했다. 주요 대상은 잉글랜드, 신성 로마 제국, 교황청, 그리고 동로마 제국 등이었다.

1324년에는 아키텐 영유권을 둘러싸고 매형인 잉글랜드에드워드 2세와 충돌하여 승리했으며, 이후 프랑스에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맺었다. 또한 1326년에는 남편에게 반기를 든 누나 이자벨을 지원하여 그녀가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잉글랜드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했다. 이후 조카인 에드워드 3세와도 다시 화평을 맺었다.

신성 로마 제국과는 1322년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 마리 드 뤽상부르와 결혼하여 인척 관계를 맺었다. 1323년에는 보헤미아 왕자 벤체슬라우를 파리 궁정에서 양육했는데, 그는 훗날 샤를 4세의 이름을 따 샤를로 개명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되었다.

교황 요한 22세와는 십자군 문제를 논의했다. 1323년 숙부 발루아 백작 샤를을 사절로 보내 형 필리프 5세가 중단했던 십자군 계획 재개를 시도했으나, 교황의 불신과 잉글랜드 문제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1326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내분에 개입하려 했으나, 이 역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반란 격화와 샤를 4세의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2. 3. 1. 잉글랜드와의 관계

1324년, 샤를 4세는 아키텐 영유권을 두고 매형인 잉글랜드에드워드 2세와 충돌했다. 그는 숙부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도움을 받아 에드워드 2세에게 승리하고, 다음 해 프랑스에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맺었다.

한편, 잉글랜드에드워드 2세와 결혼한 그의 누나 이자벨은 유약하고 인기가 없던 남편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와 손잡고 1326년 반란을 일으켰고, 샤를 4세는 누나 이자벨을 지원했다. 이자벨은 샤를 4세의 지원에 힘입어 에드워드 2세를 몰아내고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혔다. 에드워드 2세는 유폐되었다가 이듬해인 1327년 암살되었다.

1328년 샤를 4세는 조카인 에드워드 3세와 다시 화평을 맺었으나, 같은 해 사망했다.

2. 3. 2. 플랑드르 문제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플랑드르 문제'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는 샤를 4세의 결혼과 자녀, 족보에 관한 정보만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2. 3. 3.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샤를 4세는 1322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인 룩셈부르크의 마리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1323년, 보헤미아의 왕 요한은 자신의 아들 벤체슬라우를 파리의 프랑스 궁정으로 보냈다. 샤를 4세는 이 어린 왕자를 맡아 양육했다. 벤체슬라우는 자신을 돌봐준 샤를 4세의 이름을 따 '샤를'로 개명했으며, 훗날 1346년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이듬해인 134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여 카를 4세가 되었다. 이는 샤를 4세가 미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2. 3. 4. 십자군 문제

1323년, 샤를 4세는 숙부인 발루아 백작 샤를을 요한 22세에게 사절로 파견하여, 형 필리프 5세가 1320년에 중단했던 십자군 계획을 재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2세가 샤를 4세를 신뢰하지 않았고, 샤를 4세 또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의 분쟁에 집중하면서 협상은 좌절되었다. 사절로 파견되었던 발루아 백작 샤를은 다음 해에 사망했다.

1326년에는 동로마 제국에서 발생한 반란에 개입하려 시도했다. 당시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제안했고, 교황 요한 22세도 이에 긍정적이었으나,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의 반란이 본격화되면서 이 계획 역시 무산되었다. 게다가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하면서 프랑스는 동로마 제국 문제에 개입할 여력을 상실했다.

2. 4. 사망과 계승

1328년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의 직계 남성 후계자가 단절되었다. 이는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후보자샤를 4세와의 관계주요 근거
필리프 6세사촌 (아버지 샤를 드 발루아는 필리프 4세의 동생)살리카 법에 따른 부계 계승 우선 원칙
에드워드 3세조카 (어머니 이자벨 드 프랑스는 샤를 4세의 누나)모계를 통한 가장 가까운 혈족 관계
필리페 3세사촌이자 처남, 조카사위 (아버지 루이 데브뢰는 필리프 4세의 동생, 아내는 루이 10세의 딸 잔 2세 (나바라))부계 혈족 관계 및 카페 왕가와의 혼인 관계



프랑스 귀족들은 여성 및 여성 후손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 법을 근거로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 드 발루아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필리프 6세로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샤를 4세의 조카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며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왕위 계승 분쟁은 결국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오랜 갈등인 백년 전쟁을 촉발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샤를 4세는 형 필리프 5세가 아들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1328년에 사망했으며, 같은 해 사망하기 전에 조카인 에드워드 3세와 화평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과 왕위 계승 문제는 결국 두 왕국 간의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3. 가계도


  • 첫 번째 부인: 부르고뉴의 블랑슈 - 부르고뉴 백작 오토 4세의 딸. 1307년에 결혼했으나 1322년에 이혼했다. 1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했다.
  • * 필리프 (1314년 - 1322년)
  • * 잔 (1315년 - 1320년)
  • 두 번째 부인: 룩셈부르크의 마리 -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이며, 보헤미아 왕 요한의 여동생이다. 1322년에 결혼했으나 1324년에 사망했다. 1남을 낳았지만, 출산 후 산모와 아이 모두 사망했다.
  • * 루이 (1324년)
  • 세 번째 부인: 에브뢰의 잔 - 에브뢰 백작 루이의 딸이자 샤를 4세의 사촌이다. 1325년에 결혼했다. 3녀를 낳았고, 샤를 4세 사후에 태어난 막내딸 블랑슈만 성인이 되었다.
  • * 잔 (1326년 - 1327년)
  • * 마리 (1327년 - 1341년)
  • * 블랑슈 (1328년 - 1382년) - 발루아 가문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다.

참조

[1] 간행물 Les cisterciens et Charles V http://www.jstor.org[...] 2007
[2] 문서 Kibler, p.201
[3] 백과사전 Charles IV (of France) Microsoft Corporation
[4] 문서 Sumption, p.101
[5] 문서 Sumption, p.97
[6] 문서 Echols and Williams, p.87
[7] 문서 Echols and Williams, p.328
[8] 문서 Lord, p.47
[9] 문서 Lord, p.48
[10] 문서 Kibler, p.210
[11] 문서 Wagner, p.250
[12] 문서 Nirenberg, p.55
[13] 문서 Hassall, p.99
[14] 문서 Kibler, p.201; Nirenberg, p.67
[15] 문서 Holmes, p.16
[16] 문서 Neillands, p.30
[17] 문서 Neillands, p.31
[18] 문서 Holmes, p.16; Kibler, p.201
[19] 문서 Kibler, p.314
[20] 문서 Ainsworth, p.3
[21] 문서 Lord, p.46
[22] 문서 Kibler, p.314; Sumption, p.98
[23] 서적 Robert Bruce and the Community of the Realm of Scotland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88
[24] 문서 Kibler, p.477
[25] 문서 Neillands, p.32
[26] 문서 TeBrake, p.47
[27] 문서 TeBrake, p.50
[28] 문서 TeBrake, p.93
[29] 문서 TeBrake, p.94
[30] 문서 TeBrake, p.95
[31] 문서 TeBrake, p.97
[32] 문서 TeBrake, p.98
[33] 문서 Vauchez, Dobson and Lapidge, p.288
[34] 문서 Housley, p.22
[35] 문서 Kibler, p.206
[36] 문서 Geanakoplos, p.48.
[37] 문서 Geanakoplos, p.49.
[38] 문서 Sumption, p.106.
[39] 웹사이트 Official website: ''Les Rois maudits'' (2005 miniseries) http://les-rois-maud[...] 2005
[40] 웹사이트 "''Les Rois maudits'': Casting de la saison 1" http://www.allocine.[...] AlloCiné 2005
[41] 문서 Anselme, pp. 87–88
[42] 문서 Anselme, p. 90
[43] 문서 Anselme, pp. 83–85
[44] 서적 Bulletin de la Société de l'histoire de France https://archive.org/[...] J. Renouard
[45] 문서 Anselme, pp. 381–382
[46] 문서 1308년이라는 설도 있음
[47] 문서 샤를 4세가 죽고 나서 두달 뒤에 태어난 유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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