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볼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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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더볼트 작전은 1951년 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유엔군이 서울 수복을 위해 실시한 반격 작전이다.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 아래, 유엔군은 화력 중심의 전술을 펼쳐 수원-이천 선에서 관악산-지평리 선으로 전선을 북상시켰다. 이 작전은 서울 재탈환의 발판을 마련하고, 리지웨이의 전술적 통찰력과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2월 5일, 유엔군은 한강에 도달했으며, 9일에는 관악산을 점령하며 서울 수복 작전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후, 유엔군은 킬러 작전을 통해 중공군과 북한군을 격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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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볼트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교전 | |
분쟁명 | 선더볼트 작전 |
작전명 (영어) | Operation Thunderbolt |
일부 | 6.25 전쟁 |
기간 | 1951년 1월 25일 - 1951년 2월 11일 |
장소 | 경기도 남부, 한강 |
결과 | 유엔군 승리 |
결과 상세 | 중국인민지원군 인해전술의 한계점 노출 서울 수복의 기반 확보 |
교전 세력 1 | |
교전국 | 유엔군 |
참가국 | 미국 대한민국 튀르키예 영국 콜롬비아 |
지휘관 |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프랭크 W. 밀번 존 콜터 브라이언트 무어 타흐신 야즈즈 하이메 폴라니아 푸요 |
부대 | 제8군 제3보병사단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1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27보병여단 제29보병여단 튀르키예 여단 콜롬비아 대대 |
병력 | 94,147명 |
피해 (미국측 주장) | 3,500명 |
피해 (전체) | 불명 |
피해 (중국측 주장) | 10,000명 |
교전 세력 2 | |
교전국 | 중국 |
지휘관 | 펑더화이 송쉬룬 리권무 |
부대 | 제38군 제50군 제1군단 |
병력 | 불명 |
피해 | 다수 |
2. 배경
1951년 1월 중순, 울프하운드 작전을 통해 유엔군은 중공군의 전력을 정찰하고 남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에서 중공군은 유엔군의 화력에 밀려 큰 피해를 입었다.[11]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37도선에서 멈췄다.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방어선에서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며 서울 수복을 위한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1951년 1월 초, 충청도를 지켜낸 유엔군은 본격적인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서부 전선의 경기도 및 서울 탈환을 위해 미 제1군단 및 미 제3사단, 영연방군 제27보병여단, 튀르키예 여단을 투입했고, 한국군 제1사단은 예비대로 부속되었다. 미 제9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 영 연방군 제27여단, 미 제24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군 제6사단이 예비대로 부속되었다.[13] 경기도 지방에서의 작전 목표는 적군의 주저항선까지 이들을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군을 확실히 섬멸하기 위해 화해전술 및 자성전술을 택하여 중국군의 반격도 허용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당시 중국군은 유엔군의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빠르게 남하한 탓에 식량과 탄약이 고갈된 상황이었다.[14]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한국 포기를 고려했지만,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미 참모총장 조세프 콜린스를 설득하여 중공군 공격 허가를 얻어냈다.[12] 리지웨이는 "펑더화이가 사람으로 바다를 만든다면, 나는 불로 바다를 만들 것이다."라는 말로 화력 중심의 반격 의지를 드러냈다.
유엔군은 작전 준비를 위해 미군 제3, 24, 25 보병사단을 비롯하여 터키 여단,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영연방군 제27, 29 여단 등을 배치했다.
1951년 1월 15일, 리지웨이는 미 제1군단에 공세 정찰을 명령했다.[4] 제25보병사단은 수원-오산 지역 공격 임무를 맡았고, 제27보병연대 '울프하운드'가 주력 부대로 선정되었다. 제3보병사단은 수원-금양장리 간 20번 국도를 차단하고,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은 금양장리 남쪽 17번 국도의 천-니까지 진출했다. 미 제9군단은 동쪽 지역 방어를 맡았고,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이 금양장리 동쪽에 배치되었다.[5]
15일, 대한민국 부대는 교전 없이 천-니와 금양장리에 도착했다. 제1대대, 제15보병연대와 미 제3사단 전차 부대는 금양장리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중공군과 교전했다. 제27보병연대는 오산 북쪽에서, 전차 부대는 파란장에서 밤을 보냈다.[5]
16일, 존 H. 마이클리스 대령 부대는 수원으로 접근하다 중공군과 교전 후 철수했다. 울프하운드 부대는 진위천에 전초선을 구축하고 정찰대를 투입했다. 리지웨이는 공격 정신을 칭찬했고, 밀번은 이틀간 중공군/인민군 사상자 1,380명, 미군 손실 10명으로 추산했다. 정찰 결과 수원-금양장리선 남쪽에 대규모 부대는 없었지만, 조직적인 부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5]
1월 20일, 리지웨이는 군단 사령관들에게 유사 작전을 지시했다. 밀번은 22일에 제35보병연대를 투입, 울프하운드 작전을 복제한 공격을 제안했다. 이 공격으로 인민군 제8사단이 서울 남쪽에서 활동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5]
리지웨이는 제1기병사단의 제70전차대대를 진천으로 이동시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을 지원하게 했다. 제24보병사단은 이천에 대대를 주둔시켰고, 21일에는 전차 및 포병을 동반한 대대가 추가 파견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은 팽암리에 대대를 배치했다.[5]
20일, 컬터는 제70전차대대를 중심으로 22일에 금양장리-이천 간 20번 국도 북쪽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제8기병연대 산하 태스크 포스는 양지리에서 중공군과 교전했다. 이 교전으로 조직적인 적 부대가 도로를 따라 위치해 있다는 증거가 추가되었다.[5]
3. 전투
1951년 1월 25일, 경기도에서 수원-이천 방어선을 돌파하며 작전이 시작되었다. 펑더화이는 기습 공격에 당황하여 부대 재편성을 지시했지만,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격에 붕괴되고 있었다. 1월 27일 수리산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수리산 부근인 반월, 대야미, 군포장 등지에서 중국군 제50군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지만, 1월 31일 공격을 개시하여 2월 6일까지 수리산의 440고지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튀르키예군은 거의 궤멸되었으며, 미군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중국군도 기세가 꺾여 2월 6일에 수리산을 포기했다. 수리산을 유엔군이 점령하면서 작전은 유엔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15] 이 무렵 모락산에서도 전투가 발발]]하여, 한국군이 중국군의 반격을 격퇴하고 미 공군의 지원 하에 모락산을 차지하면서 서울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중국군은 모락산에서 큰 피해를 입고 한강 남쪽의 주요 고지에서 재정비를 했다.
용인 김량장리와 태화산 초하리 남산에서도 중국군과 유엔군의 혈전이 벌어졌다. 용인 김량장리에서는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작전에 유엔군의 진격이 저지되자 미 제24사단 소속의 튀르키예 여단이 착검돌격을 개시해 중국군 474명을 사살하기도 했다.[16] 초하리 남산 전투에서는 치열한 진지 쟁탈전이 벌어졌고, 중국군은 육탄전과 백병전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영 연방군과 미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중국군은 한강 남쪽에서 반격 작전을 계획하는 한편, 서울 및 한강을 사수하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17]
3. 1. 경기도 지역
1951년 1월 27일부터 2월 6일까지, 수리산 일대에서 미군과 터키 여단이 참여한 전투는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5]
날짜 | 상황 |
---|---|
1월 27일 | 미군 제35보병연대는 수원 위쪽으로 약 약 3.22km 전진했고, 터키 여단은 수원과 금양장리 사이의 탄천 계곡으로 진입하여 20번 국도 위쪽으로 약 약 1.61km 전진했다.[5] |
1월 28일 | 미군 제15보병연대와 제65보병연대는 탄천 계곡의 55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고, 터키 여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제35보병연대의 진격에 합류했다. 이들은 적절하고 불규칙한 저항에 맞서 세 번째 위상선에서 약 3.22km 이내로 진입했다.[5] |
1월 29일 | 터키 여단과 제35보병연대 좌익 부대 앞에 조선인민군 제8사단이 있었다. 1번 국도와 17번 국도 사이에는 제148사단, 제149사단, 제150사단이 제25사단, 제3사단, 제1기병사단의 좌익 부대에 저항했다.[5] |
1월 30일 ~ 31일 | 선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미군과 터키 여단을 포함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저항을 뚫고 한강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수리산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유엔군이 수리산을 점령하면서 작전의 유리한 국면을 맞이했다.[5] |
모락산에서는 한국군이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의 반격을 격퇴하고 모락산을 점령하여 서울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용인 김량장리 및 태화산 초하리 남산 일대에서는 유엔군과 중공군 간의 격전이 벌어졌으며, 특히 튀르키예 여단이 김량장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3. 2. 강원도 지역
1951년 2월, 중공군은 횡성 일대에서 대규모 반격을 개시하여 유엔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횡성 전투''')[5] 이 전투로 인해 유엔군은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다. 횡성 전투 직후, 지평리에 고립된 유엔군(미군, 프랑스군)은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내며 중요한 방어 거점을 지켜냈다.[5] 이는 유엔군의 반격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전투였다. 한편, 유엔군은 동부 전선의 물자 보급을 지연시키기 위해 원산을 폭격했다.[5]4. 결과
1951년 2월 20일, 서울의 주요 관문 중 하나인 관악산이 유엔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유엔군은 서울 수복 작전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수원-이천 선에서 관악산-지평리 선으로의 전선 북상은 유엔군의 공세가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23] 이러한 유엔군의 승리에는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뛰어난 전술적 통찰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국군의 보급 최대 한계선이 8일임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1·4 후퇴, 운산-영변 전투, 청천강 전투 등에서 중국군과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화력 중심의 전술을 펼쳐 큰 타격을 입혔다.[24]
또한, 월턴 워커의 사망 이후 미군을 이끌게 된 리지웨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때부터 한국 주둔 미군 장교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지휘 과정에서 마찰이 없었다.[25]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 유엔군의 과감한 진격과 화력 전술은 유엔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고 평가된다.
5. 이후 작전
킬러 작전은 1951년 2월 20일 매슈 리지웨이가 중공군 및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시작한 작전이다.[4]
참조
[1]
서적
History of War to Resist America and Aid Korea (抗美援朝战争史)
Chinese Military Science Academy Publishing House
[2]
서적
Ridgway Duels for Korea
Texas A and M University Military History Series
[3]
서적
Korean Battle Chronology: Unit-by-Unit United States Casualty Figures and Medal of Honor Citations
McFarland
[4]
서적
The Korean War
https://archive.org/[...]
Osprey Publishing
[5]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6]
서적
The Korean War
https://archive.org/[...]
Greenwood
[7]
서적
[8]
서적
[9]
문서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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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2]
서적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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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5]
서적
[16]
웹사이트
http://yongin.grandc[...]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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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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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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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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