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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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광덕은 《시경》을 익혀 초나라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소망지의 추천으로 어사대부가 되어 석거각 논의에 참여했다. 이후 장신소부, 어사대부를 역임하며 원제에게 직언을 하고, 흉년과 유랑민 발생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 원제에게 받은 수레는 자손 대대로 간직되었다. 《한서》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44년 12월부터 기원전 43년 2월까지 어사대부로 재직했다.
설광덕은 노시(魯詩)를 익혀 초나라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어사대부 소망지의 속관으로 발탁되었다. 소망지는 설광덕과 대화를 나누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설광덕은 박사(博士)가 되어 석거각(石渠閣)의 논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간대부(諫大夫)를 거쳐 장신소부가 되었으며, 초원 5년(기원전 44년)에 공우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1]
반고가 지은 《한서》 권19하 백관공경표 下·권71 준소우설평팽전에 따르면, 전한의 어사대부를 기원전 44년 12월[2]부터 기원전 43년 2월[3]까지 역임하였으며, 공우의 후임이었고, 위현성의 전임이었다고 한다.
[1]
문서
설광덕은 《사기》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에 따르면 초원 5년(기원전 44년) 12월에 취임하여 이듬해 2월에 물러났고, 《한서》 백관공경표에 따르면 우정국은 같은해 11월, 사고는 7월에 물러났다. 즉, 각자 다른 시기에 은퇴하였으며, 역시 백관공경표에 따르면 설광덕은 질병으로 면직되었다. 모두 본전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2. 생애
노나라의 『시경』을 초군에서 가르쳤고, 공승(龔勝)과 공사(龔舎)도 그에게 배웠다.
2. 1. 황제에게 직언하다
설광덕은 본래 온화한 성품이었으나, 삼공의 반열에 오른 후부터는 황제에게 직언을 자주 하였다.[1]
어사대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원제는 감천궁에서 제사를 지낸 후 그곳에서 사냥을 하였다. 설광덕은 이를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1]
원제는 바로 궁궐로 돌아갔다.[1]
같은 해 가을, 원제는 배를 타고 종묘의 제사를 지내러 가려 하였고, 설광덕은 다리를 건너서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원제가 듣지 않으니, 설광덕은 다시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1]
원제는 불쾌하게 여겼으나, 광록대부 장맹이 재차 간하니 결국 다리를 건너서 갔다.[1]
2. 2. 스스로 물러나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나, 설광덕은 흉년과 유랑민 발생의 책임을 지고 승상 우정국·대사마거기장군 사고와 함께 사퇴를 청원하였다. 원제는 이들에게 수레와 말·황금을 하사하였다. 설광덕은 10개월 정도 어사대부를 지냈다.[1]
설광덕은 고향인 패군으로 돌아갔고, 태수가 몸소 마중을 나왔다. 패군에서는 설광덕을 자랑스럽게 여겨, 원제로부터 받은 수레를 자손 대대로 간직하였다.
3. 출전
참조
[2]
문서
《사기》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에서는 12월 정미일, 《한서》 백관공경표에서는 12월 정사일이라고 한다.
[3]
서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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