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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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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악은 당나라 시대의 인물로, 안사의 난 이후 형 설숭이 소의군을 통치할 때 그의 휘하에 있었으나 구체적인 관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형의 사후 소의군 절도사 직을 계승했으나, 부하 배지청의 반란으로 축출되었다. 이후 당 대종에게 용서를 구하고 장안으로 돌아갔으나, 이후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2. 생애

안사의 난 이후, 설악의 형 설숭은 절도사로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형태로 소의군을 통치하였다. 이 시기, 설악이 형의 휘하에서 어떠한 관직을 지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대력 8년 1월 6일(773년 2월 2일), 형 설숭이 사망하고, 설평이 숙부인 설악에게 절도사 자리를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당 대종은 설악을 지유후사(知留後事, 절도사 권한대행)에 임명하였다. 이후 대종은 설악에게 검교태자소사(檢校太子少師)라는 명예직함을 추가로 수여하였다.

775년에 부하 장수 배지청의 반란으로 축출된 후, 당나라 조정에 귀순하여 당 대종에게 용서를 받았다. 이후 설악의 행적은 정사에 등장하지 않으며, 언제 사망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2. 1. 소의군 절도사 계승과 실각

775년, 설악은 부하 장수 배지청의 반란으로 소의군 절도사 직에서 축출되었다. 배지청은 인근 군벌 전승사에게 투항하였고, 전승사는 이 틈을 타 소의군을 차지하였다. 설악당 대종에게 용서를 구했고, 대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설악의 행적은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2. 1. 1. 설숭 사후 절도사직 계승

안사의 난 이후, 설악의 형 설숭은 절도사로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형태로 소의군을 통치하였다.

대력 8년 1월 6일(773년 2월 2일), 소의군 절도사상주자사 설숭이 죽었다. 그의 부하 장병들은 당시 11세였던 그의 아들 설평을 그 후계자로 받들고자 하였다. 그들은 번진(藩鎭)은 세습을 통해 상속해 왔었다는 이전의 사례들을 거론하며 설평에게 유후(留後)를 맡아달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설평은 이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숙부 설악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그날 밤, 아버지의 을 모시고 고향으로 달아났다. 같은 날, 당 대종은 설악을 지유후사(知留後事, 절도사 권한대행)에 임명하였다. 이후 대종은 설악에게 검교태자소사(檢校太子少師)의 명예직함을 추가로 수여하였다.

대력 10년 1월 3일(775년 2월 7일), 설악의 부하 장수인 소의군 병마사 배지청(裴志淸)이 반란을 일으켜 유후 설악을 내쫓아 버리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인근 군벌 위박(魏博, 본부는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에 있었다) 절도사 전승사에게 가서 투항하였다. 배지청은 예전부터 소의군을 차지할 속셈을 오랫동안 가져 왔던 전승사의 지난해부터 있었던 공작으로 포섭되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사주받은 소의군 장령(將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승사는 이 틈을 타 구원군이라면서 소의군의 수도 상주를 습격하여 그곳을 차지해 버렸다. 설악은 명주(洺州, 대략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일대에 해당한다)로 달아났다. 그리고 대종에게 수도 장안조정으로 들어가서 알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의 표문(表文)을 올렸다. 대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3월 12일(775년 4월 16일), 장안에 도착한 설악은 하양삼성사(河陽三城使) 상휴명(그는 사병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동도(東都) 낙양으로 도망을 와 있었다)과 함께 소복(素服) 차림을 하고 은대문(銀臺門)에서 대종에게 자신들을 처벌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대종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해 주었다.

2. 1. 2. 배지청의 반란과 축출

안사의 난 이후, 설악의 형 설숭은 절도사로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형태로 소의군을 통치하였다.

대력 10년 1월 3일(775년 2월 7일), 설악의 부하 장수인 소의군 병마사 배지청(裴志淸)이 반란을 일으켜 유후 설악을 내쫓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인근 군벌 위박(魏博, 본부는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에 있었다)절도사 전승사에게 투항하였다. 배지청은 전승사가 지난해부터 소의군을 차지할 속셈으로 공작하여 포섭한 소의군 장령(將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승사는 이 틈을 타 구원군을 가장하여 소의군의 수도 상주를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설악은 명주(洺州, 대략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일대에 해당한다)로 달아났다. 그리고 당 대종에게 수도 장안조정으로 들어가 알현할 수 있도록 청원하는 표문(表文)을 올렸고, 대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3월 12일(775년 4월 16일), 장안에 도착한 설악은 하양삼성사(河陽三城使) 상휴명(그는 사병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동도(東都) 낙양으로 도망와 있었다)과 함께 소복(素服) 차림으로 은대문(銀臺門)에서 대종에게 처벌을 청하였으나, 대종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하였다.

2. 2. 당나라 조정 귀순

안사의 난 이후, 설악의 형 설숭은 절도사로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형태로 소의군을 통치하였다.

대력 8년 1월 6일(773년 2월 2일), 소의군 절도사상주자사 설숭이 죽었다. 그의 부하 장병들은 당시 11세였던 그의 아들 자주(磁州,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서쪽에 있었다)자사 설평을 그 후계자로 받들고자 하였다. 그들은 번진(藩鎭)은 세습을 통해 상속해 왔었다는 이전의 사례들을 거론하며 설평에게 유후(留後)를 맡아달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설평은 이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숙부 설악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그날 밤, 아버지의 을 모시고 고향絳州|강주중국어(지금의 산서성 운성시)로 달아났다. 같은 날, 당 대종은 설악을 지유후사(知留後事, 절도사 권한대행)에 임명하였다. 이후 대종은 설악에게 검교태자소사(檢校太子少師)의 명예직함을 추가로 수여하였다.

대력 10년 1월 3일(775년 2월 7일), 설악의 부하 장수인 소의군 병마사 배지청(裴志淸)이 반란을 일으켜 유후 설악을 내쫓아 버리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인근 군벌 위박(魏博, 본부는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에 있었다)절도사 전승사에게 가서 투항하였다. 배지청은 예전부터 소의군을 차지할 속셈을 오랫동안 가져 왔던 전승사의 지난해부터 있었던 공작으로 포섭되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사주받은 소의군 장령(將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승사는 이 틈을 타 구원군이라면서 소의군의 수도 상주를 습격하여 그곳을 차지해 버렸다. 설악은 명주(洺州, 대략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일대에 해당한다)로 달아났다. 그리고 대종에게 수도 장안조정으로 들어가서 알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의 표문(表文)을 올렸다. 대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3월 12일(775년 4월 16일), 장안에 도착한 설악은 하양삼성사(河陽三城使) 상휴명(그는 사병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동도(東都) 낙양으로 도망을 와 있었다)과 함께 소복(素服) 차림을 하고 은대문(銀臺門)에서 대종에게 자신들을 처벌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대종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해 주었다.

2. 3. 가계

설악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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