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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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군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창설되어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해산된 군대이다. 붉은 군대로 시작하여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냉전 시대에는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으로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개입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대리전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과 소련 붕괴 과정에서 군대 규모가 축소되었고,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여러 국가의 군대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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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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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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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일 | 1918년 2월 23일 (붉은 군대로서) |
창설일 (소비에트 연방군) | 1946년 2월 25일 |
해체일 |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 해체) |
해체일 (연합군) | 1993년 12월 24일 (독립국가연합 연합군 해체) |
본부 | 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방부 청사 |
지휘부 | |
최고 사령관 | 요시프 스탈린 (1922–1953)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1991) |
최고 사령관 직책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 |
국방부 장관 |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 (1917–1918)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 (1991–1993) |
총참모장 | 파벨 파블로비치 레베데프 (1921–1924) 빅토르 삼소노프 (1991–1992) |
병력 | |
징병 연령 | 18–35세 |
징병 기간 | 육군 및 공군: 2년 해군: 3년 |
가용 병력 (1991년) | 92,345,764명 |
현역 병력 (1985년) | 4,900,000명 |
예비군 | 12,750,000명 |
예산 | |
군사 예산 (1988년 공식) | US$1280억 달러 |
군사 예산 (1988년 CIA 및 미국 국방부 추정) | US$2000억–3000억 달러 |
국내총생산 대비 군사비 (1988년 공식) | 4.9% |
국내총생산 대비 군사비 (1988년 CIA 및 미국 국방부 추정) | 7.7–11.5% |
군사 조직 | |
주요 구성군 | 소비에트 육군 소비에트 공군 소비에트 방공군 전략 로켓군 소비에트 해군 소비에트 공수군 |
역사 | |
군사 역사 |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사 |
계급 |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 계급 |
기타 | |
다른 이름 |
2. 역사
소련군의 전신은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적위대(赤衛隊)이다.
혁명에 가담한 노동자와 병사들로 구성된 민병대 수준이었던 적위대를 군대로 재탄생시킨 사람은 레온 트로츠키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이 적위대를 개편하여 백군에 대항하는 적군을 만들었다. 적군은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볼셰비키는 소련을 탄생시켰다.
1918년 1월 15일(구력), 즉 1월 28일(율리우스력)에 인민위원회는 기존의 붉은근위대를 기반으로 하여 러시아 적군을 설립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1918년 5월 29일 법령에 따라 18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에 대한 의무 군복무가 시행되었다. 대규모 징병을 위해 볼셰비키는 지역 군사위원회(voenkomats)를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이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1920년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이 볼셰비키에게 자신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자, 볼셰비키는 전직 장교인 러시아 제국군 장교의 징집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 당국은 레프 글레자로프(Лев Маркович Глезаров)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 위원회를 설립했고, 1920년 8월까지 약 31만 5천 명의 전직 장교를 징집했다.
특기할 만한 제도로는 정치지도원 제도가 있다. 나폴레옹처럼 군대 내의 혁명에 반대하는 군인(소련군의 지휘관들 중 상당수가 소비에트 입장에서 사상성이 의심가는 러시아 제국 장군 출신이었다.)이 혁명 정부에 반기를 들 것이라 걱정한 트로츠키는 군에 정치지도원을 배치하여 장군을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정치지도원의 임무중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정훈 장교와 유사하게 장병들에게 국가와 당에 대한 충성심을 지도하는 역할도 있었다. 이 제도는 지휘권의 단일화이라는 점에서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나, 군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우위를 통하여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파시즘이 유럽에 확산되자 소련은 1939년 징병제를 실시하고 폐지되었던 군 계급을 부활시켰다. 1930년대 소련의 산업화로 소련군은 장갑차, 전차, 항공기로 무장한 현대적인 군대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소련의 대숙청(예조프치나)으로 많은 지휘관이 숙청당하는등의 이유로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에서 초기에 큰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패배 직전 지휘관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줄였고, 이후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1939년 9월 17일, 적군은 폴란드의 동부 영토로 진격했다.[6] 소련의 침공은 폴란드군에게 제2전선을 열었고, 폴란드의 패배를 앞당겼다.[6] 소련군과 독일군의 진격은 커존 라인에서 멈췄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독일과 소련 간의 폴란드 분할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었다.[6] 소련군과 독일군은 1939년 9월 22일 합동 퍼레이드를 열었다. 리비우 근처에서 양측의 충돌이 있었지만, 협상을 통해 독일군이 지역을 떠났고, 적군은 9월 22일 리비우에 진입했다. 1991년 이후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폴란드에 투입된 적군 병력은 46만 6,516명이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는 폴란드인에 맞서 봉기했고, 공산당 파르티잔들은 스키델 등지에서 지역 반란을 조직했다.[7][8] 적군은 1,475명의 사망 및 실종, 2,383명의 부상자를 냈다.[9] 폴란드군의 손실은 6,000~7,000명으로 추산된다.[10]
겨울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 공격은 불법으로 판단되어 소련은 국제 연맹에서 제명되었다.[11]
계속 전쟁은 1941년 6월 25일 소련의 핀란드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1941년 9월까지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과 라도가 카렐리야에서 겨울 전쟁 이후 소련에 양보했던 지역을 되찾았다. 핀란드군은 동카렐리야 정복 중 1939년 국경 너머로 공세를 계속하여 페트로자보츠크를 점령했고, 레닌그라드 중심부에서 약 30-32 km 떨어진 곳에서만 멈췄다.[12] 레닌그라드 포위에 참여하여 북쪽 보급로를 차단하고 1944년까지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0년 가을, 나치 독일은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결정했고, 1941년 2월 3일,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계획이 승인되었다.
1941년 6월 나치가 소련을 공격했을 당시, 적군은 303개 사단과 22개 여단(480만 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부 전선에 배치된 추축국 군대는 181개 사단과 18개 여단(380만 명)이었다. 전쟁 초반 몇 주 동안 소련은 큰 패배를 당했다.
게오르기 주코프를 비롯한 뛰어난 소련 사령관 세대는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및 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승리로 대애국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1941년 후퇴하는 적군의 사기를 향상시키기 위해 1812년 애국 전쟁을 암시하여 "대애국전쟁"이라고 선포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미하일 쿠투조프와 같은 고대 러시아 군 영웅에 대한 언급이 나타났다.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탄압이 중단되었고, 공산당은 정치장교 제도를 폐지했지만, 곧 부활시켰다. 적군은 군 계급을 재도입하고 근위대의 개념이 다시 등장했다.
독일-소련 전쟁 동안 적군은 29,574,900명을 징집했다. 총 손실은 8,668,400명에 달했다. 손실의 대부분은 러시아계(5,756,000명)였다.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총 손실은 7,181,100명이었다.
전쟁 초반 적군은 혼합된 품질의 무기를 사용했다. T-34 전차는 뛰어났지만, 대부분의 소련 기갑 부대는 덜 발전된 모델이었다.
소련은 미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로 초강대국이 되었다. 육군은 천만 명이었다.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 8월 29일에 원자 폭탄(原爆)을 만들었고 1953년 8월 12일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 11월 30일에는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8월 21일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미군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45년 소련은 육군, 공군, 해군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육군과 공군을 감독하는 한 부처(인민위원부(Narkomat)s)와 해군(Soviet Navy)을 지휘하는 다른 부처는 1946년 3월 국방성(Ministry of the Armed Forces)으로 통합되었다. 네 번째 부대인 국가방공군(Soviet Air Defence Forces, 국토방공군)은 1948년에 창설되었다. 이 부처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잠시 두 개로 나뉘었다가 다시 소련 국방장관(Minister of Defence of Soviet Union) 산하 국방성(Ministry of Defence)으로 통합되었다. 6년 후에는 전략 로켓군(Strategic Rocket Forces)이 창설되었다. 소련 공수부대(Soviet Airborne Forces)는 최고사령부 예비군(Reserve of the Supreme High Command)으로서 이 무렵부터 활동했다. 또한 소련군에는 후방지원부대(Rear Services of the Armed Forces of Russia, Tyl 또는 후방지원부)도 속해 있었다.
소련군 병력은 1948년 약 1,130만 명에서 약 280만 명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해체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군관구(military district)의 수는 일시적으로 33개로 증가했다가 1946년에는 21개로 감소했다. 서방의 추산에 따르면 냉전 기간 대부분 동안 육군의 규모는 400만~500만 명 사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대규모 감축이 이루어져 110만 명의 병력이 해체되었다. 1956년에는 두 개의 군관구가 해체되었다. 소련 법률은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이 최소 2년간 복무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소련 육군은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현역 육군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 지배에서 동유럽 국가들을 장악했던 소련 부대는 소련의 위성국(satellite states)이 된 국가들에서 정권을 유지하고, 독립 운동에 대한 저항을 억제하고, 나중에는 나토(NATO)군에 대항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소련군의 군사력이 가장 강력했던 곳은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 집단(Group of Soviet Forces in Germany)이었지만, 폴란드의 북방군 집단(Northern Group of Forces), 체코슬로바키아의 중부군 집단(Central Group of Forces), 헝가리의 남방군 집단(Southern Group of Forces)을 포함하여 다른 곳에도 소규모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소련 자체 내에서는 1950년대에 모스크바 군관구(Moscow Military District), 레닌그라드 군관구(Leningrad Military District), 발트 군관구(Baltic Military District)를 포함한 15개 군관구로 부대가 나뉘어 있었다.
1941년 독일의 침공(Operation Barbarossa)으로 인한 참사는 적의 영토 또는 소련의 패권하에 있는 완충 지대에서 적과 싸우거나, 어떤 경우에도 전쟁이 소련 영토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소련 냉전 교리에 영향을 미쳤다. 동유럽에서 소련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군은 독일 민주 공화국(1953년), 헝가리(1956년), 체코슬로바키아(1968년)에서 반소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개입했다.
중소 국경 분쟁(Sino-Soviet border conflict)의 결과로 1969년 알마아타(Almaty, Alma-Ata)에 본부를 둔 중앙아시아 군관구(Central Asian Military District)라는 16번째 군관구가 신설되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는 전장 수준의 전쟁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군관구, 군 집단, 함대를 그룹화한 4개의 최고 사령부가 설립되었다. 극동 최고 사령부가 먼저 설립되었고, 유럽을 향한 서부 및 남서부 최고 사령부가 그 뒤를 이었으며, 중동을 향한 바쿠(Baku)에 남부 최고 사령부가 설립되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나토(NATO)와의 대결은 주로 핵무기(nuclear weapons)를 이용한 상호 억제의 위협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대리전(proxy war)이 발생했다. 소련과 미국은 제3세계(Third World) 국가에서 충성스러운 의존 정권(client régimes)이나 반군 운동을 지원했다. 한국 전쟁(Korean War) 중에는 소련 공군(Soviet Air Forces)이 미국과 유엔군(United Nations Command, UNC)과 직접 교전했다. 미그-9(Mikoyan-Gurevich MiG-9)와 미그-15(Mikoyan-Gurevich MiG-15) 전투기를 탑재한 소련 공군 두 개 사단이 미국의 B-29 슈퍼포트리스(Boeing B-29 Superfortress) 폭격기와 미군 및 동맹군 호위 전투기와 싸웠다.[13] 소련은 특히 탄도 미사일과 이를 발사하는 핵잠수함 생산에 많은 투자를 했다.
러시아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은 정규군이 아니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의 군대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6년 2월 25일, 적군에서 소비에트 연방군(Советская Армия)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명실상부하게 소비에트 연방의 국군이 된다. 냉전 시대에는 동구권에 주둔하여 각국 정부에 군사적 압력을 계속 가했으며, 헝가리 혁명과 프라하의 봄에서는 군사 개입으로 동유럽의 민주화를 저지했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지도자는 군대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자 군대 규모를 점진적으로 축소했다. 1989년 소련군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들을 스스로 방어하도록 내버려두고 철수했으며, 같은 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990년 말 동유럽 전체가 민주 혁명의 여파로 붕괴되면서, 소련 시민들도 소련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련 붕괴 과정에서 군대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의 분쟁과 불안을 진압하려 했으나, 트빌리시 (1989년 4월 9일), 바쿠 (1990년 1월 19일~20일), 빌뉴스 (1991년 1월 13일) 등에서 민간인을 살상하는 등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군 지휘관들은 모스크바에 탱크를 배치했지만, 이는 시민 안전 보장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정부 전복 의도는 없었다. 쿠데타는 참가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했고, 민간인 3명이 사망한 충돌 외에는 별다른 유혈 사태는 없었다.
쿠데타 실패 이후, 거의 모든 소련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소련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 설립에 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25일 사임했고, 다음 날 소련 최고회의가 해산되면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년 반 동안 독립국가연합 연합군으로 소련 군대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우크라이나 등 분리 공화국들은 자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고, 군대 자산은 새로 독립한 국가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1992년 3월, 보리스 옐친은 자신을 러시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러시아 연방군을 창설했다. 구 소련 지휘 체계는 1993년 6월 해체되었다. 전 소련군은 중앙 및 동유럽과 구 소련 공화국들에서 철수했다. 흑해 함대 분할 문제는 1997년에 합의되었다. 발트 3국은 2004년 NATO에 가입했다.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해산되어 러시아군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군대로 분할되었다.
2. 1. 기원

소련군의 전신은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적위대(赤衛隊)이다.
혁명에 가담한 노동자와 병사들로 구성된 민병대 수준이었던 적위대를 군대로 재탄생시킨 사람은 레온 트로츠키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이 적위대를 개편하여 백군에 대항하는 적군을 만들었다. 적군은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볼셰비키는 소련을 탄생시켰다.
1918년 1월 15일(구력), 즉 1월 28일(율리우스력)에 인민위원회는 기존의 붉은근위대를 기반으로 하여 러시아 적군을 설립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1918년 5월 29일 법령에 따라 18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에 대한 의무 군복무가 시행되었다. 대규모 징병을 위해 볼셰비키는 지역 군사위원회(voenkomats)를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이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1920년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이 볼셰비키에게 자신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자, 볼셰비키는 전직 장교인 러시아 제국군 장교의 징집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 당국은 레프 글레자로프(Лев Маркович Глезаров)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 위원회를 설립했고, 1920년 8월까지 약 31만 5천 명의 전직 장교를 징집했다.
특기할 만한 제도로는 정치지도원 제도가 있다. 나폴레옹처럼 군대 내의 혁명에 반대하는 군인(소련군의 지휘관들 중 상당수가 소비에트 입장에서 사상성이 의심가는 러시아 제국 장군 출신이었다.)이 혁명 정부에 반기를 들 것이라 걱정한 트로츠키는 군에 정치지도원을 배치하여 장군을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정치지도원의 임무중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정훈 장교와 유사하게 장병들에게 국가와 당에 대한 충성심을 지도하는 역할도 있었다. 이 제도는 지휘권의 단일화이라는 점에서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나, 군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우위를 통하여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해산되어 러시아군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군대로 분할되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파시즘이 유럽에 확산되자 소련은 1939년 징병제를 실시하고 폐지되었던 군 계급을 부활시켰다. 1930년대 소련의 산업화로 소련군은 장갑차, 전차, 항공기로 무장한 현대적인 군대가 되었다.그러나, 1930년대 말 소련의 대숙청(예조프치나)으로 많은 지휘관이 숙청당하는등의 이유로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에서 초기에 큰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패배 직전 지휘관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줄였고, 이후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1939년 9월 17일, 적군은 폴란드의 동부 영토로 진격했다.[6] 소련의 침공은 폴란드군에게 제2전선을 열었고, 폴란드의 패배를 앞당겼다.[6] 소련군과 독일군의 진격은 커존 라인에서 멈췄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독일과 소련 간의 폴란드 분할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었다.[6] 소련군과 독일군은 1939년 9월 22일 합동 퍼레이드를 열었다. 리비우 근처에서 양측의 충돌이 있었지만, 협상을 통해 독일군이 지역을 떠났고, 적군은 9월 22일 리비우에 진입했다. 1991년 이후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폴란드에 투입된 적군 병력은 46만 6,516명이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는 폴란드인에 맞서 봉기했고, 공산당 파르티잔들은 스키델 등지에서 지역 반란을 조직했다.[7][8] 적군은 1,475명의 사망 및 실종, 2,383명의 부상자를 냈다.[9] 폴란드군의 손실은 6,000~7,000명으로 추산된다.[10]
겨울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 공격은 불법으로 판단되어 소련은 국제 연맹에서 제명되었다.[11]
계속 전쟁은 1941년 6월 25일 소련의 핀란드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1941년 9월까지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과 라도가 카렐리야에서 겨울 전쟁 이후 소련에 양보했던 지역을 되찾았다. 핀란드군은 동카렐리야 정복 중 1939년 국경 너머로 공세를 계속하여 페트로자보츠크를 점령했고, 레닌그라드 중심부에서 약 떨어진 곳에서만 멈췄다.[12] 레닌그라드 포위에 참여하여 북쪽 보급로를 차단하고 1944년까지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0년 가을, 나치 독일은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결정했고, 1941년 2월 3일,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계획이 승인되었다.
1941년 6월 나치가 소련을 공격했을 당시, 적군은 303개 사단과 22개 여단(480만 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부 전선에 배치된 추축국 군대는 181개 사단과 18개 여단(380만 명)이었다. 전쟁 초반 몇 주 동안 소련은 큰 패배를 당했다.
게오르기 주코프를 비롯한 뛰어난 소련 사령관 세대는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및 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승리로 대애국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1941년 후퇴하는 적군의 사기를 향상시키기 위해 1812년 애국 전쟁을 암시하여 "대애국전쟁"이라고 선포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미하일 쿠투조프와 같은 고대 러시아 군 영웅에 대한 언급이 나타났다.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탄압이 중단되었고, 공산당은 정치장교 제도를 폐지했지만, 곧 부활시켰다. 적군은 군 계급을 재도입하고 근위대의 개념이 다시 등장했다.
독일-소련 전쟁 동안 적군은 29,574,900명을 징집했다. 총 손실은 8,668,400명에 달했다. 손실의 대부분은 러시아계(5,756,000명)였다.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총 손실은 7,181,100명이었다.
전쟁 초반 적군은 혼합된 품질의 무기를 사용했다. T-34 전차는 뛰어났지만, 대부분의 소련 기갑 부대는 덜 발전된 모델이었다.
2. 3. 냉전 시대 (1947-1991)
소련은 미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로 초강대국이 되었다. 육군은 천만 명이었다.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 8월 29일에 원자 폭탄(原爆)을 만들었고 1953년 8월 12일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 11월 30일에는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8월 21일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미군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1945년 소련은 육군, 공군, 해군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육군과 공군을 감독하는 한 부처(인민위원부(Narkomat)s)와 해군(Soviet Navy)을 지휘하는 다른 부처는 1946년 3월 국방성(Ministry of the Armed Forces)으로 통합되었다. 네 번째 부대인 국가방공군(Soviet Air Defence Forces, 국토방공군)은 1948년에 창설되었다. 이 부처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잠시 두 개로 나뉘었다가 다시 소련 국방장관(Minister of Defence of Soviet Union) 산하 국방성(Ministry of Defence)으로 통합되었다. 6년 후에는 전략 로켓군(Strategic Rocket Forces)이 창설되었다. 소련 공수부대(Soviet Airborne Forces)는 최고사령부 예비군(Reserve of the Supreme High Command)으로서 이 무렵부터 활동했다. 또한 소련군에는 후방지원부대(Rear Services of the Armed Forces of Russia, Tyl 또는 후방지원부)도 속해 있었다.
소련군 병력은 1948년 약 1,130만 명에서 약 280만 명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해체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군관구(military district)의 수는 일시적으로 33개로 증가했다가 1946년에는 21개로 감소했다. 서방의 추산에 따르면 냉전 기간 대부분 동안 육군의 규모는 400만~500만 명 사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대규모 감축이 이루어져 110만 명의 병력이 해체되었다. 1956년에는 두 개의 군관구가 해체되었다. 소련 법률은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이 최소 2년간 복무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소련 육군은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현역 육군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 지배에서 동유럽 국가들을 장악했던 소련 부대는 소련의 위성국(satellite states)이 된 국가들에서 정권을 유지하고, 독립 운동에 대한 저항을 억제하고, 나중에는 나토(NATO)군에 대항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소련군의 군사력이 가장 강력했던 곳은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 집단(Group of Soviet Forces in Germany)이었지만, 폴란드의 북방군 집단(Northern Group of Forces), 체코슬로바키아의 중부군 집단(Central Group of Forces), 헝가리의 남방군 집단(Southern Group of Forces)을 포함하여 다른 곳에도 소규모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소련 자체 내에서는 1950년대에 모스크바 군관구(Moscow Military District), 레닌그라드 군관구(Leningrad Military District), 발트 군관구(Baltic Military District)를 포함한 15개 군관구로 부대가 나뉘어 있었다.
1941년 독일의 침공(Operation Barbarossa)으로 인한 참사는 적의 영토 또는 소련의 패권하에 있는 완충 지대에서 적과 싸우거나, 어떤 경우에도 전쟁이 소련 영토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소련 냉전 교리에 영향을 미쳤다. 동유럽에서 소련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군은 독일 민주 공화국(1953년), 헝가리(1956년), 체코슬로바키아(1968년)에서 반소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개입했다.
중소 국경 분쟁(Sino-Soviet border conflict)의 결과로 1969년 알마아타(Almaty, Alma-Ata)에 본부를 둔 중앙아시아 군관구(Central Asian Military District)라는 16번째 군관구가 신설되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는 전장 수준의 전쟁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군관구, 군 집단, 함대를 그룹화한 4개의 최고 사령부가 설립되었다. 극동 최고 사령부가 먼저 설립되었고, 유럽을 향한 서부 및 남서부 최고 사령부가 그 뒤를 이었으며, 중동을 향한 바쿠(Baku)에 남부 최고 사령부가 설립되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나토(NATO)와의 대결은 주로 핵무기(nuclear weapons)를 이용한 상호 억제의 위협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대리전(proxy war)이 발생했다. 소련과 미국은 제3세계(Third World) 국가에서 충성스러운 의존 정권(client régimes)이나 반군 운동을 지원했다. 한국 전쟁(Korean War) 중에는 소련 공군(Soviet Air Forces)이 미국과 유엔군(United Nations Command, UNC)과 직접 교전했다. 미그-9(Mikoyan-Gurevich MiG-9)와 미그-15(Mikoyan-Gurevich MiG-15) 전투기를 탑재한 소련 공군 두 개 사단이 미국의 B-29 슈퍼포트리스(Boeing B-29 Superfortress) 폭격기와 미군 및 동맹군 호위 전투기와 싸웠다.[13] 소련은 특히 탄도 미사일과 이를 발사하는 핵잠수함 생산에 많은 투자를 했다.
러시아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은 정규군이 아니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의 군대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6년 2월 25일, 적군에서 소비에트 연방군(Советская Армия)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명실상부하게 소비에트 연방의 국군이 된다. 냉전 시대에는 동구권에 주둔하여 각국 정부에 군사적 압력을 계속 가했으며, 헝가리 혁명과 프라하의 봄에서는 군사 개입으로 동유럽의 민주화를 저지했다.
1991년 12월 26일 소련의 해체와 함께 소련군도 해체되었다. 해체되기 직전의 소련군 육군은 세계1위였으며 해군, 공군은 세계2위였다. 정규군은 5백만 명이 넘었고 예비군은 천만 명이 넘었으며 주력 전차, 중거리 로켓포, 대공 전차는 합쳐서 5만 대가 넘었으며 핵무기도 미국을압도했다. 러시아 연방군이 거의 대부분의 무기와 인력을 흡수하였고,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다른 공화국들도 일부를 자국군으로 흡수하였다. 위성국에 주둔한 군대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후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994년 8월 30일 구 동독 주둔지 철수를 마지막으로 동구권에서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2. 4. 소련 붕괴와 해체 (1991)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지도자는 군대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자 군대 규모를 점진적으로 축소했다. 1989년 소련군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들을 스스로 방어하도록 내버려두고 철수했으며, 같은 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990년 말 동유럽 전체가 민주 혁명의 여파로 붕괴되면서, 소련 시민들도 소련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련 붕괴 과정에서 군대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의 분쟁과 불안을 진압하려 했으나, 트빌리시 (1989년 4월 9일), 바쿠 (1990년 1월 19일~20일), 빌뉴스 (1991년 1월 13일) 등에서 민간인을 살상하는 등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군 지휘관들은 모스크바에 탱크를 배치했지만, 이는 시민 안전 보장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정부 전복 의도는 없었다. 쿠데타는 참가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했고, 민간인 3명이 사망한 충돌 외에는 별다른 유혈 사태는 없었다.
쿠데타 실패 이후, 거의 모든 소련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소련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 설립에 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25일 사임했고, 다음 날 소련 최고회의가 해산되면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년 반 동안 독립국가연합 연합군으로 소련 군대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우크라이나 등 분리 공화국들은 자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고, 군대 자산은 새로 독립한 국가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1992년 3월, 보리스 옐친은 자신을 러시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러시아 연방군을 창설했다. 구 소련 지휘 체계는 1993년 6월 해체되었다. 전 소련군은 중앙 및 동유럽과 구 소련 공화국들에서 철수했다. 흑해 함대 분할 문제는 1997년에 합의되었다. 발트 3국은 2004년 NATO에 가입했다.
3. 조직
소련군은 소련 공산당과 국방부의 통제를 받았다. 소련군의 최고 책임자는 국방부 장관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정치국의 정식 회원이었다. 1934년 이후로는 소련 원수가 장관직을 맡았다. 스탈린은 마지막 민간인/정치인 국방부 장관이었으며, 1947년 이후로는 현역 장군(마지막 장관은 공군 출신이었지만)이 국방부 장관직을 맡았다. 1934년부터 1946년까지,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는 별도의 해군부가 존재했고, 국방부는 육군과 공군만 담당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군 장관은 훨씬 하급 관리였고 국방부가 정책 결정을 계속 주도했다.
국방부 장관 아래에는 두 명의 제1차관이 있었다. 작전과 계획을 담당하는 총참모장과 행정을 담당하는 제1차관이었다. 1955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최고사령관도 국방부 제1차관 직책을 겸임했다. 1980년대에는 5개 군종 사령관을 포함하여 11명의 국방부 차관이 있었다.[14]
1989년 소련군은 공식적인 중요도 순서대로 전략 로켓군, 육군, 방공군, 공군, 해군으로 구성되었다. 후방부대인 "Tyl"은 자체 국방부 차관을 두었다. 1970년에는 전연방 국가 민방위군이 추가되었다.
국방부 외에도 여러 무장 조직이 있었는데, 1989년에는 내무군과 KGB 국경군이 포함되었다.
소련의 군사 조직은 기본적으로 육군, 해군, 공군, 방공군, 전략 로켓군의 5개 군종으로 구성되었으나, 국가안전위원회(КГБ), 내무부(МВД)에도 준군사 조직 및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유지했다. 소련군 최고 사령관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으며, 서기장은 군사뿐 아니라 경제 등 모든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당 서기장은 소비에트 연방 국방회의(Совет обороны СССР) 의장을 겸임했다.
전시에는 국방회의가 중앙군사회의가 되어 소련군의 지휘 감독을 담당했고, 평시에는 군사 전략을 수립했다. 중앙군사회의는 당 서기장, 국방장관, 3명의 제1 국방차관, 10명의 국방차관, 군사과학국장, 5개 군종 각 총사령관, 민방위장관, 철도건설장관, 후방장관, 장비 담당 국방차관, 감찰총감으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진다.(민방위장관 이하 6명은 추정도 포함)
중앙군사회의 아래에는 참모본부가 있었고, 5개 군종은 참모본부를 통해 국방장관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소련의 참모본부는 10국으로 구성되어 작전, 정보, 편성·동원, 군사과학, 통신, 지리, 장비, 암호, 군사원조,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각각 담당했다. 또한 이에 맞춰 정치본부, 과학기술위원회, 해군 담당 차장으로 구성되었다. 평시에는 중앙군사회의와 국방장관의 지휘를 받아 작전 계획 및 군사 행동 조정 업무를 수행했다.
참모본부는 함대, 방공관구, 육군 군관구 등의 작전 부대에 지령을 전달했다. 작전 부대는 작전 행동에 대해서는 참모본부의 지휘하에 운용되었다. 소련군은 전통적인 육해공군뿐 아니라 전략 로켓군, 국토방공군이 편성되어 있었고, 특히 전략 로켓군은 핵무기와 미사일 등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시되었다.
3. 1. 통제 기구
소련군은 소련 공산당과 국방부의 통제를 받았다. 소련군의 최고 책임자는 국방부 장관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정치국의 정식 회원이었다. 1934년 이후로는 소련 원수가 장관직을 맡았다. 스탈린은 마지막 민간인/정치인 국방부 장관이었으며, 1947년 이후로는 현역 장군이 국방부 장관직을 맡았다. 1934년부터 1946년까지,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는 별도의 해군부가 존재했고, 국방부는 육군과 공군만 담당했다.국방부 장관 아래에는 두 명의 제1차관이 있었다. 작전과 계획을 담당하는 총참모장과 행정을 담당하는 제1차관이었다. 1955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최고사령관도 국방부 제1차관 직책을 겸임했다.
공산당은 국가의 무장 세력에 대한 여러 가지 통제 기제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특정 계급부터는 당원만이 군 지휘관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당의 규율을 따라야 했다. 둘째, 최고 군 지도자들은 당의 최고위층에 체계적으로 통합되었다. 셋째, 당은 군대 전체에 정치 장교들을 배치하여 군대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정치 지휘관 (''잠폴리트'')는 무장 세력의 정치 장교 역할을 했다. ''잠폴리트''는 당 조직을 감독하고 군 부대 내에서 당의 정치 활동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잠폴리트는 지휘관의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상실했지만, 상급 정치 장교나 조직에 부대 지휘관의 정치적 태도와 성과에 대해 보고할 권한은 유지했다. 1989년 무장 세력 인원의 20% 이상이 당원이나 코뮌솜몰 회원이었다.
소련군 최고 사령관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으며, 서기장은 군사뿐 아니라 경제 등 모든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당 서기장은 소비에트 연방 국방회의(Совет обороны СССР) 의장을 겸임했다. 전시에는 국방회의가 중앙군사회의가 되어 소련군의 지휘 감독을 담당했고, 평시에는 군사 전략을 수립했다.
중앙군사회의 아래에는 참모본부가 있었고, 5개 군종은 참모본부를 통해 국방장관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평시에는 중앙군사회의와 국방장관의 지휘를 받아 작전 계획 및 군사 행동 조정 업무를 수행했다. 참모본부는 함대, 방공관구, 육군 군관구 등의 작전 부대에 지령을 전달했다.
3. 2. 군종
1989년 소련군은 공식적인 중요도 순서대로 전략 로켓군, 육군, 방공군, 공군, 해군으로 구성되었다.[14] 소련의 군사 조직은 기본적으로 육군, 해군, 공군, 방공군, 전략 로켓군의 5개 군종으로 구성되었으나, 국가안전위원회(КГБ), 내무부(МВД)에도 준군사 조직 및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유지했다.소련군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과 국방부의 통제를 받았다. 소련군 최고 사령관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으며, 서기장은 군사뿐 아니라 경제 등 모든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당 서기장은 소비에트 연방 국방회의(Совет обороны СССР) 의장을 겸임했다. 전시에는 국방회의가 중앙군사회의가 되어 소련군의 지휘 감독을 담당했고, 평시에는 군사 전략을 수립했다.[14]
- 소련 육군
- 소련 해군
- * 소련 해군 항공대
- 소련 공군
- * 소련 육군 항공대
- 국토방공군
- 전략 로켓군(전략 미사일군)
해군은 해군인민위원부(海軍人民委員部)에 소속되어 있었다.
- 북방 함대
- 발트 해 함대
- 흑해 함대
- 태평양 함대
- 북태평양 소함대
- 아무르 소함대
- 카스피 해 소함대
- 다뉴브 소함대
- 핀스크 소함대
3. 3. 군사 행정 단위
소련군은 1989년에 16개의 군관구(Военный округ)로 나뉘어 있었다. 군관구는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 군관구
- 레닌그라드 군관구
- 북캅카스 군관구
- 볼가 군관구
- 우랄 군관구
- 시베리아 군관구
- 바이칼 군관구 (자바이칼 군관구)
- 극동 군관구
- 발트 군관구
- 벨라루스 군관구 (벨로루시)
- 카르파티아 군관구
- 키예프 군관구
- 오데사 군관구
- 캅카스 군관구 (자카프카스 군관구)
- 투르키스탄 군관구
- 중앙아시아 군관구
4. 군사 교리
소련에서 군사 교리의 의미는 미국의 용어 사용과는 상당히 달랐다. 소련 국방장관 안드레이 그레치코 원수는 1975년에 이를 "전쟁의 본질과 전쟁 수행 방식, 그리고 국가와 군대의 전쟁 준비에 대한 견해 체계로서, 특정 국가와 그 무장 세력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으로 정의했다. 소련 이론가들은 군사 교리의 정치적 측면과 '군사 기술적' 측면 모두를 강조했지만, 소련의 관점에서 서방은 정치적 측면을 무시했다. 해리엇 F. 스콧(Harriet F. Scott)과 윌리엄 스콧(William Scott)에 따르면, 소련 군사 교리의 정치적 부분은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이 취한 국제적 움직임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에 기반한 군사 교리가 소련군의 근간을 이룬다. 1945년부터 스탈린주의 시대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교훈이 중시되었으나, 1953년부터 1958년의 과도기에는 핵무기 개발에 힘을 쏟게 되면서 핵전력과 재래식 전력을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소련군에는 육해공군별로 별도의 전략이 수립되지 않았고, 통합적인 전략이 수립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5. 주요 인물
레프 트로츠키는 붉은 군대의 창설자이다. 초기 붉은 군대에는 미하일 프룬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세묜 부됸니,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바실리 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등이 있었다.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세묜 티모셴코,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등의 유능한 지휘관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
5. 1. 초기(러시아 내전)
레프 트로츠키는 붉은 군대의 창설자이다. 초기 붉은 군대에는 미하일 프룬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세묜 부됸니,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바실리 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등이 있었다.
5. 2. 발전기(독소전쟁)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세묜 티모셴코,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등의 유능한 지휘관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
6. 주요 무기
소련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스탈린의 산업화 계획의 일환으로 자체 무기 산업을 구축했다.[22] 5발들이 스트리퍼 탄창을 사용하는 볼트액션식 모신나강 소총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적군의 주력 소총으로 남았다. 1930년부터 1945년까지 다양한 소련 무기 공장에서 1,700만 정이 넘는 91/30 모신나강 소총이 생산되었다.[22] 1943년에는 M91/30을 대체하기 위한 M44의 설계가 시작되어 1944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갔으며, 1948년 SKS 자동소총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생산되었다.[22]
적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적절한 기관총과 자동화기 부족에 시달렸다.[22] 7.62×54mmR탄을 사용하는 토카레프 SVT 38형과 40형 자동소총이 있었지만, 설계는 훌륭했으나 모신나강 소총만큼 많이 생산되지 않았고, 모신나강 소총을 대체하지도 못했다.[22]1945년 적군은 시모노프 SKS, 7.62×39mm 구경의 반자동 카빈총을 채택했다. 1949년에는 7.62×39mm 칼라슈니코프 AK-47 돌격소총의 생산이 시작되었는데, 곧 SKS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 1959년에는 AK-47을 현대화한 AKM이 등장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AK-47의 여러 부분을 개선했다. 1978년에는 5.45×39mm AK-74 돌격소총이 AKM을 대체했는데, AKM 부품의 51% 이상을 사용했다. 설계자들은 미국의 M-16 돌격소총에 사용되는 5.56×45mm탄에 대응하는 무기로 새로운 무기를 개발했고, 러시아군은 현재까지도 이를 사용하고 있다.[22]
7. 주요 참전 전쟁 및 전투
소련군은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은 적군의 첫 번째 해외 원정이었다. 1920년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소련의 반격은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1920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에게 저지당했다.
1934년, 몽골과 소련은 만주와 내몽골에서 증가하는 일본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방위 협력을 약속했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은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 공격을 억제했고, 소련은 극동 지역 병력을 유럽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라 폴란드 동부 영토를 침공했다.[6] 소련의 폴란드 침공은 폴란드군에게 제2전선을 열었고, 폴란드의 패배를 앞당겼다.[6]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대조국전쟁 초기,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게오르기 주코프를 비롯한 소련 사령관들은 전쟁에서 교훈을 얻어 승리를 이끌었다. 소련 정부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는 등 사기 진작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은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통해 일본과 만주국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사할린, 쿠릴 열도, 북부 조선도 공격했다.
1979년,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하여 공산 정부를 지원했다. 그러나 무자헤딘의 저항과 국내외적 문제로 인해 1989년 철수했다.
소련군은 헝가리 혁명(1956년), 프라하의 봄(1968년), 중소 국경 분쟁(1969년) 등에도 참전했다. 냉전 시대 소련은 여러 공산주의 정권과 민족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사 개입을 했다. 한국 전쟁(1950년 - 1953년), 베트남 전쟁(1961년 - 1974년) 등에도 비밀리에 참전했다.
8. 한국과의 관계
8. 1. 6.25 전쟁
8. 2. 그 외
9. 유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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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Department of Defense - Department of the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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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シア語のラテン文字表記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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