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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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은 1930년대 후반 소련 해군의 대규모 함대 건조 계획에 따라 개발된 전함으로, 4척이 기공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기술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모두 완공되지 못했다. 406mm 주포를 장착하고 16인치 포탄에 대한 방어력을 갖춘 중장갑 설계를 특징으로 했지만, 전쟁 중 자재 부족과 기술적 문제로 인해 건조가 중단되었고, 전후 전함의 전략적 가치 감소로 인해 계획이 취소되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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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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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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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 | 소련 (1935년) |
이전 등급 | 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급 (1916년) |
다음 등급 | 24 계획 |
건조 비용 | 1,180,000,000 루블 (기공된 4척 전체) |
건조 기간 | 1938년–1941년 |
계획 척수 | 15척 (건조 전에 4척 기공 후 취소) |
취소 척수 | 15척 |
1941년 개량 이후 제원 | |
함종 | 전함 |
배수량 | 표준: 만재: |
길이 | (전체 길이) |
동력 | 6 × 삼각형 형식 보일러 |
추진 | 3축, 3 × 감속 증기 터빈 |
항속 거리 | () |
무장 | 3 × 3연장 함포 6 × 2연장 함포 6 × 2연장 양용포 10 × 4연장 대공포 |
장갑 | 수선대: 갑판: 포탑: 바베트: 격벽: 함교: |
탑재기 | 4 × KOR-2 비행정 |
탑재기 설비 | 2 × 항공기 사출기 |
명칭 | |
영어 | Soviet Union |
관련 함선 |
2. 개발 및 건조 배경
러시아 혁명과 적백 내전으로 인해 신생 소련 해군에 남은 전함은 세바스토폴급(강구트급) 3척뿐이었다. 이 때문에 1934년경부터 미국에서 전함 건조를 고려하기도 했다. 1935년에 독일 전함의 건조 및 계획에 대응하여 새로운 전함 설계 작업이 시작되었으며,[1] 소련은 1930년대 후반에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설계도 또는 함선 자체를 구매하기 위해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였다.[2]
1936년 5월, 소련은 1946년까지 전함 8척, 중순양함(훗날의 크론슈타트급) 16척을 중심으로 하는 함대를 국내에서 건조하기로 한 함대정비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38년에 개정되어 1939년에 승인된 함대정비계획에서는 전함 6척, 중순양함 4척을 중심으로 하는 함대를 1947년까지 건조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이탈리아의 조. 안살도 & C.](Gio. Ansaldo & C.)]로부터 설계안을 제시받았고,[3] 1937년에는 일본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주포, 장갑, 기관 등에 대한 기술 원조 및 조달 약속을 체결하고
2. 1. 러시아 혁명과 소련 해군력 약화
2. 2. 대함대 건설 계획과 기술 협력
1930년대 중반, 이오시프 스탈린의 주도 하에 소련은 대규모 함대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35] 이 계획은 1936년 5월에 성립된 함대 정비 계획("대함대 건조 계획")에 따라 전함 15척, 중순양함 16척을 중심으로 하는 함대를 1946년까지 국내에서 건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5] 그러나 이 계획은 1939년에 전함 8척, 중순양함 4척을 1947년까지 건조하는 것으로 축소 조정되었다.이 계획의 일환으로 소련은 이탈리아와 미국으로부터 전함 설계 및 기술 지원을 받았다.[2] 이탈리아의 기준 배수량 42,000톤에 16인치(406 mm) 주포 9문을 장착한 함선을 제안했으며,[3] 미국의 깁스 & 콕스](Gibbs & Cox)]는 일반적인 전함 설계와 함께, 최대 30대의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는 비행 갑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설계 4가지를 제공했다.[4]
2. 3. 대숙청과 설계 지연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 이후, 소련 해군에 남은 전함은 「세바스토폴」급 3척뿐이었다.[35] 1934년경부터 미국에서 건조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936년 5월 대함대 건조 계획에 의해 1946년까지 전함 15척, 중순양함 16척을 국내에서 건조할 예정이었다.[35] 1939년 승인된 계획에서는 전함 8척, 중순양함 4척을 1947년까지 건조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이탈리아 안살도 사에서 설계안을 제시했고, 1937년 미국에 기술 원조, 조달 약속을 받아 깁스 & 콕스 사와 협의했다. 그러나, 미국의 거부와 설계 비용 지불 지연으로 협상은 중단되었다. 1936년부터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조선 기술자, 엔지니어들이 체포, 투옥되었다.[35] 설계 책임자가 B. 치리킨으로 교체되어 1937년 10월 15일 설계가 완료되었다.[35]
1938년 제3차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건조 계획은 1939년 6월 13일 승인되었다.[35] 1번함 「소비에츠키 소유즈」 건조는 1938년 7월 15일 시작되었다.[35]
3. 설계 및 특징
비토리오 베네토급의 영향을 받은 장선수루형 선체로, 전장 271.5m, 전폭 38.92m의 대형 선체였다.[1] 함수는 경사진 클리퍼 바우 형태였으나, 킹 조지 5세급과 같이 파도를 헤쳐나가는 능력을 고려하여 선수 갑판의 경사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설계는 고속 성능보다는 포격 시 안정성과 방어력 확보에 중점을 둔 결과였다.[35]
함교 구조는 독일 해군의 장갑함 아드미랄 셰어와 유사한 형태였다. 함교 뒤쪽에는 2개의 굴뚝이 있었고, 그 사이 공간은 함재정 보관소로 사용되었다. 함재정 운용을 위해 2번 굴뚝 앞에 후방 마스트를 기부로 하는 크레인 1기가 설치되었다.[35]
기관은 중유 연소 고온 고압 보일러 12기와 스위스 BBC사에서 발주된 증기 터빈 3기 3축으로 구성되었다.[35] 총 201,000 마력으로 최대 속력 28노트(약 51.9km/h)를 낼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14][35] 기관 배치는 시프트 배치가 아닌, 보일러실과 터빈 기관, 보조 기계실을 앞뒤로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했다.[35]
포각 갑판 후미에는 KOR-2 비행정 2~4대를 운용할 수 있는 시설과 격납고가 설치되어 있었다.[12]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의 주포는 406mm 50구경장 B-37 1937년형 포로, 3연장 포탑 3기에 총 9문이 장착되었다.[11] 이 포는 1,108kg의 포탄을 최대 45,600m까지 발사할 수 있으며, 13,600m 거리에서 406mm 두께의 현측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16] 포탑은 -2°에서 +45°까지 회전 가능하며, 분당 1.75~2.6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포탄은 포 1문당 100발이 적재되었다. 각 주포탑에는 DM-12 12m 거리 측정기가 장착되었고, 3개의 KDP-8 사격 통제 장치로 제어되었다.[21]
부포는 152mm 57구경장 B-38 1938년형 포로, 2연장 포탑 6기에 총 12문이 장착되었다.[17] 이 포는 55kg의 포탄을 최대 23,720m(최대 약 30,000m)까지 발사할 수 있었으며, 포탑은 -5°에서 +45°까지, 선회각도는 현측장갑에 바로 놓인 것은 135도, 높은 곳에 배치된 포탑은 180도 회전 가능했다. 분당 발사 속도는 4.8~7.5발이었다. 포탄은 포 1문당 170발이 적재되었다.[35] 4개의 KDP-4t-II 사격 통제 장치가 부포를 제어했다.[21]
고사포는 100mm 56구경장 B-34 1940년형 포로, 2연장 포탑 6기에 총 12문이 장착되었다. 15.6kg의 포탄을 최대 22,241m, 고도 9,895m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포탑은 -8°에서 +85.5°까지 회전 가능했으며, 발사 속도는 분당 16발이었다. 3개의 SPN-300 안정화 사격 통제 장치가 고사포를 제어했다.[21]
기타 근접 화기로는 37mm 67구경장 70-K 1941년형 기관포가 4연장 포가 8기에 장착되었다. 이 포는 0.732kg의 포탄을 최대 8,400m, 고도 5,000m까지 발사할 수 있었으며, 분당 160~180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은 16인치 포탄에 대한 방어력을 갖춘 중장갑 설계가 적용되었다.[22] 수선흘수 부위에는 375mm에서 420mm에 달하는 두꺼운 장갑판을 10도 경사로 설치했다.[35] 선수 탄약고 부분은 420mm, 기관실 위는 375mm, 후방 탄약고 위는 380mm였다.[23] 주 장갑대는 함의 전방 탄약고 근처에서 좁아지는 것을 보상하기 위해 선수 방향으로 두꺼워지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23]
수평 방어를 위해 최상 갑판에 25mm, 주 갑판에 최대 155mm 장갑을 설치하고, 50mm 파편 방어 갑판을 추가했다.[24] 주포탑 정면은 495mm, 측면과 상부는 230m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24]
어뢰 방어를 위해 이탈리아식 프리에제식 수뢰 방어 체계를 채택했다.[35] 이는 중유로 채운 외통과 공기로 채운 내통의 이중 구조 원통을 벌지 내에 삽입하여 어뢰 공격으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높은 기술력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보다 조선 능력이 떨어지는 소련에서 건조된 소비에츠키 소유즈급이 설계대로의 수중 방어력을 발휘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선체 외부는 벌지와 접속한 이중 바닥으로 되어 있었다.[25]
소련의 장갑판 공장은 230mm보다 두꺼운 세멘테이션 장갑을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200mm보다 두꺼운 장갑판은 표면 경화 장갑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장갑판이 더 깨지기 쉬워져, 실제 전투에서 방어 수준이 저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2]
KOR-2 수상기를 2~4대 탑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함선에는 2개의 항공기 사출기가 선미에 설치되었고, 2개의 격납고가 포각 갑판 후미에 설치되어 최대 4대의 수상기를 수용할 수 있었다. 갑판 크레인은 물에서 수상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쿼터덱의 앞쪽에 설치되었다.
3. 1. 선체 및 기관
비토리오 베네토급의 영향을 받은 장선수루형 선체로, 전장 271.5m, 전폭 38.92m의 대형 선체였다.[10] 함수는 경사진 클리퍼 바우 형태였으나, 킹 조지 5세급과 같이 파도를 헤쳐나가는 능력을 고려하여 선수 갑판의 경사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설계는 고속 성능보다는 포격 시 안정성과 방어력 확보에 중점을 둔 결과였다.[35]함교 구조는 독일 해군의 장갑함 아드미랄 셰어와 유사한 형태였다. 함교 뒤쪽에는 2개의 굴뚝이 있었고, 그 사이 공간은 함재정 보관소로 사용되었다. 함재정 운용을 위해 2번 굴뚝 앞에 후방 마스트를 기부로 하는 크레인 1기가 설치되었다.[35]
기관은 중유 연소 고온 고압 보일러 12기와 스위스 BBC사에서 발주된 증기 터빈 3기 3축으로 구성되었다.[35] 총 201,000 마력으로 최대 속력 28노트(약 51.9km/h)를 낼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14][35] 기관 배치는 시프트 배치가 아닌, 보일러실과 터빈 기관, 보조 기계실을 앞뒤로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했다.[35]
포각 갑판 후미에는 KOR-2 비행정 2~4대를 운용할 수 있는 시설과 격납고가 설치되어 있었다.[12]
3. 2. 무장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의 주포는 406mm 50구경장 B-37 1937년형 포로, 3연장 포탑 3기에 총 9문이 장착되었다.[11] 이 포는 1,108kg의 포탄을 최대 45,600m까지 발사할 수 있으며, 13,600m 거리에서 406mm 두께의 현측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16] 포탑은 -2°에서 +45°까지 회전 가능하며, 분당 1.75~2.6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포탄은 포 1문당 100발이 적재되었다. 각 주포탑에는 DM-12 12m 거리 측정기가 장착되었고, 3개의 KDP-8 사격 통제 장치로 제어되었다.[21]부포는 152mm 57구경장 B-38 1938년형 포로, 2연장 포탑 6기에 총 12문이 장착되었다.[17] 이 포는 55kg의 포탄을 최대 23,720m(최대 약 30,000m)까지 발사할 수 있었으며, 포탑은 -5°에서 +45°까지, 선회각도는 현측장갑에 바로 놓인 것은 135도, 높은 곳에 배치된 포탑은 180도 회전 가능했다. 분당 발사 속도는 4.8~7.5발이었다. 포탄은 포 1문당 170발이 적재되었다.[35] 4개의 KDP-4t-II 사격 통제 장치가 부포를 제어했다.[21]
고사포는 100mm 56구경장 B-34 1940년형 포로, 2연장 포탑 6기에 총 12문이 장착되었다. 15.6kg의 포탄을 최대 22,241m, 고도 9,895m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포탑은 -8°에서 +85.5°까지 회전 가능했으며, 발사 속도는 분당 16발이었다. 3개의 SPN-300 안정화 사격 통제 장치가 고사포를 제어했다.[21]
기타 근접 화기로는 37mm 67구경장 70-K 1941년형 기관포가 4연장 포가 8기에 장착되었다. 이 포는 0.732kg의 포탄을 최대 8,400m, 고도 5,000m까지 발사할 수 있었으며, 분당 160~180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3. 3. 방어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은 16인치 포탄에 대한 방어력을 갖춘 중장갑 설계가 적용되었다.[22] 수선흘수 부위에는 375mm에서 420mm에 달하는 두꺼운 장갑판을 10도 경사로 설치했다.[35] 선수 탄약고 부분은 420mm, 기관실 위는 375mm, 후방 탄약고 위는 380mm였다.[23] 주 장갑대는 함의 전방 탄약고 근처에서 좁아지는 것을 보상하기 위해 선수 방향으로 두꺼워지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23]수평 방어를 위해 최상 갑판에 25mm, 주 갑판에 최대 155mm 장갑을 설치하고, 50mm 파편 방어 갑판을 추가했다.[24] 주포탑 정면은 495mm, 측면과 상부는 230m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24]
어뢰 방어를 위해 이탈리아식 프리에제식 수뢰 방어 체계를 채택했다.[35] 이는 중유로 채운 외통과 공기로 채운 내통의 이중 구조 원통을 벌지 내에 삽입하여 어뢰 공격으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높은 기술력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보다 조선 능력이 떨어지는 소련에서 건조된 소비에츠키 소유즈급이 설계대로의 수중 방어력을 발휘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선체 외부는 벌지와 접속한 이중 바닥으로 되어 있었다.[25]
소련의 장갑판 공장은 230mm보다 두꺼운 세멘테이션 장갑을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200mm보다 두꺼운 장갑판은 표면 경화 장갑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장갑판이 더 깨지기 쉬워져, 실제 전투에서 방어 수준이 저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2]
3. 4. 함재기
KOR-2 수상기를 2~4대 탑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함선에는 2개의 항공기 사출기가 선미에 설치되었고, 2개의 격납고가 포각 갑판 후미에 설치되어 최대 4대의 수상기를 수용할 수 있었다. 갑판 크레인은 물에서 수상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쿼터덱의 앞쪽에 설치되었다.4. 건조 과정 및 중단
1938년 8월, 소련은 총 15척의 23형 전함을 건조하는 계획을 세웠고, 1939년 8월에는 14척으로 수정했다.[26] 이 중 8척은 1942년 이전에, 나머지 6척은 1947년 이전에 기공할 예정이었다.[26]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실제로 기공된 것은 4척뿐이었다.[26] 1940년 10월 19일,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전함 건조는 중단되고 한 척은 해체, 나머지 세 척 중 한 척에만 우선순위를 두도록 결정되었다.[26]
소련의 조선 및 관련 산업은 여러 대형 선박을 동시에 건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7] 키로프급 순양함 건조에서 발생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14척의 선박 건조가 계획되었다.[27]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미콜라이우에서 건조될 예정이던 두 척은 몰로토프스크의 제402 조선소로 이전해야 했다.[27] 부품은 레닌그라드에서 제조되어 백해-발트 해 운하를 통해 몰로토프스크로 운송될 예정이었다.[27] 미콜라이우의 포탑 공장은 406mm 포를 조립할 장비가 부족했고, 프로펠러 샤프트는 1940년에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주문해야 했다.[27] 1940년에는 조선용 강철이 부족했고, 장갑판 생산에도 문제가 있었다.[27] 장갑 공장은 230mm 이상의 침탄 장갑판을 만들 수 없었고, 200mm 이상의 모든 두께에 대해 열등한 표면 경화 장갑판으로 대체해야 했다.[27]
기계 문제 역시 선박 인도일을 늦추는 요인이었다.[28] 1939년 브라운 보베리에서 ''소베츠카야 로시야''에 사용할 터빈 3기를 아르한겔스크에 인도했지만, 하르코프 터보제네레이터 공장은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전까지 단 한 개의 터빈도 완성하지 못했다.[28] 시제품 보일러 제작도 1941년 초까지 완료되지 않았다.[28]
1941년 7월 10일, 세 척의 건조 중단이 명령되었고, ''소베츠키 소유즈''는 장기 보존 상태에 들어갔다.[11] 세 척 모두 1941년 9월 10일에 공식적으로 해군 목록에서 삭제되었다.[11]
1942년 6월 1일 촬영
4. 1. 건조 계획
1938년 8월, 소련은 총 15척의 23형 전함을 건조하는 계획을 세웠고, 1939년 8월에는 14척으로 수정했다.[26] 이 중 8척은 1942년 이전에, 나머지 6척은 1947년 이전에 기공할 예정이었다.[26]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실제로 기공된 것은 4척뿐이었다.[26] 1940년 10월 19일,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전함 건조는 중단되고 한 척은 해체, 나머지 세 척 중 한 척에만 우선순위를 두도록 결정되었다.[26]소련의 조선 및 관련 산업은 여러 대형 선박을 동시에 건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7] 키로프급 순양함 건조에서 발생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14척의 선박 건조가 계획되었다.[27]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미콜라이우에서 건조될 예정이던 두 척은 몰로토프스크의 제402 조선소로 이전해야 했다.[27] 부품은 레닌그라드에서 제조되어 백해-발트 해 운하를 통해 몰로토프스크로 운송될 예정이었다.[27] 미콜라이우의 포탑 공장은 406mm 포를 조립할 장비가 부족했고, 프로펠러 샤프트는 1940년에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주문해야 했다.[27] 1940년에는 조선용 강철이 부족했고, 장갑판 생산에도 문제가 있었다.[27] 장갑 공장은 230mm 이상의 침탄 장갑판을 만들 수 없었고, 200mm 이상의 모든 두께에 대해 열등한 표면 경화 장갑판으로 대체해야 했다.[27]
기계 문제 역시 선박 인도일을 늦추는 요인이었다.[28] 1939년 브라운 보베리에서 ''소베츠카야 로시야''에 사용할 터빈 3기를 아르한겔스크에 인도했지만, 하르코프 터보제네레이터 공장은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전까지 단 한 개의 터빈도 완성하지 못했다.[28] 시제품 보일러 제작도 1941년 초까지 완료되지 않았다.[28]
1941년 7월 10일, 세 척의 건조 중단이 명령되었고, ''소베츠키 소유즈''는 장기 보존 상태에 들어갔다.[11] 세 척 모두 1941년 9월 10일에 공식적으로 해군 목록에서 삭제되었다.[11]
4. 2. 건조 문제점
소련의 조선 및 관련 산업은 1938년 이전에 톤급의 을 건조했으나, 이들조차도 많은 생산 문제에 시달렸다.[27] 그럼에도 소련 지도부는 14척의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 건조를 추진했다.상트페테르부르크와 미콜라이우에서 계획된 두 척의 건조는 기존 조선소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새로 건설된 제402 조선소가 있는 몰로토프스크로 이전해야 했다.[27] 이 두 척의 선박에 대한 부품은 레닌그라드에서 제조되어 백해-발트 해 운하를 통해 몰로토프스크로 운송되어야 했다.[27] 또한, 미콜라이우의 포탑 공장은 406mm 포를 조립하기에는 장비가 부족했고, 프로펠러 샤프트는 1940년에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주문해야 했다.[27]
1번함 "소비에츠키 소유즈"는 오르조니키제 공장에서 건조되었고, 1938년 11월 28일 2번함 "소비에츠카야 우크라이나"는 미콜라이우의 마르티 남공장(제198공장)에서, 1939년 12월 21일 3번함 "소비에츠카야 벨로루시야"는 몰로토프스크의 제402공장에서, 1940년 3월 21일 4번함 "소비에츠카야 로시야"는 몰로토프스크의 제402공장에서 기공되었다.
건조 시작 후에도, 본급에 필요한 설비와 자재의 부족은 해결되지 않았다. 1939년 초 1번함의 건조 진척도는 0.16%에 불과했다.[35] 1939년 4월에야 작업 도면과 금속 공급이 시작되었고, 오르조니키제 공장에 2기의 대형 크레인이 설치되었다.[35] 조선용 철강 생산 부족, 장갑판 생산 기술 부족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고 설계 변경이 필요했다.[35] 1번함 건조에는 1,203개의 공장이 관여했으며, 조선 능력의 65%를 요구했다.[35]
1940년에는 조선용 강철이 부족했고, 규격을 충족하지 못해 여러 배치 물량이 거부되었다. 장갑판 생산은 더욱 문제가 많았는데, 1939년에 인도된 톤 중 절반 이상이 거부되었다. 장갑 공장은 230mm 이상의 침탄 장갑판을 만들 수 없었고, 200mm 이상의 모든 두께에 대해 열등한 표면 경화 장갑판으로 대체해야 했다.[27]
프로펠러 샤프트 등 소련의 기술력 부족으로 일부 부품은 외국에 발주해야 했다. 1939년, 스위스에 발주한 1척분 3기와 예비 1기의 터빈이 납품되었고, 3기는 4번함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탑재하기 위해 몰로토프스크로 보내졌다.[35] 그러나, 나머지 1기를 바탕으로 한 터빈 국산화는 실패했다.[35]결국 3번함 "소비에츠카야 벨로루시야"는 사용되는 리벳의 품질 문제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기계 문제로 인해 선박의 인도일은 1943–1944년에서 한참 늦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1939년 브라운 보베리에서 ''소베츠카야 로시야''에 사용할 터빈 3기를 아르한겔스크에 인도했지만, 하르코프 터보제네레이터 공장은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전에 단 한 개의 터빈도 완성하지 못했다. 평가를 위해 육상에 시제품 보일러를 제작하기로 했지만, 1941년 초까지 완성되지 않아 생산 계획이 더욱 복잡해졌다.[28]
4. 3. 독소전 발발과 건조 중단
1938년 8월, 소련은 총 15척의 23형 전함 건조를 계획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실제 기공된 것은 4척에 불과했다.[26] 1940년 10월 19일,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명령에 따라 소형 선박 건조에 집중하기 위해 새로운 전함 건조는 중단되었다.[26]소련의 조선 및 관련 산업은 많은 대형 선박을 동시에 건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7]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미콜라이우의 조선소는 확장 한계에 직면했고, 제402 조선소가 있는 몰로토프스크로 건조가 이전되어야 했다.[27] 부품은 백해-발트 해 운하를 통해 운송되어야 했고, 포탑 공장은 406mm 포 조립 장비가 부족했으며, 프로펠러 샤프트는 1940년에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주문해야 했다.[27] 조선용 강철 부족과 장갑판 생산 문제도 심각했다.[27] 표면 경화 장갑판으로 대체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27]
기계 문제 역시 선박 인도 지연의 원인이 되었다.[28] 하르코프 터보제네레이터 공장은 1941년 6월 독일 침공 전까지 터빈을 완성하지 못했고, 시제품 보일러 제작도 1941년 초까지 완료되지 않았다.[28]
1941년 독소전 발발로 건조 계획은 대폭 수정이 불가피했다.[35] 건조비는 1940년 국가 예산의 3분의 1에 달했고, 건조 지연 및 자재 낭비는 심각한 문제였다.[35] 1940년 10월 19일, "소비에츠카야 벨로루시야"의 건조가 중지되었고, 자재는 레닌그라드 방위를 위한 부유 포대 건설에 전용되었다.[35] 1941년 7월 10일, 남은 3척의 건조도 중지되었고, 같은 해 9월 10일 소련 해군 선적에서 제외되었다.[35]
전쟁 종결 후, 소련은 건조 계획 재개를 검토했지만, 소베츠키 소유즈급 전함은 전쟁 중 피해와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한 자재 전용[35]으로 1945년 종전 당시 공사 완성도가 크게 후퇴했다. 특히 "소베츠카야 우크라이나"는 니콜라예프 점령 당시 독일군에 의해 크게 파손되어 복구 불능 상태가 되었다.
결국 소련은 전함 건조 계획을 포기하고, "소베츠카야 우크라이나"와 "소베츠카야 로시야"는 1947년 3월 27일 해체되었다. "소베츠키 소유즈"는 1948년 5월 29일 건조 재개가 결정되었으나, 1949년 4월 다시 건조 중지가 결정되어 해체되었다.
5. 동형함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은 소련의 문화적, 민족적, 경제적 중심인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러시아 3개 지역(혹은 국가)과 민족의 명칭,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 그 자체를 함명으로 하여 소련을 대표하는 함선이 될 예정이었다.[29]
- 소비에츠키 소유즈(소비에츠키 소유즈/Советский Союзru)는 1938년 7월 15일 레닌그라드 189번 조선소(오르조니키제)에서 기공되었으나[29], 전쟁 발발 당시 약 21.19% 완성된 상태였다. 독일군의 공습과 포격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 일부 자재가 사용되었다.[29] 종전 후 완성을 고려했으나 구식으로 간주되어 1948년 5월 29일 폐기 명령이 내려졌고, 1949년 4월까지 폐기 작업이 진행되었다.[30]
- 소비에츠카야 우크라이나(소비에츠카야 우크라이나/Советская Украинаru)는 1938년 10월 31일 미콜라이우 198번 조선소(마르티 사우스)에서 기공되어[31] 전쟁 발발 당시 17.98% 완성되었다. 1941년 8월 18일 독일군에게 점령되었고, 후퇴하는 소련군과 독일군에 의해 선체 일부가 파손되었다. 1944년 3월 17일 독일군 철수 과정에서 완전히 손실되었으며, 1947년 3월 27일 해체 명령이 내려졌다.[31]
-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소비에츠카야 로시야/Советская Россияru)는 1940년 7월 22일 402번 조선소(몰로토프스크)에서 기공되었으나[31], 전쟁 후 0.97%만 완성된 채 1947년 3월 27일 해체 명령을 받았다.[31]
- 소비에츠카야 벨로루시야(소비에츠카야 벨로루시야/Советская Белоруссияru)는 1939년 12월 21일 몰로토프스크 402번 조선소에서 기공되었지만[32], 선체 외판 리벳의 품질 문제로 1940년 10월 19일 건조가 취소되었다.[32] 자재는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한 부유 포대 건조에 사용되었다.[33]
- 소비에츠카야 그루지야 (Советская Грузияru)는 1941년 발틱 조선소에서 기공될 예정이었으나, 소련 침공으로 인해 취소되었다.[34]
6. 전후 평가 및 영향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은 소련 해군의 대함대 건조 계획의 핵심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완공되지 못하고 결국 해체되었다.[35] 전쟁 중 피해와 자원 부족으로 건조가 중단되었고, 전후에는 전함의 전략적 가치가 감소하면서 계획이 취소되었다.
1945년 종전 당시 소베츠키 소유즈는 19.5%의 공정률을 보였으나, 주포와 강재가 레닌그라드 방어에 전용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35] 소베츠카야 우크라이나는 니콜라예프가 독일군에 점령되면서 선체가 크게 손상되어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전후 소련은 전함 건조 대신 항공모함과 잠수함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소베츠키 소유즈급 전함 건조 계획은 1947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고, 스탈린의 건조 재개 지시에도 불구하고 1949년 최종적으로 해체가 결정되었다.
소베츠키 소유즈급의 설계를 바탕으로 한 개량형 전함 계획이 검토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35] 이로써 소베츠키 소유즈급은 소련 해군이 설계하고 실제로 건조한 유일한 전함으로 남게 되었지만, 미완성으로 끝난 비운의 함선이 되었다.
소베츠키 소유즈급과 함께 대함대 계획의 주축이었던 크론시타트급 중순양함 역시 건조가 중단되고 해체되었다.
7. 한국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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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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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編集部「幻の戦艦「ソヴィエツキー・ソユーズ」 ソ連専門誌が明らかにしたその素顔」『[[世界の艦船]]』447集(1992年3月号)[[海人社]] P.14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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