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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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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금선은 일제강점기에 친일 활동을 한 교육자이다.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후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 덕성여자초급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가입을 시작으로 친일 강좌, 애국금차회 참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에서 활동하며 학병 지원을 독려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등재되었다. 덕성여대 이사장을 지낸 박원국이 아들이다.

2. 생애

송금선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모교,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가입을 시작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애국금차회에 가담했다.

전시 체제 하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는 등 친일 행적을 이어갔다.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했고, 학병 지원 독려 연설 활동에 참가했다. 《매일신보》에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자랑과 의무를 느낀다”, “여학생의 생도들도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되어야 한다” 등의 발언을 남겼다.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0년 총독부의 지지로 차미리사의 뒤를 이어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고등학교 전신) 교장이 되었고, 1950년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덕성여대 이사장을 지낸 박원국이 송금선의 아들이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활동 (1893년 ~ 1937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모교와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2. 2. 친일 활동 (1937년 ~ 1945년)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전시체제 하에서 송금선의 친일 행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고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는 등으로 계속되었다. 친일 단체의 총본산격인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고,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려하는 연설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매일신보》에는 “이제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자랑과 의무를 느낀다.”라고 하였고, 이어 “여학생의 생도들도 어디까지나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종전 직전 패전이 가시화되자 본토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이 되기도 했다.

2. 3. 덕성여자실업학교 및 덕성여자초급대학 (1940년 ~ 1950년)

1940년 총독부의 지지 하에 차미리사의 뒤를 이어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고등학교의 전신) 교장이 되었고, 1950년에는 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3.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송금선은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전시체제 하에서 송금선의 친일 행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고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는 등으로 계속되었다.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과 같은 친일 단체의 총본산에 가입하였고,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려하는 연설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매일신보》에는 “이제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자랑과 의무를 느낀다.”라고 하였고, “여학생의 생도들도 어디까지나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종전 직전 패전이 가시화되자 본토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이 되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가족 관계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송금선의 가족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추가할 수 없다.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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