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스코 천황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코 천황은 고곤 천황의 첫째 황자로, 1348년 북조의 천황으로 즉위했으나, 1351년 남조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남조에 납치되어 유폐 생활을 겪었으며, 귀환 후 아들의 황태자 책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398년 사망했으며, 그의 증손자가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스코 천황은 비파 연주에 능했고, 관련 저작과 일기를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34년 출생 - 변안렬
    변안렬은 고려 말 무신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고 이성계와 함께 황산대첩에서 왜적을 격파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우왕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절했다.
  • 1334년 출생 - 하얌 우룩
    하얌 우룩은 14세기 마자파히트 왕국의 군주로, 가자 마다의 지도력 아래 왕국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으며, 그의 치세는 자바 문화의 인도화를 촉진했다.
  • 14세기 일본의 군주 - 고코마쓰 천황
    고코마쓰 천황은 남북조 시대 혼란을 종식시키고 북조 황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남북조 교대 약속을 어기고 아들에게 양위하여 비판받은 일본 제100대 천황이다.
  • 14세기 일본의 군주 - 고엔유 천황
    고엔유 천황은 북조의 천황으로서 즉위 후 신하들과 갈등을 겪었고, 아들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한 후 사망했다.
  • 1398년 사망 - 문익점
    문익점은 고려 말 문신으로,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전국에 보급하여 백성들의 의생활 향상에 기여했으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조선 시대에 참지의정부사로 추증되었다.
  • 1398년 사망 - 심효생
    심효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조선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이조전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과 함께 숙청되었다.
스코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코 천황
고타로 미야케의 스코 천황
이름스코 천황
일본어崇光天皇 (Sukō Tennō)
추존호스코인 (崇光院) 또는 스코 천황 (崇光天皇)
마스히토 (益仁) / 오키히토 (興仁)
묘호다이코묘오지 능 (大光明寺陵)
생년월일1334년 5월 25일
몰년월일1398년 1월 31일
왕조
왕가일본 황실
아버지고곤 천황
어머니산조 쇼시
자녀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고신 법친왕
스이시쓰
고조 법친왕
통치
북조 대수북조 제3대
재위 기간1348년 11월 18일 ~ 1351년 11월 26일
일본력 재위 기간조와 4년 10월 27일 ~ 간노 2년 11월 7일
즉위례1350년 2월 3일 (조와 5년 12월 26일)
시대무로마치 시대, 남북조 시대
연호조와
간노
수도교토
황거오시코지카라스마루도노 (押小路烏丸殿)
쓰치미카도히가시노토인도노 (土御門東洞院殿)
지묘인도노 (持明院殿)
섭정고곤 상황 (1348년–1351년)
쇼군아시카가 다카우지 (1338년–1358년)
간파쿠니조 요시모토 (1346년–1358년)
선대고묘
후대고코곤 천황

2. 생애

1348년 황태자로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고묘 천황의 양위로 북조의 천황이 되었다. 고곤 천황이 상황으로서 다스렸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의 경쟁(간오의 교란)이 시작되었고, 1351년 다카우지는 남조와 화의(쇼헤이 일통)했다. 이로 인해 둘로 나뉘었던 황통이 남조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스코 천황은 천황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그러나 평화는 곧 깨졌고, 1352년 남조는 교토로 진격했다. 스코 천황은 아버지 고곤 천황, 숙부 고묘 천황,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하나조노 천황의 아들) 등과 함께 남조에게 납치되어 수 년간 유폐 생활을 보냈다. 그 사이 북조 측은 고곤 천황의 차남이자 스코 천황의 동생인 이야히토 친왕을 고코곤 천황으로 추대하였다.[2]

1357년 교토로 돌아온 스코 천황은 아들 요시히토 친왕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고, 이 문제를 둘러싸고 동생 고코곤 천황과 갈등이 생겼으나, 아시카가 막부는 고코곤 천황의 아들 오히토 친왕(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황위 계승을 인정하였다.

1398년 스코 천황은 세상을 떠났고, 교토시 후시미구에 있는 ''다이코묘지노 미사사기''(大光明寺陵)에 모셔졌다. 30년 후인 1428년, 그의 종손 히코히토 친왕이 쇼코 천황의 양자로서 고하나조노 천황에 즉위하여 스코 천황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었다. 스코 천황의 혈통은 후시미노미야 가문으로 이어졌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많은 미야케(후시미노미야 계열 황족, 이른바 구 황족)가 분리되었으므로, 스코 천황은 현재 황실과 구 황족의 남계 공통 조상에 해당한다.[7]

2. 1. 출생과 즉위

1334년 5월 25일(그레고리력 6월 2일) 고곤 천황의 첫째 황자로 태어났다.[8] 어머니는 오기마치산조 킨히데의 딸인 오기마치산조 히데코이다.

1348년 황태자로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고묘 천황의 양위로 북조의 천황이 되었다.[2] 재위 중에는 간오의 교란이 격화되었고, 남조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화평인 쇼헤이 일통이 성립하자,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때 고곤 천황이 상황으로서 다스렸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의 경쟁은 시작되었고 1351년 다카우지는 남조와 화의했다. 이로 인해 둘로 나뉘었던 황통이 남조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스코 천황은 천황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쇼헤이 일통이 파탄되자, 1352년 남조는 교토로 진격했다. 스코 천황은 아버지 고곤 천황과 숙부 고묘 천황,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하나조노 천황의 아들) 등과 함께 남조에게 납치되어 수 년간 유폐 생활을 보냈다. 그 사이 북조 측은 고곤 천황의 차남으로 스코 천황의 동생인 이야히토 친왕을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고코곤 천황)[2]

2. 2. 간오의 교란과 폐위

1348년 고묘 천황의 양위로 천황이 되었으나, 1351년 간오의 교란이 일어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와 화의(쇼헤이 일통)하면서 폐위되었다.[2] 고무라카미 천황에 의해 폐위된 후, 고곤 천황, 고묘 천황, 나오히토 친왕과 함께 남조에 납치되었다.

납치에 따라 동생인 고코곤 천황이 즉위하였고, 이후 고코곤 천황과 황위를 두고 다투었으나 패배하였다. 분와 3년(1354년) 3월에는 가와치 곤고지로 옮겨졌고, 엔분 2년(1357년) 2월에 고곤인, 다다히토 친왕과 함께 귀경했다.

오안 3년(1370년) 8월, 고코곤 천황이 자신의 둘째 황자인 쓰구히토에게 양위하려 하자, 스코 천황은 자신의 첫째 황자인 에이히토의 즉위를 요구하며 대립했다. 그러나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이끄는 막부의 불개입 방침으로 인해 결국 고코곤 천황의 뜻대로 고엔유 천황이 즉위하였다.

에이토쿠 2년(1382년) 4월, 고엔유 천황이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하려 할 때, 스코 천황은 다시 에이히토 친왕의 즉위를 주장했으나,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지지로 인해 실패했다.

1398년 실의 속에 사망하였으나, 1428년 그의 증손자인 히코히토 왕이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스코 천황의 혈통이 천황가에 부활하였다.

2. 3. 남조에 의한 납치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남조와 화의하면서, 둘로 나뉘었던 황통이 남조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스코 천황은 천황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곧 깨졌고, 1352년 남조는 교토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스코 천황은 아버지 고곤 천황, 숙부 고묘 천황,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하나조노 천황의 아들)과 함께 남조에 납치되어 수년간 유폐 생활을 했다.[2] 이 때문에 다카우지는 고곤 천황의 둘째 아들인 이야히토 친왕을 천황으로 옹립했다.[2]

1354년 3월, 가나요로 옮겨진 스코 천황과 고곤 천황, 고묘 천황, 나오히토 친왕은 가와치 곤고지로 옮겨져 돗추 관조인을 행궁으로 삼았다. 같은 해 10월,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도 곤고지 돗추 마니인을 행궁으로 삼았다. 1355년에는 고묘 상황만이 교토로 돌아갔다.

1357년 2월, 남조 세력이 쇠퇴하고 강화로 기울어지자 스코 천황은 고곤 상황, 나오히토 친왕과 함께 곤고지에서의 3년 남짓한 억류 생활을 마치고 교토로 돌아온다.

2. 4. 귀환과 황위 계승 분쟁

1348년 황태자가 되었고, 같은 해 고묘 천황의 양위로 천황이 되었다. 고곤 천황이 상황으로서 다스렸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의 경쟁(간오의 교란)이 시작되었고, 1351년 다카우지는 남조와 화의(쇼헤이 일통)했다. 이로 인해 둘로 나뉘었던 황통이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에 의해 통합되었기 때문에 스코 천황은 천황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그러나 평화는 곧 깨져 1352년 남조는 교토로 진격했다. 스코 천황은 아버지 고곤 천황, 숙부 고묘 천황,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하나조노 천황의 아들) 등과 함께 남조에게 납치되어 수 년간 유폐 생활을 보냈다. 그 사이 북조 측은 고곤 천황의 차남이자 스코 천황의 동생인 이야히토 친왕을 고코곤 천황으로 추대하였다.[2]

1357년 교토로 돌아온 스코 천황은 아들 요시히토 친왕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고, 이 문제를 둘러싸고 동생 고코곤 천황과 갈등이 생겼으나, 아시카가 막부는 고코곤 천황의 아들 오히토 친왕(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황위 계승을 인정하였다.

1398년 스코 천황은 세상을 떠났지만, 30년 후인 1428년 그의 종손 히코히토 친왕이 쇼코 천황의 양자로서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하여 스코 천황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었다.

2. 5. 후시미노미야 가문과 고하나조노 천황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와 화의하면서, 둘로 나뉘었던 황통이 남조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스코 천황은 천황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그러나 평화는 곧 깨졌고, 1352년 남조는 교토로 진격했다. 스코 천황은 아버지 고곤 천황, 숙부 고묘 천황,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하나조노 천황의 아들) 등과 함께 남조에 납치되어 수 년간 유폐 생활을 보냈다.[2]

1357년 교토로 돌아온 스코 천황은 아들 요시히토 친왕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고, 이 문제를 둘러싸고 동생 고코곤 천황과 갈등이 생겼으나, 막부는 고코곤 천황의 아들 오히토 친왕(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황위 계승을 인정하였다.

1398년 스코 천황이 세상을 떠났지만, 30년 후인 1428년 그의 증손 히코히토 친왕이 쇼코 천황의 양자로서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하여 스코 천황의 바람을 이루었다. 스코 천황의 혈통은 후시미노미야 가문으로 이어졌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많은 미야케(후시미노미야 계열 황족, 이른바 구 황족)가 분리되었으므로, 스코 천황은 현재 황실과 구 황족의 남계 공통 조상에 해당한다.[7]

3. 가계도


  • 庭田(源)資子|니와타 (미나모토) 스케코일본어 (?-1394)

: 니와타 시게스케의 딸

:: 제1황자 :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1351-1416) - 초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 제1황손 : 후시미노미야 하루히토 왕 (1370-1417) - 2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 제2황손 : 고스코인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 (1372-1456) - 3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 제1증손 : 히코히토 친왕

:::: 제2증손 : 후시미노미야 사다쓰네 친왕 (1426-1474) - 4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 제2황자 : 쿄신 법친왕 (1358-1391)

  • 安福殿女御|안후쿠덴뇨고일본어
  • 궁인 : 산조노 츠보네

:: 황녀 : 즈호 여왕

:: 제3황자 : 코죠 법친왕

4. 연호


  •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의해 정통 왕조로 간주되는 남조 연호
  • * 쇼헤이

  •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의해 사칭 왕조로 간주되는 북조 연호
  • * 조와
  • * 간오



5. 평가 및 의의

스코 천황은 비파 연주와 저술에 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1. 비파 연주와 저술

스코 천황은 비파에 관한 저작을 다수 남겼으며, 일기로는 『숭력어기』, 『부지기』가 남아 있다. 간오 원년(1351년)부터 엔분 원년(1356년)까지 아버지 고곤 천황에게서 비파를 배웠고, 곤고지에서는 비곡 "양진조(楊真操)", "이시가미 류센(石上流泉)", "우에하라 이시가미 류센(上原石上流泉)"을 전수받았다. 엔분 원년(1356년) 10월 20일에는 고곤 천황에게서 최비곡인 "탁목"을 전수받았다.[8] 지묘인통에서 비파는 정통만이 습득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고곤 상황과 스코 천황은 고고곤 천황과 관계없이 스코 천황의 혈통이 정통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4] 사전 崇光天皇 講談社
[5] 서적 尊皇攘夷―水戸学の四百年
[6] 웹사이트 崇光天皇 2023-01-13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논문 伏見宮貞成親王の尊号宣下
[11] 논문 伏見宮貞成親王の尊号宣下
[12] 서적 歴代御製集.3
[13]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延文3年2月9日(13580020090) 2条 https://wwwap.hi.u-t[...] 東京大学史料編纂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