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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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익점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강성 문씨의 시조이며, 목화 재배를 들여와 한국 의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들여와 고향에서 재배에 성공했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목화 재배를 보급하여 백성들의 의생활을 향상시켰다. 관직으로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조선 시대에는 참지의정부사 강성군으로 추증되었다. 목화 보급의 공로로 인해 후대 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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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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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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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상남도 산청 문익점 묘(묘소 및 신도비 포함) |
출생일 | 1329년 2월 8일 |
출생지 | 고려 경상도 진주목 강성현 |
사망일 | 1398년 6월 13일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진주목 강성현 |
국적 | 고려 |
종교 | 불교 → 유교(성리학) |
본명 | 문익첨(文益瞻) → 문익점(文益漸) |
배우자 | 사별 초배 신안 주씨 부인 재혼 계배 진양 정씨 부인 |
자녀 | 5남 3녀 |
부모 | 부: 문숙선 모: 조씨 부인 |
친인척 | 진양군 정천익(계배 장인) 척산군 이원계(셋째 사위) 문내(친손자) 문영(친손자) 완령군 원윤 이백온(외손자) |
웹사이트 | 두피디아 문익점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작위 | 고려의 경상도 김해부 사록 고려의 한림원 순유박사 고려의 한림원 사간원관 겸 좌정언 고려의 경상도 청도군 군수 고려의 전의시 주부 겸 좌사의대부 고려의 우문관 제학 겸 서연동지사 고려의 국자감 성균관 대사성 겸 서연동지사 |
재임 기간 | 1360년 5월 1일 ~ 1361년 5월 31일 (김해부 사록) 1361년 5월 31일 ~ 1363년 5월 31일 (한림원 순유박사) 1363년 5월 31일 ~ 1364년 2월 29일 (한림원 사간원관 겸 좌정언) 1374년 12월 1일 ~ 1375년 5월 31일 (청도군 군수) 1375년 5월 31일 ~ 1376년 6월 30일 (전의시 주부 겸 좌사의대부) 1388년 11월 30일 ~ 1390년 2월 28일 (우문관 제학 겸 서연동지사) 1390년 8월 1일 ~ 1390년 11월 30일 (국자감 대사성 겸 서연동지사) |
군주 | 공민왕 왕전 (김해부 사록, 한림원 순유박사, 한림원 사간원관 겸 좌정언) 우왕 왕우 (청도군 군수, 전의시 주부 겸 좌사의대부) 창왕 왕창, 공양왕 왕요 (우문관 제학 겸 서연동지사) 공양왕 왕요 (국자감 대사성 겸 서연동지사) |
섭정 | 공원태후 홍씨, 이인임 (청도군 군수) 이인임 (전의시 주부 겸 좌사의대부) 이색, 이성계 (우문관 제학 겸 서연동지사) 이성계 (국자감 대사성 겸 서연동지사) |
학력 | 1360년 문과 과거 급제 |
기타 | |
주요 업적 | 목면을 조선에 들여온 인물 |
시호 | 부민후(富民侯), 충선공(忠宣公) |
2. 주요 전력
연도 | 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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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년 | 경상도 김해부사록, 한림원 순유박사 |
1363년 | 한림원 사간원관 겸 좌정언, 원나라 사신, 덕흥군 지지 후 파면[8] |
우왕 즉위 후 | 전의감주부, 좌사의대부, 성균관대사성 |
공양왕 시대 말기 | 이성계, 정도전, 조준 일파의 전제개혁 반대로 조준 탄핵 후 관직 물러남[8] |
본(관향)은 강성(江城)으로, 남평(南平)의 동종 분파 성씨 가문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8] 초명은 '''문익첨'''(文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3. 생애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 김해부사록, 한림원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한림원 사간원관 겸 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1374년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가 되었으나, 그해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친원파 권문세족의 역공격을 받고 청도군수로 좌천되었다. 1375년 전의감주부에 임명되었고, 1376년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383년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가 세워졌다.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였으며,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가 되었다.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러 토지 제도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렸고,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는 것에 대해 병을 핑계로 반대 상소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함께 이성계파의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복귀했다. 그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고, 11월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산청으로 귀향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 자신의 학문을 펼치지 못하는 안타까움, 학문이 깊어지지 못함을 걱정하며 스스로를 삼우거사라 불렀다.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겠다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1398년에 세상을 떠났다.
3. 1. 생애 초반
문익점은 1329년 2월, 경상도(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강성현(江城縣)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은 강성(江城)이다. 문익점의 생몰년은 다소 불확실하며, 1331년생, 1400년몰로 추정하기도 한다. 처음 이름은 익첨(益瞻)이었으나 뒤에 익점(益瞻)으로 바꾸었다.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극구 사양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2살 때부터 이곡의 제자가 되어 그의 아들 이색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10]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 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었다.
3. 2. 원나라 사행길과 목화 반입
1363년 문익점은 좌정언으로 벼슬을 하던 중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귀국길에 붓통에 면화씨를 숨겨 몰래 한국으로 가져왔다. 1364년 고향 진주로 돌아와 면화 재배에 성공하였다.[10]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벼슬을 박탈당하고 강제 귀국되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0]
3. 2. 1. 원나라 왕환
1363년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는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연경에 도착한 문익점은 이를 지지했는데, 원나라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까지 진군하여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 등에게 패하였다.[10]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자신의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 명단에 멋대로 적어 올렸다는 것이다.[10]
3. 2. 2. 목화 재배 성공과 시중 보급
3년 만에 목화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라서 고민하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실을 뽑아냈다.[11] 정천익이 호승인 홍원(弘願) 등에게서 씨아와 실을 뽑는 기계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다시 시중에 보급시켰다. 이후 이를 근거로 옷과 이불을 만들게 되었다.
그가 심었던 것은 실패하였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그의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 개의 씨앗을 얻어서 다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 주면서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된 것이다. 후일 조식은 문익점의 그 공적을 기려 훗날 “일반 백성들에게 값 싸고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신농하고 후직씨 같다(衣被生民 神農 后稷氏同).”며 그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문익점은 이에 그치지 않고, 목화솜에서 실을 뜨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하고 문영(文英)은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11] 이 기구를 '물레'라고 부르는데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11]
3. 3. 관료 생활
1374년 문익점은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친원파 권문세족의 역공격을 받고 청도군수로 좌천되었다.[2] 우왕 즉위 직후 중앙정계로 복귀, 목면 보급에 대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감주부(典儀監注簿)에 임명되었다.[2] 1376년 어머니 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2] 왜구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홀로 어머니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중단하지 않았다.[2] 1383년(우왕 9)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가 세워졌다.[2]
3. 4. 생애 후반
1389년(창왕 1) 문익점은 좌간의대부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였으며,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러 토지 제도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렸다. 이때 문익점은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는 것에 대해 병을 핑계로 반대 상소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함께 이성계파의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
조준이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문익점을 탄핵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복귀했다. 그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고, 11월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산청으로 귀향했다.[1]
3. 4. 1. 신진사대부와의 갈등과 은퇴
성리학적 소양이 있었던 문익점은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였으며,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가 되었다.[1]
그러나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러, 1389년 8월 당시 토지 제도 개혁(田制改革)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다. 이때 문익점은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설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상소할 때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1] 이후 문익점은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함께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파의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1]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에 반대해 온 문익점은 사헌부 대사헌인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 등으로 조정에 복귀했다.[1] 그 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으며, 같은 해 11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산청으로 귀향했다.[1]
3. 4. 2. 은퇴와 최후
1389년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문익점은 토지 제도 개혁 문제를 두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대립할 때,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는 것에 반대하는 상소에 병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함께 이성계파의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11]
조준이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문익점을 탄핵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복귀했다. 그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고, 11월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산청으로 돌아갔다.[11]
고향으로 돌아간 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 자신의 학문을 펼치지 못하는 안타까움, 학문이 깊어지지 못함을 걱정하며 스스로를 삼우거사라 불렀다.[11]
1392년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조선을 건국했으나, 문익점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겠다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398년에 세상을 떠났다.[11] 저서로는 《삼우당실기》가 있으며,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묻혔다.
4. 사후
조선 태종 때 문익점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 동지춘추관사 겸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하였으며,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8] 1440년(세종 22)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다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았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의 도천서원(道川書院), 전라남도 장흥군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제향되었다. 산청의 사당에는 정조가 1785년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사액을 지어 내려보내기도 했다.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로 지정되었고, 이 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후대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수록되었다.
묘소는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66호 《산청문익점묘》(山淸文益漸墓)로 지정되었다.
5. 연보
- 1329년 2월: 경상도(지금의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10]
- * 1331년 출생설도 있음
- 1341년: 이곡 (이색의 아버지) 문하에서 수학[10]
- 1346년: 주씨 부인과 혼인
- 1348년: 장남 중용(中庸) 출생
- 1350년: 경덕재 (시경 전문 교육기관) 입교 후 이름을 익점으로 개명
- 같은 해: 2남 중성(中誠) 출생
- 1353년: 정동성향시(征東省鄕試)에 이색과 함께 급제
- 1360년 11월: 신경동당시에 정몽주와 함께 문과 7품에 급제, 정8품인 김해부 사록(金海府 司錄)이 됨[10]
- 같은 해: 주씨 부인 사망
- 1361년: 종7품인 순유박사(諄諭博士)에 오름
- 1362년: 정6품인 승봉랑(承奉郞)에 오름
- 1363년: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이 된 후, 4월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행차[10]
- * 3월에 행차했다는 설도 있음
- 같은 해 11월: 운남행성(베트남과 접한 중국의 남단)으로 유배
- 1366년: 유배 종료 후 원나라 대도로 복귀해 예부시랑 어사대부를 지냄
- 1367년 2월: 목화씨를 붓두껍 속에 숨겨 개경에 도착[10]
- 같은 해: 정3품인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 藝文官提學 兼 知製敎)에 올랐다가, 휴직을 청하여 귀향해서 목화 재배 시작
- 1368년: 예문관제학 겸 성균관사성(藝文館 提學 兼 成均館司成)이 됨
- 1369년: 부친상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
- 1373년: 이색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조정에 들지 못함
- 1374년: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오름 (종6품 또는 7품)
- 1375년: 정3품인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다가, 청도군수로 좌천
- 1376년: 모친상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시묘를 중단하지 않음)
- 1383년: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 건립
- 1388년: 정3품인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 書達同知事)가 됨
- 1389년 8월: 사전(私田)에 관해 이색과 우현보 등에 뜻을 같이하자, 대사헌 조준의 탄핵으로 낙향
- 1390년 8월: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이 됨
- 같은 해: 10월에 시무론 8조를 상소한 뒤, 신병을 이유로 같은 해 11월에 사임하고 산청으로 귀향
- 1394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그에게 두 차례 조정에 들기를 권유하나 두문불출하자, 3품의 벼슬을 내리고 봉록을 지급
- 1400년: 사망[10]
- * 조선실록에는 1398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었으며, 문익점의 증손 문치창의 기록에 따르면 70세까지 생존해 1400년에 사망했다고 함
6. 영향력
문익점은 3년 만에 목화 재배에 성공하였으나,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는 방법을 몰랐다.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웠다. 정천익이 호승인 홍원(弘願) 등에게서 씨아와 실을 뽑는 기계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시중에 보급시켰다.
문익점은 목화솜에서 실을 뜨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와 문영은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는데,[11] 이 기구는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물레'라고 불린다.[11]
-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선정되었다.
6. 1. 목화 전래의 영향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 개의 씨앗을 얻어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 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 주면서 심고 가꾸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다.[11]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에도 확산된 것이다. 훗날 조식은 “일반 백성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신농과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神農 后稷氏同).”며 문익점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11]
목화의 전래로 한국의 의생활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온 백성들이 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11] 목면으로 포근한 솜과 튼튼하고 땀을 잘 흡수하는 무명 옷감으로 의생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물레와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 도구 제작의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또한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 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튼튼한 무명실은 노끈, 낚싯줄, 그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 일상용품 여러 곳에 두루 쓰였다. 조선시대에 무명은 물물교환의 화폐, 즉 통화 수단으로 이용되어 세금을 걷는 기본 통화가 되었다. 또한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11]
6. 2. 공로의 인정
문익점은 고려 말 목화씨를 들여와 한국 의생활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375년(우왕 1) 조정에서는 문익점을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삼았고,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1389년(창왕 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8]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동지춘추관사 겸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 1440년(세종 22)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다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았다.[8]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의 도천서원, 전라남도 장흥군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제향되었다. 산청의 사당에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1785년 직접 도천서원의 사액을 지어 내려보내기도 했다.[8]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며 온 백성들이 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목면으로 포근한 솜과 튼튼하고 땀을 잘 흡수하는 무명 옷감으로 의생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물레와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 도구 제작의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또한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튼튼한 무명실은 노끈, 낚싯줄, 그물을 만들어서 일상용품 여러곳에 두루 다양하게 쓰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무명은 물물교환의 화폐 통화수단으로 이용되어 세금을 걷는 기본 통화가 되었으며,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의 하나였다.[8]
조선 태종 때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 여겨 후손인 문중용에게 벼슬을 내렸으며 도천서원을 세웠다. 세종 22년(1440년)에는 영의정에 추증,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는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고종 때에는 일부 유생들이 모든 백성의 만세에 이룬 공을 들어 이색과 함께 문묘에 모실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8]
7.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문극검(文克儉) |
친조부 | 문윤각(文允恪) |
외조부 | 조진주(趙珍柱) |
아버지 | 문숙선(文叔宣) |
어머니 | 함안 조씨(咸安趙氏) |
장인 | 정천익(鄭天益) |
부인 | 진주 정씨(晋州鄭氏) |
아들 | 문중용(文中庸) |
아들 | 문중성(文中誠) |
아들 | 문중실(文中實) |
아들 | 문중진(文中晉) |
아들 | 문중계(文中啓) |
손자 | 문래(文琜) |
손자 | 문영(文瑛) |
증손 | 문거룡(文巨龍) |
사위 | 이원계(태조의 이복형) |
외손자 | 이양우 |
외손자 | 이천우 |
8. 논란과 의혹
문익점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한국에 목화를 들여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목화 전래 과정에는 여러 논란과 의혹이 존재한다.
1363년 문익점은 계품사(啓稟使) 이공수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의 배원 정책으로 원나라와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고,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책봉하려 했다. 문익점이 어느 사행단에 소속되었는지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어 논란이 있다.[10] 고려사에는 이공수가 귀국할 때 임박을 서장관으로 데려왔다는 기록이 있고, 문익점이 대도에서 덕흥군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이공수를 찾았다는 기록도 있어, '흥왕사의 변' 이후 사신단에 속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0]
원나라에서의 행적과 관련하여, 문익점이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 후 벼슬을 박탈당했다는 기록이 있다.[10] 그러나 이는 반란 주모자 최유가 임의로 문익점의 이름을 명단에 올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0] 고려사는 조선 건국 이후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성계를 반대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덕흥군 관련 기록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목화 전래 과정에 대해서는,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유배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남 지방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덕흥군 사건으로 이공수와 함께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어, 유배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10] 또한,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껑에 숨겨왔다는 전설은 당시 목화가 금수 품목이 아니었다는 기록과 태조실록에 주머니에 넣어 왔다는 기록으로 인해 신빙성이 떨어진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구한 지역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나라 멸망 직전 유배지는 주로 운남성이었지만,[1] 당시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운남성까지 가는 길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과, 장사성이 지배하던 지역을 통하면 운남성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대립한다.[2] 또한, 문익점이 굳이 강남 지방에 가지 않고 대도에서 목화씨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8. 1. 소속된 사신행차단에 대한 논란
1363년 좌정언으로 벼슬을 하던 중 계품사(啓稟使)인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 당시 재위 중인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배원 정책을 시행해서 친원파를 숙청했고, 이로 인해 고려와 원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급기야 원나라 황제인 순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했다. 공민왕은 자신의 복위를 위해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고, 1363년(공민왕 12) 3월과 4월에 다시 사신들을 파견했다.[10]이때 계품사(計稟使)로 정사(正使)인 찬성사 이공수, 부사(副使)로 밀직제학 허강, 그리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좌정언 문익점을 정하여 사행단이 정해졌다. 이는 태조실록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문익점이 어느 쪽 사행단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다.[10]
고려사에 따르면 정사 이공수가 나중에 고려로 돌아올 때 임박을 서장관으로 하여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문익점이 원나라 황도인 대도에서 덕흥군의 신원을 확인하는 문제로 이공수를 찾아보았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민왕의 시해를 노린 ‘흥왕사의 변’ 이후에 출발한 사신단에 속해 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보인다.[10]
어떤 학자는 이공수를 계품사로 해서 떠난 사행단이 진정표와 하평해개적표, 2개의 표문을 가지고 떠났기 때문에 서장관이 2명이었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1363년이 아닌 1364년(공민왕 13)에 사행을 떠났다는 기록도 남아있다.[10]
8. 2. 원나라에서의 행적
1363년 좌정언으로 벼슬을 하던 중 계품사(啓稟使)인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동시에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때 연경에 도착한 그는 이를 지지했는데, 원나라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까지 진군하여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 등에게 패하였다.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강제 귀국됨과 동시에 벼슬도 박탈 조처되었다.[10]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자신의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의 명단에 멋대로 적어 올려놓았던 것이다.[10]'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배원 정책을 시행, 친원파를 숙청해서 고려와 원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원나라 황제인 순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했다. 공민왕은 자신의 복위를 위해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고, 1363년(공민왕 12) 3월과 4월에 다시 사신들을 파견했다. 이때 계품사(計稟使)로, 정사(正使)인 찬성사 이공수(李公遂), 부사(副使)로 밀직제학 허강, 그리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좌정언 문익점을 정하여 사행단이 정해졌다. 이는 태조실록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과연 문익점이 어느 쪽 사행단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사 이공수가 나중에 고려로 돌아올 때 임박을 서장관으로 하여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문익점이 원나라 황도인 대도에서 덕흥군의 신원을 확인하는 문제로 이공수를 찾아보았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민왕의 시해를 노린 ‘흥왕사의 변’ 이후에 출발한 사신단에 속해 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는 이공수를 계품사로 해서 떠난 사행단이 진정표와 하평해개적표, 2개의 표문을 가지고 떠났기 때문에 서장관이 2명이었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1363년이 아닌 1364년(갑진년, 공민왕 13)에 사행을 떠났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덕흥군에 붙었다고 이야기하는 고려사의 내용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편찬되었고, 이성계를 지지하지 않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 한 사람들의 경우 관련 내용을 누락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익점이 덕흥군에 붙었다는 이야기가 옳다고 가정해보면 고려로 순순히 돌아왔다는 것도 큰 의문이다. 당시 공민왕을 배반하고 덕흥군을 고려의 새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던 사신들은 다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러므로 문익점이 공민왕을 배반했다면 순순히 고려로 돌아올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설령 고려로 돌아왔다고 해도 문익점은 파면 이상의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익점이 고려로 돌아온 직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점이 문익점이 공민왕을 배반하였다는 기록이나 더 큰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에 모두 적혀 있다. 즉 문익점이 공민왕에 대한 충절을 지킨 충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덕흥군에 붙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또 다른 증거는 바로 이성계를 지지하는 역성혁명을 꾀하던 신진사대부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8. 3. 목화의 전래 과정
1363년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벼슬을 박탈당했다.[10] 그러나 이는 반란 주모자인 최유가 문익점의 이름을 명단에 멋대로 적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0]문익점은 귀국길에 목화씨를 가져왔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원나라에서 유배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남 지방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사에는 덕흥군 사건으로 인해 이공수와 함께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편찬이 조선 시대에 이루어졌고, 이성계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의 기록은 누락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있어 덕흥군 관련 내용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문익점이 공민왕을 배반했다면 순순히 고려로 돌아오기 어려웠을 것이고, 돌아왔더라도 파면 이상의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주자 가례를 철저히 지키려던 고지식한 사대부였던 문익점이 주군을 배반하고 새 왕을 섬기려 했을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처음에는 재배에 실패했지만, 장인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하여 1367년부터는 백성들에게 씨앗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정천익은 호승(胡僧)에게서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이를 백성들에게 보급했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는 실 잣는 기구인 물레를 발명하였다.[11]
목화가 널리 퍼지면서 백성들의 의복 재료는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었다. 조식은 문익점의 공적을 신농과 후직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껑 속에 숨겨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당시 해외 수출 금지 품목은 주로 무기나 서적이었고 목화는 금수 품목이 아니었다는 기록이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원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금령이 잘 지켜졌을 리도 없었고, 태조실록에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는 후대에 문익점의 공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8. 3. 1. 목화씨를 구한 지역 논란
문익점이 사신으로 갔을 당시 원나라는 멸망 직전이었다. 원나라 조정에서 유배지는 보통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운남성이었다.[1]문익점의 유배설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홍건적과 원나라 멸망기의 혼란한 정국을 언급한다. 원나라의 국력이 기울고 정국이 혼란하던 시기였다. 홍건적은 단순한 민란 수준을 넘어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는 부대로 성장했다. 당시 유배지였던 운남성은 홍건적이 일어나 각 구역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란이 일어난 곳까지 순탄하게 길을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2]
문익점 유배설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주원장과 세력 다툼을 벌이던 장사성이 지배한 지역을 살펴보면 운남성까지의 여정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장사성은 옛 오나라 영토를 지배하며 '오왕(吳王)'이라 자처했지만, 원나라 '승상'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의 관할권을 가진 제후국과 비슷한 지위로 원나라 조정에 협조했다. 이 때문에 항주에서 통주를 거쳐 대도까지 연결된 운하는 여전히 활용되었고, 이를 통해 쌀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대도에 공급했다. 주원장이나 다른 홍건적 세력이 지배하는 지역을 피한다면 운남까지의 여정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2]
장사성이 주원장과 대립하던 시기라면 운남까지의 여정이 물리적으로 가능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문익점이 실제로 운남까지 유배되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운남까지 유배를 갔다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강남 지방까지는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2]
8. 3. 2. 목화씨의 금수 품목 여부 논란
문익점이 굳이 강남지방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도 대도(현재의 베이징)에서 충분히 목화씨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왕정의 ‘농서’에 따르면 문익점이 대도에 가기 오래전부터 북쪽 지방에서도 목화 재배가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현재도 중국은 목화씨의 최대 산출국이지만, 그 경작지는 강남지역 위주이다. 즉, 옛날부터 대량으로 재배되던 지역에서 현재까지도 목화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익점은 특히 사신단의 서장관으로서 원나라 조정의 상황을 주시하며 분주하게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대규모로 목화 재배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닌 대도에서 우연히 목화가 눈에 들어와 이를 심어보자는 생각까지 이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9. 평가
문익점은 목화 재배 성공과 보급을 통해 일반 백성들의 의생활에 혁명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11] 이전까지 삼베를 주로 입던 백성들은 문익점 덕분에 무명으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귀족들만 사용하던 솜이불과 솜옷이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조식은 문익점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며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신농하고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神農 后稷氏同)."라는 시를 지어 칭송했다. 김육, 윤휴, 이익, 정약용 등 후대의 학자들도 문익점의 목화 보급을 높이 평가하였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껑 속에 숨겨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 반출을 엄격하게 금지했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원말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금령이 제대로 지켜졌을 리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익점이 목숨을 걸고 목화씨를 몰래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그의 공을 과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와 문영은 실 잣는 기구인 물레를 개량했다.[11] '물레'라는 이름은 발명자인 문래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11]
문익점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문화인물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선정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태조 14권, 7년(1398 戊寅 / 洪武31년) 6월 13일(丁巳)
http://sillok.histor[...]
2014-03-23
[2]
웹사이트
文益漸
https://kotobank.jp/[...]
[3]
뉴스
'문재인과 남평문씨'…나주 곳곳에 남평문씨 흔적
https://www.yna.co.k[...]
2017-05-10
[4]
웹사이트
文益漸
http://world.kbs.co.[...]
[5]
문서
배다른 8남매 중 초배 부인 주씨 소생 2남 1녀, 계배 부인 정씨 소생 3남 2녀. 8남매 그들 가운데 장남 문중용, 차남 문중성(이상 둘은 신안 주씨 소생.), 3남 문중실, 4남 문중진, 5남 문중계(이상 셋은 진양 정씨 소생.)
[6]
문서
문내 선생은 외자 이름의 두음법칙 미사용 시에는, '문래'라고도 부른다.
[7]
문서
문내(문래)의 친제.
[8]
인물
한국학중앙연구원
[9]
뉴스
‘문익점’보다 800년 앞선 백제 면직물 발견
http://www.seoul.co.[...]
[10]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1]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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