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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령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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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령 모로코는 1912년부터 1956년까지 스페인이 모로코 북부 지역을 지배했던 보호령이다. 스페인은 19세기 말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군사력이 약화되었지만, 모로코와의 지리적 근접성과 세우타, 멜리야의 존재로 북부 확장을 시도했다. 1904년 영불 협정을 통해 스페인은 모로코에서 영향력을 인정받았고, 1912년 페스 조약을 통해 보호령을 수립했다. 스페인령 모로코는 이중 권력 구조를 가졌으며, 스페인 고등판무관이 실질적인 최고 권위자로서 통치했다. 주요 사건으로는 리프 전쟁,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등이 있었으며, 1956년 모로코가 독립하면서 스페인은 이프니, 타르파야 지역을 모로코에 반환했다. 현재 모로코는 세우타와 멜리야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며 스페인과 영토 분쟁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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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령 모로코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공식 명칭스페인 보호령 모로코
현지 명칭 (스페인어)Protectorado español en Marruecos
현지 명칭 (아랍어)الحماية الإسبانية في المغرب
일반 명칭스페인령 모로코
시대전간기
지위보호국
종주국스페인
존속 기간1912년 – 1956년
성립 이벤트마드리드 조약
성립 연도1912년
성립 날짜11월 27일
소멸 이벤트모로코에 반환
소멸 연도1956년
소멸 날짜4월 7일
주요 사건리프 전쟁 (1921년 6월 – 1926년 5월)
주요 사건탕헤르 의정서
주요 사건국민주의자 봉기 (1936년 7월)
주요 사건탕헤르 점령 (1940년 6월 – 1945년 10월)
스페인령 모로코 상선기
상선기
국기모로코 국기
국기 종류상선기
모로코 보호령 문장
모로코 문장 (보호령)
국가국왕 행진곡
국가 (스페인어)Marcha Real
수도테투안
공용어스페인어
기타 사용 언어베르베르어
아랍어
테투아니 또는 하케티아
종교이슬람교 (다수)
가톨릭교
유대교
스페인령 모로코 지도
보호령의 북부 지역 (스페인령 모로코) 및 남부 지역 (주비 곶) 지도
1956년 북부 지역 지도
1956년 북부 지역 지도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보호령 하)
성립 이벤트1923년 12월 18일
군주술탄
군주 1유세프 (1912–1927)
군주 2무함마드 5세 (1927–1956)
대표고등 판무관
대표 1펠리페 알파우 멘도사 (1913년, 첫 번째)
대표 2라파엘 가르시아 발리뇨 (1951–1956, 마지막)
경제
통화스페인 페세타
이전
이전 국가알라위 술탄국
이전 국기[[File:Flag of Morocco (1666–1915).svg]]
이후
이후 국가모로코
이후 국기[[File:Flag of Morocco.svg]]
면적
면적20,948 km2

2.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분할 경쟁을 벌이던 시기에 스페인은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력이 약해지고 식민지를 상실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은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모로코 진출을 모색했다.

모로코는 지브롤터 해협에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멜리야 인근에서 철광석이 발견되는 등 풍부한 광물 자원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3] 스페인 내 자유주의 세력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모로코 진출을 옹호했다. 몬테로 리오스는 모로코 북서부가 프랑스에 넘어가면 스페인이 남북으로 포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3]

당시 유럽에서는 식민지 소유가 국가의 위신을 높인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스페인 정치인들이 모로코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4] 모로코는 스페인이 유럽 열강 간의 협력 체제에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다.

1912년 11월 27일, 스페인 보호령이 수립되는 조약 서명 장면

2. 1. 스페인-모로코 관계

스페인은 19세기 후반, 다른 유럽 국가들이 식민 제국을 확장하는 동안,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세우타멜리야 등 모로코와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모로코 북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모색했다.[3]

스페인은 유럽 열강의 영향력이 모로코에서 증대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자유당 지도자 몬테로 리오스는 모로코 북서부가 프랑스령이 될 경우, 스페인이 남북으로 프랑스에 의해 포위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략적 안보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멜리야 인근에서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모로코의 광물 자원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3]

스페인이 모로코에 개입한 또 다른 주요 동기는, 모로코가 유럽 열강 간의 협력 체제에서 스페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인식이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식민지 소유가 국가의 위신을 높인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스페인 정치인들이 모로코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도록 영향을 주었다.[4]

1900년 6월 27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파리 조약을 통해 모로코 내 영향권을 인정했지만, 경계는 명확히 하지 않았다. 1902년 프랑스는 세부 강 북쪽과 수스 강 남쪽의 모로코 전역을 스페인에 제안했으나, 스페인은 영국의 반발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1904년 4월 8일, 영국과 프랑스는 앙탕트 코르디알을 통해 모로코 내 스페인의 영향권을 인정했다.[5]

1885년 베를린 회의, 1900년 파리 조약 (1900년), 1902년, 1904년 앙탕트 코르디알, 그리고 1912년 모로코에 관한 프랑스-스페인 조약에 따른 북서 아프리카 내 스페인 영토 경계 변화


1904년 10월 3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의 영향권을 북부와 남부 지역으로 확정했다. 북부 지역은 프랑스령 알제리 국경에 미치지 못했고, 탕헤르는 국제화되었다. 남부 지역은 사기아엘함라 남쪽으로, 프랑스는 이 지역을 스페인의 배타적 지역으로 인정했다. 이 조약은 또한 스페인의 이프니 영유권을 인정했다.[5]

1905년 3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에 대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주장하고, 모로코 독립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모로코 술탄 압둘아지즈는 국제 회의를 소집했고, 알헤시라스 회의(1906년 4월 7일)에서 모로코 국립은행 설립과 참가국들의 동등한 상업적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장교가 이끄는 모로코 원주민 경찰 창설이 결정되었다.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영향권은 카보주비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대와 남부 지대로 구성되었다. 1912년 스페인이 남부 지역을 보호령의 일부로 간주하면서, 1950년대 모로코는 이 지역에 대한 법적 주장을 제기하게 되었다. 인구가 적은 카보주비는 스페인령 사하라와 함께 관리되었고, 북부 지역은 테투안을 수도로 하는 스페인 보호령으로 별도로 관리되었다. 1912년 보호령 체제가 수립되면서 카디의 이슬람 법 체계는 공식적으로 유지되었다.

2. 2. 유럽 열강과의 관계

19세기 말, 스페인은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패배하며 군사력이 약화되고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었지만, 모로코와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모로코 북부 지역으로의 확장을 모색했다.[3] 스페인은 유럽 열강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으며, 특히 모로코 북서부가 프랑스에 넘어가면 스페인이 남북으로 포위될 것을 우려했다. 또한 멜리야 근처에서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모로코의 광물 자원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3]

스페인이 모로코에 개입한 주된 이유는 모로코가 유럽 열강과의 관계에서 스페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식민지 소유가 국가의 위신을 높인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스페인 정치인들이 모로코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4]

1900년 6월 27일, 파리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 내 영향권을 인정했지만, 경계는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1902년 프랑스는 세부 강 북쪽과 수스 강 남쪽의 모로코 전역을 스페인에 제안했지만, 스페인은 영국의 반발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1904년 4월 8일, 앙탕트 코르디알의 8조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모로코 내 스페인의 영향권을 인정했다.[5]

앙탕트 코르디알프랑스어의 비밀 조항 3조와 4조에서는 스페인의 "특별 고려"를 명시하며, 스페인이 원하면 이를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술탄이 권한을 행사하지 않을 때 멜리야와 세우타에 인접한 모로코 영토는 스페인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멜리야에서 세부 강 우안 고지대까지의 해안 관리는 스페인에 위임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약소국인 스페인이 지브롤터 맞은편의 전략적 해안을 장악하도록 하여 모로코 내 영향력을 포기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1903년 이탈리아와의 협약에서 오스만 리비아에 대한 야망을 포기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 더 많은 지분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1904년 10월 3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의 영향권을 북부와 남부 지역으로 확정했다.[5] 북부 지역은 프랑스령 알제리 국경에 미치지 않았고, 탕헤르도 포함되지 않았다. 남부 지역 남쪽의 사기아엘함라는 프랑스가 스페인의 배타적 지역으로 인정했다. 이 조약은 스페인의 이프니를 인정하고 그 경계를 획정했다.

1905년 3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에 대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선전하고, 모로코 독립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모로코 술탄에게 재정적 지원을 보장했다. 알헤시라스 회의(1906년 4월 7일)의 최종 결정은 모로코 국립은행을 설립하고 참가국들에게 모로코 내 동등한 상업적 권리를 보장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장교들이 이끄는 모로코 원주민 경찰을 창설했다.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영향권 지역은 카보주비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대와 남부 지대였다. 1912년 보호령의 일부로 남부 지대를 고려한 것은 1950년대 모로코가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법적 주장을 갖게 했다. 인구 밀도가 낮은 카보주비는 스페인령 사하라와 하나의 단위로 관리되었지만, 북부 지역은 테투안을 수도로 하는 스페인 보호령으로 별도로 관리되었다.

3. 보호령 성립 (1912년)



19세기 후반, 스페인은 마그레브 지역에서 유럽 열강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스페인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모로코 북부 확장을 추진했다. 자유당 지도자 몬테로 리오스는 모로코 북서부가 프랑스에 넘어가면 스페인이 남북으로 프랑스에 포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멜리야 근처에서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모로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3]

모로코는 스페인이 유럽 열강 간의 협력 체제에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식민지가 국가의 위신을 높인다는 믿음이 있었고, 이는 스페인 정치인들이 모로코에서 적극적 정책을 추진하게 했다.[4]

1900년 6월 27일, 파리 조약과 함께 체결된 협약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 내 영향권을 인정했지만, 경계는 명확히 하지 않았다. 1902년 프랑스는 세부 강 북쪽과 수스 강 남쪽의 모로코 전 지역을 스페인에 제안했지만, 스페인은 영국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1904년 4월 8일, 앙탕트 코르디알 8조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의 영향권을 인정했다.

"특별 고려"의 내용은 비밀 조항에서 다루어졌으며, 스페인은 조약의 일부 조항을 인정해야 하지만 원한다면 "특별 고려"를 거부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1903년 이탈리아와의 협약에서 오스만 리비아에 대한 야망을 포기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 더 큰 몫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1904년 10월 3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그들의 정확한 영역을 정의하는 조약을 체결했다.[5] 스페인은 북부 지대와 남부 지대를 포함하는 영향권을 받았다. 북부 지대는 프랑스령 알제리 국경에 도달하지 않았으며, 탕헤르도 포함되지 않았다. 남부 지대는 유럽 열강이 인정한 모로코의 최남단 지역이었다. 그 남쪽 지역인 사기아엘함라는 프랑스가 스페인의 배타적 지역으로 인정했다. 이 조약은 스페인의 엑스크레임인 이프니를 인정하고 그 경계를 획정했다.[5]

1905년 3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에 대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선전하고 모로코 독립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모로코 술탄에게 재정적 지원을 보장했다. 알헤시라스 회의(1906년 4월 7일)의 최종 결정은 모로코 국립은행을 설립하고 참가국들에게 모로코 내 동등한 상업적 권리를 보장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장교들이 이끄는 모로코 원주민 경찰을 창설했다.[5]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영향권 지역은 카보주비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대와 남부 지대였다. 1912년 보호령의 일부로 남부 지대를 고려한 것은 결국 1950년대 모로코가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법적 주장을 갖게 했다.[5] 인구 밀도가 낮은 카보주비는 스페인령 사하라와 하나의 단위로 관리되었지만, 북부 지역은 테투안을 수도로 하는 스페인 보호령으로 별도로 관리되었다.

1912년 페스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보호령을 공식화했다. 스페인은 북부(리프 지역)와 남부(카보주비, 타르파야)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카디''의 이슬람 법 체계는 공식적으로 유지되었다.

3. 1. 보호령 체제

1912년부터 1956년까지 모로코의 프랑스와 스페인 보호령


1920년경 테투안(Tétouan)에 있는 스페인 고등판무관 관저; 1950년대 후반 테투안 왕궁(Royal Palace of Tétouan)에 통합됨


스페인령 모로코의 보호령 체제는 이중 권력 구조를 가졌다. 한편으로는 술탄의 위임을 받아 입법권을 행사하는 칼리파(Khalifa)가 이끄는 모로코 행정부가 있었다. 칼리파는 다히르(dahir, 법령)를 통해 입법권을 행사했으며 최고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다. 칼리파가 이끄는 이 정부는 마크젠(Makhzen)이라고 불렸으며, 대비지르(Grand Vizier)가 각 부처(장관급)를 조정했다. 장관들은 카디 알 쿠다트(qadi al-qudat, 판사장), 하부스(Habus, 수입이 종교적 목적이나 기관에 쓰이는 불가침 재산) 비지르, 아민 알 암락(amin al-amlak), 아민 알 우마나(amin al-umana, 재무장관)였다.[26] 5개 지역별로 2명의 대표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있었다. 칼리파는 스페인 정부가 제안한 두 명 중에서 술탄이 선택했다. 초대 칼리파는 무하마드 메헤디 울드 벤 이스마엘(Mohammed Mehedi Ould Ben Ismael)로, 1913년 4월 27일 테투안에서 취임했다. 모로코 독립까지 뮬레이 엘 메디(Muley el Mehdi, 1913년-1923년 재임)와 그의 아들 뮬레이 엘 하산 빈 엘 메디(Muley el Hassán bin el Mehdi) 두 명의 칼리파만 재임했다.[26]

스페인 행정부는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이 이끌었는데, 형식적으로는 칼리파에게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보호령의 최고 권위자였다. 고등판무관은 보호령 내 스페인의 정치 행동을 지휘했고, 명령과 지시는 고등판무관으로부터 나왔다. 고등판무관은 여러 부서(원주민 사무 개발 및 재정)의 지원을 받았다. 각 지역에는 원주민 사무국에 직접 보고하는 지역 통제관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지역 감사관과 현지 감사관이 있었다. 치안 유지는 레굴라레스(Regulares, "원주민" 리프족과 함께하는 스페인군)와 원주민 경찰이 담당했다. 군사적으로는 고등판무관은 세우타(Ceuta), 멜리야(Melilla), 라라슈(Larache)에 주둔한 세 명의 사령관의 지원을 받았다.[26]

스페인은 1916년 원주민 사무국 내에 보건 감독관실을 설치하여 모로코의 공중 보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스페인은 모로코인들이 스페인 치료자와 민간 요법에 대해 느끼는 불신을 극복해야 했고, 광범위한 예방 접종 캠페인을 실시하여 보호국의 위상을 높였다. 교육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코란을 암기하는 것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1913년 4월 3일에 설립된 교육위원회에 인구 교육 임무를 맡겼다. 이 위원회는 지리, 문학, 역사, 모로코 법률을 가르치기 위한 인력을 양성하고, 외교 및 영사 직업 자유 연구소에 모로코 연구 센터를 설립하고, 일부 경영 학교에 아랍어 강좌를 개설하고, 연구 확대 위원회에 아랍어 위원회를 설립했다.[26]

고등판무관과 칼리파는 테투안(Tétouan)에 있는 인접한 두 개의 궁전에 각각 거주했는데, 1956년 모로코 독립 이후 이 두 궁전은 하나의 단지로 통합되어 테투안 왕궁(Royal Palace of Tétouan)으로 재활용되었다.[26] 이슬람 법제도인 카디(Qadi)는 공식적으로 유지되었다.[26]

4. 스페인령 모로코의 통치

1912년 11월 27일, 스페인 보호령이 수립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식민 제국을 확장하던 시기에, 스페인은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패배하며 해외 식민지를 잃고 군사적 약세를 드러냈다. 그러나 모로코와의 지리적 근접성과 세우타, 멜리야의 존재로 인해, 스페인은 모로코 북부로의 확장을 추진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은 유럽 열강의 영향력이 마그레브 지역에서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스페인의 안보 확보가 개입의 가장 큰 이유였는데, 자유당 지도자 몬테로 리오스는 모로코 북서부가 프랑스에 넘어가면 스페인이 프랑스에 취약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멜리야 근처에서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모로코에 막대한 광물 자원이 있다는 믿음이 커졌다.[3]

스페인이 모로코에 개입한 또 다른 이유는 모로코가 유럽 열강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이 유럽 열강 간의 협력 체제에서 지위를 유지할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는 식민지가 국가의 위신을 높인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스페인 정치인들이 모로코에서 적극적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4]

스페인령 모로코의 통치 체제는 보호국 개념에 기반하여 이중적인 구조를 가졌다. 공식적으로는 할리파(Jalifa)가 이끄는 모로코 정부가 존재하여 술탄의 대리인으로서 법령(다히르)을 통해 입법권을 행사하고 최고 종교적 권위를 가졌다. 이 정부는 마크젠(Makzen)이라 불렸고, 대재상이 부처들을 조정했다. 할리파는 스페인 정부가 제안한 두 명 중 술탄이 선택했다. 초대 할리파는 무하마드 메흐디 올드 벤 이스마엘이었으며, 1913년 4월 27일 테투안에서 취임했다.

스페인 정권은 공식적으로 할리파에게 인정받은 고등판무관이 이끌었지만, 실제로는 보호령의 최고 권위자였다. 고등판무관은 스페인의 정치적 행동을 지휘하고 명령과 지시를 내렸다. 고등판무관은 여러 부서의 지원을 받았고, 각 지역에는 영토 관리자가 대표되었다. 질서 유지는 정규군과 원주민 경찰이 담당했다.

행정 조직은 고등판무관이 스페인의 행동 지휘를 책임지고, 모든 당국이 그에게 종속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고등판무관은 할리파의 행동에 개입하고, 정책을 결정하며, 군사 작전을 승인하거나 지시했다. 원주민 서비스 부서는 사무국에 위탁되어 카빌과의 관계, 이슬람 사법 행정 검사, 원주민 보호, 부동산 및 재산 증명, 학교 및 의료 센터 검사 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자문했다.

모로코에는 탕헤르를 제외하고 공중 보건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1916년에 원주민국 내에 보건 검사관을 설립하여 이를 개선하려 했다. 또한, 스페인은 코란 암송 중심의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1913년에 교육위원회를 설립하고, 모로코 연구 센터, 아랍어 강좌 등을 개설했다.

스페인 내전 중인 1937년에는 스페인령 모로코의 영토 조직은 고등판무관과 민사 및 군사 문제를 담당하는 중령이 담당했다.

고등판무관과 할리파는 테투안에 있는 두 개의 인접한 궁전에 거주했다. 1956년 모로코 독립 후, 이 궁전들은 테투안 왕궁(Royal Palace of Tétouan)으로 통합되었다.[26]

4. 1. 행정

보호령의 행정 체제는 공식적으로 이중 권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술탄의 위임을 받은 칼리파가 이끄는 모로코 행정부가 있었다. 칼리파는 다히르(법령)를 통해 입법권을 행사했으며 최고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다. 칼리파가 이끄는 이 정부는 마크젠(Makhzen)이라고 불렸으며, 각 부처는 대비지르(Grand Vizier)가 조정했다. 장관들은 카디 알 쿠다트(판사장), 하부스 비지르, 아민 알 암락, 아민 알 우마나(재무장관)였다. 5개 지역 각각에서 2명의 대표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있었다. 칼리파는 술탄이 스페인 정부가 제안한 두 명 중에서 선택했다. 모로코 독립까지 두 명의 칼리파만 재임했는데, 1913년부터 1923년까지 재임한 뮬레이 엘 메디와 그의 아들인 뮬레이 엘 하산 빈 엘 메디였다.[14]

스페인 행정부는 고등판무관이 이끌었는데, 형식적으로는 칼리파에게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보호령의 최고 권위자였다. 고등판무관은 보호령 내 스페인의 정치 행동을 지휘했고, 명령과 지시는 고등판무관으로부터 나왔다. 고등판무관은 여러 부서(원주민 사무 개발 및 재정)의 지원을 받았다. 각 지역에는 원주민 사무국에 직접 보고하는 지역 통제관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지역 감사관과 현지 감사관이 있었다. 치안 유지는 레굴라레스(스페인군)와 원주민 경찰이 담당했다. 군사적으로는 고등판무관은 세우타, 멜리야, 라라슈에 주둔한 세 명의 사령관의 지원을 받았다.[26]

행정 조직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직위설명
고등판무관전체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행동 방향 책임, 모든 당국(군사 당국 포함)은 고등판무관에게 종속. 칼리파의 행위에 개입, 영사가 감독관으로 활동하는 도시의 체제, 일반 정책의 결정, 군사 작전의 승인 또는 지휘.
원주민 서비스 부서총무부에 소속. 카빌족과의 관계, 이슬람 사법 행정의 검사, 원주민 보호를 위한 영사 관할권과의 관계, 부동산 및 재산 옹호와 관련된 셰리프와의 관계, 학교 및 보건소의 검사, 교육 활동에 대한 스페인 선교부 등 모든 문제에 대한 자문.


4. 2. 사법

스페인령 모로코에서는 이슬람 법(샤리아)을 기반으로 하는 카디(재판장 또는 판사) 법정이 유지되었다.[26] 이와 함께 스페인 민법 및 형법이 도입되어 적용되었다.[26]

4. 3. 교육

스페인령 모로코의 교육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으며, 주로 코란을 암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스페인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1913년 4월 3일에 교육 위원회를 설립하고 인구 교육 임무를 맡겼다.[26] 이 위원회는 교육 인력을 양성하고, 지리, 문학, 역사, 모로코 법률 등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26]

이를 위해 외교 및 영사 직업 자유 연구소에 모로코 연구 센터가 설립되었고, 일부 경영 학교에는 아랍어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연구 확대 위원회에는 아랍어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4. 4. 보건

스페인은 탕헤르를 제외한 모로코에 공중 보건을 보장하기 위한 사전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함을 시정하고자 1916년 원주민 사무국 내에 보건 감독관실을 설립했다.[26] 스페인은 모로코인들이 스페인 치료사와 민간 요법에 대해 느끼는 불신을 극복해야 했으며, 보호령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광범위한 예방 접종 캠페인을 실시했다.[26]

5. 주요 사건 및 갈등

스페인령 모로코는 역사적으로 여러 중요한 사건과 갈등을 겪었다.

20세기 초, 압드 엘 크림이 이끌던 리프 공화국은 독립을 추구하며 스페인프랑스에 맞서 리프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스페인은 아누알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이는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쿠데타로 이어졌다. 결국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은 알우세마스 상륙 작전을 통해 승리하면서 리프 전쟁은 종식되었다.[6][19]

1936년,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아프리카 스페인군의 봉기로 시작되었다. 프랑코 부대의 모로코인 병사(regulares|레굴라레스es)들은 국민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20] 스페인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은 공화정부에 스페인령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프랑스와의 갈등을 우려한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20]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스페인군은 이탈리아의 침략을 구실로 탕헤르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다.[3]

5. 1. 리프 전쟁 (1921-1926)

셰프샤우엔 근처 스페인 진영 폐허


리프 전쟁 중 노획한 소총을 휴대하는 베르베르인들. 마우저 1893년형과 베르티에 카빈소총 포함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게릴라 지도자 압드 엘 크림이 이끄는 리프 공화국은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리프 지방에 존재했던 독립 국가였으나, 리프 전쟁 당시 스페인 아프리카군과 프랑스군의 합동 원정으로 진압되어 해체되었다.[6]

스페인은 1921년 7월~8월 아누알 전투에서 1만 3천 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전쟁 초반 스페인의 작전 수행에 대한 논란은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쿠데타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이는 1936년~1939년의 스페인 내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19]

1925년 알우세마스 상륙 작전의 성공 이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승리를 거두고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5. 2. 스페인 내전 (1936-1939)

스페인 내전은 1936년 공화정부에 대한 쿠데타가 부분적으로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쿠데타는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아프리카 스페인군의 봉기로 시작되었지만, 하루 이내에 스페인 본토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20] 모로코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 부대를 지휘했으며, 상당수의 모로코인 부대(regulares|레굴라레스es)를 포함한 이 부대는 국민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20]

스페인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은 반식민주의 정책을 주장하며, 프랑코의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의 모로코인 병사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하려는 의도로 공화정부에 스페인령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이 이끌던 정부는 모로코의 다른 지역을 식민 지배하던 프랑스와의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다.[20]

현지에서 모집된 무슬림 regulares|레굴라레스es는 프랑코의 가장 효과적인 군대 중 하나였다.[21] 프랑코의 승리 이후, 스페인령 모로코는 프랑코 독재 하의 스페인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유와 자치권을 누렸다.[21] 이 지역에는 경쟁 정당과 모로코 민족주의 언론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종종 스페인 정부를 비판했다.[21]

5. 3.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스페인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이탈리아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구실로 탕헤르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3]

6. 모로코 독립과 영토 반환 (1956년)

1956년 프랑스가 모로코에 대한 보호령을 종식시키자, 스페인 역시 보호령을 중단하고 새롭게 독립한 모로코 왕국에 영토를 반환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자국의 영토였던 세우타, 멜리야 등의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plazas de soberanía)와 캡 주비(Cape Juby), 이프니, 그리고 스페인령 사하라와 같은 모로코 외부의 다른 식민지는 계속 유지했다.[9]

모로코는 스페인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세우타멜리야를 포함한 모든 스페인령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특히 모로코 해방군은 스페인군과 무력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1969년 1월 5일, 모로코와 스페인은 이프니를 모로코에 할양하는 조약에 서명하면서, 이프니 전쟁 이후 지속된 영토 분쟁은 일단락되었다.[12]

년 현재, 모로코는 여전히 세우타멜리야를 자국의 불가분의 일부로 주장하며, 이들 지역을 외국의 군사 점령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모로코는 세우타멜리야의 지위를 지브롤터의 지위와 비교하기도 한다. 반면 스페인은 세우타멜리야가 수세기 동안 스페인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두 도시를 자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13]

6. 1. 이프니 전쟁 (1957-1958)

모로코 해방군이 스페인령 사하라 및 이프니를 공격했으나,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의 반격으로 1958년 타르파야 지역이 모로코에 반환되었다.[9] 이후 1969년 이프니가 모로코에 반환되었다.[12]

1956년 프랑스가 모로코에 대한 보호령을 종식했을 때, 스페인은 세우타, 멜리야 등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스페인의 영토였던 지역과 스페인령 사하라는 유지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모로코 해방군은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58년 이프니 전쟁은 시디 이프니에서 리오 데 오로까지 확대되었고, 모로코는 타르파야를 획득했으며,[9] 이프니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는 도시 자체의 주변부로 축소되었다.[10] 모로코와 스페인은 이프니 문제에 대해 1년 이상 협상을 진행했는데, 모로코는 세우타멜리야에 대한 통제권도 요구했지만 스페인은 이프니에 대한 통제권만 포기하려 했다.[11] 1969년 1월 5일 모로코와 스페인은 이프니를 모로코에 할양하는 조약에 서명했다.[12]

7. 현대의 영토 분쟁

년 현재, 모로코는 여전히 세우타멜리야를 자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로 주장하며, 이를 외국의 군사 점령하에 있다고 간주한다. 모로코는 세우타멜리야의 지위를 지브롤터의 지위와 비교하기도 한다.[13] 스페인은 세우타멜리야가 수세기 동안 스페인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두 도시를 스페인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로 간주한다.[13]

1956년 프랑스가 모로코에 대한 보호령을 종식시켰을 때, 스페인은 보호령을 중단하고 새롭게 독립한 모로코 왕국에 영토를 반환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스페인의 영토였던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세우타, 멜리야 등), 캡 주비(Cape Juby), 이프니(Ifni), 그리고 모로코 외부의 다른 식민지(예: 스페인령 사하라)는 유지했다.[9]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모로코 해방군은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58년 이프니 전쟁은 시디 이프니(Sidi Ifni)에서 리오 데 오로(Río de Oro)까지 확대되었고, 모로코는 보호령의 남부 지역인 타르파야(Tarfaya)를 획득했으며[9], 이프니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를 도시 자체의 주변부로 축소시켰다.[10] 모로코와 스페인은 이프니 문제에 대해 1년 이상 협상을 진행했는데, 모로코는 세우타멜리야에 대한 통제권도 요구했지만 스페인은 이프니에 대한 통제권만 포기하려 했다.[11] 1969년 1월 5일 모로코와 스페인은 이프니를 모로코에 할양하는 조약에 서명했다.[12]

8. 경제

스페인령 모로코의 경제는 리프 산맥의 철광산 개발과 광물 운송을 위한 협궤 철도 건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멜리야는 철광산 개발로 인해 경제 호황을 누렸다.[16] 알헤시라스 조약 체결 이후, 스페인은 광물이 풍부한 모로코 북부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광물 운송을 위한 여러 협궤 철도가 건설되었다.[16]

8. 1. 광업

리프 산맥의 철광산은 수입원 중 하나였다. 이러한 광산 개발은 멜리야의 경제 호황으로 이어졌다.[16]

8. 2. 교통

알헤시라스 조약 체결 후 스페인은 광물이 풍부한 모로코 북부 지역 개발을 시작했고, 이에 따라 광물 운송을 위해 수많은 협궤 철도가 건설되었다.[16]

참조

[1] 웹사이트 Real Decreto 1560/1997, de 10 de octubre, por el que se regula el Himno Nacional http://www.boe.es/bo[...] 1997-10-11
[2] 논문 Treaty Between France and Spain Regarding Morocco
[3] 논문 Spain and Her Moroccan Protectorate 1898 - 1927 https://www.jstor.or[...] 1975
[4] 문서
[5] 논문 Treaty Between France and Spain Concerning Morocco
[6] 간행물 Spain's African Nightmare
[7] 서적 Tres años de lucha 2015
[8] 서적 El Colonialismo español en Marruecos Ruedo Iberico
[9] 웹사이트 The Berkshire Eagle 18 Apr 1958, page 2 https://www.newspape[...] 2023-01-13
[10] 웹사이트 The Morning News 05 Mar 1958, page Page 11 https://www.newspape[...] 2023-01-13
[11] 웹사이트 The Des Moines Register 03 Jan 1969, page 5 https://www.newspape[...] 2023-01-13
[12] 웹사이트 Wisconsin State Journal 05 Jan 1969, page 7 https://www.newspape[...] 2023-01-13
[13] 서적 STATUS OF GIBRALTAR. https://www.worldcat[...] ROUTLEDGE 2021
[14] 논문 Las residencias de S.A.I. el Jalifa y S.E. el Alto Comisario en Tetuán http://simurg.biblio[...] Consejo Superior de Investigaciones Científicas, Instituto de Estudios Africanos 1948
[15] 논문 Treaty Between France and Spain Regarding Morocco
[16] 논문 Spain and Her Moroccan Protectorate 1898–1927 https://www.jstor.or[...]
[17] 문서
[18] 논문 Treaty Between France and Spain Concerning Morocco
[19] 간행물 Spain's African Nightmare
[20] 서적 Tres años de lucha 2015
[21] 서적 El Colonialismo español en Marruecos Ruedo Iberico
[22] 뉴스 Takeover Under Way In South Morocco https://www.newspape[...] United Press International 1958-04-18
[23] 뉴스 Morocco Bolsters Ifni https://www.newspape[...] United Press International 1958-03-05
[24] 뉴스 Spain to Give Up African Enclave https://www.newspape[...] The Manchester Guardian 1969-01-03
[25] 뉴스 Spain Returns Ifni to Morocco https://www.newspape[...] United Press International 1969-01-05
[26] 논문 Las residencias de S.A.I. el Jalifa y S.E. el Alto Comisario en Tetuán http://simurg.biblio[...] Consejo Superior de Investigaciones Científicas, Instituto de Estudios Africanos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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