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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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직은 무로마치 막부의 사무라이도코로 장관에 교대로 임명된 아카마츠 씨, 잇시키 씨, 교고쿠 씨, 야마나 씨의 4개 가문을 지칭한다. 1398년 아시카가 요시미츠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칠두와 3 칸레이 가문과 함께 막부의 중앙 정치에 참여했다. 오닌의 난 이후 기나이의 쟁란과 슈고의 재국화 등으로 인해 쇠퇴했으며, 각 가문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후손들이 다이묘 또는 하타모토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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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시키씨 - 사무라이도코로
사무라이도코로는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에 설치되어 사무라이를 통솔하고 군사, 경비, 치안 유지, 죄인 수감 등의 역할을 수행한 기관이다. - 잇시키씨 - 잇시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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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은 1467년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로 시작되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며,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 야마나씨 - 돗토리성
돗토리성은 일본 센고쿠 시대에 축성되어 모리 가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세력 다툼의 무대가 되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이케다 가문에 의해 확장 및 재건되었고, 현재는 히사마쓰 공원으로 정비되어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 - 아카마쓰씨 - 다케다성
다케다성은 1431년 야마나 소젠이 축성한 일본의 성으로, 교통의 요지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함락된 후 폐성되었고, 2006년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어 관광 명소가 되었다. - 아카마쓰씨 - 아카마쓰 마사노리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무로마치 시대에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쓰 가문을 재건하고 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옛 영지를 회복했으며, 막부 내에서 높은 신임을 얻고 문화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시시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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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자 | 四職 |
로마자 표기 | Sajik |
영어 표기 | Four influential posts |
개요 | |
역사적 맥락 | |
역할 및 기능 | |
중요성 |
2. 사직의 성립과 변천
무로마치 막부의 군사, 교토 시내 경찰, 징세 등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두인, 소지)은 슈고 다이묘인 아카마츠 씨, 잇시키 씨, 교고쿠 씨, 야마나 씨의 4개 가문이 교대로 맡았는데, 이들을 '''사직'''이라 불렀다.[1] 이들은 겐지를 본성으로 하였다.
사직은 1398년(오에이 5년)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제정하였으며,[1] 막부의 주요 직책으로 중앙 정치에 참여했다. 1440년(에이쿄 12년) 이후 야마나 소젠, 교고쿠 모치키요, 잇시키 노리치카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했다. 1467년(오닌 원년)부터 1477년(분메이 9년)까지 이어진 오닌의 난 때, 사직 가문은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져 싸웠다. 이후 메이오의 정변 등 혼란을 겪으며 사직은 자연 소멸했다.
2. 1. 사직의 성립
무로마치 막부의 군사 소집·지휘와 교토 시내의 경찰·징세 등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두인, 소지)에 교대로 임명된 슈고 다이묘인 아카마츠 씨, 잇시키 씨, 교고쿠 씨, 야마나 씨의 4개 가문을 '''사직'''이라고 불렀다.[1] 한편, 실제로는 이 4개 가문 외에 토키 씨(미노 슈고)와 이마가와 씨(스루가 슈고)도 종종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들까지 포함하여 '''육직'''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설도 있다. 사직과 육직은 모두 겐지를 본성으로 한다(세이와 겐지가 4개 가문, 무라카미 겐지가 1개 가문, 우다 겐지가 1개 가문).사직은 오에이 5년(1398년)에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에 의해 제정되었으며,[1] 이세 씨, 우에스기 씨, 토키 씨를 더하여 "칠두"라고 칭하고, 3 칸레이 가문(호소카와 씨,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과 함께 막부의 숙로로서 중앙 정치에 참여했다. 또한, 교토의 경찰권을 담당하기 위해 야마시로 슈고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에이쿄 12년(1440년) 이후, 야마나 소젠, 교고쿠 모치키요, 잇시키 노리치카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했다. 오닌 원년(1467년)부터 분메이 9년(1477년)까지 이어진 오닌의 난 때, 사직 중 야마나 소젠·잇시키 요시나오는 서군에, 교고쿠 모치키요·아카마츠 마사노리는 동군으로 갈라졌다. 분메이 3년(1471년) 아카마츠 마사노리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 분메이 17년(1485년)에 교고쿠 자이무네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했지만, 메이오 2년(1493년)의 메이오의 정변 이후, 기나이의 쟁란과 슈고의 재국화 등으로 인해 공석이 되어 자연 소멸했다.
2. 2. 육직(六職) 논란
무로마치 막부의 군사 소집·지휘와 교토 시내의 경찰·징세 등을 담당하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두인, 소지)에 교대로 임명된 슈고 다이묘인 아카마츠 씨, 잇시키 씨, 교고쿠 씨, 야마나 씨의 4개 가문을 가리켜 '''사직'''이라고 칭한다. 한편으로, 실제로는 이 4개 가문 외 토키 씨(미노 슈고)와 이마가와 씨(스루가 슈고)도 종종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들까지 포함하여 '''육직'''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설도 있다.[1]2. 3. 사직의 활동과 권한
사직은 오에이 5년(1398년)에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에 의해 제정되었으며[1], 이세 씨, 우에스기 씨, 토키 씨를 더하여 "칠두"라고 칭하고, 3 칸레이 가문(호소카와 씨,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과 함께 막부의 숙로로서 중앙 정치에 참여했다. 또한, 교토의 경찰권을 담당하기 위해 야마시로 슈고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에이쿄 12년(1440년) 이후, 야마나 소젠, 교고쿠 모치키요, 잇시키 노리치카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했다. 오닌 원년(1467년)부터 분메이 9년(1477년)까지 이어진 오닌의 난 때, 사 씨 중 야마나 소젠·잇시키 요시나오는 서군에, 교고쿠 모치키요·아카마츠 마사노리는 동군으로 갈라졌다. 분메이 3년(1471년) 아카마츠 마사노리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 분메이 17년(1485년)에 교고쿠 자이무네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했지만, 메이오 2년(1493년)의 메이오의 정변 이후, 기나이의 쟁란과 슈고의 재국화 등으로 인해 공석이 되어 자연 소멸했다.
2. 4. 오닌의 난과 사직의 쇠퇴
사직은 오에이 5년(1398년)에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에 의해 제정되었으며[1], 이세 씨, 우에스기 씨, 토키 씨를 더하여 "칠두"라고 칭하고, 3 칸레이 가문(호소카와 씨,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과 함께 막부의 숙로로서 중앙 정치에 참여했다. 또한, 교토의 경찰권을 담당하기 위해 야마시로 슈고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에이쿄 12년(1440년) 이후, 야마나 소젠, 교고쿠 모치키요, 잇시키 노리치카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했다. 오닌 원년(1467년)부터 분메이 9년(1477년)까지 이어진 오닌의 난 때, 사 씨 중 야마나 소젠·잇시키 요시나오는 서군에, 교고쿠 모치키요·아카마츠 마사노리는 동군으로 갈라졌다. 분메이 3년(1471년) 아카마츠 마사노리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 분메이 17년(1485년)에 교고쿠 자이무네가 사무라이도코로 두인에 취임했지만, 메이오 2년(1493년)의 메이오의 정변 이후, 기나이의 쟁란과 슈고의 재국화 등으로 인해 공석이 되어 자연 소멸했다.3. 사직 가문의 후손
무로마치 막부의 사직 가문은 아카마츠 씨, 잇시키 씨, 교고쿠 씨, 야마나 씨로, 이들은 사무라이도코로의 수장을 번갈아 맡으며 막부의 권력을 쥐었다.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 쇠퇴하여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로 성장하지 못했다. 잇시키 씨를 제외한 3개 가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에 편입되었다. 각 가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조하라.
3. 1. 아카마츠 씨
아카마츠 노리후사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에 침공해 오자 항복했고, 이후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다이묘가 되었다. 그러나 노리후사의 아들 노리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고, 전쟁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의지했지만 용서받지 못하고 자결하여 아카마츠 씨의 적류는 여기서 멸망했다. 분가는 하타모토로서 존속했고, 메이지 시대에 노리요시는 해군 군인으로서 공적을 세워 남작이 되었다. 서류인 셋쓰 아리마 씨는 구루메번 주로서 백작이 되었다.3. 2. 잇시키 씨
잇시키 요시사다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단고에 침공해 오자, 이에 맞서 싸웠으나 아케치 미쓰히데의 중개로 후지타카의 딸과 혼인하여 오다 가문에 항복했다.[1] 그러나 혼노지의 변에서 미쓰히데의 편을 들었다가 장인인 후지타카에게 토벌되었다.[1] 요시사다의 숙부 요시키요가 가독을 이었지만, 그 또한 토벌되어 잇시키 씨의 적류는 멸망했다.[1]3. 3. 교고쿠 씨
교고쿠 타카요시 시대에 에이로쿠의 변에서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옹립에 진력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었다. 타카쓰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오쓰 성을 사수했고, 차남 타카토모 또한 동군에 가담하여 세키가하라 본전에 참전했다. 전쟁 후 타카쓰구는 와카사오바마를, 타카토모는 단고미야즈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타카쓰구의 자손은 사누키마루가메번 주로서, 타카토모의 자손은 분가가 탄바미네야마번 주로서 모두 자작이 되었다.3. 4. 야마나 씨
야마나 스케토요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하시바 히데요시가 탄바에 침공해 오자 이에 항복했지만 직후에 사망했다. 가독을 이은 삼남 타카오키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로서 섬겼고, 이후 히데요리의 가신이 되었지만, 그 아들 타카오사는 오사카 전투에서 전사하여 야마나 씨의 적류는 멸망했다. 스케토요의 조카 토요쿠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섬겼고, 교다이요리아이로부터 자손은 유신 립번에 의해 탄바무라오카번 주로서 남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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