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토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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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돗토리성은 일본 센고쿠 시대에 이나바 국에 축성된 산성으로, 현재 돗토리 시 북쪽 교슈산에 위치해 있다. 1532년부터 1555년까지 야마나 씨가 건설했으며, 이후 모리 가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세력 다툼의 무대가 되었다. 1581년 히데요시는 돗토리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에도 시대에는 이케다 가문이 돗토리 번을 통치하며 성을 확장하고 재건했다. 메이지 시대에 폐성령으로 해체되었지만, 현재는 히사마쓰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2006년 일본 100명성에 선정되었다. 2006년부터 30년간 에도 시대 말기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이 진행 중이며, 2021년에는 오테몬의 목조 복원이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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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성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돗토리 성 |
원어 이름 | 鳥取城 |
다른 이름 | 구마쓰 성 구마쓰 산성 |
위치 | 돗토리, 돗토리현, 일본 |
좌표 | 35°30′26.73″N 134°14′24.0″E |
![]() | |
유형 | 일본의 성 |
건축 시기 | 1532년 - 1555년 |
철거 시기 | 1879년 |
현재 상태 | 유적 |
관리 주체 | 이케다 씨 |
주요 전투 | 돗토리 공성전 |
주석 | 일본 국가 사적 |
구조 및 특징 | |
구조 | 계곽식 평산성 |
망루 구조 | 독립식 망루형 3중 3층 (1573년, 현존하지 않음) 복합식 층탑형 2중 2층 지하 1층 (1605년 개축, 현존하지 않음) 3층 망루 (독립식 층탑형 3중 3층, 1728년 재건, 현존하지 않음) |
건축자 | 다지마 야마나 씨 |
건축 연도 | 덴분 연간 (1532년 - 1555년) |
개축자 | 깃카와 쓰네이에 미야베 게이준 이케다 나가요시 |
지배자 | 야마나 씨 깃카와 씨 미야베 씨 이케다 씨 |
폐성 연도 | 1871년 (메이지 4년) |
유적 | 석벽 해자 우물 |
문화재 | 국가 사적 |
재건된 것 | 나카시키리 문 오테 문 기보시 다리 |
국가 지정 문화재 등 데이터베이스 | |
문화재 번호 | 401, 2130 |
문화재 이름 | 돗토리 성 유적 및 다이코가하라 |
2. 역사
돗토리성은 센고쿠 시대에 이나바 현(이나바 국)에 산성으로 축성되었다.[2] 겐페이 전쟁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야시마 전투의 영웅 나스노 요이치에게 이나바 현의 슈고직을 하사했다고 전해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와하라 가게토키에게 성을 빼앗겼다. 현재 모습의 성은 야마나 씨가 1532년부터 1555년까지 건설하였다. 무로마치 시대 초기 야마나 씨는 산인 지방과 산요 지방 대부분의 슈고직을 차지했지만, 오닌의 난 이후 이나바 현에 대한 지배력은 약해졌다. 이에 호키 현(伯耆国)을 야마나 씨로부터 빼앗고 타지마 현(但馬国)을 위협하는 아마고 씨에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다.
1566년 아마고 씨는 아키 현(安芸国)의 모리 씨에게 패배했고, 이나바 현은 모리 씨, 아마고 씨의 잔당, 그리고 야마나 도요쿠니의 지휘 아래 쇠퇴하는 야마나 씨 사이의 격전지가 되었다. 1573년 야마나 씨는 본거지를 덴진야마성(이나바 현)에서 돗토리성으로 옮겼다.[3] 1575년 성은 모리 씨에게 함락되었지만, 이나바 현과 하리마 현(播磨国) 일부를 장악한 모리 씨는 오다 노부나가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577년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견하여 모리 씨를 정벌하였다.
히데요시의 원정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1581년 모리 씨는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깃카와 쓰네이에를 돗토리성에 임명하여 대응했다. 히데요시는 돗토리성을 포위 공격하여 3개월 만에 함락시켰고, 깃카와 쓰네이에는 할복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미야베 게이힌에게 성을 할당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6년 이케다 미쓰마사에게 성을 재할당했다. 이케다 미쓰마사는 돗토리성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재건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돗토리성은 1873년 육군성에 양도되었다. 1876년 돗토리 현이 시마네현에 편입되자, 육군성은 돗토리성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879년 돗토리성의 해체가 시작되었지만, 1881년 돗토리 현은 재설립되었다. 현재는 돌담 일부와 철로 보강되고 문 외부에 송곳이 박혀 공격자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문 하나만 남아 있다. 이 부지는 공원과 고등학교 부지가 되었다.[2]
돗토리성은 2006년 일본성곽협회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4] 성터는 JR 서일본 산인 본선 돗토리역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다.[2]
2. 1. 센고쿠 시대
돗토리성은 센고쿠 시대에 이나바 현(이나바 국)에 산성(山城)으로서 축성되었다.[2] 자연 지형과 방어 시설을 인공 성벽보다 더 크게 활용하여 산 자체에 성을 쌓았으며, 현재 돗토리 시 북쪽 교슈산(Kyusho)의 가파른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2]1566년 아마고 씨는 아키 현(安芸国)의 모리 씨에게 패배했고, 이나바 현은 모리 씨, 아마고 씨의 잔당, 그리고 야마나 도요쿠니의 지휘 아래 쇠퇴하는 야마나 씨 사이의 격전지가 되었다. 야마나 씨는 1573년 본거지를 덴진야마성(이나바 현)에서 돗토리성으로 옮겼다.[3]
1575년에 성은 모리 씨에게 함락되었지만, 이나바 현과 하리마 현(播磨国) 일부를 장악한 모리 씨는 급성장하는 오다 노부나가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577년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견하여 모리 씨를 정벌하였다.
히데요시는 1581년 모리 씨가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깃카와 쓰네이에를 돗토리성에 임명하여 대응하자,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돗토리성을 정면 공격하는 대신 포위 공격을 선택했다. 그는 이나바 현에서 모든 쌀과 식량을 매우 높은 가격에 매입하고, 성을 도시와 모든 보급로 및 증원군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성의 삼면에 12km 길이의 반원형 진영인 다이코가히라(太閤ヶ平)를 구축했다. 식량이 부족하고 증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3개월 만에 성은 항복했고 기카와 쓰네이에는 할복을 강요당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미야베 게이힌에게 성을 할당했다.
2. 1. 1. 이나바 국의 혼란과 돗토리 성
덴분 연간(1532년 ~ 1554년) 무렵 이나바국 슈고 야마나 노부미치가 히사마쓰 산에 산성을 축조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나바 야마나 가문과 대립하고 있던 다지마 야마나 가문의 야마나 스케토요가 축성했다는 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 명확히 성주로 확인된 인물은 다케다 다카노부가 성주로 부임하고 나서이다. 다카노부는 야마나 노부미치 계열 이나바 야마나 가문의 세력이 몰락하자, 다지마 야마나 가문의 야마나 도요히로를 옹립해 이나바 야마나 가문의 명맥을 이은 후,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이후 다지마 야마나 가문이 야마나 도요쿠니를 이나바로 보내 세를 과시하려 하자 점차 대립하게 된다. 이에 다카노부는 주고쿠 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 중인 모리 가문과 내통해 세력을 구축한다.1573년(텐쇼 원년),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 니코 잔당과 결탁한 도요쿠니가 다카노부를 토벌하기 위해 공격하여 열세에 놓이자, 다카노부는 화의를 맺고 성을 열어 주지만(니코 재흥군에 의한 도토리 성 전투), 곧 도요쿠니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이나바 야마나씨의 본거지도 도토리 성으로 옮겨졌지만, 같은 해 요시카와 모토하루에게 공격받아 도요쿠니는 항복하고, 이치바 성주인 모리 도요모토(이나바 모리씨)가 성주가 된다. 그러나 1574년(텐쇼 2년) 다시 니코 잔당에게 공격받아 항복한다.
1575년(텐쇼 3년) 게이탄 화목으로 모리씨의 세력이 도토리에 직접 미치게 되자,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니코 잔당이 도토리 성에서 물러나고 도요쿠니가 성주로 자리 잡는다.
2. 1. 2. 야마나 가문의 몰락과 모리 가문의 지배
덴분 연간(1532년 ~ 1554년) 무렵 이나바국 슈고 야마나 노부미치가 히사마쓰 산에 산성을 축조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나바 야마나 가문과 대립하고 있던 다지마 야마나 가문의 야마나 스케토요가 축성했다는 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 명확히 성주로 확인된 인물은 다케다 다카노부가 성주로 부임하고 나서이다. 다카노부는 야마나 노부미치 계열 이나바 야마나 가문의 세력이 몰락하자, 다지마 야마나 가문의 야마나 도요히로를 옹립해 이나바 야마나 가문의 명맥을 이은 후,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이후 다지마 야마나 가문이 야마나 도요쿠니를 이나바로 보내 세를 과시하려 하자 점차 대립하게 된다. 이에 다카노부는 주고쿠 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 중인 모리 가문과 내통해 세력을 구축한다.[2]1573년(텐쇼 원년), 다케다 다카노부를 토벌하기 위해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 니코 잔당과 결탁한 야마나 도요쿠니의 공격을 받아 열세에 놓인 다카노부는 화의를 맺고 성을 열어 주지만(니코 재흥군에 의한 도토리 성 전투), 곧 도요쿠니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나바 야마나씨의 본거지도 돗토리 성으로 옮겨지지만, 같은 해에 요시카와 모토하루에게 공격받아 도요쿠니는 항복하고, 이치바 성주인 모리 도요모토(이나바 모리씨)가 성주가 된다. 그러나 1574년(텐쇼 2년) 다시 니코씨 잔당에게 공격받아 항복한다.
1575년(텐쇼 3년) 게이탄 화목으로 모리씨의 세력이 돗토리에 직접 미치게 되자,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니코 잔당이 돗토리 성을 물러나고 도요쿠니가 성주로 자리 잡는다.
2. 1. 3. 하시바 히데요시의 돗토리 성 공략 (돗토리 성 갈증 작전)
1580년 오다 가문의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나바로 진군해 왔다. 3개월 간의 농성전 끝에 도요쿠니는 항복하고 오다 가문에 복속한다. 하지만, 곧 오다 가문이 물러간 후, 모리 가문이 침략해 다시 모리 가문에 항복한다. 이때 성의 수비를 위해 모리 가문에서 가신 우시오 하루시게를 파견한다. 이 무렵 야마나 도요쿠니는 이나바 슈고직을 유지했지만, 성주는 아니었다. 이후 몇 명인가 성의 수장이 교체된 끝에 1581년 음력 3월 깃카와 쓰네이에가 성주로 부임하였다. 음력 4월 야마나 도요쿠니가 오다 가문에게 밀사를 보내지만, 발각되어 하시바 히데요시에게로 쫓겨 간다. 이에 다시 하시바 히데요시는 군을 이끌고 돗토리 성을 공략한다.히데요시는 하리마 미키성 공격(미키 전투)에서 사용했던 병량 공격을 여기서도 실시했는데, 후에 '돗토리 성 갈증 작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참혹한 병량 공격이었다.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지난 번 미키 전투에서 행했던 포위전을 펼쳤다. 《신장공기》에 “아귀처럼 야윈 남녀가 성책 끝으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밖으로 나와 도움을 부르짖는다. 슬픔과 애절함이 녹아있으매 눈을 마주어 볼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7] 성주 깃카와 쓰네이에는 고심한 끝에 성을 양도하고, 할복한다.
『음덕태평기』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와카사에서 상선을 이나바로 보내 쌀을 고가에 매점매석하는 한편, 1400명의 병사가 틀어박힌 돗토리 성에 인근 농민 2000명 이상을 성에 몰아넣었다. 또한 하천과 바다를 통한 모리 측의 병량 반입도 저지했다. 이때 성에는 20일치의 병량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이 작전으로 순식간에 병량이 떨어져 기아에 빠졌다. 수주일이 지나자 성 안의 가축과 식물은 먹어 치워졌고, 4개월이 지나자 아사자가 속출했다.
1581년 10월 25일, 성주 쓰네이에는 할복했고, 그 대신 병사들은 목숨을 건진다는 조건으로 성을 열었다.
개성 후, 굶주린 병사들에게 죽이 제공되었지만, 많은 병사들이 곧 죽었다. 『신장공기』에서는 "먹은 사람은 먹고 취해 버려 절반 이상이 곧 죽어 버렸다"라고 하고 있으며, 『풍감』에서는 "죽을 많이 먹은 사람은 곧 죽어 버렸지만, 조금 먹은 사람은 문제가 없었다"라고 하고 있다.[7] 이 기록으로부터 저영양 상태에서 고영양을 섭취함으로써 저혈당이나 전해질 이상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는 리피딩 증후군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8]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년 야마나 도요쿠니는 이즈모에서 모리 가문에 쫓겨 온 아마고 가문 세력과 연합하여 다케다 다카노부를 공격했고, 다카노부는 돗토리 성을 양도하고 물러갔다. 하지만, 얼마 뒤 도요쿠니는 다카노부를 모살했다. 같은 해에 모리 가문의 깃카와 모토하루의 공격을 받고 성을 양도하였고, 성은 이치바 성주 모리 도요모토에게 주었다. 1574년 다시금 아마고 가문 세력과 연합하여 돗토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575년 모리 가문이 다시 공세를 펴 야마다 가문과 모리 가문의 화친을 맺었다. 이때, 아마고 가문 잔당세력은 돗토리 성에서 퇴거하고, 야마나 도요쿠니가 성주로 입성하였다.[3]1580년 오다 가문의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나바로 진군해 왔다. 3개월 농성전 끝에 도요쿠니는 항복하고 오다 가문에 복속한다. 하지만, 곧 오다 가문이 물러간 후, 모리 가문이 내습해 다시금 모리 가문에 항복한다. 이때 성의 수비를 위해 모리 가문에서 가신 우시오 하루시게를 파견한다. 이 무렵 야마나 도요쿠니는 이나바 슈고직을 유지했지만, 성주는 아니었다. 이후 몇 명인가 성의 수장이 교체된 끝에 1581년 음력 3월 깃카와 쓰네이에가 성주로 부임하였다. 음력 4월 야마나 도요쿠니가 오다 가문에게 밀사를 보내지만, 발각되어 하시바 히데요시에게로 쫓겨 간다. 이에 다시 하시바 히데요시는 군을 이끌고 돗토리 성을 공략한다.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지난 번 미키 전투에서 행했던 포위전을 펼쳤다. 돗토리 성의 병사들과 영민들은 식량난에 겪어야 했고, 아사자가 속출했다.《신장공기》에“아귀처럼 야윈 남녀가 성책 끝으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밖으로 나와 도움을 부르짖는다. 슬픔과 애절함이 녹아있으매 눈을 마주어 볼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 성주 깃카와 쓰네이에는 고심한 끝에 성을 양도하고, 자결한다.[3]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옛 아자이 가문의 가신으로 오미 북부의 아자이 가문 공략에 힘써준 미야베 게이준을 성주 대행으로 돗토리 성에 입성시켜 산인 지방 공략의 거점을 삼았다. 1585년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게이준은 규슈 정벌에 공적으로 이나바, 다지마 국내 5만석을 영지로 받아 정식으로 돗토리 성주에 오른다. 1596년 미야베 나가후사가 대를 이어 성주로 부임하지만, 곧이어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영지가 몰수 되었다. 대신 오미 국 미나쿠치에서 이케다 나가요시가 돗토리 번 6만석에 입봉되어 입성한다. 그리고, 돗토리 성의 산 아랫부분을 크게 확장하여 근세성곽으로 개수하였다.
히데요시는 1577년 하리마 현의 미키성과 셋쓰 현(摂津国)의 아리오카성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1580년에 은광이 있는 타지마 현을, 1581년에 하리마 현을 정복했다. 또, 호키 현을 지배하던 난죠 씨와 미마사카 현(美作国)과 비젠 현(備前国)을 지배하던 우키타 나오이에를 모리 씨로부터 이탈시켰다. 1581년 모리 씨는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깃카와 쓰네이에를 돗토리성에 임명하여 대응했다. 히데요시는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돗토리성을 정면 공격하는 대신 포위 공격을 선택했다. 그는 이나바 현에서 모든 쌀과 식량을 매우 높은 가격에 매입했다. 또한 성을 도시와 모든 보급로 및 증원군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성의 삼면에 12km 길이의 반원형 진영인 다이코가히라(太閤ヶ平)를 구축했다. 식량이 부족하고 증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3개월 만에 성은 항복했고 기카와 쓰네이에는 세푸쿠(切腹)를 강요당했다.[3]
피해 없이 성을 함락한 히데요시는 그의 장군 미야베 게이준에게 성을 할당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과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6년 이케다 미쓰마사에게 성을 재할당했다. 이나바 현과 호키 현을 지배한 돗토리 번의 다이묘로서 이케다 미쓰마사는 돗토리성을 돌담과 해자를 갖추도록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재건했다. 본래의 내성(本丸)을 포함한 성의 산악 지역은 버려졌지만, 하층부에 3층의 천수각(天守閣)이 건설되었다.[2]
미야베 게이준은 1585년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워 공식적으로 이나바와 다지마의 5만 석을 받고 정식으로 도토리 성주가 되었다. 이후에도 게이준은 규슈 평정 후 오봉행(五奉行)으로서 연서하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봉행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은퇴 후에는 오가슈(御伽衆)로서 히데요시 곁에서 일했다.
게이준 사후에는 아들 미야베 나가후사가 계승했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야베 가문은 서군에 속했고, 성주 나가후사는 이나바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성대 가로(城代家老)인 이부키 사유자에몬과 일족이 성을 지켰으나, 세키가하라 본전 종료 후 동군의 카메이 스케노리 등에게 격렬하게 공격받아 개성했다. 나가후사는 전후 개역(改易)되었다.
2. 3. 에도 시대
1617년 이케다 미쓰마사가 이나바(현재의 돗토리현 동부)와 호키(현재의 돗토리현 중서부) 32만 5천 석으로 돗토리성에 입성하여, 성을 대규모로 확장하고 성하 마을도 정비하여 현재 돗토리시의 기반을 다졌다.[2] 1632년 미쓰마사는 비젠국 오카야마번으로 영지가 바뀌었고, 대신 오카야마 번에 있던 이케다 미쓰나카가 돗토리 번으로 들어왔다. 이는 어린 미쓰나카가 산요 지방의 요지인 오카야마 번을 다스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막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미쓰나카 계열의 이케다 가문이 12대에 걸쳐 돗토리 성을 다스렸다.2. 4. 메이지 시대 이후
1873년(메이지 6년) 폐성령으로 돗토리성은 존치되어 육군성 관할이 되었고 제4군관에 속했다.[9] 1876년(메이지 9년) 돗토리현이 시마네현에 편입되자, 현청 소재지(마쓰에시) 이외에는 성이 필요없다는 관점에 따라[10] 육군성에 의해 모든 건축물이 매각되었고, 1877년(메이지 10년)부터 1879년(메이지 12년)에 걸쳐 중사절문과 부채 모양의 궁전 화장실을 남기고 해체되었다.[9] 마지막으로 철거된 것은 돗토리성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던 니노마루의 고산가이야구라였다고 한다. 유일하게 현존했던 중사절문도 1975년(쇼와 50년) 3월 강풍으로 붕괴되었지만 같은 해 가을 목조로 복원되었다.[9] 현재 천수대와 석축이 남아 있으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5]되었다. 쇼와 44년부터 쇼와 51년까지 산록 북서쪽에서 관광용 로프웨이가 운행되었다.1993년(헤이세이 5년), 돗토리성 정문 입구에 기카와 쓰네이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2006년(헤이세이 18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63번)으로 선정되었다.
2005년(헤이세이 17년) 「사적 돗토리성 유적 부속 다이코가하라 보존정비 기본계획」이 책정되었다. 이는 돗토리성을 2006년부터 30년간 51.2억엔을 들여 에도 막부 말기 모습으로 목조 복원하는 계획이다.[11] 이에 따르면, 우선 2015년까지 중노미카도오테몬 등성 루트, 하바바반쇼, 다이묘미카도, 고산가이야구라, 도헤이 등을 목조 복원할 계획이다.[11] 2011년(헤이세이 23년) 5월, 텐큐마루의 마키이시가키 수리가 완료되었다.[12][13][14] 2014년 6월, 텐큐마루 마키이시가키의 돌이 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15][16]
2019년 11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오테몬 목조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17][18] 2021년 3월 13일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19]
3. 구조
해발 263m의 구스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산성 부분과 산기슭의 텐큐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우젠노마루 등으로 구성된 평산성 부분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성곽이다. 서쪽 언덕길, 중앙 언덕길, 동쪽 언덕길 등의 능선에는 전국 시대의 유구가 많이 남아 있으며, 전국 시대부터 근세, 그리고 막말까지의 축성 기술이 하나의 성지에 남아 있는 성터이다.
번정기 돗토리성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많은 옛 그림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에도 후기 돗토리번사 오카지마 마사요시의 『돗토리부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산상의 마루(山上の丸)
천수각(天守), 차정(車井戸), 기기루(御旗櫓), 착견루(着見櫓), 다문루(多聞櫓) 등의 건물이 있었다. 동쪽에는 이의 마루(二の丸)·삼의 마루(三の丸)로 볼 수 있는 2단의 성곽이 있다. 본마루 서쪽의 한 단 아래에는 출마루(出丸)이 있으며, 하단의 오루(御櫓) 외에 마장(馬場)도 설치되어 있었다.
:* 천수각(天守)
:: 산상의 마루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다. 기원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지만, 『이나바 민담기(因幡民談記)』에 따르면 1573년(天正元年)에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가 이나바 수호소를 부세 텐진산성(布勢天神山城)에서 도토리성으로 옮겼을 때, 부세 텐진산성의 3층 천수각을 이축했다고 전해진다. 이케다 나가요시(池田長吉)가 도토리 성주가 되었을 때, 강풍으로 인한 뒤틀림을 피하기 위해 2층으로 개축했다.
:: 천수대(天守台)는 남북 10간 5척 × 동서 10간 2척의 거의 정사각형으로 성내에서 가장 큰 루대(櫓台)이다. 2층 천수각의 루대로서는 매우 대규모이며, 현존 천수각에서는 이누야마성(犬山城) 천수각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 천수대의 성벽을 보면 북쪽을 향해 쌓아 올린 부분이 명확하게 확인되며, 3층 천수각을 2층으로 개축할 때 성벽을 확장한 것이 유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천수대 중앙부에는 깊이 8척의 구멍 창고가 있다.
:: 옛 그림 등에 따르면 카키즈부키 또는 판붙임 지붕, 시타미이타하리(下見板張り) 외장이라는 한기에 배려한 구조로, 최상층 지붕 이외에는 파풍이 없는 외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천수각 남동쪽으로 돌출된 5간 × 3간·3간 × 3간의 2단의 석루에 주목하여, 도토리성 천수각은 부루(付櫓)가 수반된 복합 천수각이라는 의견이 있다. 천수대에는 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돌계단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부루를 경유하여 천수각 내부로 들어갔다는 추론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다만 『도부지(鳥府志)』나 도토리 이케다가 문서 등 여러 기록에는 부루에 대한 기록이 없고, 도토리성을 그린 옛 그림에도 부루가 그려져 있지 않다.[20] 그 반면 『도부지』에는 천수각 북동쪽에 있었던 기기루라는 루에 대한 기록이 있다.
:: 도토리성 천수각은 1692년(元禄5년)에 낙뢰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천수대의 성벽도 에도 시대 후기에 북쪽이 너비 7간에 걸쳐 팽창이 발생하여, 마키이시가키(巻石垣)로 보강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 것 같다(도토리 현립 박물관 소장 『御天守御台石垣損シノ処御絵図面』 저자 및 작성 연대 불명이지만 에도 시대 후기 작품).
:: 태평양 전쟁 중에는 천수대 위에 방공 감시소가 설치되었다. 1943년의 도토리 대지진(鳥取大震災)으로 천수대 북쪽 성벽이 무너져 현재도 수리되지 않은 채 성벽이 붕괴되어 있다.
:* 기기루(御旗櫓)
:: 『도부지』에 "천수각 북동쪽에 떡살 모양으로 돌출된 석루가 있으며, 거기에 기기루라고 불리는 루가 있었지만, 현재는 간수가 구전으로 전할 뿐,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토리성을 그린 옛 그림에는 산상의 마루의 출마루에 해당하는 장소에 2동의 단루(単櫓)가 그려져 있지만, 어느 것이 기기루인지는 루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불명확하다. 기기루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천수대의 북동부는 도토리 대지진으로 성벽이 붕괴되어 루대에 해당하는 석루도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 착견루(着見櫓)
:: 산상의 마루의 남동쪽 모서리에 있으며, 달리는 루에 의해 동쪽의 다문루와 연결되어 있었다. 천구마루 아래의 타테구라(楯蔵)와 함께 1720년(享保5년)의 이시구로 화재(石黒火事) 때 불에 타지 않고 남은 몇 안 되는 건물이었다.
:* 차정(車井戸)
:: 천수각 근처에 있으며, 게이쵸(慶長) 대개축 때 3년에 걸쳐 파였다. 차정 근처에는 천수각 봉행이 주재했던 건물도 있었다. 또한 켄포나시(ケンポ梨), 가부토마츠(兜松) 등의 거목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 하단의 오루(御櫓)
:: 산상의 마루의 출마루에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루로, 에도 초기의 그림에도 평루(平櫓)가 기록되어 있다. 이시구로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고 한다.
:* 오하코이도(御箱井戸)
:: 삼의 마루 아래, 동쪽 언덕의 성문 안에 있던 우물. 게이쵸 대개축 때 북쪽 기슭의 엔고지(円護寺)(엥고지)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길어 올렸다고 전해진다. 도부지에는 이 안에 산초어(山椒魚)(카스미산쇼우오(カスミサンショウウオ))로 보이는 이형의 것이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 우젠마루(右膳丸)
본성의 삼층망루 서쪽, 니노마루보다 한 단 아래에 있는 성곽. 성대(城代) 다카기 우젠(高木右膳)의 저택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이곳에 주둔군의 관사가 세워져 기초석 등의 유구는 파괴되었지만, 성곽 한구석에 오륜탑(五輪塔) 군, 우물, 성내 안전비(城内安全之碑)가 남아 있다.
; 산노마루(三の丸)
에도 시대 초, 이케다 나가요시 시대에는 숙소(侍屋敷)가 있었던 것 같다. 이케다 미츠나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젊은 영주의 거처와 은퇴한 영주의 거처가 되었지만, 1718년(교호 3년)에 확장 공사가 시행되어 번주의 거처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이곳을 니노마루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번주의 거처가 다시 니노마루로 옮겨진 막말에는 산노마루라는 명칭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번주 이케다 요시토쿠 시대, 분큐 연간에 에도 고이시카와에 있던 미토 도쿠가와가의 소나무 저택을 이축했기 때문에, 소나무 저택이라고도 불렸다. 산노마루는 현재 도토리현립 도토리니시 고등학교 부지가 되어 있다.
:* 달리는 망루(走櫓)
:: 현재 도토리니시 고등학교 체육관이 있던 곳에 있었던 산노마루 유일의 망루. 이곳에서는 가로(家老)들이 정무를 처리했다.
:* 북문(太鼓御門)
:: 산노마루 정면 입구의 문으로 마스가타몬(枡形門)이다. 일의 문(一の門)은 망루문(櫓門)이었고, 망루의 가로는 24m에 달하는 성내 최대급의 망루문이었다. 이 망루의 누각 위에서는 둘레가 5m나 되는 큰 북(太鼓)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이 북은 한 그루의 느티나무에서 만들어진 형제 북으로, 나와 신사(도토리현 오야마정), 미호 신사(시마네현 마쓰에시), 카로 신사(도토리시)에 보존되어 있다. 2023년 복원 완료 예정
; 마루노우치(丸の内)
현재는 도쿄 니시 고등학교 운동장과 구마쓰 공원이 된 구역은 이케다 미쓰마사 시대까지는 번주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그 후, 번주들의 저택은 내해자 바깥으로 옮겨지고, 그 대신 미곡 창고와 무기 창고가 세워지고, 마장도 설치되었다. 미곡 창고가 있었던 관계로 일부 유력한 마을 사람들도 출입이 허락되었다.
:* 중노오몬 표문 및 도야구몬
:: 1621년(겐나 7년)에 이케다 미쓰마사에 의해 창건[22]. 게이초의 대개축 이후, 오테몬으로 되었다. 10대 번주인 이케다 나리타카가 1817년(분카 14년)에 11대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13남인 오토고로(이케다 나리히사)를 양자로 맞이한 것으로부터, 외양 다이묘로서는 유일하게, 거성에 아오이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22]. 마스가타를 갖춘 복문으로 이의 문은 야구몬이었다. 번주 재성시에는 문의 문은 열리고, 번주가 에도 출부 중에는 닫혀 있었다. 1720년(교호 5년)의 대화재로 소실되었지만 같은 해에 재건되었다[22]. 1875년(메이지 8년)에 해체[22]. 표문은 2021년(레이와 3년)에 에도 말기의 모습으로 재건[22].
:: 도야구몬은 2025년(레이와 7년)에 완성 예정.
:* 구루마이도
:: 중노오몬 부근(등장한 사람이 가마나 말에서 내리는 장소 근처)에 있으며, 기와로 지붕을 덮고, 도르래로 번주의 용수를 길어 올리고 있었다. 오카지마 마사요시의 조후시나 에도 시대의 도토리 성도에 기재되어 있었지만, 오테 등성로 복원에 따른 도쿄 니시 고등학교 운동장의 발굴 조사에서 조후시나 옛 그림에 기재된 장소에서 우물 흔적이 출토되어 존재가 확인되었다. 직경은 약 1.4m, 깊이는 3m 이상으로 추정되며, 소나무 재목으로 조립된 우물틀도 출토되었다.
:* 기보주바시
:: 중노오몬을 향해 놓여 있던 다리로 오테바시에 해당한다. 이케다 미쓰마사 시대의 1621년(겐나 7년) 7월에 창건되었다. 전장 약 36m, 전폭 약 6m. 도토리 성의 오테바시로서 산킨코타이의 현관이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번령의 측량의 기점이 되고 있었다. 그 외에, 다리 위에서 달맞이 잔치가 열리거나, 단오절에는 젊은 영주가 다리 위에 진을 치고 제례를 구경하는 등의 행사가 행해졌다. 수차례의 개수·교체를 거쳐, 메이지 초기에는 도토리 성의 건물이 철거된 후에도, 1897년(메이지 30년)경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2011년(헤이세이 23년)에 『사적 도토리 성 부속 타이코가다이라 보존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가 실시된 후, 2018년(헤이세이 30년) 가을에 복원되었다. 국의 특별 사적 또는 사적으로 문화청이 인정한 근세 성곽의 목조 다리로서는 국내 최장이 된다. 또한, 번정 시대에 사용되고 있던 이 다리의 기보주는 도토리 니시 고등학교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 미나미노오몬
:: 부도관 옆에 있던 문. 유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것도 마스가타를 가진 복문이다. 최근 발견된 이케다 나가요시 시대의 옛 그림에 따르면, 이케다 나가요시 시대는 미나미노오몬이 오테였다고 한다. 이케다 미쓰마사 이후는 나라베몬으로 되어, 무사의 통행문이 되고 있었다.
:* 키타노오몬
:: 게이초 대개축 전은 오테몬이었지만, 개축 후 나라베몬으로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루노우치에 출입하는 경우는 이 문을 사용했다. 키타노오몬만 단문이었다.
:* 나카시키리몬(니시자카시타몬)
:: 도토리현립 박물관 옆의 니노마루 등로구에 있으며, 1867년(게이오 3년)에 창건되었다. 조후시 등의 에도 시대의 여러 기록이나 그림에는 이 문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오랫동안 「성의 문」으로서 시민에게 친숙해져 있었지만, 1975년(쇼와 50년) 3월에 강풍 때문에 붕괴되었다. 그 후, 거의 구태대로 복원되었다.
:* 호류인 정원
::
:: 호류인은 11대 번주인 이케다 요시히데의 미망인. 젊어서 남편을 잃은 호류인을 위로하려고 이케다 요시토쿠가 만든 정원. 호류인이 거주했던 센고텐이라고 불리는 고텐도 있었지만, 후술하는 화장실을 제외하고 철거되었다. 1907년(메이지 40년), 당시 황태자(후의 다이쇼 천황)의 산인 행계에 즈음하여 숙소로서 센고텐 자리에 진풍각이 세워졌다. 그 후, 호류인 정원은 도토리 대지진 등에 의해 황폐해졌지만, 1971년(쇼와 46년)부터 1972년(쇼와 47년)에 걸쳐 복원·정비가 이루어졌다.
:* 센고텐 화장실
:: 호류인 정원의 남쪽 구석에 남아 있는 센고텐의 일부. 호류인이 거주했던 센고텐은 이케다 요시토쿠에 의해 1863년(분큐 3년) 5월경에 착공되어, 같은 해 7월 28일에 상량되었다. 푸수와 란간에 부채 무늬가 많이 도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센고텐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화장실은 센고텐의 별채로 세워져, 호류인은 이 건물을 좋아했다고 한다. 완성 후 얼마 되지 않아 메이지 유신의 시대가 되어, 센고텐은 화장실을 남기고 철거되었다. 화장실은 수리를 받고, 현재는 다실 「호센안」으로 시민 다회 등에 대여되고 있다. 도토리 성에 남은 유일한 건축물이지만, 전술한 것처럼 후세에 수리의 손길이 들어가 있다. 자세한 수리 시기나 수리·개변의 장소·정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호류인 정원의 복원·정비가 이루어진 1971년경에 동시에 화장실도 수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3].
; 기타
현재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에도 시대의 유구이다. 산정상의 본성, 산기슭의 천구원, 이의원, 삼의원, 마루노우치 등에 많은 석축, 누각대, 건물의 초석, 우물 등이 남아 있다. 도토리 성의 개축은 에도 시대 초기 게이쵸 연간부터 막말의 카에이 연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석축을 자세히 관찰하면 "야마즈미(野面積み)→우치코미하기(打ち込みハギ)→키리코미하기(切り込みハギ)"와 같이 변천한 석축 축조 기술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의원 고삼계루(御三階櫓) 뒤편 산허리에는 에도 시대 개축 당시의 돌을 캘 채석장의 유구도 있다.
남아 있는 건조물로는 유일하게 마루노우치의 호류인 정원 한구석에 있는 센고텐 화장실이 있지만, 후세의 수리·개변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의원 아래에 나카시키리몬(니시사카시타몬)이 복원되어 있다.
산기슭에는 내호가 남아 있지만, 완전한 형태는 아니다. 도토리 성의 총구였던 야켄보리(薬研堀)의 유구는 근년까지 시내 각처에 남아 있었지만, 전후부터 헤이세이에 이르기까지의 구획 정리와 도로 확장 공사로 완전히 매립되었다.
도토리 성은 도토리 시가지를 흐르는 후쿠로가와(袋川)가 방어 라인의 하나가 되어 있으며, 성 쪽의 제방에는 대나무를 심어 적의 시야를 가리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메이지 이후 대나무 숲은 벌채되어 벚꽃으로 바뀌었지만, 도토리 시립 가와마치 부근의 후쿠로가와 제방에 대나무 숲에 의한 방어 시설이 남아 있다.
현재의 돗토리성은 도요토미 정권 시대 미야베 쓰구루・미야베 나가후사 시대의 성곽과 성벽을 기초로 대대적으로 개축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유구는 대부분 에도 시대의 유구 아래에 묻혀 있다. 직접 볼 수 있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확실한 유구로는, 덴큐마루 아래의 방패루 루대 하부가 미야베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야마즈미 성벽이다.
산상의 마루 성벽은 높은 성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2단, 3단의 성벽을 쌓아 올리는 방법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미야베 시대에 축조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천수대의 석루는 게이쵸 시대의 대개축 때 증축된 흔적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데다, 천수대 동쪽 바로 아래에서 도요토미 정권 시대의 성곽에 자주 사용되었던 삼줄무늬의 처마기와가 출토되기 때문에, 미야베 시대의 천수대가 게이쵸 시대의 대개축 때 확장되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 언덕, 중앙 언덕, 동쪽 언덕의 세 능선을 중심으로 전국 시대의 유구도 남아 있다.
; 서쪽 언덕
돗토리현립박물관 위 능선을 올라가면 산 정상의 본마루에 이른다. 미야베 시대까지는 정문 길로 이용되었으나, 에도 시대가 되면서 험준한 서쪽 언덕은 사용되지 않게 되어, 번정 시대의 돗토리성 그림에는 입구나 길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산 정상의 본마루까지 소나무 마루, 북소리 언덕, 피리 언덕, 종소리 언덕 등의 옛 봉수대 흔적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소나무 마루에는 야마나 토요쿠니 시대까지의 성주 저택이 있었고, 미야베 시대가 되어서야 이의마루로 저택이 옮겨졌다고 한다. 『돗토리부지』에 따르면 이시구로 화재 무렵까지 소나무 마루에는 화약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나무 마루, 종소리 언덕에 석루가 확인되는 외에는 능선을 평탄하게 다듬은 전국 시대의 옛 봉수대이다. 1849년( 가에이 2년)에 이의마루가 확장될 때 서쪽 언덕 옛 봉수대군의 성벽이 파헤쳐져 재활용되었다. 그 때문에 서쪽 언덕 옛 봉수대군의 성벽은 이의마루 쪽이 무너져 있다.
; 중앙 언덕
이의마루 뒷편의 하치만 신사에서 올라가는 번정 시대의 정문 길이지만, 전국 시대의 옛 봉수대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중턱에는 여우를 모신 중앙 언덕 신사라는 계장방이 전국 시대의 옛 봉수대 터에 세워져 있다. 또한 멀리 보는 초소, 넘어 보는 초소라는 두 개의 초소가 있었다. 정상 근처에는 바위를 파내어 산에서 나오는 샘물을 저장한 산복 우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 동쪽 언덕
나가타 신사 옆 계곡에서 올라가는 에도 시대의 숨겨진 길. 야마나 토요쿠니가 후세에 있던 센린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해지는 절터가 중간에 있으며, 돌길과 우물, 오륜탑 등이 남아 있다. 정상 근처 능선에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십신의 옛 봉수대가 있으며, 1573년( 덴쇼 원년)의 아마고 당의 공격을 여기서 막았다. 십신의 옛 봉수대 입구에는 오래된 성문 터가 남아 있다.
그 외에도 간야마 금산성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이나 엔고지 쪽 산허리에도 많은 옛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다. 산 정상의 본마루 바로 아래에 수많은 평탄지가 있지만, 이들은 하시바 히데요시의 돗토리성 공격 때 성 안으로 피난해 온 사람들의 주둔소 자리라고 『돗토리부지』가 전하고 있다.
4. 현대의 돗토리 성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1873년 돗토리성은 육군성에 양도되어 제4사단(第四師団)의 관할이 되었다. 1876년 돗토리 현이 시마네 현(島根県)에 편입되자, 육군성은 현청 소재지인 마쓰에(松江)를 제외한 성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돗토리성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879년 돗토리성의 해체가 시작되었지만, 돗토리 현은 1881년에 재설립되었다.[2]
현재는 돌담의 일부와, 철로 보강되고 문 외부에 송곳이 박혀 공격자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개의 문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부지는 공원과 고등학교 부지가 되었다.[2]
돗토리성은 2006년 일본성곽협회(Japan Castle Foundation)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日本100名城)으로 선정되었다.[4]
성터는 JR 서일본(JR西日本) 산인 본선(山陰本線) 돗토리역(鳥取駅)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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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取城の石垣破壊=唯一の球形、石抜か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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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いに現地着工!史跡鳥取城跡大手門の木造復元工事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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よみがえる鳥取城大手門 146年ぶり木造復元に向け着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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飢餓キャラ「かつ江さん」ネットで反響 4日で公開中止、無念の作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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