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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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일야방성대곡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며 당시 대신들과 이토 히로부미를 강하게 비판한 장지연의 사설이다. 이 글은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되었으며, 고종 황제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비판하고, 동양 삼국의 분열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널리 유포되어 한국의 일본 보호국화에 대한 저항을 대표하는 글로 평가받았으며, 장지연의 체포와 황성신문의 발행 중단으로 이어졌다. 이 사설은 대한매일신보 등 다른 신문에도 게재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민족 저항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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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 |
---|---|
개요 | |
제목 | 시일야방성대곡 |
원제 | 是日也放聲大哭 |
발표일 | 1905년 11월 20일 |
매체 | 황성신문 |
작성자 | 장지연 |
내용 | 을사조약 체결을 비판하는 논설 나라의 주권을 잃은 슬픔을 통탄하며 민족의 각성을 촉구 |
역사적 배경 | |
시대적 상황 | 을사조약 강제 체결 직후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심화 시기 |
관련 사건 | 을사조약 황성신문 폐간 |
영향 | |
사회적 영향 | 국민들의 항일 의식 고취 애국 계몽 운동 확산에 기여 |
평가 | 국권 수호 의지를 드러낸 대표적인 논설로 평가 언론의 역할과 책임 강조 |
2. 배경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지연은 을사늑약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작성, 게재하였다.
2. 1. 을사늑약 체결과 대한제국의 위기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백성들은 그가 대한제국, 청나라, 일본 제국 동양 삼국의 안녕을 주선할 것이라 믿고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환영했다. 그러나 5조약이 제출되면서 동양 삼국은 분열될 위기에 놓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본뜻이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6]고종 황제는 조약 체결에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개돼지만도 못한 정부 대신들은 일신의 영달과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겼다. 4천 년 역사와 2천만 백성을 남의 노예로 만든 외무대신 박제순 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참정대신은 정부 수석임에도 반대만 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김상헌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거나 정온처럼 할복하지도 못하고 살아남은 대신들은 황제 폐하와 2천만 동포를 볼 면목이 없다.[7]
원통하고 분하다.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가 된 동포여! 단군과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동포여, 원통하다!
일본 제국이 한국을 병합하려는 상황에서, 이 사설은 을사늑약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 작성되었다.[1] 이 조약으로 한국은 일본 통감의 간접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2] 사설은 조약과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 그리고 조약 제정에 크게 기여한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했다.[1] 이 사설은 널리 유포되었으며, 일본 보호국 수립에 대한 한국의 반응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3][4][1]
이 글은 원래 국한문 혼용체(한글과 한자)로 작성되었다.[1]
3. 내용
〈시일야방성대곡〉은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되었으며, 강렬한 어조로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논설은 이토 후작이 내한했을 때,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가 동양 3국(대한제국, 청나라, 일본 제국)의 안녕을 주선할 것이라 믿고 환영했지만, 을사늑약으로 인해 그 기대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6]
고종이 조약에 강경하게 반대했음에도, 정부 대신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았다고 비판한다. 외무대신 박제순 등은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질타하고, 참정대신은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고 비판한다.[6],[7]
김상헌과 정온의 예를 들어 대신들의 무책임함을 지적하고, 2천만 동포에게 노예가 된 현실을 통탄하며 민족정신이 망했다고 개탄한다.[7]
프레데릭 아서 맥켄지는 위와 같이 번역하였다.[5]
3. 1. 원문 분석
이토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백성들은 "후작은 평소 대한제국, 청나라, 일본 제국 동양 3국의 솥발[鼎足]처럼 균형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자처하던 사람이니, 이번 한국 방문은 필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굳건하게 할 방안을 권고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라고 서로 말하며,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리와 백성, 윗사람과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세상일 중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다.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이 분열을 초래할 조짐이니, 그렇다면 이토 후작의 본뜻은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6]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고종 황제 폐하의 뜻이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임을 이토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 년의 영토와 5백 년의 종묘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백성들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말로 깊이 꾸짖을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라는 자는 정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니오’라고 반대함으로써 책임을 면하고 이름이나 얻으려 했단 말인가?
청음 김상헌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동계 정온처럼 할복하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7]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4. 영향
〈시일야방성대곡〉은 발표 직후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설은 대한매일신보와 재팬 크로니클 등 다른 신문에도 다시 게재되었다.[2]
4. 1. 언론 탄압과 민족 저항의 확산
이 사설은 한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에 본사를 둔 영문판 신문 재팬 크로니클 등 다른 신문에 의해 다시 게재되기도 했다.[2] 이 사설로 인해 장지연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황성신문 발행은 3개월 동안 강제로 중단되었다.[1]4. 2. 역사적 재평가
〈시일야방성대곡〉은 한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에서 발행되던 영문판 신문 재팬 크로니클 등에 다시 게재되기도 했다.[2] 이 사설로 인해 장지연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황성신문은 3개월 동안 발행이 강제로 중단되었다.[1]참조
[1]
웹사이트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https://encykorea.ak[...]
2024-02-01
[2]
웹사이트
Fighting Injustice with the Pen
http://www.kocis.go.[...]
2024-01-26
[3]
서적
The Abacus and the Sword: The Japanese Penetration of Korea, 1895-191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
논문
"Colonialism and the 'Korea Problem' in the Historiography of Modern Japan."
2000-11
[5]
서적
Korea's Fight for Freedom
https://books.google[...]
Fleming H. Revell
1920
[6]
문서
정족(鼎足, 솥발)은 솥 밑에 달린 3개의 발을 말하는 것으로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는 모양처럼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동아시아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가 붕괴되면 다른 나라도 생존할 수 없다는 일종의 운명 공동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
문서
[[병자호란]] 시기에 주전론자였던 김상헌은 주화론자였던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의 초안을 찢어 버리고 통곡했다고 한다. 정온은 병자호란 시기에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칼로 자살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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