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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야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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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비야 방화 사건은 1905년 9월 5일, 러일 전쟁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불만을 품은 일본 시민들이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시작한 대규모 시위가 폭동으로 번진 사건이다. 조약 내용에 대한 불만과 배상금 미지급, 연해주 할양 불발에 대한 실망감이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시위는 정부, 경찰, 러시아, 미국 관련 시설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17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와 체포자가 발생했으며, 가쓰라 내각이 사퇴하고 일본 정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일본 역사에서 민중 폭력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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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츠머스 조약은 1905년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토적 양보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우월권 인정, 배상금 면제 등을 포함하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에 기여했으나 한국에서는 국권 침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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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야 방화 사건
사건 개요
명칭히비야 방화 사건
다른 명칭히비야 야키우치 사건
히비야 야키우치 지켄
발생 장소도쿄부도쿄시
날짜1905년 9월 5일
개요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포츠머스 조약 반대 국민 집회가 폭동으로 발전
사망자17명
부상자500명
피해내무대신 관저
국민신문사
파출소 등이 습격당함
대처87명 유죄 판결
관련 정보
로마자 표기Hibiya yakiuchi jiken
참고 문서宣教師ニコライと明治日本

2. 배경

러일 전쟁의 전개 과정과 당시 일본과 러시아의 국내외 상황은 포츠머스 조약 체결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동북아시아에서 수십 년간 제국주의적 이익을 두고 경쟁하며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결국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제국 해군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을 격파하고, 일본 제국 육군은 뤼순을 함락하고 봉천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전황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만주에서 과도하게 전력을 소모했고, 일본 경제는 장기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1]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여 재정이 악화된 상태였다. 러시아 또한 피의 일요일 사건 등 혁명 운동이 격화되어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일본 내에서는 계속되는 승전보가 보도되었고,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대규모 증세와 국채 발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러일 전쟁의 전장이 모두 만주(현재 중국 동북부) 남부와 조선반도 북부였고, 러시아 영토는 전혀 일본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금 지불을 끝까지 거부했다.

일본 측 전권 대사였던 소무라 주타로는 러시아로부터 사할린 남부 할양과 랴오둥 반도의 이권 이양, 일본의 만주한국에 대한 지배권 우위 등을 인정받는 선에서 타협하여 포츠머스 조약에 조인했다.[4]

하지만 이 조약에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배상금 지불 의무가 없었다. 일청 전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희생자와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배상금을 얻지 못한 것이다. 또한, 영토 할양이 사할린 남부에 불과하고 연해주 할양이 없다는 점도 일본 국민이 생각했던 강화 조건과는 크게 달랐다.

2. 1. 러일 전쟁

동북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이익을 둘러싼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 간의 갈등이 수십 년간 지속되면서 긴장이 고조된 끝에,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제국 해군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일본 제국 육군은 뤼순을 함락하고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 육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만주에서 과도하게 전력을 낭비했고, 일본 경제는 더 이상 장기적인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1] 1905년 9월 5일, 일본과 러시아 간 한 달간의 협상 끝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러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본을 파산 직전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2]

2. 2. 포츠머스 조약 체결

러일 전쟁일본 제국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격파하는 등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일본군은 만주에서 과도하게 전력을 소모했고, 일본 경제는 장기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1]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여 재정이 악화된 상태였다.[2] 러시아 또한 피의 일요일 사건 등 혁명 운동이 격화되어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러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공식 종료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
러시아는 사할린 남부(북위 50도 이남)를 일본에 할양한다.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의 이권을 일본에 이양한다.
러시아는 일본의 만주한국에 대한 지배권 우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조약 내용에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배상금 지불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크게 반발했다.[5] 일청 전쟁에 비해 훨씬 많은 희생자와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배상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토 할양이 사할린 남부에 불과하고 연해주 할양이 없다는 점도 불만 요인이었다. 일본은 배상금 50억 엔, 랴오둥 반도와 여순-하얼빈철도 권리, 사할린 전토 양도를 원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 활동가들은 이르쿠츠 지방 동쪽의 러시아 영토(연해주) 할양을 주장하기도 했다.[5]

오랜 전쟁으로 증세에 시달려온 일본 국민들은 배상금과 연해주를 얻지 못한 강화 조약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난 여론을 높였다.

3. 히비야 방화 사건의 전개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시위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야당이었던 헌정본당의 가와노 히로나카를 중심으로 한 대러시아 강경파 9단체[5]의 집회가 개최되었다. 가와노 등이 주장하는 배상금과 연해주 할양을 지지하기 위해 강화 내용에 반대하면서 수만 명의 폭동[5]이 발생했다.

(하위 섹션 "시위대의 집결과 경찰의 저지" 와 "폭동으로의 격화" 에서 이미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해당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

9월 6일 일본 정부는 도쿄시와 부하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즉시 시행하여, 근위사단이 진압함으로써 이 소동을 진압했다. 이 소동으로 사망자 17명, 부상자 500명 이상, 체포자 2000명 이상이 발생했다. 이 중 재판에 회부된 자는 104명,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87명이었다.

같은 날, 칙령으로 치안 방해가 되는 신문 잡지의 발행 정지 권한이 내무대신에게 주어졌다. 이에 따라 『오사카 아사히』, 『도쿄 아사히』, 『만조보』, 『보치 신문』 등이 발행 정지를 명령받았다.

각지에서 강화 반대 집회가 열렸고, 9월 7일 고베, 9월 12일 요코하마에서도 폭동이 발생했다.

3. 1. 시위대의 집결과 경찰의 저지

9월 5일 저녁, 러일 전쟁 강화 조약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도쿄 히비야 공원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시청은 집회를 금지하고 경찰관 350명과 통나무를 동원해 공원 입구를 봉쇄했다.[9]

격분한 민중들은 히비야 공원에 침입했다. 일부는 황궁 앞에서 긴자 방면으로 향해, 정부에 우호적인 신문으로 여겨졌던 국민신문사를 공격했다. 군중은 약 3만 명으로 불어났지만, 경찰은 여전히 문을 열지 않았다.

3. 2. 폭동으로의 격화

9월 5일 저녁,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히비야 공원에 모이기 시작했지만, 도쿄도경찰청이 집회를 금지하고 공원 입구를 바리케이드로 막았다. 군중은 약 3만 명으로 불어났지만, 경찰은 문을 열지 않았다. 격분한 군중은 폭동을 일으켜 황궁으로 행진했고, 이후 이틀 동안 도시 전체에서 난동을 부렸다.[5]

폭도들은 특히 정부, 경찰, 러시아,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의 조건을 중재했던 미국과 관련된 건물과 조직을 표적으로 삼았다. 외무성 시설이 피해를 입었고, 수많은 경찰서파출소가 불타고 파괴되었으며, 5명으로 구성된 무리가 내무대신의 집을 공격했다. 시위대는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본 정교회의 니콜라이 성당과 그 관련 시설도 공격하였으나, 근위병 등의 호위로 화를 면했다.[11] 또한 군중의 분노는 강화를 중재한 미국에도 향했고, 도쿄의 주일 미국 대사관 외에도, 미국인 목사가 일하는 교회까지 공격 대상이 되었다.[12]

9월 6일, 일본 정부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13] 즉시 시행하여, 근위사단이 진압에 나섬으로써 간신히 이 소동을 진압했다. 이 소동으로 사망자 17명, 부상자 500명 이상, 체포자 2000명 이상에 달했다. 이 중 재판에 회부된 자는 104명[15],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87명이었다.

4. 사건 이후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1906년 1월 가쓰라 내각은 총사퇴하고 사이온지 긴모치내각이 뒤를 이었다. 9월 7일 질서가 회복되기 전까지 군중들은 350개가 넘는 건물을 파괴하거나 손상시켰으며, 17명이 사망하고 450명 이상의 경찰, 48명의 소방관, 그리고 민간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폭동에 참여한 2,00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이 중 104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8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계엄령은 11월 29일에 해제되었다.[1]

히비야 방화 사건은 역사가들이 민중 폭력 시대|민슈 소조 키일본어라고 부르는 일본 역사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13년 동안 일본은 일련의 폭력적인 시위에 휘말렸고, 이는 1918년 쌀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다.[2] 도쿄의 폭력 사태 소식은 고베와 요코하마에서 유사한 소요 사태를 촉발했고, 수개월 동안 일본 전역에서 수백 건의 비폭력 집회, 연설 및 회의를 자극했다.[1]

4. 1. 일본 정계의 변화

폭동 수습 후에도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발이 그치지 않자 1906년 1월 가쓰라 내각은 총사퇴하였으며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그 뒤를 이었다.[1]

히비야 폭동과 그 이후의 불안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그의 내각이 1906년 1월 7일에 붕괴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다.[3] 가쓰라는 정치적 라이벌인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사이온지는 정치 문제에서 일본 육군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했다.[3]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郎)는 입헌정우회를 이끄는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와 비밀리에 회담을 갖고 수습책을 논의한 결과,[4] 이듬해 1월 제1차 가쓰라 내각(第1次桂内閣)은 총사퇴하고, 대신 제1차 사이온지 내각(第1次西園寺内閣)이 성립되었다.[4] 사이온지와 새로 내무대신(内務大臣)이 된 하라 다카시(原敬)는 반정부측에서 제기된 계엄령 관계자 처벌 요구를 거부하고, 사건의 마무리를 꾀했다.[4]

4. 2. 민중 폭력 시대의 시작

히비야 방화 사건은 역사가들이 민중 폭력 시대|민슈 소조 키일본어라고 부르는 일본 역사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그 후 13년 동안 일본은 일련의 폭력적인 시위(도쿄에서만 9건의 폭동)에 휘말렸고, 1918년 쌀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다.[2]

4. 3. 관련자 처벌

9월 7일 질서가 회복될 때까지 격분한 군중들은 도시 경찰 박스의 70%를 포함해 350개가 넘는 건물을 파괴하거나 손상시켰다. 이로 인해 17명이 사망하고 450명 이상의 경찰, 48명의 소방관, 그리고 민간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폭동에 참여한 2,00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이 중 104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8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8] 계엄령은 11월 29일에 해제되었다.

경시청은 9월 5일 아침 국민대회 개최를 저지하기 위해 대회 위원 8명을 체포하려 했으나, 오가와 헤이키치, 오다케 간이치 등은 체포를 피하고 대회를 강행했다.

같은 날 오후, 주최자 8명이 흉도소취죄(메이지 13년 형법 제137조)로 체포되었으나, 도쿄지방법원 검찰국은 폭동 계획 교사의 증거가 전혀 없다며 이들을 석방했다.[6] 시바경찰서는 이후 수사를 거쳐 주최자들을 기소했고, 11월 10일 검찰측 책임자 구라토미 유사부로에 의해 기소되었다.

이듬해 2월 26일부터 4월 11일까지 11회에 걸쳐 도쿄지방법원 제1형사부 재판장 이마무라 교타로, 배석판사 후카가와 다지로, 오카 케이지, 검사 아즈미 토타로, 스기모토 토사부로에 의해 공판이 진행되었다. 4월 21일 무죄가 선고되었고, 항소 없이 확정되었다.[8]

4. 4. 기타 지역으로의 확산

도쿄의 폭력 사태 소식은 고베와 요코하마에서 유사한 소요 사태를 촉발했고, 수개월 동안 일본 전역에서 수백 건의 비폭력 집회, 연설 및 회의를 자극했다.[1] 계엄령은 11월 29일에 해제되었다.[1]

5. 피해 건물

9월 5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강화조약 반대 집회에서 격분한 군중들이 내무대신 관저, 국민신문사 등을 공격했다. 도쿄 각지의 파출소[9], 경찰서 등이 방화·파괴되었고, 시내 13곳 이상에서 불길이 치솟았다.[10]

이외에도 일본 정교회의 니콜라이 성당과 그 관련 시설, 미국인 목사가 일하는 교회도 공격 대상이 되었으나, 니콜라이 성당은 근위병 등의 호위로 화를 면했다.[11]

5. 1. 정부 및 언론 기관

5. 2. 종교 시설

일본 정교회러시아와 관계가 깊었던 점 때문에, 니콜라이 성당과 그 관련 시설도 공격 표적이 되었으나, 근위병 등의 호위로 화를 면했다.[11] 강화 조약을 중재한 미국에도 분노가 향하여, 도쿄 주재 미국 대사관 외에 미국인 목사가 일하는 교회까지 공격 대상이 되었다.[12]

다음은 공격받은 종교 시설 목록이다.

종파시설명비고
개신교 (미이교회)산켄초 미이교회
개신교 (미이교회)쿠루마사카초 미이교회현재 일본기독교단 시모다니교회
개신교 (성공회)쿠로후네초 성요한교회
개신교 (구세군)모리시타초 구세군 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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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일본기독교단)오니시초 일본기독교회현재 일본기독교단토시마오카교회
개신교 (일본기독교단)일본기독명성교회현재 일본기독교단 고이시카와명성교회
개신교고마가타정 복음전도관


참조

[1] 웹사이트 Social Protest in Imperial Japan: The Hibiya Riot of 1905 https://apjjf.org/20[...] 2022-05-22
[2] 웹사이트 Social Protest in Imperial Japan: The Hibiya Riot of 1905 帝国日本における社会的抗議行動 1905年の日比谷焼打事件 https://apjjf.org/20[...] 2014-07-20
[3] 논문 1974
[4] Kotobank 桂太郎内閣とは 2023-01-07
[5] Kotobank 日比谷焼打事件とは 2023-01-07
[6] 서적 政治家人名事典 日外アソシエーツ 1990
[7] 웹사이트 婦人雑誌『新女界』の記事および執筆者の学歴・キャリアからみる知識人層の女子教育観と学校選択 https://web.archive.[...] 電気通信大学 2017
[8] 웹사이트 日比谷焼打事件と倉富勇三郎 https://web.archive.[...]
[9] 논문 1936
[10] 논문 2004
[11] 논문 1996
[12] 논문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 1988
[13] 간행물 東京府内一定ノ地域ニ戒嚴令中必要ノ規定ヲ適用スルノ件 https://dl.ndl.go.jp[...] 官報 1905-09-06
[14] 간행물 明治三十八年勅令第二百五号及第二百六号廃止 https://dl.ndl.go.jp[...] 官報 1905-11-29
[15] 논문 2004
[16] 서적 宣教師ニコライと明治日本 岩波書店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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