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누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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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누룻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니룻다, 팔리어로 아누룻다라고 불리며, 석가모니의 사촌이자 제자이다. 석가족의 왕자 출신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2년 후 출가하여 수행했다. 코살라국의 기원정사에서 졸다가 질책을 받은 후 불면불휴의 수행을 통해 천안통을 얻었고, 붓다의 마지막 포교 여행에 동행하여 열반 이후 제자들을 위로했다. 앙굿따라 니까야를 보관했으며, 150세에 입적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니룻다(아니룻다/Aniruddhasa)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아누룻다(아누룻다/Anuruddhapi)라고 한다. 다른 음차로는 아니로두, 아노률타, 아나률타 등이 있다. 음차 (약어)로는 누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의역하면 여의, 무멸, 선의 등의 의미를 가진다.
아누룻다의 출신에는 여러 설이 있다. 석가족의 궁핍한 식사 운반인으로 출가하여 55년간 수행 후 발기족(바지국)이 사는 베르바 마을에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석가족 고반왕(드로노다나)의 태자로, 형 큼남(마하나만, 카피라성의 대신)의 남동생이라는 설(5분률)과, 석가족 감로반왕(암리트다나)의 태자로 큼남의 남동생이라는 설(대지도론)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뒤의 두 가지 설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석가모니 부처가 고향 카필라 성으로 돌아오자, 난다(아난다), 라훌라(라훌라)를 시작으로 석가족 청년 5백 명이 출가하였다. 아누룻다는 형인 마하남과 상담해 형 대신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형제의 어머니가 두 형제 모두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바드리카 왕(跋提梨迦王)[3]이 출가한다면 출가해도 괜찮다」라고 했고, 이에 친구였던 바드리카 왕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이레 동안의 유예 뒤에 모두 출가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2. 이름
3. 출신
아누룻다는 샤카족 왕 싯다르타 고타마의 형제인 아미토다나의 아들이자 마하나마의 동생이었다. 따라서 아누룻다는 고타마 붓다의 사촌이었다. 그는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부유하게 자랐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샤카 왕국에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을 때, 아누룻다는 아난다, 데바닷타 등과 함께 출가했다.
3. 1. 석가족 왕자
아누룻다의 출신에는 여러 설이 있다. 석가족의 궁핍한 식사 운반인으로 출가하여 55년간 수행 후 발기족(바지국)이 사는 베르바 마을에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1] 또 다른 설로는 석가족 고반왕(드로노다나)의 태자로, 형 큼남(마하나만, 카피라성의 대신)의 남동생이라는 설(5분률)과, 석가족 감로반왕(암리트다나)의 태자로 큼남의 남동생이라는 설(대지도론)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뒤의 두 가지 설이 널리 받아들여진다.[1]
아누룻다는 아미토다나의 아들이자 마하나마와 공주 로히니 (붓다의 제자)의 형제였다. 아미토다나는 카필라바스투의 샤카족 왕 싯다르타 고타마의 형제였으므로, 아누룻다는 고타마 붓다의 사촌이었다. 그는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부유하게 자랐다.[1]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샤카 왕국에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을 때, 아누룻다는 사촌 3명인 바디야, 아난다, 데바닷타와 그들의 하인 우팔리와 함께 아누피야 망고 숲에서 붓다에게 출가했다.[1]
3. 2. 기타 설
아누룻다의 출신이나 신변에는 여러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석가족의 왕자로, 마하나의 동생이라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4. 생애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는 하층인 수드라 출신으로 이발사였던 우팔리(우팔리)가 왕자인 아누룻다보다 먼저 출가했는데, "먼저 제자가 된 사람에게 예경해야 한다"는 석가모니 교단의 의례에 따라 아누룻다 등 왕자들이 우팔리에게 예배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잘해냈다. 석가족의 교만한 마음을 멸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후에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에 있던 기원정사에서 석가모니의 설법 도중에 졸아 질책을 받고 불면불휴, 즉 자지도 쉬지도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상좌불와의 수행을 했다. 석가모니 부처도 걱정되어 자도 좋다고 설득했지만, 아누룻다는 끝내 실명까지 해가면서 맹세를 지켜냈고, 눈을 잃은 대신 천안통을 얻었다고 한다.[2] 또 승복을 꿰매는 것도 눈이 보이지 않아 고생하는 모습을 본 석가모니 부처가 도와 주었다고 한다(《증일아함경》, 대31,38 역품).
아누룻다는 과거세에 불사불(弗沙佛)의 말법의 세상에서 기근이 있었을 때 굶주린 연각중(縁覚衆)[4]에게 자신이 가진 나머지 밥을 모두 주어 베풀었던 인연으로 현세에 보물을 얻었고 나아가 91겁 동안에 인간계와 천상계에서 태어나는 과보를 얻어 가난을 겪는 일 없이 그가 바라는 일은 모두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중아함경》12, 경률이상13).
아누룻다는 이후 석가모니 부처의 마지막 포교의 여행에도 동행해,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에 통곡하며 비탄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고, 아난다에게 지시해 쿠시나가라의 맛라(Mahla)족에 석가모니 부처의 장의 준비를 시켰다고도 한다.
4. 1. 출가 전
아누룻다는 아미토다나의 아들이자 마하나마와 공주 로히니의 형제였다.[1] 아미토다나는 카필라바스투의 샤카족 왕 싯다르타 고타마의 형제였으므로, 아누룻다는 싯다르타, 즉 고타마 붓다의 사촌이었다.[1] 그는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부유하게 자랐다.[1]
4. 2. 출가와 수행
석가모니 부처가 고향 카필라 성으로 돌아오자, 난다(아난다), 라훌라(라훌라)를 시작으로 석가족 청년 5백 명이 출가하였다. 아누룻다는 형인 마하남과 상담해 형 대신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형제의 어머니가 두 형제 모두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바드리카 왕(跋提梨迦王)[3]이 출가한다면 출가해도 괜찮다」라고 했고, 이에 친구였던 바드리카 왕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이레 동안의 유예 뒤에 모두 출가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는 하층인 수드라 출신으로 이발사였던 우팔리(우팔리)가 왕자인 아누룻다보다 먼저 출가했는데, "먼저 제자가 된 사람에게 예경해야 한다"는 석가모니 교단의 의례에 따라 아누룻다 등 왕자들이 우팔리에게 예배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잘해냈다. 석가족의 교만한 마음을 멸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후에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에 있던 기원정사에서 석가모니의 설법 도중에 졸아 질책을 받고 불면불휴, 즉 자지도 쉬지도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상좌불와의 수행을 했다. 석가모니 부처도 걱정되어 자도 좋다고 설득했지만, 아누룻다는 끝내 실명까지 해가면서 맹세를 지켜냈고, 눈을 잃은 대신 천안통을 얻었다고 한다.[2] 또 승복을 꿰매는 것도 눈이 보이지 않아 고생하는 모습을 본 석가모니 부처가 도와 주었다고 한다(《증일아함경》, 대31,38 역품).
아누룻다는 과거세에 불사불(弗沙佛)의 말법의 세상에서 기근이 있었을 때 굶주린 연각중(縁覚衆)[4]에게 자신이 가진 나머지 밥을 모두 주어 베풀었던 인연으로 현세에 보물을 얻었고 나아가 91겁 동안에 인간계와 천상계에서 태어나는 과보를 얻어 가난을 겪는 일 없이 그가 바라는 일은 모두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중아함경》12, 경률이상13).
아누룻다는 이후 석가모니 부처의 마지막 포교의 여행에도 동행해,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에 통곡하며 비탄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고, 아난다에게 지시해 쿠시나가라의 맛라(Mahla)족에 석가모니 부처의 장의 준비를 시켰다고도 한다. 아누룻다는 "천안통"(dibba-cakkhu)을 얻어 그 능력이 뛰어난 자들 중 으뜸으로 꼽혔다. 사리풋타는 아누룻다에게 위대한 사람의 여덟 가지 생각을 명상 주제로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체티 지방의 파치나밤사다야로 가서 수행을 하던 중, 그는 일곱 가지는 터득했지만 여덟 번째는 배우지 못했는데, 이는 부처가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누룻다는 통찰력을 키워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했다.
4. 3. 석가모니 열반과 그 이후
아나률은 석가모니 부처의 마지막 포교 여행에 동행했으며, 석가모니의 열반에 통곡하며 비탄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2] 아난다에게 지시해 쿠시나가라의 맛라(Mahla)족에 석가모니 부처의 장의 준비를 시켰다고도 한다.[2]
아누룻다는 부처가 쿠시나라에서 열반에 들 때 함께 있었다. 그는 승려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미래의 행동 방향을 훈계하는 데 가장 앞장섰으며, 부처의 법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부처가 누워 자나에 들었을 때, 아난다는 아누룻다에게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완전한 열반에 이르셨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아누룻다는 천안을 통해 부처가 "멸진"의 상태에 몰입해 있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누룻다는 부처의 마지막 장례에 대해 쿠시나라의 말라족에게 자문받았다.
이후, 제1차 불교 회의에서 그는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으며, 앙굿따라 니까야를 보관하는 책임을 맡았다. 아누룻다는 바지 국가의 바지에서 대나무 숲 그늘 아래 벨루바가마에서 입적했다. 그는 죽을 당시 백오십 세였다.
5. 전생담
아누룻다는 자타카에서 자주 묘사되는데, 이는 불교 인물들의 이전 윤회를 설명한다. Padumuttara 부처 시대에 그는 부유한 거주자였다. 한 승려가 천안을 가진 사람들 중 최고라고 선언하는 것을 듣고 그는 비슷한 영예를 얻고 싶어했다. 그는 부처의 무덤 앞에서 큰 빛의 향연을 열고 공덕을 쌓았다. Kassapa 부처 시대에 그는 바라나시에서 환생하여 태어났다. 어느 날 그는 부처의 무덤 주변에 기(Ghee)로 채운 그릇을 놓고 불을 붙였으며, 머리에 불이 켜진 그릇을 이고 밤새도록 무덤을 돌았다.
그는 바라나시의 가난한 집안에서 다시 태어나 안나바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느 날, 그는 그의 주인인 은행가 수마나를 위해 일하면서 그의 식사를 Pratyekabuddha인 우파릿타에게 주었다. 은행가는 안나바라의 경건한 행위를 듣고 그를 위해 사업을 시작하도록 도와 그에게 보상했다. 감명을 받은 왕은 그에게 집을 지을 부지를 주었고, 그 아래 땅을 파내자 많은 묻힌 보물이 나왔다.
6. 묘사
아누룻다는 팔리 경전에서 다정하고 충성스러운 비구로 묘사되며, 부처 곁에 서 있었다. 부처가 코삼비의 승려들의 논쟁에 실망하여 파치나밤사다야로 물러났을 때, 아누룻다와 함께 머물렀다. 많은 텍스트에서, 많은 저명한 승려들이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누룻다는 종종 부처의 질문을 받고, 상가를 대신하여 답변을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Ananda, The Guardian of the Dhamma
http://www.accesstoi[...]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2006-06-18
[2]
서적
今日から役立つ仏教
[3]
문서
숫도다나 왕이 물러나고 카필라 성의 성주가 되었다.
[4]
문서
스승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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