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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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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난다는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환희'를 뜻하며, 부처의 시자이자 10대 제자 중 한 명으로 불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부처의 사촌이자 25년 동안 부처를 시중들며 '다문제일'로 불렸으며,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는 데 기여했다. 부처의 열반 전후에 비탄하고 통곡했으며, 제1차 불교 결집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암송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달마의 보물'로 불렸으며, 승가의 규율을 강조하는 학교와 긴장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아난다는 말년에 가르침을 펼치다 로히니 강에서 열반에 들었으며, 그의 유해는 갠지스 강 양쪽에 흩어져 숭배되었다. 아난다는 문학 작품에도 등장하며, 바그너의 오페라, 타고르의 희곡, 만화 등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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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석회암 조각의 일부인 아난다의 머리
북제 시대, 550–577 CE의 북부 샹탕산 동굴에서 나온 석회암 조각의 일부인 아난다의 머리
다른 이름비데하무니
담마-반다가리카 (담마의 보고)
존칭존경하는 분
장로 (테라)
출생지카필라바투
출생 연도기원전 5세기–4세기
사망지로히니 강 근처의 베살리, 또는 갠지스 강
사망 연도부처의 죽음 후 20년
종교불교
알려진 업적부처의 시종 (aggupaṭṭhāyaka)
뛰어난 기억력
여성에 대한 연민
스승부처
푼나 만타니풋타
입문자다샤발라 카샤파 또는 벨라타시사
입문 시기부처의 사역 20년째 (무라사르바스티바다), 또는 2년째 (다른 전통)
입문 장소니그로다라마 또는 아누피야, 말라
제자맛잔티카
사나바시 등
부모수클로다나 왕 또는 아미토다나 왕; 므르기 여왕 (산스크리트 전통)
칭호다르마의 총대주교 (산스크리트 전통)
계승자마하카사파
후계자맛잔티카 또는 사나바시
생애 및 역할
주요 역할부처의 수석 시종
초기 불교 경전의 암송자
주요 사건여성의 출가 허용 요청
부처의 마지막 설법 암송
제1차 불교 회의 주도
불교 내 위치
중요성부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중 한 명
기억력의 상징
여성의 권익 옹호
다른 이름아난다 (기쁨)
존칭다문 제일 (가장 많이 들은 자)
가계
출생지코살라국카필라성
스승석가
제자마하카사파

2. 명칭

'아난다'(Ānanda|아난다pi, आनंद|아난다sa)는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환희, 기쁨'을 의미한다.[1] 팔리어 주석서는 아난다가 태어났을 때 그의 친척들이 기뻐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물라사르바스티바다 전통의 문헌은 아난다가 부처의 깨달음의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도시에서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붙었다.

3. 생애

아난다는 과거 생에서 붓다의 시자가 되기를 서원했으며, 파두뭇타라 부처 시대에 이 서원을 했다. 여러 생을 거쳐 윤회하며 선행을 쌓은 후 고타마 붓다 시대에 아난다로 태어났다.

기원전 500년경 인도 지도


아난다는 부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으며, 기원전 5~4세기로 추정된다.[2] 그는 부처의 사촌이었으며,[3] 그의 아버지는 부처의 아버지인 숫도다나의 형제였다.[12] 팔리어 및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 전통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아미토다나였지만, 『마하바스투』는 그의 아버지가 슈클로다나라고 언급한다. 『마하바스투』는 또한 아난다의 어머니의 이름이 므기라고 언급하고 있다. 팔리어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는 시타르타 왕자와 같은 날 태어났다. 그러나 물라사르바스티바다 및 후대 대승 전통의 경전들은 아난다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태어났다고 말하며, 따라서 부처보다 훨씬 어렸다.[46]

중국 조각상, 아난다로 추정


팔리, 마히사사카, 다르마굽타카 경전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는 부처가 카필라밧투를 방문한 동안 부처의 수행 2년차에 승려가 되었다. 그는 계율을 지키며 부처의 씨족인 사키야의 많은 다른 왕자들과 함께 부처로부터 수계를 받았다.[46] 말라 영토의 일부인 아누피야라고 불리는 망고 숲에서였다. 마하상기카 전통의 경전에 따르면 숫도다나 왕은 부처가 크샤트리아 계급에서 더 많은 추종자를 얻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형제가 있는 모든 "크샤트리아"가 부처를 따라 승려가 되거나 형제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다. 아난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형제 데바닷타에게 집에 머물라고 요청하여 그가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했다.[4] 그러나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과 팔리어 『테라가타』의 후대 연대기에 따르면 아난다는 훨씬 늦게, 즉 부처의 죽음 약 25년 전에 출가했다.[46] 일부 산스크리트어 자료에서는 그가 훨씬 더 늦게 출가했다고 한다.

비나야에 관한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은 점쟁이들이 아난다가 부처의 시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전한다. 아난다가 궁궐을 떠나 출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부처가 카필라밧투를 방문하는 동안 그를 바이샬리로 데려갔지만, 나중에 부처는 아난다를 만나 가르침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마하바스투』는 므기가 처음에는 아난다가 출가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그의 형제 데바닷타가 이미 출가하여 궁궐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난다는 어머니의 반대에 대해 비데하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침묵의 서약을 지키며 살았다. 이것이 그에게 '비데하 출신의 침묵의 현자'라는 뜻의 비데하무니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아난다가 출가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난다의 우파자야가 다사발라 카샤파라는 사람으로 하여 카필라밧투의 니그로다라마 수도원에서 많은 의식과 함께 그가 출가하도록 했다.

팔리어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의 첫 번째 스승은 벨라타시사 및 푼나 만타니푸타였다. 푼나의 가르침은 아난다가 깨달음에 앞선 경지인 수다원의 경지에 도달하게 했다. 아난다는 나중에 푼나에게 빚을 졌다고 표현했다.[35] 아난다의 삶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부처의 주요 제자 중 한 명인 사리푸타였다. 사리푸타는 종종 아난다에게 불교 교리의 미묘한 점에 대해 가르쳤다. 그들은 서로의 것을 공유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들의 관계는 좋은 우정으로 묘사된다. 일부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에서는 아난다가 제1차 불교 회의에서 추방되었을 때 아난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준 아난다의 시자도 언급된다. 그는 "바지푸타"였다. 후대 경전에 따르면, 계몽된 승려이자 바지푸타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난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아난다의 가르침을 듣고 아난다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지푸타는 아난다에게 재가자들과의 대화를 줄이고 숲에서 물러나 명상 수행을 심화하도록 권유했는데, 이 조언은 아난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난다 조각상


아난다 조각상


아난다의 출신은 불전에 따라 여러 설이 있어 일치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석가모니의 사촌 동생이며, 여러 불전에 석가모니와 그의 교단에 위배되는 악인으로 묘사되는 데바닷타의 동생이라고 한다.

그는 석가모니가 성도한 밤에 태어났다고 한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곡반왕이 석가모니의 친아버지인 정반왕에게 사자를 보내 아난의 탄생을 알렸을 때, 정반왕은 매우 기뻐하여 "아난다(환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또한 국민은 모두 왕자의 탄생을 기뻐하여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그는 아나율 등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 곁으로 가서 불제자가 되었다. 그때 석가모니가 55세, 아난이 25세라고 한다.

또한, 『불본행집경』에 따르면, 출가할 때 석가모니 부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난과 데바닷타 두 명만 설산 기슭의 장로인 우파다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스승의 허락을 얻어 불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난다 및 석가족의 계보는 불전에 따라 다양하여 일치하지 않지만, 주요 설은 다음과 같다.

불전아버지형제 관계
오분율백반왕형: 아난다, 동생: 데바닷타
대지도론곡반왕형: 데바닷타, 동생: 아난다
기세경, 중허마가제경감로반왕형: 아난다, 동생: 데바닷타
마하바스투백반왕형: 아난다, 차남: 우파다나, 삼남: 데바닷타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후 20년 동안 여러 시중이 있었으나, 55세가 되면서 영구적인 시중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전 시중들의 역할 수행이 미흡했기 때문이다.[39] 주요 제자들이 지원했으나 석가모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난다는 침묵을 지켰고, 그 이유를 묻자 석가모니가 적임자를 선택할 것이라 답했다. 석가모니는 아난다를 선택했다.[46]

아난다는 물질적 이익을 받지 않고,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초대를 수락하고 교리에 대한 질문을 하며, 부재중에 가르친 내용을 반복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조건으로 시중 자리를 수락했다. 이는 사람들이 아난다를 신뢰하고 석가모니가 그를 동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석가모니는 동의했고, 아난다는 25년간 헌신적으로 시중 역할을 수행하며, 석가모니의 일상생활을 돕고, 대화의 화자 역할을 하며, 때로는 목숨을 걸고 보호하기도 했다.[3]

석가모니와 아난다의 관계는 따뜻하고 신뢰가 깊었다.[5] 석가모니가 아팠을 때 아난다도 병에 걸렸고, 석가모니가 나이가 들었을 때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한번은 데바닷타가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 석가모니를 해치려 했을 때, 아난다는 석가모니를 보호하기 위해 앞섰으나, 자비로 코끼리를 제압한 석가모니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난다는 중재자, 비서 역할도 수행하며, 메시지 전달, 소식 알림, 재가 신자 조언 등을 담당했다.[6] 석가모니의 양어머니 마하파자파티가 옷을 제공하려 했을 때, 아난다는 중재하여 석가모니가 옷을 받도록 설득했다.

석가모니는 아난다에게 가르침을 대신 요청하기도 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칭찬했다. 아난다는 말리카 여왕 등 통치 계급 사람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7] 우데나 왕의 첩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옷을 선물 받았는데, 왕은 아난다를 탐욕스럽다고 비난했지만, 아난다는 옷의 재활용에 대해 설명하여 왕에게 다시 옷을 제공받았다. 베살리 방문 시, 아난다는 ''라타나 수타''를 낭송하여 도시의 문제를 해결했다. 영적 우정에 대한 가르침도 아난다에게 전해졌다.[8]

아난다는 외모가 매력적이었다.[9] 팔리 문헌에 따르면 한 비구니가 아난다에게 반하여 아픈 척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난다에게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다.[9] 다른 이야기에서는 찬달라 신분의 여성 프라크리티가 아난다와 사랑에 빠져 흑마술 주문을 사용하여 그를 매혹시키려 했다. 아난다는 부처의 도움을 요청했고, 부처는 프라크리티에게 인간의 몸의 혐오스러운 특성을 되돌아보라고 가르쳤고, 결국 프라크리티는 ''비구니''로 서품되어 아난다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10] ''수람가마 수트라''에 나오는 동아시아 버전의 이야기에서 부처는 아난다를 돕기 위해 만주스리를 보냈고, 만주스리는 다라니를 사용하여 마법의 매력을 무력화했다. 그 후 부처는 아난다와 다른 청중들에게 불성에 대해 계속 가르쳤다.

초기 경전에서는 초기 승가에 여성을 포함시킨 것을 아난다의 공헌으로 기록하고 있다.


초기 경전에서는 초기 ''상가''(승가)에 여성을 포함시킨 것을 아난다의 공헌으로 기록하고 있다.[11]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15년 후, 붓다의 양어머니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붓다를 찾아와 최초의 불교 ''비구니''가 되기를 요청했다. 붓다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5년 후, 마하파자파티는 다시 붓다에게 요청했는데, 이번에는 붓다의 전 부인이었던 야쇼다라를 포함한 다른 사키야 여성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500km를 걸어와 지치고 우울한 모습이었고, 아난다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아난다는 붓다에게 여성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고, 붓다는 이를 인정했지만, 사키야 여성들의 출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난다는 붓다와 함께 마하파자파티가 붓다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린 시절 붓다를 어떻게 돌봤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22] 또한 아난다는 이전 붓다들도 ''비구니''를 서품했다고 언급했다. 결국, 붓다는 사키야 여성들의 출가를 허락했고, 이것이 ''비구니'' 교단의 시작이었다. 아난다는 붓다가 정한 일련의 규칙(''가루다르마'')을 받아들임으로써 마하파자파티를 출가시켰다. 이 규칙은 ''비구니'' 공동체가 ''비구''(승려) 공동체에 종속되는 관계를 설명한다.

경전에 따르면, ''비구니'' 교단을 창건하는 데 아난다가 기여한 덕분에 그는 ''비구니'' 공동체에서 인기를 얻었다. 아난다는 종종 ''비구니''들을 가르쳤고,[15] 종종 여성들에게 출가를 권했으며, 그가 승려 마하카샤파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때, 여러 ''비구니''들이 그를 변호하려 했다.

부처가 인도 라자가하의 독수리 봉우리에서 아난다를 위로하는 모습의 조각


팔리어 ''마하-빠리닙바나 숫타''는 부처가 아난다와 함께 라자가하에서 쿠시나라까지 마지막 1년 여행을 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쿠시나라에 도착하기 전, 부처는 우기 동안의 안거(vassa)를 베루가마에서 보냈는데, 기근으로 고통받았던 바이샬리 지역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여기서 팔십 세의 부처는 다시 한번 ''승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했다. 부처는 바이샬리에서 심각한 병을 앓았고, 몇몇 제자들이 크게 걱정했다. 아난다는 부처가 열반하기 전에 마지막 지침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부처는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르쳤으며, 비밀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아난다에게 승가가 지도자에게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을 이어서 했다.

부처는 초자연적인 성취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전한 겁으로 연장할 수 있다는 암시를 여러 번 주었지만, 아난다는 정신이 산만했고 그 암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아난다는 그 요청을 했지만, 부처는 이미 늦었다고 대답했고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라가 부처를 방문했고, 부처는 3개월 안에 죽기로 결심했다. 아난다는 이 말을 듣고 울었다. 그러나 부처는 아난다가 여러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훌륭한 시중이었다고 지적하며[46] 그를 위로했다. 만약 그가 그의 노력에 진지했다면, 그는 곧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는 아난다에게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은 무상하다고 지적했다. 즉,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한다.

부처의 마지막 날에 부처를 숭배하는 아난다


부처의 마지막 날, 부처는 쿠시나라로 여행했다. 부처는 아난다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출산한 것과 같은 종류의 나무인 두 살 나무 사이에 누울 자리를 준비하게 했다. 그러고 나서 부처는 아난다에게 말라 씨족을 쿠시나라에서 초청하여 마지막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20] 돌아온 아난다는 부처에게 열반 후에 자신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물었고, 부처는 그것을 화장해야 한다고 대답하면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지침을 제시했다. 부처는 아난다가 직접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말라족에게 의식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21] 그러고 나서 아난다는 열반 후 신자들이 부처를 어떻게 기려야 하는지 질문을 계속했다. 부처는 사람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자신의 삶에서 네 가지 중요한 장소를 나열하여 답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불교 순례의 네 가지 주요 장소가 되었다. 부처가 열반하기 전에 아난다는 부처에게 더 의미 있는 도시로 옮길 것을 권했지만, 부처는 그 도시가 한때 위대한 수도였다고 지적했다. 아난다는 그러고 나서 부처가 열반한 후에 다음 스승이 누구가 될지 물었고, 부처는 자신의 가르침과 규율이 대신 스승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처는 자신의 열반 전에 몇 가지 지침을 주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전 마부인 찬나가 그의 동료 승려들에 의해 기피되어 그의 자만을 낮추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다. 부처는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하는 질문이 있는지 물어 모든 의심을 해소할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아난다는 현재 부처의 모든 제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넘어선 경지에 도달했다는 기쁨을 표현했다. 그러나 부처는 아난다가 믿음에서 말한 것이지 명상적 통찰력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했다. 부처는 또한, 현재 그를 둘러싸고 있는 500명의 승려들 중, 심지어 "가장 늦은" 또는 "가장 뒤떨어진" 자들조차도 ''수다원''의 초기 단계에 도달했다고 덧붙였다. 부처의 ''최종 열반'' 동안, 아누룻다는 부처가 최종 열반에 도달하기 전에 거친 단계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명상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난다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이는 그의 낮은 영적 성숙도를 나타냈다. 부처의 열반 후에 아난다는 몇 구절을 낭송하며 절박감을 표현하며 사건과 그 의미에 깊이 감동했다.

3. 1. 초기 생애

경전에 따르면 아난다는 붓다의 시자가 되기를 서원했고, 파두뭇타라 부처 시대에 이 서원을 했다고 한다. 여러 생을 거쳐 윤회하며 선행을 쌓은 후 고타마 붓다 시대에 아난다로 태어났다.

아난다는 부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으며, 기원전 5~4세기로 추정된다.[2] 아난다는 부처의 사촌이었으며,[3] 그의 아버지는 부처의 아버지인 숫도다나의 형제였다.[12] 팔리어 및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 전통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아미토다나였지만, 『마하바스투』는 그의 아버지가 슈클로다나라고 언급한다. 『마하바스투』는 또한 아난다의 어머니의 이름이 므기라고 언급하고 있다. 팔리어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는 시타르타 왕자와 같은 날 태어났다. 그러나 물라사르바스티바다 및 후대 대승 전통의 경전들은 아난다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태어났다고 말하며, 따라서 부처보다 훨씬 어렸다.[46]

팔리, 마히사사카, 다르마굽타카 경전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는 부처가 카필라밧투를 방문한 동안 부처의 수행 2년차에 승려가 되었다. 그는 계율을 지키며 부처의 씨족인 사키야의 많은 다른 왕자들과 함께 부처로부터 수계를 받았다.[46] 말라 영토의 일부인 아누피야라고 불리는 망고 숲에서였다. 마하상기카 전통의 경전에 따르면 숫도다나 왕은 부처가 크샤트리아 계급에서 더 많은 추종자를 얻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형제가 있는 모든 "크샤트리아"가 부처를 따라 승려가 되거나 형제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다. 아난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형제 데바닷타에게 집에 머물라고 요청하여 그가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했다.[4] 그러나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과 팔리어 『테라가타』의 후대 연대기에 따르면 아난다는 훨씬 늦게, 즉 부처의 죽음 약 25년 전에 출가했다.[46] 일부 산스크리트어 자료에서는 그가 훨씬 더 늦게 출가했다고 한다.

비나야에 관한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은 점쟁이들이 아난다가 부처의 시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전한다. 아난다가 궁궐을 떠나 출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부처가 카필라밧투를 방문하는 동안 그를 바이샬리로 데려갔지만, 나중에 부처는 아난다를 만나 가르침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마하바스투』는 므기가 처음에는 아난다가 출가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그의 형제 데바닷타가 이미 출가하여 궁궐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난다는 어머니의 반대에 대해 비데하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침묵의 서약을 지키며 살았다. 이것이 그에게 '비데하 출신의 침묵의 현자'라는 뜻의 비데하무니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아난다가 출가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난다의 우파자야가 다사발라 카샤파라는 사람으로 하여 카필라밧투의 니그로다라마 수도원에서 많은 의식과 함께 그가 출가하도록 했다.

팔리어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의 첫 번째 스승은 벨라타시사 및 푼나 만타니푸타였다. 푼나의 가르침은 아난다가 깨달음에 앞선 경지인 수다원의 경지에 도달하게 했다. 아난다는 나중에 푼나에게 빚을 졌다고 표현했다.[35] 아난다의 삶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부처의 주요 제자 중 한 명인 사리푸타였다. 사리푸타는 종종 아난다에게 불교 교리의 미묘한 점에 대해 가르쳤다. 그들은 서로의 것을 공유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들의 관계는 좋은 우정으로 묘사된다. 일부 물라사르바스티바다 경전에서는 아난다가 제1차 불교 회의에서 추방되었을 때 아난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준 아난다의 시자도 언급된다. 그는 "바지푸타"였다. 후대 경전에 따르면, 계몽된 승려이자 바지푸타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난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아난다의 가르침을 듣고 아난다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지푸타는 아난다에게 재가자들과의 대화를 줄이고 숲에서 물러나 명상 수행을 심화하도록 권유했는데, 이 조언은 아난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출신은 불전에 따라 여러 설이 있어 일치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석가모니의 사촌 동생이며, 여러 불전에 석가모니와 그의 교단에 위배되는 악인으로 묘사되는 데바닷타의 동생이라고 한다.

그는 석가모니가 성도한 밤에 태어났다고 한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곡반왕이 석가모니의 친아버지인 정반왕에게 사자를 보내 아난의 탄생을 알렸을 때, 정반왕은 매우 기뻐하여 "아난다(환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또한 국민은 모두 왕자의 탄생을 기뻐하여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그는 아나율 등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 곁으로 가서 불제자가 되었다. 그때 석가모니가 55세, 아난이 25세라고 한다.

또한, 『불본행집경』에 따르면, 출가할 때 석가모니 부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난과 데바닷타 2명만 설산 기슭의 장로인 우파다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스승의 허락을 얻어 불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난다 및 석가족의 계보는 불전에 따라 다양하여 일치하지 않지만, 주요 설은 다음과 같다.

불전아버지형제 관계
오분율백반왕형: 아난다, 동생: 데바닷타
대지도론곡반왕형: 데바닷타, 동생: 아난다
기세경, 중허마가제경감로반왕형: 아난다, 동생: 데바닷타
마하바스투백반왕형: 아난다, 차남: 우파다나, 삼남: 데바닷타


3. 2. 붓다의 시자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후 20년 동안 여러 시중이 있었으나, 55세가 되면서 영구적인 시중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전 시중들의 역할 수행이 미흡했기 때문이다.[39] 주요 제자들이 지원했으나 석가모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난다는 침묵을 지켰고, 그 이유를 묻자 석가모니가 적임자를 선택할 것이라 답했다. 석가모니는 아난다가 응답하도록 선택했다.[46]

아난다는 물질적 이익을 받지 않고,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초대를 수락하고 교리에 대한 질문을 하며, 부재중에 가르친 내용을 반복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조건으로 시중 자리를 수락했다. 이는 사람들이 아난다를 신뢰하고 석가모니가 그를 동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석가모니는 동의했고, 아난다는 25년간 헌신적으로 시중 역할을 수행하며, 석가모니의 일상생활을 돕고, 대화의 화자 역할을 하며, 때로는 목숨을 걸고 보호하기도 했다.[3]

석가모니와 아난다의 관계는 따뜻하고 신뢰가 깊었다.[5] 석가모니가 아팠을 때 아난다도 병에 걸렸고, 석가모니가 나이가 들었을 때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한번은 데바닷타가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 석가모니를 해치려 했을 때, 아난다는 석가모니를 보호하기 위해 앞섰으나, 자비로 코끼리를 제압한 석가모니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난다는 중재자, 비서 역할도 수행하며, 메시지 전달, 소식 알림, 재가 신자 조언 등을 담당했다.[6] 석가모니의 양어머니 마하파자파티가 옷을 제공하려 했을 때, 아난다는 중재하여 석가모니가 옷을 받도록 설득했다.

석가모니는 아난다에게 가르침을 대신 요청하기도 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칭찬했다. 아난다는 말리카 여왕 등 통치 계급 사람들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7] 우데나 왕의 첩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옷을 선물 받았는데, 왕은 아난다를 탐욕스럽다고 비난했지만, 아난다는 옷의 재활용에 대해 설명하여 왕에게 다시 옷을 제공받았다. 베살리 방문 시, 아난다는 ''라타나 수타''를 낭송하여 도시의 문제를 해결했다. 영적 우정에 대한 가르침도 아난다에게 전해졌다.[8]

3. 2. 1. 유혹에 대한 저항

아난다는 외모가 매력적이었다고 한다.[9] 팔리 문헌에 따르면 한 비구니가 아난다에게 반하여 아난다를 방문하게 하려고 아픈 척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난다에게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다.[9] 다른 이야기에서는 찬달라 신분의 여성 프라크리티(중국에서는 摩登伽女|Módēngqiénǚ|마등가녀중국어로도 알려짐)가 아난다와 사랑에 빠져 어머니 마탕기를 설득하여 흑마술 주문을 사용하여 그를 매혹시키려 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아난다는 그녀의 집으로 유인되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부처의 도움을 요청했다. 부처는 프라크리티에게 인간의 몸의 혐오스러운 특성을 되돌아보라고 가르쳤고, 결국 프라크리티는 ''비구니''로 서품되어 아난다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10] ''수람가마 수트라''에 나오는 동아시아 버전의 이야기에서 부처는 아난다를 돕기 위해 만주스리를 보냈고, 만주스리는 다라니를 사용하여 마법의 매력을 무력화했다. 그 후 부처는 아난다와 다른 청중들에게 불성에 대해 계속 가르쳤다.

3. 2. 2. 여성 출가 허용



초기 경전에서는 초기 ''상가''(승가)에 여성을 포함시킨 것을 아난다의 공헌으로 기록하고 있다.[11]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15년 후, 붓다의 양어머니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붓다를 찾아와 최초의 불교 ''비구니''가 되기를 요청했다. 붓다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5년 후, 마하파자파티는 다시 붓다에게 요청했는데, 이번에는 붓다의 전 부인이었던 야쇼다라를 포함한 다른 사키야 여성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500km를 걸어와 지치고 우울한 모습이었고, 아난다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아난다는 붓다에게 여성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고, 붓다는 이를 인정했지만, 사키야 여성들의 출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난다는 붓다와 함께 마하파자파티가 붓다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린 시절 붓다를 어떻게 돌봤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22] 또한 아난다는 이전 붓다들도 ''비구니''를 서품했다고 언급했다. 결국, 붓다는 사키야 여성들의 출가를 허락했고, 이것이 ''비구니'' 교단의 시작이었다. 아난다는 붓다가 정한 일련의 규칙(''가루다르마'')을 받아들임으로써 마하파자파티를 출가시켰다. 이 규칙은 ''비구니'' 공동체가 ''비구''(승려) 공동체에 종속되는 관계를 설명한다. 아시아 종교학자 레이코 오누마는 붓다가 양어머니 마하파자파티에게 진 빚이 ''비구니'' 교단을 설립하는 데 있어서 붓다가 양보한 주된 이유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붓다가 여성의 출가를 망설였고, 아난다가 붓다의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해석한다. 인도학자이자 번역가인 I.B. 호너는 "이것은 그[붓다]가 논쟁에서 지나치게 설득당한 유일한 사례"라고 썼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붓다의 처음 거절을 결의를 시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4] 다른 학자들은 경전의 다른 구절들이 붓다가 처음부터 ''비구니'' 교단을 설립하려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어떻든, 붓다는 여성의 승가 수용 과정에서 아난다에게 이로 인해 붓다의 가르침의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라고 말했다.[12]

당시 불교 승가는 방랑하는 독신 남성들로 구성되었고, 많은 승가 제도가 없었다. 여성이 불교 독신 생활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성별 간의 불화와 유혹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루다르마''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가르침의 수명이 단축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13]

경전에 따르면, ''비구니'' 교단을 창건하는 데 아난다가 기여한 덕분에 그는 ''비구니'' 공동체에서 인기를 얻었다. 아난다는 종종 ''비구니''들을 가르쳤고,[15] 종종 여성들에게 출가를 권했으며, 그가 승려 마하카샤파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때, 여러 ''비구니''들이 그를 변호하려 했다. 인도학자 오스카 폰 히뉘버에 따르면, 아난다의 친''비구니''적 태도가 아난다와 마하카샤파 사이의 잦은 논쟁의 이유였을 것이고, 결국 마하카샤파는 아난다에게 제1차 불교 회의에서 여러 번의 위반 혐의를 씌우게 되었다.

3. 3. 붓다의 열반



팔리어 ''마하-빠리닙바나 숫타''는 부처가 아난다와 함께 라자가하에서 쿠시나라까지 마지막 1년 여행을 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쿠시나라에 도착하기 전, 부처는 우기 동안의 안거(vassa)를 베루가마에서 보냈는데, 기근으로 고통받았던 바이샬리 지역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여기서 팔십 세의 부처는 다시 한번 ''승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했다. 부처는 바이샬리에서 심각한 병을 앓았고, 몇몇 제자들이 크게 걱정했다. 아난다는 부처가 열반하기 전에 마지막 지침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부처는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르쳤으며, "닫힌 주먹"을 가진 스승처럼 비밀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아난다에게 승가가 지도자, 심지어 자신에게도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고, 다른 피난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잘 알려진 말을 이어서 했다.

부처는 초자연적인 성취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전한 겁으로 연장할 수 있다는 암시를 여러 번 주었지만, 아난다는 정신이 산만했고 그 암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아난다는 그 요청을 했지만, 부처는 이미 늦었다고 대답했고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라가 부처를 방문했고, 부처는 3개월 안에 죽기로 결심했다. 아난다는 이 말을 듣고 울었다. 그러나 부처는 아난다가 여러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훌륭한 시중이었다고 지적하며[46] 그를 위로했다. 만약 그가 그의 노력에 진지했다면, 그는 곧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는 아난다에게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은 무상하다고 지적했다. 즉,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한다.

부처의 마지막 날, 부처는 쿠시나라로 여행했다. 부처는 아난다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출산한 것과 같은 종류의 나무인 두 살 나무 사이에 누울 자리를 준비하게 했다. 그러고 나서 부처는 아난다에게 말라 씨족을 쿠시나라에서 초청하여 마지막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20] 돌아온 아난다는 부처에게 열반 후에 자신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물었고, 부처는 그것을 화장해야 한다고 대답하면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지침을 제시했다. 부처는 아난다가 직접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말라족에게 의식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21] 그러고 나서 아난다는 열반 후 신자들이 부처를 어떻게 기려야 하는지 질문을 계속했다. 부처는 사람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자신의 삶에서 네 가지 중요한 장소를 나열하여 답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불교 순례의 네 가지 주요 장소가 되었다. 부처가 열반하기 전에 아난다는 부처에게 더 의미 있는 도시로 옮길 것을 권했지만, 부처는 그 도시가 한때 위대한 수도였다고 지적했다. 아난다는 그러고 나서 부처가 열반한 후에 다음 스승이 누구가 될지 물었고, 부처는 자신의 가르침과 규율이 대신 스승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처는 자신의 열반 전에 몇 가지 지침을 주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전 마부인 찬나가 그의 동료 승려들에 의해 기피되어 그의 자만을 낮추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다. 부처는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하는 질문이 있는지 물어 모든 의심을 해소할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아난다는 현재 부처의 모든 제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넘어선 경지에 도달했다는 기쁨을 표현했다. 그러나 부처는 아난다가 믿음에서 말한 것이지 명상적 통찰력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했다. 부처는 또한, 현재 그를 둘러싸고 있는 500명의 승려들 중, 심지어 "가장 늦은" 또는 "가장 뒤떨어진" 자들조차도 ''수다원''의 초기 단계에 도달했다고 덧붙였다. 부처의 ''최종 열반'' 동안, 아누룻다는 부처가 최종 열반에 도달하기 전에 거친 단계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명상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난다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이는 그의 낮은 영적 성숙도를 나타냈다. 부처의 열반 후에 아난다는 몇 구절을 낭송하며 절박감을 표현하며 사건과 그 의미에 깊이 감동했다.

4. 제1차 결집

불교 경전에 따르면, 제1차 불교 결집은 라자가하에서 열렸다.[24] 부처열반에 든 후 첫 번째 우기에 의장 스님 마하카사파(Mahākāśyapa|마하카샤파sa)는 아난다에게 그가 들었던 설법을 암송하도록 요청했다.[24] 번뇌가 제자들의 기억을 흐리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깨달음을 얻은 제자(''아라한'')만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하는 규칙이 있었다. 그러나 아난다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에[24] 마하카사파는 아난다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아난다가 결집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규칙에 예외를 두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난다는 굴욕감을 느꼈지만, 결집 전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행사 전날 밤,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가 잠시 누워 쉬기로 결정했고,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아난다는 "4가지 전통적인 자세"(걷기, 서기, 앉기, 눕기) 중 어느 자세에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제자로 알려졌다. 다음 날 아침, 아난다는 땅속으로 뛰어들어 결집 자리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업적을 수행했다.[24]

제1차 결집은 아난다가 설법을 암송하고, 어떤 것이 진본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기 위해 자문했을 때 시작되었다.[24] 마하카사파는 아난다가 열거한 각 설법에 대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설해졌는지 물었고,[25] 결집 회의는 아난다의 기억과 암송이 정확하다는 데 동의했다.[24] 그 후 경전(Sutta Piṭaka)(Sutta Piṭaka|숫타 피타카pi, Sūtra Piṭaka|수트라 피타카sa)가 최종 확정되었다.[24] 아난다는 이 결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 경전에 따르면 그는 84,000가지의 가르침 주제를 기억했는데, 이 중 82,000개는 부처가 설했고, 나머지 2,000개는 제자들이 설했다.[24]

많은 초기 불교 설법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Evaṃ me sutaṃ|에വം 메 수탕pi, Evaṃ mayā śrutam|에വം 마야 스루탐sa)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불교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의 말이다.[26] 그는 직접적인 경험을 했고, 그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24] 아난다가 기억한 설법은 하이마바타(Haimavāta), 다르마굽타카(Dharmaguptaka) 및 사르바스티바다(Sarvāstivāda)의 경전 전통에 따르면, 아비담마 피타카(Abhidhamma Piṭaka)도 포함한다.[24]

스투파, 당시 라자가하라고 불렸던 현재의 라지기르에 위치

4. 1. 결집에서의 비판

텍스트에 따르면, 제1차 불교 결집은 라자가하에서 열렸다.[24] 부처가 열반에 든 후 첫 번째 우기에 의장 스님 마하카사파는 아난다에게 그가 들었던 설법을 암송하도록 요청했다.[24] 깨달음을 얻은 제자(''아라한'')만 결집에 참석할 수 있었으나, 아난다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에[24] 마하카사파는 아난다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난다가 결집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규칙에 예외를 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난다는 굴욕감을 느꼈지만, 결집이 시작되기 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행사 전날 밤,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가 잠시 누워 쉬기로 결정했고,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 날 아침, 아난다는 땅속으로 뛰어들어 결집 자리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인도 라자가하의 제타바나 사원. 아난다가 기억에서 암송한 부처의 각 설법에 대한 서론으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공식을 선언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


제1차 결집은 아난다가 설법을 암송하고, 어떤 것이 진본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기 위해 자문했을 때 시작되었다. 마하카사파는 아난다가 열거한 각 설법에 대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설해졌는지 물었고,[25] 결집 회의는 아난다의 기억과 암송이 정확하다는 데 동의했으며, 그 후 경전(Sutta Piṭaka)이 최종 확정되었다.

같은 회의에서 아난다는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죄 등으로 승가 구성원들에게 기소되었다.[27] 그는 승가의 규율 위반 사항 중 어떤 것을 무시할 수 있는지 부처에게 구체적으로 질문하는 것을 잊은 죄, 부처의 가사를 밟은 죄 등으로 기소되었지만, "존경하는 연장자 스님들의 의견을 믿고" 공식적으로 참회하기로 동의했다. 여성 출가와 관련하여 아난다는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오랫동안 그를 돌봐준 부처의 양어머니였기 때문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답했다.

4. 2. 말년과 죽음

초기 불교 경전에는 아난다의 죽음에 대한 날짜가 없지만, 중국 순례 승려 법현 (337~422 CE)에 따르면 아난다는 120세까지 살았다.[36] 그러나 후기의 연대기에 따르면 아난다는 75~85세까지 살았을 것이다. 불교 연구 학자 L. S. Cousins는 아난다의 죽음을 부처의 열반 20년 후로 추정했다.[36]

아난다는 생의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주었다. 물라사르바스티바다의 기록에 따르면, 아난다는 젊은 승려가 한 구절을 잘못 낭송하는 것을 듣고 그에게 조언했다. 그 승려가 이 사실을 그의 스승에게 보고하자, 스승은 "아난다는 늙었고 기억력이 감퇴했다..."라고 반대했다. 이것은 아난다가 최종 열반에 도달하게 했다. 그는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관리"를 그의 제자 사나바시에게 넘겨주고 갠지스 강으로 떠났다.[37] 그러나 팔리어 경전에 따르면, 아난다는 죽기 직전에 그의 마지막 순간을 베살리에서 보내기로 결심하고 로히니 강으로 갔다. 물라사르바스티바다 버전에서는 이를 확장하여 그가 강에 도착하기 전에 선지자인 마즈한티카를 만나고 (이전의 예언을 따라) 그의 추종자 500명을 만났으며, 그들은 불교로 개종했다고 전한다. 어떤 자료에서는 아난다가 부처의 메시지를 그에게 전했다고 덧붙인다. 아난다가 강을 건너는 동안, 그의 죽음을 목격하고 유물로서 그의 유해에 관심이 있었던 아자타사투 왕(Ajātaśatrū|아자타사트루sa)가 그를 따랐다. 아난다는 한때 아자타사투에게 그가 죽을 때 그에게 알리겠다고 약속했고, 그에 따라 아난다는 그에게 알렸다. 그러나 강의 다른 쪽에서는 베살리의 리차비족 그룹이 같은 이유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리어 경전에도 관심 있는 두 그룹이 있었지만, 두 그룹은 사키야족과 콜리야족이었다. 아난다는 강의 어느 쪽에서 죽든 관련 당사자 중 한쪽을 화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38] 따라서 그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 공중으로 솟아올라 공중에서 명상을 하고, 그의 몸은 불 속으로 들어가 그의 유물이 강의 양쪽 기슭에 떨어지게 하거나, 어떤 버전에서는 4조각으로 쪼개지게 했다. 이런 식으로 아난다는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을 기쁘게 했다. 물라사르바스티바다 버전을 포함한 다른 버전에서는 그의 죽음이 공중에서가 아니라 강의 한가운데 있는 바지선에서 일어났다. 유해는 아난다의 뜻에 따라 둘로 나누어졌다.[39]

아육왕경 권7, 아육왕전 권4, 법현의 불국기, 또한 현장대당서역기 등에 따르면, 그는 마가다국과 바이샬리국의 리차비족(리차비=바지국) 사람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고 하며, 그는 자신의 사후에 유골이 쟁탈될 것을 우려하여 갠지스 강 중류에서,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트루 왕과 리차비족이 함께 온 후에, 배 안에서 허공으로 상승하여 화광삼매에 들어 120세에 입멸했고, 그 유골을 각각 이분하여 양 기슭에 떨어뜨렸다는 전설이 있다. 각국의 왕은 그 유골을 받들어 탑을 건립했다고 한다.

오른쪽에서 명상하는 승려와 왼쪽에서 해골 반쪽, 무릎을 꿇은 왕관을 쓴 인물과 왕관을 쓴 인물 위에 우산을 들고 있는 두 번째 인물이 있는 부조
아난다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적으로 복원된 인도 부조. 전통적인 불교 설화에 따르면 그는 강 양쪽에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유물을 남기고 로히니 강 위 공중에서 최종 열반에 도달했다.

5. 평가와 유산

아난다는 부처의 가장 중요한 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30] ''앙구타라 니까야''와 ''상윳타 니까야''의 제자 목록에서 아난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자주 언급되며, 행실, 타인에 대한 배려, 기억력, 박식함, 결단력에서 으뜸으로 꼽혔다.[2][32][31] ''마하빠리닙바나 숫타''에는 부처가 열반 직전 아난다를 칭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는 친절하고 이타적이며 대중적이고 사려 깊은 인물로 묘사된다.[32] 부처는 승려와 재가 신자들이 아난다를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듣는 것을 기뻐했으며, 아난다는 비서와 같은 조직적인 기술로도 유명했다.[33]

숲 속에서 눈을 비비는 수도승.
아난다의 동 자바 부조, 울고 있는 모습 묘사


부처상과 함께, 아난다와 마하카샤파가 양쪽에 위치한 사원
마하야나 도상학에서 아난다는 종종 부처의 오른쪽에, 마하카샤파와 함께 왼쪽에 배치되어 묘사된다.


두 명의 승려가 있는 그림, 한 명은 중앙 아시아적인 특징, 엄지 손가락을 검지 손가락에 대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동아시아적인 특징,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다.
8-9세기 중국 회화, 조각난 천으로 만들어진 가사를 입은 두 명의 승려 묘사. 팔리어 전통에 따르면 아난다는 붓다 승려의 가사를 쌀 농경지의 구조를 기반으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아난다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많이 들은 자"(산스크리트어: , p=Duowen Diyi중국어)로 불렸으며,[46] "달마의 보물"(, 산스크리트어: )로 알려졌다.[2] 여기서 ''달마''(산스크리트어: )는 부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6]

문학적으로 아난다는 종종 계몽되지 않은 제자로서 대조적인 인물[34] 역할을 하며, 부처를 섬기는 데 헌신하고 사리푸타의 죽음에 슬퍼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아난다는 웅변가였으며,[6] 자아와 명상에 대해 가르쳤다. ''Atthakanāgara Sutta'', ''Bhaddekaratta Sutta''(), ''Sekha Sutta'', ''Subha Suttanta'' 등 많은 불교 텍스트가 아난다에게 귀속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아난다는 10대 제자 중 한 명이며,[43] 부처의 가르침을 전한 계보의 두 번째 조사로 여겨진다. 마하카샤파가 첫 번째, Majjhantika 또는 Saṇavāsī[44]가 세 번째이다.

아난다는 ''비구니'' 공동체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비구니''들의 존경을 받았다. 5-6세기 중국과 10세기 일본에서는 아난다를 기리는 텍스트가 작성되었고, 일본에서는 ''게카''(悔過중국어)라는 참회 의식을 통해 그를 기렸다. 13세기까지 일본 여러 수녀원에서 아난다 숭배가 성행했다.

팔리 율장 텍스트는 불교 승복 디자인을 아난다에게 귀속시키는데, 그는 마가다 쌀 농경지 구조를 기반으로 표준 승복 모델을 디자인했다. 또한 ''paritta'' 암송 중 물 뿌리기 관습, 보리수 사용 등도 아난다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Kāliṅgabodhi Jātaka''에는 아난다가 아난다 보리수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5. 1. 한국 불교에의 영향

아난다는 부처의 정통 가르침을 전달하는 중재자로 묘사된다.[29] 인도학자 리차드 곰브리치는 비구 수자토와 비구 브라말리의 주장을 따라, "팔리 경전의 많은 부분이 부처의 제자인 아난다와 제1차 결집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부처의 말씀', 즉 ''붓다-바차나''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말한다.

6. 등장 작품


  • 리하르트 바그너는 1856년에서 1858년 사이에 아난다와 낮은 계급의 소녀 프라크리티에 관한 전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대본 초고를 썼다. 그는 ''Die Sieger''라고 불릴 작품의 단편적인 산문 스케치만 남겼지만, 이 주제는 그의 후기 오페라 ''파르지팔''에 영감을 주었다.[51] 이 초고는 작곡가 조나단 하비가 2007년 오페라 바그너의 꿈에서 사용했다.[50]
  •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아난다와 프라크리티에 관한 전설을 ''찬달리카''라는 단편 산문극으로 만들었다. ''찬달리카''는 영적 갈등, 계급, 사회적 평등을 다루며, 인도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다.[52][53]
  • 서유기에도 석가여래의 제자로서 가섭과 함께 등장한다. 다만, 둘이서 삼장법사에게 뇌물을 요구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에도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지만, 그 캐릭터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 개그 만화 『세인트☆영멘』에서도 십대 제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기독교의 사도 요한과 사이가 좋다.

참조

[1] encyclopedia Ananda Springer-Verlag
[2] encyclopedia Ananda https://books.google[...] ABC-CLIO 2004
[3] 서적 A Concise Encyclopedia of Buddhism https://books.google[...] Oneworld Publications 2013
[4] 간행물 Les débuts de la prédication du Buddha selon l'Ekottara-Āgama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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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문서 これは日本の[[曹洞宗]]で顕著である。禅宗でも正法は阿難が付法したとすることもある。通教的には仏教は[[ジャイナ教]]のジナと同様、過去仏(七仏とも四仏ともされる)と釈迦との直接的な関係は説いておらず、付法について論議されることはない。
[55] 서적 差別の超克――原始仏教と法華経の人間観 講談社
[56] 서적 초기불교――붓다의 사상을 더듬다 2018
[57] 문서 인명사전 > 세 계 인 명 > ㅇ > 아난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8] 웹사이트 阿難陀(아난타) http://buddha.donggu[...] 불교 사전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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