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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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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틸라는 5세기 유럽을 지배한 훈족의 왕이다. 그의 이름의 기원은 여러 설이 존재하며, 동게르만어, 튀르크어족, 튀르크-몽골어족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 기록은 로마인에 의해 기록되었기에 객관적인 정보를 얻기 어려우나, 프리스쿠스의 기록이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434년 블레다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며, 블레다가 사망한 후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고 막대한 공물을 얻었으며, 서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갈리아에서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453년 결혼식 날 밤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제국은 붕괴되었다. 아틸라는 서구에서는 잔혹한 침략자로, 헝가리에서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영웅으로 숭배받았으며, 문화적으로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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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머리에 왕관을 쓰고 오른손에 칼, 왼손에 구슬을 들고 있는 수염을 기른 왕의 금색 묘사
아틸라 왕 (Chronicon Pictum, 1358)
칭호훈족 제국의 왕이자 추장
재위 기간434년–453년
선임자블레다와 루가
후임자엘라크, 덴기지크, 에르나크
출생일기원후 406년경
사망일기원후 453년경 (46–47세)
배우자크레카와 일디코
아버지문트주크
이름
로마자 표기Attila
영어Attila
일본어アッティラ
고트어Attila
독일어Etzel
노르드어Atli
의미끔찍한 자
통치
종교(정보 없음)

2. 어원

'아틸라'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아틸라라는 이름이 동게르만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틸라'가 '작은 아버지'를 뜻하는 고트어 또는 게피드어 단어 'atta'에 지소사 '-ila'를 붙여 파생된 것으로 본다. '작은 늑대'를 뜻하는 울필라스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19세기 초 야코프 그림빌헬름 그림 형제가 처음으로 고트어 어원설을 제안했다.

오멜리안 프리차크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튀르크어족 기원설을 주장한다. 프리차크는 '아틸라(Ἀττίλα)'가 튀르크어 *''es'' (위대한, 오래된)와 *''til'' (바다, 대양)에 접미사 /a/가 붙어 만들어진 복합 칭호-이름으로, '바다의, 보편적 통치자'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J. J. 미콜라는 튀르크어 'āt'(이름, 명성)과의 연관성을 제시했다.

H. 알토프는 터키어 'atli'(기마병, 기병)나 'at'(말)과 'dil'(혀)와 관련이 있다는 설을 제기했다. M. 스내달은 아틸라의 이름이 튀르크-몽골어 'at', 'adyy/agta' (거세마, 군마)와 터키어 'atlı'(기마병, 기병)에서 유래하여 "거세마의 소유자, 군마 제공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게르하르트 되르퍼는 조지 6세가 그리스식 이름을, 술레이만 1세가 아랍식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인이나 아랍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며, 아틸라가 훈족 기원이 아닌 이름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훈족이 다민족 연합체였고, 아틸라의 이름 역시 다양한 언어적 배경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3. 역사 기록과 사료

아틸라에 대한 역사 기록은 훈족의 적대 세력이었던 로마인들이 그리스어라틴어로 작성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아틸라와 같은 시대 사람들이 그의 삶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이 중 단편적인 부분들만 남아있다. 프리스쿠스는 비잔틴 제국의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449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사절단 일원으로 훈족 궁정에 파견되어 아틸라를 직접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편향된 시각을 가졌을 수 있지만, 그의 저술은 아틸라의 삶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주요 자료이며, 그의 외모를 기록한 유일한 인물이다. 프리스쿠스는 430년부터 476년까지의 후기 로마 제국 역사를 8권으로 저술했다.

프리스쿠스의 작품은 현재 단편들만 남아있는데, 6세기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와 요르다네스가 자신의 저술에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특히 요르다네스의 《고트족의 기원과 업적》에는 프리스쿠스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있으며, 훈족 제국과 그 이웃에 대한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기도 하다. 요르다네스는 아틸라 사후 한 세기 동안 아틸라와 훈족의 유산을 묘사하고 있다. 같은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상이었던 마르켈리누스 코메스 또한 훈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관계를 기록했다.

교회 기록들은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내용이 산재되어 있고 6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여러 번 필사되면서 진위 여부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주의해야 한다. 12세기 헝가리 작가들은 훈족을 영웅적인 조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특정 역사적 요소를 숨기고 자신들의 전설을 추가하기도 했다.

훈족의 문학과 지식은 구전으로 전해졌으며, 서사시와 낭송된 시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었다. 이러한 구전 역사의 단편들은 훈족의 이웃이었던 스칸디나비아인과 게르만인들이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기록한 문학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아틸라는 《니벨룽겐의 노래》, 다양한 에다사가와 같은 여러 중세 서사시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고고학 조사를 통해 훈족의 생활 방식, 예술, 전쟁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이 밝혀졌다. 몇몇 전투와 공성전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아틸라의 무덤과 그의 수도 위치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4. 생애

아틸라는 434년부터 453년 죽을 때까지 18년 동안 유럽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으며, 그의 제국은 중부 유럽에서 흑해, 도나우강에서 발트해까지 이어졌다. 그는 삼촌 루아가 죽자 형 블레다(Bleda)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다만, 블레다가 실질적인 왕이고 아틸라는 2인자였다는 설도 있다.

447년, 아틸라는 남하하여 모에시아를 지나 동로마 제국 영토로 다시 침공했다. 고트족 군 사령관 (마기스테르 밀리툼) 아레네기스크로스 휘하의 로마군은 우투스에서 아틸라와 싸웠지만 패배했다. 훈족은 저항을 받지 않고 트라키아까지 발칸 반도를 약탈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총독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성벽이 재건되었고, 새로운 방어선이 구축되어 살아남았다.

449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그중에는 역사학자 프리스쿠스가 있었다. 프리스쿠스는 사절을 대접하는 호화로운 연회에서 아틸라의 식기만 매우 검소하고, 그의 행동이 청렴했다고 기록했다.[36]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사절 중에 자객을 숨겨 보냈지만, 암살은 실패했다.[37][38] 아틸라는 동로마의 사절을 벌하지 않고 정중하게 돌려보냈다.[39]

450년 7월, 테오도시우스 2세가 붕어하고, 마르키아누스가 뒤를 이었다. 군인 출신의 신제는 강경책을 사용하여 공세 지불을 중단했다.[40]

45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로 진격하여 오를레앙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카탈라우눔 전투(샬롱 전투)에서 서로마 장군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서고트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퇴각했다.[54]

452년, 아틸라는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약탈했다.[56][57] 베네치아는 사람들이 이러한 공격을 피해 베네토 석호의 작은 섬으로 피난하면서 형성되었다.[56][57] 교황 레오 1세만토바 근교 민치오 강변에서 아틸라를 만나 이탈리아에서 퇴각하고 평화를 맺기로 약속을 받았다.[61]

453년 초, 아틸라는 일디코와의 결혼 연회 중 코피를 흘리고 의식을 잃고 질식사했다.[66] 이탈리아를 떠난 후, 아틸라는 도나우 강을 건너 궁전으로 돌아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곧 사망했다.

4. 1. 초기 생애와 배경

훈족이 알란족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 요한 네포무크 가이거 (1805–1880)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1870년대 조각.


훈족볼가강 동쪽에서 나타나 370년서유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라시아 유목민 집단이다.[3] 이들은 기마 궁술과 투창에 능숙했다.[3] 훈족은 서유럽에 도착하기 전 정착 단계를 밟고 있었지만, 주요 영양 공급원이 가축에서 생산된 고기와 우유인 유목 전사 사회였다.[3]

훈족의 기원과 훈족어는 수세기 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3] 일부 이론에 따르면, 적어도 지도자들은 현대의 추바시어와 가장 가까울 수 있는 튀르크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3] ''유럽 민족 백과사전''은 "훈족, 특히 서쪽으로 이주한 훈족은 중앙 아시아 튀르크, 몽골, 우그리아 계통의 혼합이었을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3]

아틸라의 아버지 문주크는 5세기 초 훈족 제국을 공동 통치한 왕 옥타르와 루가의 형제였다.[3] 이러한 양두체제는 훈족에게 되풀이되었지만, 이것이 제도화되었는지, 관습이었는지, 아니면 가끔 발생한 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 아틸라의 가문은 고귀한 혈통이었지만, 왕족 왕조를 구성했는지는 불분명하다.[3] 아틸라의 출생일은 논쟁의 대상이다.[3] 언론인 에릭 데쇼트와 작가 헤르만 슈라이버는 395년을, 역사가 이아로슬라프 레베딘스키와 고고학자 카탈린 에셔는 390년대에서 5세기 첫 10년 사이를, 여러 역사가들은 406년을 제시했다.[3]

아틸라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성장했다.[3] 그의 백성은 최근에 유럽에 도착한 유목민이었다.[3] 이들은 370년대에 볼가강을 건너 알란족의 영토를 병합한 후, 카르파티아 산맥과 다뉴브강 사이의 고트족 왕국을 공격했다.[3] 훈족은 매우 기동성이 뛰어난 민족이었고, 기마 궁수들은 무적이라는 평판을 얻었으며, 게르만족은 그들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3]

4. 2. 공동 통치

434년, 루길라(루아 또는 루가라고도 함) 왕이 사망하면서, 그의 조카인 브레다와 아틸라가 훈족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형제는 즉위하자마자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사절과 도망자(주로 로마 측에 고용된 훈족 병사[24]) 송환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 다음 해, 아틸라와 브레다는 마르구스(현 포자레바츠)에서 훈족의 관습에 따라 기마 상태로 제국 사절단과 회견을 가졌고[25], 로마 측은 도망자들을 송환할 뿐만 아니라, 루아 왕에게 바치던 공물을 두 배인 금 700로마 파운드 (250kg)로 하고, 시장을 훈족 상인에게 개방하며, 로마인 포로 1명당 8 솔리두스 금화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에 동의하는 등 훈족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었다.[26] 송환된 도망자 중 2명의 왕족 소년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26][27] 훈족은 조약에 만족하여 동로마 영토에서 물러나, 아마도 자국의 제국을 굳건히 하기 위해 헝가리 대평원으로 돌아갔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을 강화하고 최초의 해상 성벽을 건설했으며, 도나우 강을 따라 국경 방어선을 구축했다.

436년에는 부르군트 왕국을 침공하여 군다하르가 이끄는 부르군트 군을 전멸시켰다.[28]

여성과 아이를 유린하는 훈족 기병. 드 뇌빌의 그림, 19세기。


그 후 몇 년 동안 훈족은 사산 왕조를 침략했기 때문에 로마는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아르메니아에서 사산 왕조에게 패배하여 동쪽으로의 침략을 포기하고 다시 관심을 서유럽으로 돌렸다. 440년, 마르구스의 주교가 훈족 왕족의 무덤을 파헤쳐 재물을 빼앗았다는 이유로 브레다와 아틸라는 죄인의 인도를 요구했고,[29] 이를 구실로 훈족은 다시 로마 국경에 나타나 조약에 의해 만들어진 도나우 강 북안의 시장 상인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도나우 강을 건너 강가의 일리리아 여러 도시와 요새를 약탈했고, 모에시아(현 세르비아-불가리아)의 비미나키움(현 코슈트라츠)은 완전히 파괴되었다.[30] 훈족이 마르구스를 공격했을 때, 인도를 요구받던 주교는 몰래 훈족으로부터 목숨을 보장받고 성문을 열어 도시가 함락되었다.[30]

훈족이 도나우 강 방어선을 제압한 440년경,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서 로마 제국 아프리카 속주의 수도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있었고, 441년에는 사산 왕조의 야즈데게르드 2세가 아르메니아를 침략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가장 풍요로운 주이자 주요 식량 공급지였던 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발칸 반도의 군대가 동원되었고, 아틸라와 브레다가 일리리아를 거쳐 발칸으로 침공할 길이 열려 있었다. 마르구스와 비미나키움을 약탈한 훈족은 싱기두눔(현 베오그라드)과 시르미움을 점령했다.

소란은 442년에도 계속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소환하고, 전쟁 자금으로 신화폐를 대규모로 발행했다. 이로 인해 그는 훈족의 요구를 거부해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브레다와 아틸라는 443년의 전쟁에서 이에 응했다.[31] 훈족은 도나우 강을 따라 공격하여 라티아라(현 알칼)의 군사 거점을 유린하고 공성 추와 공성탑을 사용하여 (훈족에게는 최신 군사 기술이었다) 나이수스(현 니시)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니샤바 강을 따라 진군하여 세르디카(현 소피아), 필리포폴리스(현 플로브디프) 그리고 아르카디오폴리스를 점령했다. 훈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 밖에서 동로마 군과 조우하여 이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서 마침내 멈췄다. 다른 동로마 군도 칼리폴리스(현 겔리볼루)에서 패배했고, 더 이상 대처할 군대가 없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패배를 인정하고, 측근 아나토리우스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강화 조건은 이전 조약보다 더 가혹해져서, 황제는 침략 시 조약 불이행의 배상으로 금 6000로마 파운드 (2000kg)의 지불을 인정했다. 공물의 연간 금액은 3배로 늘어나 금 2100로마 파운드 (700kg)가 되었다. 게다가 로마인 포로의 몸값은 1인당 12 솔리두스 금화로 인상되었다. 요구는 당분간 충족되었고, 두 훈족 왕은 그들의 제국 내로 물러났다.

4. 3. 단독 통치

445년경, 블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아틸라는 훈족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5] 아틸라는 447년에 다시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모에시아를 거쳐 남쪽으로 진격했다. 고트족 출신 마기스테르 밀리툼 아르네기스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우투스 전투에서 아틸라에게 맞섰지만 패배했다. 훈족은 저항 없이 발칸 반도를 약탈하며 테르모필레까지 진격했다.[6]

콘스탄티노플은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오리엔템 제논의 이사우리아 군대와 콘스탄티누스의 개입으로 보호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지진으로 손상된 성벽을 재건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칼리니쿠스는 그의 저서 《성 히파티우스의 생애》에서 훈족의 침략으로 트라키아의 백 개 이상의 도시가 점령당하고 콘스탄티노플이 위험에 처했으며, 수많은 살인과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6]

4. 4. 서로마 제국 침공

450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호노리아는 황제를 몰아내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추방된 후, 콘스탄티노폴 궁궐에 감금되어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받고 있었다. 아틸라는 이 요청을 구혼으로 해석하고,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다. 서로마 측은 이를 거절했으나, 아틸라는 이를 무시하고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46][47][48]

갈리아 침공 당시 훈족의 경로


451년,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로 진격하여 오를레앙까지 진출했다. 6월 초 아틸라는 오를레앙을 포위했다.[53] 그러나 카탈라우눔 전투(샬롱 전투)에서 서로마 장군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서고트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퇴각했다.[54] 이 전투에서 서고트 왕 테오도리쿠스 1세가 전사했고, 아에티우스는 서고트족의 압도적인 승리를 우려하여 추격하지 않았다.[55]

카탈라우눔 전투. 양군의 무장은 중세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틸라는 프랑크족 족장의 사망 이후 후계자 다툼에 개입하기도 했다. 아틸라는 장남을, 아에티우스는 차남을 지지했다.[49]

4. 5. 이탈리아 침공과 죽음

452년, 아틸라는 황녀 호노리아와의 결혼을 다시 주장하며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약탈했다.[56][57] 베네치아는 사람들이 이러한 공격을 피해 베네토 석호의 작은 섬으로 피난하면서 형성되었다.[56][57] 아퀼레이아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우디네 시는 아틸라가 아퀼레이아 시가지가 불타는 것을 보기 위해 언덕 위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에서 기원했다.[56][57] 밀라노에는 아틸라가 점령 후 궁전 벽화를 바꾸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56][57]

『로마로 다가오는 야만족』 울피아노 체카 그림, 19세기


갈리아의 아에티우스는 지원을 오지 않았고, 근위 사령관 아에티우스(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는 동명이인[58])가 적은 병력으로 기습을 가하며 아틸라의 진격을 늦추었다.[59][56][60] 아틸라는 결국 포강에서 멈췄는데, 아마도 역병과 기아가 그의 진영에 발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59][56][60]

thumb와 아틸라의 만남』, 라파엘로 그림.]]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바람에 따라, 교황 레오 1세만토바 근교 민치오 강변에서 아틸라를 만나 이탈리아에서 퇴각하고 평화를 맺기로 약속을 받았다.[61] 아키텐의 프로스페르는 이 만남에 대한 신뢰할 만한 묘사를 남겼다.[62] 후대의 기록[62]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도움을 받은 교황이 아틸라를 물러서게 했다고 전한다. 중세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교황은 아틸라에게 평화롭게 로마를 떠나면 그의 후계자가 성스러운 왕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63] 알라리크 1세의 운명에 대한 미신적인 공포가 아틸라를 주저하게 했다고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말했다.[64][65]

thumb의 만남 삽화. 1360년경]]

이탈리아를 떠난 후, 아틸라는 도나우 강을 건너 궁전으로 돌아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453년 초에 사망했다.[10]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일디코와의 결혼 연회 중 코피를 흘리고 의식을 잃고 질식사했다고 기록했다.[66] 다른 견해로는 과음이나 식도 정맥류로 인한 내출혈 가능성이 제기된다.[67]

연대기 편자 마르켈리누스 코메스는 아틸라가 아내에게 암살되었다고 기록했다.[68] 볼숭가 사가와 고 에다 역시 아내 구드룬에 의한 죽음을 언급한다.[69]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유언비어로 여기지만, 마이클 A. 밥콕은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아틸라의 죽음 뒤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70]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아틸라가 남자들의 피로 애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71][72] 요르다네스와 카시오도루스에 따르면, 기사들이 아틸라의 텐트 주위를 뛰어다니며 장송가를 읊었고, 성대한 연회와 함께 매장지에서 애가(''strava'')를 읊었다.[71][72] 전설에 따르면 아틸라는 금, 은, 철의 삼중 관에 안치되었고, 강바닥에 묻혔으며, 매장지 위치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일꾼들은 살해되었다.[71][72]

아틸라의 아들들 엘라크, 덴기지크, 이르나크는 유산을 놓고 다투었고, 454년 네다오 전투에서 패배하여 궤멸되었다.[73]

5. 외모와 성격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 일원으로 아틸라를 직접 만났던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틸라는 키가 작고 넓은 가슴과 큰 머리를 가졌으며, 작은 눈, 얇은 수염을 가진 외모였다.[34] 콧날이 낮고 피부는 검었으며, 수염은 얇고 회색이 섞여 있었다. 이러한 외모는 그의 출신을 보여주는 특징이었다.[34] 그는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으며,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6. 유산과 평가

아틸라는 서구권에서 '신의 채찍'이라 불리며 잔혹한 침략자로 묘사되지만, 헝가리에서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영웅으로 숭배받는다.[74] 그의 제국은 사후 급속히 붕괴되었으나, 그 명성은 유럽 역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11]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작품, 창백한 말을 탄 아틸라


헝가리 박물관에 전시된 아틸라 조각상


'아틸라'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다수의 학자들은 동게르만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며, '작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고트어 또는 게피드어 명사 'atta'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반면, 오멜리안 프리차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튀르크어족 기원을 주장하며, '바다의, 보편적 통치자'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아틸라에 대한 역사 기록은 대부분 훈족의 적대 세력에 의해 그리스어라틴어로 작성되어 어려움이 따른다. 비잔틴 제국의 외교관이자 역사가였던 프리스쿠스는 449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사절단 일원으로 훈족 궁정에 파견되었으며, 그의 저술은 아틸라의 삶에 대한 중요한 1차 사료이다.

아틸라의 아들들(엘라크, 뎅기지크, 에르나크)은 제국 분할을 시도했으나, 네다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훈족의 지배는 막을 내렸다.

북유럽에서는 아틸라가 위대하고 총명하며 관대한 왕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는데,[74] 이는 "핀란드는 훈족이 만든 나라"라는 설이 널리 믿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7. 문화적 영향

아틸라는 유럽의 역사, 문학, 예술 작품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그리스, 스칸디나비아 등 유럽 전역에서 아틸라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만들어졌다.[15] 특히 아틸라는 세 편의 노르드 사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는 훈족의 왕 에첼로 등장한다. 그러나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아틸라는 대부분 잔인한 야만인 왕으로 기억되어 왔다. 주세페 베르디는 아틸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846년 오페라를 발표했다.

아틸라의 이름은 여러 언어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대 노르드어로는 아틀리(Atli)와 아틀레(Atle), 중세 고지 독일어 (니벨룽겐의 노래)로는 에첼(Etzel), 고대 영어로는 애틀라(Ætla), 헝가리어로는 아틸라(Attila), 아틸라(Atilla), 에텔레(Etele)가 있으며, 이 중 아틸라(Attila)가 가장 널리 쓰인다. 터키어로는 아틸라(Attila), 아틸라(Atilla), 아틸라이(Atilay), 아틸라(Atila)가 있고, 카자흐어에서는 아딜(Adil)과 에딜(Edil), 몽골어에서는 아딜("같음/유사함") 또는 에딜("사용하다")이 있다.

왕좌에 앉은 아틸라 (그림 연대기, 1358)


헝가리의 중세 연대기 전통은 훈족과 헝가리인이 스키타이에서 두 번 나왔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며, 훈-헝가리 연속성을 강조했다.[15] 헝가리 국가 창시 왕조인 아르파드 왕조는 위대한 훈족 지도자 아틸라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11][16][17] 게스타 헝가로룸에서 헝가리 대공 아르파드는 "도나우 강과 티서 강 사이에 뻗어 있는 땅은 나의 조상인 강력한 아틸라의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헝가리의 마차시 (1458–1490)는 "두 번째 아틸라"로 묘사되는 것을 기뻐했다.[20] 요하네스 투로치는 ''크로니카 헝가로룸''에서 아틸라를 찬양하며, "신의 채찍"이라는 특징을 후대 헝가리 작가들에게 소개했다. 투로치는 아틸라를 헝가리의 마차시 왕의 모델로 삼아, "세상의 망치"를 현실화하려 했다.[15]

아틸라와 레오 교황의 만남 (Chronicon Pictum, 1358)


중세 시대 익명의 연대기 작가는 교황 레오와 아틸라의 만남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도 참석했다고 묘사했는데, 이는 "당시 시대의 취향에 맞게 계산된 기적적인 이야기"였다.[15] 이러한 신격화는 르네상스 예술가 라파엘과 조각가 알가르디에 의해 예술적으로 묘사되었으며,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이를 "교회 전통의 가장 훌륭한 전설 중 하나"를 확립했다고 칭찬했다.[15] ''그림 연대기''에 따르면, 교황은 아틸라에게 로마를 평화롭게 떠나면 그의 후계자 중 한 명이 헝가리의 성스러운 왕관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일부 역사서와 연대기에서는 아틸라를 위대하고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며, 그는 ''아틀라크비다'',[15] ''볼숭 사가'',[15] ''아틀라말''[15] 등 세 개의 노르드 텍스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폴란드 연대기''는 아틸라의 이름을 ''아퀼라''로 표기한다.[21]

1812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아틸라에 관한 오페라를 쓸 생각을 하고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에게 대본을 써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국 쓰이지 않았다.[15] 1846년, 주세페 베르디는 아틸라의 이탈리아 침공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썼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은 빌헬름 2세가 1900년 연설에서 아틸라의 군사적 역량을 칭찬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불렀다고 자바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린''은 전한다.[15]

미국 작가 세실리아 홀랜드는 1973년 소설 ''아틸라의 죽음''에서 아틸라를 강력한 배경 인물로 등장시켜 그의 삶과 죽음이 젊은 훈족 전사와 게르만족 전사인 주인공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도록 묘사했다.

현대 헝가리와 터키에서 "아틸라"와 터키식 변형인 "아틸라"는 남성 이름으로 흔히 사용된다. 헝가리에서는 여러 공공 장소의 이름이 아틸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에는 10개의 아틸라 거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부다 성 뒤의 중요한 거리이다. 1974년 터키군이 키프로스를 침공했을 때, 작전은 아틸라의 이름을 따 "아틸라 계획"으로 명명되었다.[15]

1954년 유니버설 인터내셔널 영화 ''이교도의 표적''에는 잭 팔란스가 아틸라 역으로 출연했다.

아틸라를 소재로 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종류제목제작 국가제작 연도아틸라 역 배우
영화침략자이탈리아·프랑스1954년앤서니 퀸
영화이교도의 깃발미국1954년잭 팰런스
영화박물관이 살아있다미국2006년패트릭 갤러거
텔레비전 드라마아틸라 더 훈미국2001년제라드 버틀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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