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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베스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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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상인이자 탐험가로, 신대륙에 대한 탐험과 기록으로 유명하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공증인으로 일했으며, 메디치 가문과 관계를 맺으며 지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사업을 하던 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하기도 했다. 베스푸치는 여러 차례 신대륙 탐험에 참여했으며, 그가 쓴 편지들을 통해 신대륙이 아시아의 일부가 아닌 새로운 대륙임을 주장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대륙이 명명되었으나, 그의 항해와 관련된 기록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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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베스푸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런던 영국 박물관에 있는 (1590–1637년경) 사후 초상화, 크리스피진 반 데 파스 장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됨
이름아메리고 베스푸치
로마자 표기Amerigo Vespucci
스페인어 이름Américo Vespucio
라틴어 이름Americus Vespucius
포르투갈어 이름Américo Vespúcio
출생일1454년 3월 9일
출생지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사망일1512년 2월 22일
사망지세비야, 카스티야 왕국
알려진 업적유럽인들에게 신세계가 아시아가 아닌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네 번째 대륙임을 증명, 아메리카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함.
직업상인, 탐험가, 지도 제작자
친척아고스티노 베스푸치 (사촌)
시모네타 베스푸치 (사촌의 배우자)
서명
추가 정보
국적피렌체, 이탈리아

2. 생애

피렌체 출신으로, 공증인 나스타조 베스푸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삼촌 조르조 안토니오로부터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1479년 메디치 가문과 관계를 맺고 은행에서 근무하기도 했다.[19] 1491년 말 스페인 세비야로 파견되어 메디치 가문의 사업을 도왔고, 그곳에서 콜럼버스의 항해 준비에 관여했던 주오나토 베라르디 상사에 들어갔다.

1497년부터 1498년까지 첫 번째 탐험 항해에 참여했다고 주장했으며, 1499년부터 1500년까지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아마존강 하구를 지나 남쪽으로 탐험했다. 1500년 말부터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항해에 나섰고, 1501년부터 1502년까지 이어진 탐험에서는 리우데자네이루 만과 리오데라플라타 강 하구까지 남하했다.

이러한 탐험을 통해 그는 자신이 도달한 곳이 아시아가 아닌 '신대륙'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19][20] 그는 1503년 《신대륙(Mundus Novusla)》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자신의 주장을 널리 알렸고,[21][22] 1505년경 발간된 서한집에서도 이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17]

그의 주장은 독일의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에게 영향을 주었다. 발트제뮐러는 1507년 출판한 《세계지리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la)》에서 베스푸치의 업적을 기려 그의 이름 '아메리고(Amerigo)'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새로운 대륙을 '아메리카(America)'라고 명명했다.[23][24] 처음에는 남아메리카만을 지칭했으나, 1538년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가 세계 지도에서 북미와 남미 모두를 '아메리카'로 표기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두 대륙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굳어졌다.[25]

베스푸치는 1505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왕실에 봉사했으며, 1508년에는 신대륙 항해를 관리하는 수석 항해사(piloto mayor|필로토 마요르es)로 임명되었다. 그는 1512년 세비야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2. 1. 출신과 초기 이력

베스푸치 가문 문장


기를란다요가 그린 베스푸치 가문 초상화 속 젊은 아메리고 베스푸치


이탈리아 피렌체 페레톨라에 있는 베스푸치의 생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454년 3월 9일,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피렌체 공화국의 교외 지역 페레톨라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는 피렌체 화폐교환업자 조합의 공증인이었던 나스타지오 베스푸치였고, 어머니는 리사 디 조반니 미니였다. 아메리고는 이들 사이의 셋째 아들이었다.[5] 벌(vespa)에서 유래한 성을 가진 베스푸치 가문은 플라토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플라토 문 근처의 오니산티 지구에 거주했다. 이 지역에는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집도 있었는데, 이들은 베스푸치 가문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오니산티 교회에 있는 기를란다요가 그린 베스푸치 가문의 단체 초상화에는 어린 아메리고의 모습도 담겨 있다.

베스푸치 가문은 다른 베스푸치 일족들과 함께 산타 루치아 도니산티 지역에 살았으며, 오니산티 교회에 가족 예배당을, 인근 산 조반니 디 디오 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1380년 시모네 디 피에로 베스푸치 설립). 아메리고의 직계 가족은 특별히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 그의 할아버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피렌체 정부인 '시뇨리아'의 총무로 36년간 재직했고, 아버지 나스타지오 역시 시뇨리아와 다른 조합 사무소에서 일했다. 또한 베스푸치 가문은 당시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19]

아메리고의 두 형 안토니오와 지롤라모는 교육을 위해 피사 대학교로 보내졌다. 안토니오는 아버지를 따라 공증인이 되었고, 지롤라모는 교회에 들어가 로도스의 성 요한 기사단에 합류했다. 아메리고는 형들과 달리 대학에 가지 않고 피렌체에 남아,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이자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자 중 한 명이었던 삼촌 조르조 안토니오 베스푸치에게 교육을 받았다. 삼촌 조르조 안토니오는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문화계 인사 모임에도 속해 있었다. 아메리고는 삼촌에게서 라틴어그리스어를 배우고, 문학, 철학, 수사학 등 인문학 전반과 플라톤을 비롯한 고전 고대 문학, 그리고 그의 경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지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후기 저술들은 고대 그리스의 우주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와 스트라보, 그리고 동시대 피렌체 천문학자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의 연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메디치 가문 추방 후 피렌체 지도자가 된 피에로 소데리니는 조르조 안토니오 밑에서 아메리고와 함께 공부한 사이였으며, 아메리고는 훗날 자신의 저서 《네 번의 항해》(Quattro viaggi)를 그에게 헌정했다.

1478년, 아메리고의 또 다른 삼촌인 구이도 안토니오 베스푸치가 피렌체 대사로 프랑스에 파견될 때, 24세였던 아메리고를 비서관으로 동행시켰다. 그의 정확한 역할은 불분명하지만, 수행원이나 개인 비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볼로냐, 밀라노, 리옹 등지에서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파리에서의 주된 목표는 나폴리와의 전쟁에서 피렌체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루이 11세는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고 외교 사절단은 별다른 성과 없이 1481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아메리고는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과학 공부를 계속했다. 148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메디치 가문의 분가 당주인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메리고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보다 12살이 많았지만, 삼촌 조르조 안토니오의 지도 아래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정 관리인으로 시작하여 점차 책임이 커져 국내외에서 가문의 여러 사업 거래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베스푸치 가문의 세미라미데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와 결혼했을 때 아메리고가 그의 집사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지리학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가, 유명한 지도 제작자 가브리엘 데 발세카가 만든 고가의 지도를 구입하기도 했다.

1489년,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는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메디치 은행 대리점에 부정 의혹이 제기되자 아메리고를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를 맡겼다. 아메리고는 세비야에서 스페인에 오래 거주한 피렌체 출신 장네트 베랄디를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지점장 후보로 추천하고 1~2개월 체류 후 피렌체로 돌아왔다. 귀국길에 피사에 들러 130 두카트로 항해 지도를 구입했다. 이후 베랄디 상회가 세비야 메디치 은행 대리점이 되면서, 아메리고는 1491년 말 다시 세비야로 파견되어 베랄디 상회에 합류하고 메디치 가문의 사업을 감독하게 되었다.[19] 당시 세비야에는 메디치 가문이 운영하는 사업이 있었고, 베랄디 상사는 콜럼버스가 1차 및 2차 신대륙 항해를 준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2. 2. 스페인에서의 활동과 항해

1491년 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메디치 가문의 사업을 위해 스페인 세비야로 파견되었다.[19] 당시 세비야에는 메디치 가문 소유의 사업체가 있었고, 베스푸치는 그곳에서 피렌체 상인 지아노토 베라르디(Giannotto Berardi)가 운영하는 상사에 합류했다. 이 상사는 콜럼버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신대륙 항해 준비에 관여했던 곳이다. 1488년, 베스푸치의 후원자였던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는 기존 세비야 사업 대리인에게 불만을 느껴 베스푸치를 파견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고, 그 결과 베라르디가 메디치 가문의 세비야 사업을 인수하게 되었다. 베라르디는 메디치 가문 사업 외에도 아프리카 노예 무역과 선박장비업을 개인적으로 운영했다.

1492년까지 베스푸치는 세비야에 정착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을 위한 일부 사업을 계속하면서도, 점차 베라르디의 다른 활동, 특히 콜럼버스 항해 지원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베라르디는 콜럼버스의 첫 항해에 50만 마라베디를 투자했고, 두 번째 함대 보급 계약을 따냈으나 큰 수익을 얻지는 못했다. 1495년, 베라르디는 왕실과 이사벨라섬(히스파니올라)에 보급선 12척을 보내는 계약을 맺었지만, 그해 12월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다.

베스푸치는 베라르디의 유언 집행자로서 회사의 채무를 정리하고 미지급된 의무를 이행했으나, 결국 14만 마라베디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는 서인도 제도로 가는 선박에 보급품을 계속 제공했지만, 콜럼버스의 탐험이 기대만큼의 이익을 내지 못하고 그의 후원자였던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메디치마저 다른 피렌체 대리인을 이용하면서 사업 기회는 줄어들었다.

세비야에 정착한 후, 베스푸치는 스페인 여성 마리아 세레소(Maria Cerezo)와 결혼했다.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베스푸치의 유언장에 따르면 유명한 군 지휘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딸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는 그녀가 곤살로의 사생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관계가 베스푸치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리아 세레소는 남편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베스푸치가 부재중일 때는 그의 법적 대리인 역할을 했다.

베스푸치의 탐험 항해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그가 쓴 소수의 편지에 의존한다. 이 문서들의 저자, 정확성, 진위 여부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그가 참여한 항해 횟수, 항로, 역할, 업적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그의 항해는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번호가 매겨지지만, 일부 항해의 실재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다.

'''첫 번째 항해 (주장, 1497년 ~ 1498년)'''

베스푸치가 알몸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만나는 모습
1497년에 있었다고 주장되는 베스푸치의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첫 만남을 묘사한 그림 (테오도르 드 브리 판화, 약 1592년)


1504년 피렌체 관리 피에로 소데리니에게 보낸 편지(이듬해 출판됨)에는 베스푸치가 1497년 5월 10일 스페인을 출발하여 1498년 10월 15일에 귀환한 신세계 항해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6] 이 항해는 베스푸치의 항해 중 가장 논란이 많은데, 이 편지가 유일한 기록이며 많은 역사가들이 실제 항해 여부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편지의 저자와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위작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온두라스 근처에서 시작하여 북서쪽으로 870리그(약 약 5133.79km)를 항해했다는 주장은 멕시코를 가로질러 태평양에 도달하는 경로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를 비롯한 초기 역사가들은 베스푸치가 후속 항해의 관측 결과를 이 가상의 첫 항해 기록에 포함시켜 콜럼버스보다 먼저 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보이려 했다고 의심했다.[7] 다른 학자들은 이 편지가 베스푸치가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다른 편지들을 접한 미상의 저자가 작성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7] 이 편지는 베스푸치의 이름으로 그의 생전에 널리 유포된 두 편지 중 하나이다.[8]

'''두 번째 항해 (1499년 ~ 1500년)'''

베스푸치의 두 번째 항해. 피에트로 파치니가 피렌체에서 1505년경 출판한 소데리니에게 보낸 편지 초판에 묘사됨


1499년, 베스푸치는 스페인의 허가를 받아 알론소 데 오헤다가 함대 사령관, 후안 데 라 코사가 수석 항해사로 참여한 탐험대에 합류했다. 이 탐험의 목적은 콜럼버스가 세 번째 항해에서 발견한 신대륙 해안을 탐험하고, 특히 그가 보고한 진주 광산을 찾는 것이었다. 베스푸치와 그의 후원자들은 함대의 네 척 중 두 척의 자금을 지원했다. 항해에서 그의 정확한 역할은 불분명하다. 베스푸치 자신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경험 부족을 고려할 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대신 함대 투자자들을 대표하는 상업 대표였을 수 있다. 수년 후 오헤다는 "모리고 베스푸체(Morigo Vespuche)"가 탐험대의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고 회상했다.

함대는 1499년 5월 18일 스페인을 떠나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현재의 수리남이나 프랑스령 기아나 근처 남아메리카 해안에 도착했다. 여기서 함대는 둘로 나뉘었다. 오헤다는 두 척을 이끌고 북서쪽 베네수엘라 방면으로 향했고, 베스푸치가 탄 나머지 두 척은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 항해에 대한 기록은 베스푸치의 기록만 남아있다. 그는 자신들이 아시아 해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남쪽으로 계속 가면 프톨레마이오스가 언급한 "카티가라 곶"을 돌아 인도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바다로 약 40.23km나 민물을 쏟아내는 아마존강과 파라 강(Pará River)이라는 거대한 강 두 개를 지났다. 약 40리그(약 약 241.40km)를 더 남하했으나, 강한 역류에 부딪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했다. 베스푸치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파리아만과 현재의 베네수엘라 해안까지 항해했다. 이후 오헤다와 다시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여름이 끝날 무렵, 그들은 보급과 수리를 위해 서인도 제도의 히스파니올라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로 향했다. 히스파니올라를 떠난 후, 바하마에서 원주민 232명을 노예로 포획하는 습격을 벌인 뒤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 항해 (1501년 ~ 1502년)'''

원주민이 사람을 해체하고, 신체 부위가 매달려 있는 모습
신세계에서 최초로 알려진 식인 풍습 묘사. 150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판된 베스푸치의 ''Mundus Novus'' 판본을 위해 요한 프로샤우어가 제작한 판화


1500년 말경부터 베스푸치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1501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대서양 서쪽의 땅(훗날의 브라질)을 조사하기 위한 원정대를 파견했다. 국왕은 이 땅의 범위를 확인하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른 포르투갈 영유권(경계선 동쪽)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미 탐험가이자 항해사로 명성을 얻고 있던 베스푸치는 곤살루 코엘류가 지휘하는 이 원정대에 항해사로 고용되었다.

코엘류의 함대(3척)는 1501년 5월 리스본을 출발하여 카보베르데에서 보급을 받았다. 그곳에서 전년도에 브라질을 발견했던 카브랄의 귀환 함대와 마주쳤다. 코엘류 함대는 6월 카보베르데를 떠났고, 이후의 탐험 기록은 베스푸치의 기록에만 의존한다. 1501년 8월 17일, 원정대는 남위 약 6° 지점에서 브라질 해안에 도착했다. 상륙 후 적대적인 원주민과 충돌하여 선원 한 명이 살해당하고 식인되는 사건을 겪었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면서 더 우호적인 원주민들을 만나 교역을 하기도 했다. 남위 23° 지점에서 만(灣)을 발견하고, 당시 날짜가 1502년 1월 1일이었으므로 리우데자네이루(1월의 강)라고 이름 붙였다. 1502년 2월 13일, 함대는 해안을 떠나 귀환길에 올랐다. 베스푸치는 당시 위도를 남위 32°로 기록했으나, 현대 학자들은 남위 25°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귀환 항해에 대한 기록은 베스푸치가 남긴 천문 관측과 이동 거리에 대한 정보가 혼란스러워 명확하지 않다.

이 탐험 후 베스푸치는 콜럼버스와 달리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신대륙'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19][20] 귀국 후 1503년에 《신대륙(Mundus Novus)》이라는 지리서를 출판하여 자신의 주장을 알렸고,[21][22] 1505년경 발간된 서한집에서도 이를 거듭 강조했다.[17]

'''네 번째 항해 (주장, 1503년)'''

1503년, 베스푸치는 포르투갈 왕실을 위해 다시 곤살루 코엘류가 이끄는 탐험에 참여하여 브라질 동부 해안을 탐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에 코엘류가 항해를 이끈 증거는 있지만, 베스푸치가 참여했다는 독립적인 확인 자료는 없다. 이 항해에 대한 유일한 정보원은 소데리니 서한이며,[17]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 서한의 저자가 베스푸치가 아니라고 보며 그의 참여 여부를 불확실하게 여긴다. 또한 이 항해 기록에 보고된 날짜와 세부 사항에도 문제점이 지적된다.

'''아메리카 명명의 유래'''

독일의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1507년 《세계지리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을 출판하면서, 베스푸치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의 이름 '아메리고(Amerigo)'를 따서 새로운 대륙의 이름을 '아메리카(America)'라고 명명했다.[23][24] 발트제뮐러는 직접 밝히기를, 유럽(Europa), 아시아(Asia), 아프리카(Africa) 등 기존 대륙 이름이 여성형 명칭임을 고려하여, 발견자의 이름을 기리되 다른 대륙 이름처럼 '-a'로 끝나는 여성형 이름 '아메리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24] 처음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를 남미 대륙에만 사용했으나,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가 1538년 발간한 《세계전도》에서 북미와 남미를 모두 아울러 '아메리카'로 표기하면서 이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다.[25]

베스푸치는 이후 세비야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2. 3. 신대륙 개념 제시

탐험 후 콜럼버스와는 달리 그가 발견한 땅이 아시아가 아닌 '신대륙'일 수 있다고 판단했고,[19][20] 귀국하여 1503년에 《신대륙(Mundus Novusla)》이라는 지리서를 출판하며 이런 사실을 알렸다.[21][22] 또한 1505년경에 발간한 서한집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거듭 강조했다.[17] 베스푸치는 1499년부터 1502년에 걸친 남아메리카 탐험에서 남위 50도까지 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이 땅이 아시아 최남단(말레이 반도, 북위 1도)이나 아프리카 최남단(남위 34도)보다 훨씬 남쪽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고, 기존에 알려진 구대륙과는 다른 새로운 대륙임을 확신했다. 당시에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신대륙》은 남아메리카 대륙만을 다루고 있었다. 그의 주장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대륙 세계관을 뒤흔드는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인문주의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베스푸치는 1502년(또는 1503년)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신대륙》의 기초가 됨)에서 다음과 같이 신대륙에 대한 확신을 드러냈다.

며칠 전에 저는 포르투갈의 가장 평화로운 국왕의 비용과 명령에 따라 우리가 탐색하고 발견한 새로운 지역에서 돌아온 것에 대해 자세히 편지를 썼습니다. 이 지역은 우리의 조상들이 전혀 알지 못했고, 오늘날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신대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합니다...1501년 8월 7일, 우리는 그 신대륙 해안에서 닻을 내리고, 엄숙한 기도와 미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우리는 그 신대륙이 섬이 아니라 대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1]


우리가 발견하고 탐험한 새로운 지역에서 돌아온 것에 관하여...우리는 그것을 새로운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그것에 대해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고대인들의 견해를 초월하는 것으로, 그들 대부분은 적도 너머 남쪽에는 대륙이 없고, 그들이 대서양이라고 명명한 바다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대륙이 존재한다고 단정 지었더라도, 그들은 그것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라고 많은 논거를 가지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이 거짓이고 진실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것이...나의 마지막 항해로 명백해졌다. 남쪽 지역에서 나는 유럽이나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보다 인구가 더 조밀하고 동물이 풍부한 대륙을 발견했고, 게다가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어떤 지역보다 온화하고 즐거운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설명에서 알게 될 것이다.


스트라다누스의 신세계 풍경화, 잠자는 아메리카를 깨우는 베스푸치를 묘사하고 있음.


1503년과 1505년 사이에 베스푸치의 이름으로 출판된 두 편의 기록(《신대륙》과 소데리니 편지)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소데리니 편지(1505)는 프랑스 로렌 공국의 생디에에서 활동하던 인문주의 학자 그룹(발터 루트, 마티아스 링만, 마르틴 발트제뮐러 등)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1506년 소데리니 편지의 프랑스어 번역본과 포르투갈 해양 지도를 입수하고, 이것이 고대부터 추측되어 온 '신세계' 또는 '반대편'이라고 확신했다. 소데리니 편지는 이 신대륙 발견의 공로를 베스푸치에게 돌리고 있었다.

1507년 4월, 링만과 발트제뮐러는 세계 지도를 첨부한 《세계지리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소데리니 편지의 라틴어 번역본이 포함되었으며, 링만은 서문에서 새로운 대륙의 이름을 제안했다.

저는 명석한 천재인 발견자 아메리고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을 누군가가 제대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여성의 이름을 받았으므로 적절한 형태는 아메리게(Amerigela), 즉 아메리고의 땅 또는 아메리카(Americala)가 될 것입니다.


발트제뮐러는 책의 부록으로 첨부된 세계 지도(발트제뮐러 지도)에 이 신대륙의 이름을 베스푸치의 라틴어 이름인 아메리쿠스 베스푸키우스(Americus Vespuciusla)를 여성형으로 바꾼 '아메리카'로 표기했다.[23] 이는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알린 베스푸치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24] 유럽(Europa), 아시아(Asia), 아프리카(Africa) 등 기존 대륙들의 명칭이 모두 여성형 라틴어 어미 '-a'로 끝나는 것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24] 발트제뮐러가 직접 밝힌 명명 이유는 다음과 같다.[24]

오늘날 지구의 여러 부분(구대륙)은 광범위하게 탐험되었는데, 그 중 새로운 대륙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명칭이 여자 이름에서 유래했음을 고려해볼 때, 내가 이 네 번째 대륙의 발견자인 아메리고(Amerigo)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고의 땅', 즉 '아메리게(Amerige)' 또는 '아메리카(America)'라고 부르는 데 대해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콜롬비아 엘 치코의 아메리고 베스푸치 기념상


《세계지리 입문》과 발트제뮐러 지도는 큰 성공을 거두며 빠르게 퍼져나갔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점차 새로운 대륙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를 남아메리카 대륙에만 사용했으나, 1538년 메르카토르가 제작한 세계 지도에서는 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 모두를 '아메리카'로 표기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두 대륙을 모두 가리키는 이름으로 굳어졌다.[25]

하지만 이후 발트제뮐러는 1513년에 제작한 새로운 지도에서 '아메리카' 대신 '미지의 땅'(Terra Incognitala)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콜럼버스를 발견자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콜럼버스의 지지자들이 베스푸치가 콜럼버스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비판한 것을 의식한 행동으로 보인다. 현대의 많은 역사가는 베스푸치 본인은 발트제뮐러의 지도나 '아메리카' 명명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으며, 논란이 된 소데리니 편지 역시 베스푸치가 직접 쓴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푸치의 편지(그것이 직접 쓴 것이든 아니든)가 유럽 사회에 신대륙의 존재를 알리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13]

2. 4. 말년

1505년 초, 베스푸치는 세비야로 돌아왔다. 탐험가이자 항해사로서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으며, 포르투갈에서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페르디난드 국왕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은 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의 가능성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1505년 2월, 베스푸치는 항해 문제에 대해 상의하라는 국왕의 소환을 받았다. 이후 몇 달간 그는 왕실로부터 봉급을 받았고, 4월에는 왕실 선포에 의해 카스티야와 레온의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1505년부터 1512년 사망할 때까지 베스푸치는 스페인 왕실에 봉사했다. 그는 인도로 향하는 배에 물품을 공급하는 선박 장비 담당자로 일했으며, "향신료 제도"로 향하는 함대의 선장직을 맡기도 했으나 이 항해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508년 3월, 그는 스페인의 해외 영토 무역을 관리하는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통상원)의 수석 항해사(piloto mayor|필로토 마요르es)로 임명되었다. 그는 연봉 5만 마라베디와 경비 2만 5천 마라베디를 받았다. 이 새로운 직책에서 베스푸치는 신대륙으로 항해하는 선원들의 훈련과 면허 발급을 책임졌으며, 각 항해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공식 표준 지도인 '파드론 레알'을 편찬하는 임무도 맡았다.

피렌체 오니산티에 있는 베스푸치 가족 묘


베스푸치는 1511년 4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다섯 명의 가정 노예를 포함한 자신의 소박한 재산을 대부분 아내에게 남겼고, 옷과 책, 항해 장비는 조카 조반니 베스푸치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아내 가족의 묘지에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복을 입고 묻히기를 원했다. 베스푸치는 1512년 2월 22일 세비야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베스푸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는 후임 수석 항해사의 봉급에서 공제되는 연금 1만 마라베디를 받았다. 그의 조카 조반니는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에 고용되었고, 이후 피렌체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기도 했다.

3. '아메리카' 명칭의 유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499년부터 1502년까지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험하며 남위 50도까지 내려갔다. 그는 이 탐험을 통해 자신이 발견한 땅이 아시아아프리카의 일부가 아닌,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신대륙'이라고 판단했다.[19][20] 이는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을 아시아의 일부라고 믿었던 것과는 다른 결론이었다. 베스푸치는 1503년 《신대륙(Mundus Novus)》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자신의 주장을 유럽에 알렸고,[21][22] 1505년경 발간된 서한집에서도 이를 다시 강조했다.[17]

이러한 베스푸치의 주장은 독일의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에게 영향을 주었다. 발트제뮐러는 1507년 《세계지리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과 함께 세계 지도를 출판하면서, 베스푸치의 공적을 기려 새로운 대륙에 그의 라틴어 이름 '아메리쿠스(Americus)'를 여성형으로 바꾼 '아메리카(America)'라는 이름을 붙였다.[23][24] 이는 유럽(Europa), 아시아(Asia), 아프리카(Africa) 등 기존 대륙들의 이름이 여성형 명칭이었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24]

처음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남아메리카 대륙에만 사용했지만, 1538년 지도 제작자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가 자신이 만든 세계 지도에서 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를 모두 포함하여 '아메리카'라고 표기하면서 이 명칭이 널리 퍼져 오늘날과 같이 굳어지게 되었다.[25]

3. 1. 발트제뮐러의 세계지도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탐험 후 콜럼버스와는 달리 자신이 탐험한 곳이 '신대륙'일 수 있다고 판단했고,[19][20] 귀국하여 《신대륙(Mundus Novus)》이라는 지리서를 1503년에 출판하며 이런 사실을 알렸다.[21][22] 또한 1505년경에 발간한 서한집에서도 이런 주장을 거듭 했다.[17]

독일의 지도 제작자였던 발트제뮐러는 1507년에 《세계지리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를 출판하며 아메리고의 의견을 반영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대륙의 명칭을 '아메리카'라 명명했다.[23] 발트제뮐러는 자신이 '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직접 밝혔다.[24]

:오늘날 지구의 여러 부분(구대륙)은 광범위하게 탐험되었는데, 그 중 새로운 대륙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명칭이 여자 이름에서 유래했음을 고려해볼 때, 내가 이 네 번째 대륙의 발견자인 아메리고(Amerigo)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고의 땅', 즉 '아메리게(Amerige)' 또는 '아메리카(America)'라고 부르는 데 대해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신대륙임을 처음으로 밝혀낸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24] '아메리고(Amerigo)'가 아니라 '아메리카(America)'로 한 것은, 유럽(Europa), 아시아(Asia), 아프리카(Africa) 등 다른 대륙들의 명칭이 '-a'로 끝나는 여성형이었기 때문이다.[24]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를 남미대륙에만 국한해서 사용했으나 메르카토르는 1538년에 발간한 《세계전도》에서 북미와 남미 모두를 지칭하여 '아메리카'로 표기했다. 이후 이것이 굳어져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25]

3. 2.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

독일의 지도 제작자였던 발트제뮐러1507년에 《세계지리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을 출판하며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의견을 반영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대륙의 명칭을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23] 발트제뮐러는 자신이 '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직접 다음과 같이 밝혔다.[24]

오늘날 지구의 여러 부분(구대륙)은 광범위하게 탐험되었는데, 그 중 새로운 대륙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명칭이 여자 이름에서 유래했음을 고려해볼 때, 내가 이 네 번째 대륙의 발견자인 아메리고(Amerigo)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고의 땅', 즉 '아메리게(Amerige)' 또는 '아메리카(America)'라고 부르는 데 대해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신대륙임을 처음으로 밝혀낸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24] '아메리고(Amerigo)' 대신 '아메리카(America)'라는 여성형 이름이 사용된 것은, 유럽(Europa), 아시아(Asia), 아프리카(Africa) 등 기존 대륙들의 명칭이 라틴어에서 '-a'로 끝나는 여성형 명사였기 때문에 이를 따른 것이다.[24] 발트제뮐러는 처음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남미 대륙에만 한정하여 사용했으나, 지도 제작자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1538년에 발간한 《세계전도》에서 북미와 남미를 모두 포괄하여 '아메리카'라고 표기했다. 이후 이 표기가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오늘날과 같이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25]

4. 항해 논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탐험 항해에 대한 증거는 거의 전적으로 그가 썼거나 그에게 귀속된 소수의 편지에 의존한다. 역사가들은 이 문서들의 저자, 정확성 및 진실성에 대해 크게 의견이 달랐다. 따라서, 수행된 항해 횟수, 항로, 베스푸치의 역할 및 업적에 대한 의견도 크게 다르다. 1490년대 후반부터 베스푸치는 역사 기록에 비교적 잘 기록된 두 번의 신세계 항해에 참여했다. 다른 두 번의 항해가 주장되었지만 증거는 더욱 문제가 있다. 전통적으로 베스푸치의 항해는 한 번 이상의 여행을 기각하는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로 불린다.

피렌체 관리 피에로 소데리니에게 보낸 1504년 편지는 다음 해에 출판되었는데,[6] 이 편지는 베스푸치가 1497년 5월 10일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1498년 10월 15일 귀환한 신세계 항해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이 항해는 베스푸치의 항해 중 가장 논란이 많은데, 이 서한이 유일한 기록이며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러한 항해가 실제로 있었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서한의 저자와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위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항해 기록의 불일치, 특히 온두라스 근처에서 시작하여 북서쪽으로 870리그(약 약 5133.79km)를 항해했다는 주장에 주목하는데, 이는 멕시코를 가로질러 태평양에 이르는 항로였을 것이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를 포함한 초기의 일부 역사가들은 베스푸치가 후대의 항해 관측 결과를 이 가상의 첫 번째 항해 기록에 포함시켜 콜럼버스보다 우선순위를 확보하고 대륙을 처음 발견한 유럽 탐험가로 자리매김하려 했다고 의심했다.[7] 학자 알베르토 마냐기(Alberto Magnaghi)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소데리니 서한이 베스푸치가 쓴 것이 아니라, 1499년과 1501년 아메리카로의 항해에 대한 베스푸치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보낸 개인 편지를 접한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7] 이 편지에는 1497년 항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소데리니 서한은 베스푸치에게 귀속되는 두 편의 서한 중 하나이며, 그의 생애 동안 편집되어 널리 유포되었다.[8]

1503년 베스푸치는 포르투갈 왕실을 위한 탐험에 참여하여 브라질 동부 해안을 다시 탐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무렵 코엘료가 이끄는 항해가 있었다는 증거는 있지만, 베스푸치가 참여했다는 독립적인 확인은 없다. 이 마지막 항해에 대한 유일한 자료는 소데리니 서한이다. 그러나 여러 현대 학자들은 베스푸치가 그 서한의 저자라는 것을 부정하며, 베스푸치가 이 여행을 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또한 이 항해에 대한 기록에 보고된 날짜와 세부 사항에도 어려움이 있다.

크리스피안 판 더 파세(Crispijn van de Passe)가 제작한 베스푸치 초상화, "브라질 땅의 발견자이자 정복자"라고 표기되어 있음


베스푸치는 "초기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수수께끼 같고 논란이 많은 인물"이라고 불려왔다. 이러한 논쟁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베스푸치 문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몇 번의 항해를 했을까? 항해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알아냈을까? 증거는 거의 전적으로 그에게 귀속되는 소수의 편지에 의존한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문서들을 분석했고,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1515년, 세바스찬 카보트는 베스푸치의 업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의 1497년 항해에 대해 의심을 표명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나중에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베스푸치가 거짓말쟁이이며 콜럼버스에게 돌아가야 할 공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1600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스푸치를 사기꾼으로 여기며 그의 명예와 명성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839년,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신중한 고려 끝에 1497년 항해는 불가능했지만 포르투갈이 후원한 두 번의 항해는 받아들였다. 훔볼트는 또한 베스푸치가 새로운 대륙을 만났다는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훔볼트에 따르면, 베스푸치(그리고 콜럼버스)는 아시아의 동쪽 끝에 도달했다고 믿고 죽었다. 베스푸치의 명성은 아마도 1856년 랄프 왈도 에머슨이 베스푸치를 세비야 출신의 "도둑"이자 "절인 야채 판매상"이라고 부르며 "부정직한 이름으로 세상의 절반을 세례받게 만든" 인물이라고 묘사했을 때 최저점에 달했을 것이다.

벽감 속 동상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외부의 베스푸치 동상


1857년 브라질 역사가 프란시스쿠 아돌푸 드 바르냐젠이 소데리니 편지에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썼을 때부터 여론이 다소 변하기 시작했다. 존 피스크와 앙리 아리스를 포함한 다른 역사가들이 베스푸치를 지지했다.

1924년, 알베르토 마냐기는 베스푸치의 저술과 관련 지도 제작에 대한 철저한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베스푸치가 1503년 ''신세계''(Mundus Novus)와 1505년 소데리니에게 보낸 편지를 저술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이 두 편지는 그의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두 편의 글이다. 그는 소데리니 편지가 베스푸치가 쓴 것이 아니라, 파렴치한 피렌체 출판업자들이 여러 자료 – 일부는 베스푸치의 것, 다른 일부는 다른 출처의 것 – 를 결합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마냐기는 원고 편지가 진본이며, 이를 바탕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항해만 사실이고 첫 번째와 네 번째 항해(소데리니 편지에만 나옴)는 날조라고 제안했다. 마냐기가 두 번의 항해라는 주장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지만, 로베르토 레벨리에는 모든 베스푸치의 편지의 진정성을 지지하고 그의 네 번의 항해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여정을 제안한 영향력 있는 아르헨티나 역사가였다.

다른 현대 역사가들과 대중 작가들은 베스푸치의 편지와 항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했으며, 두 번, 세 번 또는 네 번의 항해를 주장하고 그의 두 인쇄된 편지의 진정성을 지지하거나 부인했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세 원고 편지는 진본이라고 믿는 반면, 소데리니 편지에 묘사된 첫 번째 항해는 가장 많은 비판과 불신을 받는다.

두 번의 항해라는 논문은 프레드릭 J. 포흘(1944)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대중화되었고, 네 번의 항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한 헤르만 아르시니에가스(1955)에 의해 거부되었다. 루치아노 포르미시아노(1992)는 또한 마냐기의 논문을 거부했고(출판업자들이 아마도 베스푸치의 글을 조작했음을 인정하면서) 네 번의 항해 모두 진짜라고 선언했지만, 세부 사항(특히 첫 번째 항해)에서 아르시니에가스와 다르다. 새뮤얼 모리슨(1974)은 첫 번째 항해를 단호히 거부했지만 두 개의 출판된 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았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2007)는 진정성 문제를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부르며 첫 번째 항해는 아마 두 번째 항해의 다른 버전일 것이며, 세 번째 항해는 부인할 수 없고, 네 번째 항해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베스푸치는 생애 동안 네 번의 항해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2차와 3차 항해는 확실히 신빙성이 있지만, 1497년~1498년의 첫 번째 항해와 4차 항해에 대해서는 그 사건 자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게 되었다.[16]

5. 평가와 영향

독일의 지도 제작자였던 발트제뮐러1507년에 《세계지리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을 출판하며 아메리고의 의견을 반영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대륙의 명칭을 '아메리카'라 명명했다.[23]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24]

오늘날 지구의 여러 부분(구대륙)은 광범위하게 탐험되었는데, 그 중 새로운 대륙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명칭이 여자 이름에서 유래했음을 고려해볼 때, 내가 이 네 번째 대륙의 발견자인 아메리고(Amerigo)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고의 땅', 즉 '아메리게(Amerige)' 또는 '아메리카(America)'라고 부르는 데 대해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신대륙임을 처음으로 밝혀낸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24] '아메리고(Amerigo)'가 아니라 '아메리카(America)'로 한 것은, 유럽(Europa), 아시아(Asia), 아프리카(Africa) 등 기존 대륙의 명칭이 '-a'로 끝나는 여성형 명사였기 때문이다.[24]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를 남미대륙에만 국한해서 사용했으나, 메르카토르는 1538년에 발간한 《세계전도》에서 북미와 남미 모두를 지칭하여 '아메리카'로 표기했다. 이후 이것이 굳어져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25]

베스푸치는 "초기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수수께끼 같고 논란이 많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논쟁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베스푸치 문제"로 알려져 있다. 그가 몇 번의 항해를 했는지, 항해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알아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한 증거는 거의 전적으로 그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소수의 편지에 의존하는데, 많은 역사가들이 이 문서들을 분석했지만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1515년, 세바스찬 카보트는 베스푸치의 업적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1497년 항해에 대해 의심을 표명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바르톨로메오 데 라스 카사스는 베스푸치가 거짓말쟁이며 콜럼버스에게 돌아가야 할 공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1600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들이 베스푸치를 사기꾼으로 여기며 그의 명예와 명성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839년,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신중한 검토 끝에 1497년 항해는 불가능하지만 포르투갈이 후원한 두 번의 항해는 사실일 수 있다고 보았다. 훔볼트는 또한 베스푸치가 새로운 대륙을 만났다는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베스푸치와 콜럼버스 모두 아시아의 동쪽 끝에 도달했다고 믿고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베스푸치의 명성은 1856년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를 세비야 출신의 "도둑"이자 "절인 야채 판매상"이라 부르며 "부정직한 이름으로 세상의 절반을 세례받게 만든" 인물이라고 묘사했을 때 가장 낮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1857년 브라질 역사가 프란시스쿠 아돌푸 드 바르냐젠이 소데리니 편지에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베스푸치에 대한 여론이 다소 변하기 시작했다. 존 피스크와 앙리 아리스를 포함한 다른 역사가들도 베스푸치를 지지했다.

1924년, 알베르토 마냐기는 베스푸치의 저술과 관련 지도 제작에 대한 철저한 검토 결과를 발표하며, 베스푸치가 그의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두 편지인 1503년 ''신세계(Mundus Novus)''와 1505년 소데리니에게 보낸 편지를 직접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데리니 편지가 베스푸치가 쓴 것이 아니라, 파렴치한 피렌체 출판업자들이 여러 자료(일부는 베스푸치의 것, 일부는 다른 출처)를 결합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마냐기는 원본 편지들을 진본으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항해만 사실이며, 첫 번째와 네 번째 항해(소데리니 편지에만 나옴)는 날조라고 주장했다. 마냐기가 두 번의 항해설을 지지한 반면,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있는 역사가 로베르토 레벨리에는 모든 베스푸치 편지의 진정성을 지지하며 그의 네 번의 항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현대 역사가들과 대중 작가들은 베스푸치의 편지와 항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하며, 두 번, 세 번 또는 네 번의 항해를 주장하고 그의 두 개의 인쇄된 편지의 진정성을 지지하거나 부인했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세 개의 원고 편지는 진본이라고 믿는 반면, 소데리니 편지에 묘사된 첫 번째 항해는 가장 많은 비판과 불신을 받는다.

두 번의 항해설은 프레드릭 J. 포흘(1944)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대중화되었지만, 네 번의 항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한 헤르만 아르시니에가스(1955)에 의해 반박되었다. 루치아노 포르미시아노(1992) 역시 마냐기의 주장을 거부하고(출판업자들이 베스푸치의 글을 조작했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 네 번의 항해 모두 진짜라고 선언했지만, 세부 사항(특히 첫 번째 항해)에서는 아르시니에가스와 차이를 보였다. 새뮤얼 모리슨(1974)은 첫 번째 항해를 단호히 부정했지만 두 개의 출판된 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2007)는 진정성 문제를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첫 번째 항해는 아마 두 번째 항해의 다른 버전일 것이고, 세 번째 항해는 부인할 수 없으며, 네 번째 항해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베스푸치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의 실제 발견보다는 그의 편지가 미친 영향에 더 크게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그에게서 유래한 것을 당시 이탈리아 문학이 역사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례로 들었다.[13] 그의 두 편지가 출판된 후 몇 년 만에 유럽 대중은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베스푸치는 자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발견하고 탐험한 새로운 지역에서 돌아온 것에 관하여...우리는 그것을 새로운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그것에 대해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고대인들의 견해를 초월하는 것으로, 그들 대부분은 적도 너머 남쪽에는 대륙이 없고, 그들이 대서양이라고 명명한 바다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대륙이 존재한다고 단정 지었더라도, 그들은 그것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라고 많은 논거를 가지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이 거짓이고 진실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것이...나의 마지막 항해로 명백해졌다. 남쪽 지역에서 나는 유럽이나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보다 인구가 더 조밀하고 동물이 풍부한 대륙을 발견했고, 게다가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어떤 지역보다 온화하고 즐거운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설명에서 알게 될 것이다.

6. 베스푸치의 서한

베스푸치의 신세계 첫 항해, 소데리니에게 보낸 편지의 최초 간행본에서 발췌한 목판화


1499년 항해 중 남십자성을 천측의(astrolabe)로 찾는 베스푸치,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에 묘사된 사건. 그림에는 단테의 『신곡, 연옥편』의 관련 구절에 대한 베스푸치 자신의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베스푸치의 항해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소수의 편지에 의존한다. 이 편지들 중 두 개는 그의 생애 동안 출판되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주목받았다. 현재 여러 학자들은 베스푸치가 생전에 유포된 형태로 두 편의 출판된 편지를 직접 쓰지 않았다고 본다. 이들은 이 편지들이 부분적으로 실제 베스푸치의 편지를 바탕으로 한 위작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 신세계(Mundus Novus)(1503)

베스푸치의 옛 학교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이다. 원래 라틴어로 출판되었으며, 포르투갈 국기를 달고 1501년에서 1502년 사이에 브라질로 항해한 경험을 묘사한다. 이 문서는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어, 출판 후 1년 만에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12개의 판본이 인쇄되었다. 1550년까지 최소 50개의 판본이 발행되었다.

  • 소데리니에게 보낸 편지(1505)

피렌체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피에로 디 토마소 소데리니를 위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편지이다. 이탈리아어로 쓰여 1505년경 피렌체에서 출판되었다. 다른 편지들보다 선정적인 어조를 띠며, 베스푸치가 네 번의 탐험 항해를 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편지이다. 이 편지의 저자와 진위 여부는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널리 의심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대륙을 명명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 외 나머지 문서들은 미출판된 원고로, 베스푸치 사후 250년 이상이 지난 후에 연구자들이 발견한 손으로 쓴 편지들이다. 수년간의 논란 끝에, 세 개의 완전한 편지의 진위 여부는 1924년 알베르토 마냐니에 의해 설득력 있게 입증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것들을 베스푸치의 작품으로 받아들이지만, 기록의 일부 측면들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 세비야에서 보낸 편지(1500)

스페인을 위해 1499년에서 1500년 사이에 이루어진 항해를 묘사한다. 1745년 안젤로 마리아 반디니가 처음 출판했다.

  • 카보베르데에서 보낸 편지(1501)

1501년에서 1502년 사이에 포르투갈을 위해 시작된 항해 초기에 카보베르데에서 쓰였다. 1807년 발델리 보니 백작이 처음 출판했다. 리스본에서 카보베르데까지 여정의 첫 단계를 설명하고, 카보베르데 항구에서 우연히 만난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의 인도 항해에 대한 세부 정보를 담고 있다.

  • 리스본에서 보낸 편지(1502)

카보베르데에서 보낸 편지의 후속 내용으로, 1501년에서 1502년 사이에 포르투갈을 위해 이루어진 항해의 나머지 부분을 설명한다. 1789년 프란체스코 바르톨로치가 처음 출판했다.

  • 리돌피 단편(1502)

베스푸치에게 귀속되는 편지의 일부이지만, 그 내용 중 일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1937년 로베르토 리돌피가 처음 출판했다. 이 편지는 알려지지 않은 수신자가 제기한 질문이나 이의에 대한 반박으로 보이며, 베스푸치가 스페인을 위해 두 번, 포르투갈을 위해 한 번, 총 세 번의 항해를 했다는 언급이 있다.

참조

[1] 사전 Vespucci Collins Dictionary 2020-04-27
[2] 웹사이트 Borgo di Montefioralle {{!}} Comune di Greve in Chianti https://www.comune.g[...] 2024-08-24
[3] 웹사이트 Abita e muore nel castello di Montefioralle l'ultimo discendente dei Vespucci http://met.provincia[...] 2024-08-24
[4] 웹사이트 l Chianti tra natura e storia: Montefioralle https://www.italiauo[...] 2024-08-24
[5] 웹사이트 Amerigo Vespucci https://www.britanni[...] 2022-12-29
[6] 웹사이트 Amerigo Vespucci https://www.britanni[...] 2021-05-21
[7] 논문 The 'First' Voyage of Amerigo Vespucci in 1497–8 1952
[8] 논문 Amerigo Vespucci and His Alleged Awareness of America as a Separate Land Mass https://www.tandfonl[...] 2021-05-21
[9] 서적 Viaggi di Amerigo Vespucci: con la vita, l'elogio e la dissertazione giustificativa di questo celebre navigatore, di Stanislao Canovai ... https://books.google[...] Dai torchi di A. Tofani 1832
[10] 서적 Amerigo Vespucci https://books.google[...] Centro Tipografico Livornese editore 2013-07-01
[11] 서적 The Classical Tradition and the Americas Walter de Gruyter 1994
[12] 웹사이트 The Waldseemüller Map: Charting the New World https://www.smithson[...] 2009-12
[13] 서적 The Civilization of the Renaissance in Italy Phaidon Press 1944
[14] 서적 The Letters of Amerigo Vespucci, and Other Documents Illustrative of His Career https://archive.org/[...] Hakluyt Society 1894
[15] 서적 Amerigo: The Man Who Gave His Name to America Random House 2007
[16] 웹사이트 The Life of Amerigo Vespucci http://www.millersvi[...] 2010-02-28
[17] 웹사이트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 https://terms.naver.[...]
[18] 서적 삐딱하고 재미있는 세계 탐험이야기 푸른숲 2003
[19] 웹사이트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 https://100.daum.net[...]
[20] 서적 라틴아메리카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08
[21] 웹사이트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 https://terms.naver.[...] 2013-10-31
[22] 서적 탐험지도의 역사 새날 1995
[23] 웹사이트 아메리고의 땅 - 아메리카 https://terms.naver.[...] 2008-11-01
[24] 서적 라틴아메리카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08
[25] 서적 라틴아메리카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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