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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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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6대 쇼군으로, 1394년에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비뽑기를 통해 쇼군으로 선출되었으며, 쇼군 취임 후 막부 권위 부흥과 쇼군 친정 체제 부활을 목표로 했다. 명과의 무역 재개, 신사·사찰 세력에 대한 개입, 군사력 강화 등을 추진했으며, 슈고 다이묘를 통제하고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가혹한 통치로 '만인 공포'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441년 아카마쓰 미쓰스케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통치는 쇼군 권력의 강화와 함께 공포 정치를 특징으로 하며, 그의 사후 쇼군 권력은 약화되었지만, 그가 설립한 호코슈 제도는 이후 막부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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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위쇼군
재임 시작1428년
재임 종료1441년
이전아시카가 요시카즈
다음아시카가 요시카쓰
직위1엔랴쿠지 사원의 수석 사제
재임 시작11419년
재임 종료11428년
이전1쇼곤
다음1지벤
배우자히노 무네코
자녀아시카가 요시카쓰
아시카가 마사토모
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미
아버지아시카가 요시미쓰
어머니후지와라노 요시코
군주고하나조노
출생일1394년 7월 12일
사망일1441년 7월 12일
서명
인물 정보
씨족아시카가 씨 (아시카가 쇼군 가문)
시대무로마치 시대 중기
아명춘인 (슌인)
법명의원 (기엔)
이명추첨 쇼군, 제비 쇼군, 환속 쇼군, 악어소, 만인공포
계명보광원전선산도혜선정문 (후코인덴젠산도에젠조몬)
묘소주넨지
소젠지
안코쿠지 (수총)
관위종5위하
좌마두
종4위하
참의
좌근위중장
종3위
권대납언
우근위대장
종2위
우마료어감
종1위
내대신
좌대신
준화장학양원별당
증태정대신
가계
아버지아시카가 요시미쓰
어머니후지와라노 요시코
형제존만
호도와카기미
요시모치
요시쓰구
요시노리
요시아키라
호손
그 외
정실히노 무네코
계실오기마치산조 이사코
측실히노 시게코
고자이쇼노 쓰보네
고벤도노
히가시오카타
그 외
자녀요시카쓰
마사토모
요시마사
요시미
그 외
양자교켄 (이치조 가네요시의 아들)
요시카이 (니조 미쓰모토의 아들)
마사초 (구조 마사타다의 아들)
정치 경력
막부무로마치 막부 제6대 정이대장군 (재임: 에이쿄 원년 (1429년) ~ 가가키 원년 (1441년))

2. 생애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무로마치 막부 제6대 쇼군으로, 실추된 막부 권위와 쇼군 친정 체제의 부활을 목표로 했다.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모범으로 삼아 여러 정책을 펼쳤다.

1428년 형인 제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카즈가 사망하고, 후계자 지명이 없었기 때문에 각료들이 모여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에서 제비뽑기로 후계자를 정했다. 그 결과 요시노리가 쇼군으로 선출되었으며, '''제비뽑기 쇼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쇼군 취임 후 1429년 요시노부에서 요시노리(義教)로 이름을 바꾸고 정2품 쇼군이 되었다.[4]

요시노리는 신속고금화가집(新続古今和歌集)을 상주하고,[5] 명나라와의 감합무역을 재개하여 재정 정책을 정비했다.[4][11] 신사·사찰 세력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군사적으로는 호코슈(奉公衆)를 정비하는 등 군제 개혁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슈고 인사나 군사 면에서는 신명재판을 시행하지 않았지만,[29] 영지 다툼이나 신사 인사 문제 등이 발생하면 제비뽑기 등 신명재판(神明裁判)에 맡겼다. 이는 신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독재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왕권신수 의식에 따른 것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29]

엔랴쿠지와의 항쟁에서 요시노리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1433년 엔랴쿠지 승려들이 막부 부교의 부정을 비판하는 소송을 제기했을 때, 요시노리는 부교를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수습했다. 그러나 히에이 산 승려들이 온조지를 불태우는 사건을 일으키자, 요시노리는 직접 병사를 이끌고 히에이 산을 포위했다. 1434년에는 엔랴쿠지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와 내통하여 요시노리를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히에이 산 일대를 포위하고 물자 유입을 막았다. 결국 엔랴쿠지 측이 항복하고 막부 중신들도 사면을 요청했으나, 요시노리는 쉽게 승낙하지 않았다. 이후 엔랴쿠지 대표 4인을 참수하고, 근본중당에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요시노리는 히에이 산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는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1]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와의 갈등은 에이쿄의 난으로 이어졌다. 모치우지는 요시노리를 원망하고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1438년 모치우지의 적남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관례 때 요시노리를 무시하고 멋대로 이름을 붙여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5]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가 모치우지에게서 도망가자, 요시노리는 이를 기회로 1439년 모치우지 토벌군을 일으켰다. 모치우지는 대패하고 삭발했으나, 요시노리는 모치우지 일족을 살해했다.[6]

요시노리는 슈고 다이묘들의 가독 계승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자신의 심복을 당주로 밀어 지배력을 강화했다. 요시노리의 뜻을 거스른 잇시키 요시쓰라와 도키 모치요리는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 쇼초 도잇키와 후남조 세력의 반란 등 불온한 정치·사회 정세 속에서, 요시노리는 규슈 평정, 종교 세력 간섭, 후남조 토벌, 간토 평정, 슈고 다이묘 간섭 등에서 성과를 거두어 권력의 중앙 집권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요시노리는 쇼군 권력 강화에 집중하며 엄격하고 가혹한 면모를 보였다. 사소한 일에도 격노하여 혹독하게 처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요시노리의 가혹한 처벌 사례이다.

사건 발생 시기사건 내용
에이쿄 2년구게 히가시보조 마스나가(東坊城益長)가 웃었다는 이유로 영지 몰수 및 칩거[24]
에이쿄 4년투계 구경 때문에 쇼군 행렬 방해, 닭싸움 금지 및 교토 내 닭 추방
에이쿄 6년 이전측실 히노 시게코(日野重子)의 오빠 히노 요시스케(日野義資)에게 원한, 영지 몰수 및 근신 처분
에이쿄 6년 2월시게코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쓰(足利義勝) 출생, 요시스케 하례객 처벌
에이쿄 6년 6월 8일요시스케 참살, 소문 유포자 산기 다카쿠라 나가후지(高倉永藤) 이오섬(硫黄島) 유배
히에이 산 관련히에이 산 근본중당(根本中堂) 화재 언급 금지, 위반 시 참수
시녀 관련술 따르는 실수, 시녀 매질 및 삭발
닛신 관련설교 시도 니치렌슈(日蓮宗) 승려 닛신(日親) 끓는 솥에 머리 담그고 혀 절단
제아미 관련사루가쿠(猿楽)에서 간아미(音阿弥) 중용, 제아미(世阿弥) 냉대 및 사도(佐渡) 유배



이 외에도 헌상받은 매화 가지를 꺾거나 요리가 맛이 없다는 이유로 정원사와 요리사를 벌한 기록이 있다. 사다후사 친왕(貞成親王)은 《간몬닛키》(看聞日記)에 “'''만인이 공포에 떠나니, (소문은)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고 기록하여, ‘'''만인 공포'''’가 요시노리 시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가키쓰 원년(1441년) 6월 24일,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요시노리를 자신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했다. 연회가 한창일 때 요시노리는 암살당했다. (향년 48세)[15] 이를 가키쓰의 난이라 부른다. 이후 호소카와 모치쓰네·야마나 소젠 등이 아카마쓰 가문을 토벌하고 멸망시켰다.

요시노리는 압제적인 조치와 예측 불가능한 독재적인 변덕으로 악명이 높았다.[15]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요시노리가 자신의 사촌 아카마쓰 사다무라에게 영지를 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암살을 계획했다.[17] 이 사건으로 야마나 히로타카, 교고쿠 다카카즈, 오우치 모치요가 사망했다. 아시카가 가문은 일곱 번째 쇼군을 통해 이어졌지만, 쇼군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막부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19]

아시카가 요시노리 목상(도지인)

2. 1. 쇼군 취임

오에이 32년(1425년), 형인 제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아들인 제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카즈가 급사하고, 요시모치도 쇼초 원년(1428년)에 중태에 빠졌다. 요시모치는 후계자 지명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각료들이 모여 평정한 결과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에서 제비뽑기로 요시모치의 동생들 중에서 쇼군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1428년 1월 17일,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에서 제비를 뽑았고, 다음 날 요시모치가 사망한 후 개봉한 결과 기엔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제비뽑기는 신을 믿었던 중세의 일이었기 때문에 공정했을 것이라는 설과, 사전에 산보인 만사이가 손을 써서 부정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어쨌든 이 일로 무로마치 막부 제6대 쇼군으로 취임한 요시노리는 '''제비뽑기 쇼군'''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요시노리는 쇼군 취임을 즉각 승낙하지 않고, 취임 전에 간레이를 돌아가면서 차지하는 시바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 호소카와 가문 등 중앙 정부 실력자들에게 ‘쇼군을 뒷전에 두고 멋대로 행동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서를 받고 나서야 취임을 승낙하였다.

쇼초 2년(1429년) 3월 15일, 요시노리는 요시노부에서 요시노리(義教)로 이름을 바꾸고, 산기 고노에 주장으로 승진한 후, 정2품 쇼군이 되었다.[4] 이름을 바꾼 이유는 '요시노부'(よしのぶ)가 '세상을 참는다'는 뜻(世忍ぶ)으로 통한다는 소문이 있어 불쾌했기 때문이다.

2. 2. 막부 권위 부흥을 위한 노력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쇼군 취임 후 실추된 막부 권위와 쇼군 친정 체제의 부활을 목표로 하였다.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모범으로 삼아, 1428년 쇼코 천황 사후 천황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고하나조노 천황을 즉위시키고, 신속고금화가집(新続古今和歌集)을 상주하였다.[5] 산보인 만사이를 정치 고문으로 삼아 의례와 소송 절차를 요시미쓰 시대로 되돌리고, 기존 의결 기관 대신 쇼군이 직접 주재하고 참가자를 지명하는 비공식 평정인 고젠사타(御前沙汰)를 통해 간레이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다. 또한 명나라와의 감합무역을 재개하여 재정 정책을 정비하고,[4][11] 신사·사찰 세력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군사적으로는 쇼군 직할 치안 담당 기관인 호코슈(奉公衆)를 정비하는 등 군제 개혁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쇼초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가마쿠라 오산 주지를 멋대로 결정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이를 구실로 가마쿠라 구보 토벌을 시도했으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가문의 반대로 단념했다. 대신 오우치 모리미에게 규슈 정벌을 명하여, 모리미 사후 그의 조카 오우치 모치요가 야마나 가문의 도움을 받아 시부카와 가문, 쇼니 가문, 오토모 가문을 격파하고, 모치요를 규슈 단다이에 임명하여 규슈를 쇼군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2. 3. 신명재판 정치

요시노리는 영지 다툼이나 신사 인사 문제 등이 발생하면 직접 심리하지 않고 제비뽑기 등 신명재판(神明裁判)에 맡겼다. 이는 신의 권위를 빌려 중신과 구게 등의 반론을 제압하고 자신의 독재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자신이 신의 뜻에 의해 무로마치 쇼군이 되었다는 왕권신수 의식에 따른 것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29]

이러한 신명재판은 주로 영지 경제 문제와 조정 관련 문제에 한정되었고, 슈고 인사나 군사 면에서는 시행되지 않았다.[29]

요시노리는 "판결을 정직하게, 여러 사람의 소송을 포함하지 않도록 판결해야 한다"고 스스로 말하며 소송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쇼군 취임 직후,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부터 실질적인 기능을 상실한 평정중과 히키츠케토닌을 다시 설치하여 제도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한편, 재판에서는 "유키쇼"나 제비를 뽑는 등의 신판에 의한 재판을 하기도 했다. 이는 신의 권위에 의해 중신이나 구게 등의 의견을 물리치고, 자신의 독재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하며, 자신이 "신의 뜻"에 의해 무로마치 도노가 되었다는 왕권신수 의식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29]

에이쿄 2년(1430년)부터 2년간 요시노리가 직접 재판한 기록은 "고젠 라쿠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4. 엔랴쿠지와의 항쟁

본래 천태종 좌주였던 요시노리는 환속 후 바로 동생 기쇼를 천태종 좌주에 임명하고, 천태종 세력을 포섭하려고 했다. 에이쿄 5년(1433년) 엔랴쿠지 승려들이 막부 부교의 부정을 비판하는 12개조의 탄핵소송을 제기하였다. 만사이와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가 유화책을 주장했기 때문에, 요시노리는 부교를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히에이 산 승려들은 승소한 기세를 몰아 소송 결과에 동조하지 않고 온조지까지 불태우는 사건을 일으켰다. 요시노리는 격노하여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온조지 승병과 함께 히에이 산을 포위하였다. 이에 히에이 산 측이 즉각 항복하여 일단 화목이 성립되었다.[1]

그러나 이듬해(1434년) 7월, 엔랴쿠지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와 내통하여 요시노리를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요시노리는 즉시 오미 슈고 교고쿠 모치타카·롯카쿠 미쓰쓰나에게 명하여 히에이 산 일대를 포위하고 물자 유입을 막았다. 11월에는 군사가 히에이 산 산하 마을인 사카모토의 민가에 방화하여 주민이 히에이 산으로 피난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엔랴쿠지 측이 항복 의사를 밝히고 간레이 호소카와 모치유키 등 막부 중신들도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요시노리는 좀처럼 승낙하지 않았다. 12월 10일, 모치유키 등 막부 중신 5인이 “히에이 산을 사면하지 않으면, 저희의 교토 저택을 불태우고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강경하게 요청하였다. 12일, 요시노리는 뜻을 꺾고 화해에 응하여 엔랴쿠지 대표 4인을 알현한 뒤 군대를 물렸다.[1]

그러나 요시노리는 엔랴쿠지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에이쿄 7년(1435년) 2월, 앞서 온 엔랴쿠지 대표 4인을 교토로 불렀다. 그들은 요시노리의 속셈을 의심하여 좀처럼 상락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간레이 모치유키가 맹세장을 보내왔기 때문에 교토로 출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출두하자마자 참수당했고, 이 사실을 들은 엔랴쿠지 신도들은 격앙하여 이 처사에 항의하고자 근본중당에 방화하고 24인의 신도가 분신자살하였다.[1]

불길은 교토에서도 보여 세간이 소란스러워졌다. 요시노리는 히에이 산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는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엔랴쿠지 대표 후임으로 친막부파 승려가 새로 임명되고, 반년 뒤에는 근본중당 재건도 개시되었다.[1]

2. 5. 에이쿄의 난과 유키 전투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동생들이 모두 승적에 들었으나, 자신은 승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요시모치 사후 자신이 쇼군에 취임했어야 했다고 믿고 있어 요시노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전술한 연호 문제는 타협으로 수습되었으나, 히에이 산 저주 문제와 1438년 (에이쿄 10년) 모치우지의 적남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관례 때 요시노리를 무시하고 멋대로 이름을 붙여준 것(당시에는 쇼군에게 한 글자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켜 모치우지와 막부와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5]

이러한 때에 때때로 모치우지에게 충고를 해주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가 모치우지가 자신을 소원하게 여기는 것에 신변의 위험을 느껴 영지 고즈케국으로 도망갔고, 모치우지는 노리자네 토벌군을 일으켰다. 요시노리는 이를 호기로 여겨 노리자네와 손을 잡고, 간토의 여러 다이묘에게 모치우지 포위망을 결성하게 하였으며, 모치우지 토벌 칙령을 받아 조정의 적으로 공인받았다. 이듬해 1439년 (에이쿄 11년)에 간토 토벌군을 일으켰는데, 이를 에이쿄의 난이라 한다.[5] 모치우지는 대패하고 삭발하여 공순의 자세를 보였으나, 요시노리는 노리자네의 구명 탄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치우지 일족을 살해하였다.[6]

그 뒤 요시노리는 간토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하여 친아들을 새로운 가마쿠라 구보로 내려보냈으나, 이는 우에스기 가문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후 요시노리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마사 대에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막부 공인 가마쿠라 구보로서 간토로 부임하여 요시노리의 계획이 실행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한 채 이즈국 호리고에(堀越)에 머무르며 호리고에 구보라고 칭하게 되었다.

2. 6. 슈고 다이묘 통제와 중앙집권화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를 격파하여 쇼군의 권력을 강화했다.[7] 1440년에는 모치우지의 아들 안오마루(安王丸)·슌오마루(春王丸) 형제가 유키 우지사다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유키 전투), 이듬해 진압되었다. 모치우지의 두 아들은 교토로 호송되던 중 참수되었다. 또한 야마토 에이쿄의 난에서 유력 고쿠진과 후남조 세력을 토벌하였다. 이러한 난 진압 때 요시노리는 조정의 윤지를 받아 상대를 ‘조정의 적’으로 삼아 토벌하였는데, 이것이 센고쿠 시대에 조정의 권위 회복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31]

요시노리는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가독 계승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오우치 모치요와 아카마쓰 사다무라 등 자신의 심복을 당주로 밀어 지배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요시노리의 뜻을 거스른 슈고 다이묘 잇시키 요시쓰라와 도키 모치요리는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

요시노리 시대에는 쇼초 도잇키와 후남조 세력의 반란 등 무로마치 막부를 둘러싼 정치·사회 정세가 불온하였는데, 요시노리는 규슈 평정, 종교 세력 간섭, 후남조 토벌, 간토 평정, 슈고 다이묘 간섭 등에서 성과를 거두어 권력의 중앙 집권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2. 7. 만인공포(万人恐怖)

요시노리는 쇼군 권력 강화에 집중하여 때로는 심각할 정도로 엄격하고 가혹한 면을 드러냈고, 쇼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격노하여 혹독하게 처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요한 예는 아래와 같다.

사건 발생 시기사건 내용
에이쿄 2년구게 히가시보조 마스나가(東坊城益長)가 의식이 한창일 때 싱긋 웃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이에 요시노리는 "지금 어디서 감히 쇼군을 비웃는 거냐?" 격노하여 마스나가의 영지를 몰수하고 본인은 칩거시켰다.[24]
에이쿄 4년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의 저택에서 투계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쇼군의 행렬이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자, 격노한 요시노리는 닭싸움을 일절 금지하고 교토 안에 있는 모든 닭을 도시 밖으로 추방하였다.
에이쿄 6년 이전요시노리는 측실 히노 시게코(日野重子)의 오빠 히노 요시스케(日野義資)에게 쇼렌인 문적 시절부터 원한을 품고 있어, 쇼군에 취임하자 요시스케의 영지를 몰수하고 근신 처분을 내렸다.
에이쿄 6년 2월시게코가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쓰(足利義勝)를 낳자, 아이의 숙부가 되는 요시스케에게도 하례객이 방문하였다. 이를 불쾌하게 여긴 요시노리는 방문객에게 모두 처벌을 내렸다.
에이쿄 6년 6월 8일요시스케가 누군가에게 참살당하였다. 요시노리의 사주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 소문을 흘린 산기 다카쿠라 나가후지(高倉永藤)는 이오섬(硫黄島)으로 유배되었다.
히에이 산 관련히에이 산 근본중당(根本中堂)의 화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엄하게 금지하여, 그 금령을 어긴 상인은 참수되었다.
시녀 관련술을 따르는 것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쇼나곤 국의 시녀를 죽을 정도로 매질하고, 삭발시켜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닛신 관련자신에게 설교하려고 한 니치렌슈(日蓮宗) 승려 닛신(日親)을 끓는 솥에 머리부터 담구어 두번 다시 이야기할 수 없도록 혀를 잘랐다.
제아미 관련사루가쿠(猿楽)에 있어서는 간아미(音阿弥)를 중용하는 한편으로 제아미(世阿弥)를 냉대해 사도(佐渡)로 유배했다.



이외에도 ‘헌상받은 매화 가지를 꺾었다’‘요리가 맛이 없다’는 사소한 이유로 정원사와 요리사를 벌한 것이 당시의 기록에 다수 남겨져 있다.

에이쿄 6년(1434년) 6월, 나카야마 사다치카(中山定親)가 자신의 일기 《삿카이키(薩戒記)》에 요시노리에게 처벌 받은 사람 수를 헤아린 것을 보면, 구교(公卿) 59인, 신관(神官) 3인, 승려 11인, 뇨보(女房, 시녀) 7인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스코 천황(称光天皇)의 생모, 황족, 간파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수는 무가와 서민은 포함되지 않은 수로, 이 외에도 상당수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적은 요시노리가 공포정치를 지향한 것과, 가학성을 가지고 있던 것을 보이는 일화로 전해져온다. 사다후사 친왕(貞成親王)은 《간몬닛키》(看聞日記)에 전술한 소문을 흘린 상인의 참수를 언급하며 “'''만인이 공포에 떠나니, (소문은)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고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만인 공포'''’를 요시노리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보는 경우도 많다.

2. 8. 가키쓰의 난과 최후

에이쿄 9년(1437년) 즈음부터 쇼군 요시노리가 아카마쓰 미쓰스케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가키쓰 원년(1441년) 6월 24일,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새끼 오리가 많이 태어난 것'과 간토의 가마쿠라 구보 모치우지 정벌을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요시노리에게 자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열 수 있도록 요청했다. 당시 쇼군이 가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여는 것은 중요한 정치 의식이었다. 요시노리는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아카마쓰 저택을 방문하여 연회에 참석했으나, 연회가 한창일 때 암살당했다. 향년 48세였다.[15]

주인을 잃은 막부는 혼란에 빠져 토벌대를 보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아카마쓰 미쓰스케·노리야스 부자는 영지인 하리마로 돌아갔다. 같은 해 7월 11일, 막부는 토벌군을 편성하여 호소카와 모치쓰네·야마나 소젠 등이 아카마쓰 가문을 토벌하고 멸망시켰다. 이를 가키쓰의 난이라 부른다.

요시노리는 압제적인 조치와 예측 불가능한 독재적인 변덕으로 악명이 높았다.[15] 1441년, 요시노리는 아카마쓰 미쓰스케의 아들인 아카마쓰 노리야스에게 암살당했는데, 노리야스는 교토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그를 노 공연에 초대하여 저녁 연극 중에 암살했다.[16] 요시노리는 암살 당시 47세였으며, 이는 미쓰스케가 조직한 것이었다. 미쓰스케는 요시노리가 자신의 사촌 아카마쓰 사다무라에게 자신이 소유한 세 개의 영지를 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사다무라의 여동생이 요시노리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요시노리로부터 중요한 지위를 받게 되었다.[17]

그 직후, 그의 8살 된 아들 요시카쓰가 새로운 쇼군으로 결정되었다.[18]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이미 1427년에 다섯 번째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와 영토 몰수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미쓰스케는 교토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영지인 하리마로 가서 가족과 가신들을 모아 전투를 준비했다.

이 사건으로 이와미의 수호 다이묘인 야마나 히로타카, 야마시로, 이즈모, 오키, 히다의 수호 다이묘 교고쿠 다카카즈, 스오, 나가토, 부젠, 치쿠젠의 수호 다이묘 오우치 모치요가 사망했다.

아시카가 가문은 이 일곱 번째 쇼군을 통해 이어졌지만, 쇼군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막부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19] 이러한 암살과 반역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전의 충성심이라는 군사적 윤리가 약화되었다.[20]

3. 인물 평가

요시노리는 쇼군 권력 강화에 집중하여 엄격하고 가혹한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소한 일에도 격노하여 혹독하게 처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 에이쿄 2년(1430년), 구게 히가시보조 마스나가가 의식 중 웃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칩거 처분을 받았다.[35]
  • 에이쿄 4년(1432년), 이치조 가네요시 저택에서 닭싸움으로 쇼군 행렬이 통과하지 못하자 닭싸움을 금지하고 교토 내 모든 닭을 추방했다.[35]
  • 측실 히노 시게코(日野重子)의 오빠 히노 요시스케를 쇼렌인 문적 시절부터 미워하여 영지를 몰수하고 근신 처분을 내렸다. 에이쿄 6년(1434년), 시게코가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쓰를 낳자 요시스케에게 하례객이 방문했는데, 이를 불쾌하게 여긴 요시노리는 방문객을 처벌했다. 요시스케는 참살당했고, 요시노리의 사주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소문을 퍼뜨린 산기 다카쿠라 나가후지는 이오섬으로 유배되었다.[35]
  • 히에이 산 근본중당 화재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긴 상인은 참수했다.[35]
  • 술을 따르는 것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쇼나곤 국 시녀를 매질하고 삭발시켜 비구니로 만들었다.[35]
  • 자신에게 설교하려 한 니치렌슈 승려 닛신을 끓는 솥에 담그고 혀를 잘랐다.[35]


이 외에도 ‘헌상받은 매화 가지를 꺾었다’, ‘요리가 맛이 없다’는 사소한 이유로 정원사와 요리사를 벌한 기록이 남아있다.
에이쿄 6년(1434년) 6월, 나카야마 사다치카의 일기 《삿카이키(薩戒記)》에 따르면 요시노리에게 처벌받은 사람은 공경 59인, 신관 3인, 승려 11인, 궁녀 7인이다. 여기에는 천황의 생모, 황족, 간파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무가와 서민은 포함되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35]

이러한 기록은 요시노리가 공포정치를 지향하고 가학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사다후사 친왕은 《간몬닛키》(看聞日記)에 “'''만인이 공포에 떠나니, (소문은)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만인 공포'''’는 요시노리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여겨지기도 한다.[35]

  • 사다나리 친왕은 요시노리의 시대를 "살얼음을 밟는 시절"(踏薄氷時節)이라 칭하며 "악장군"이라 평가했다. 요시노리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업자득의 결과, 무력한 일이로다. 장군이 이와 같은 개죽음은 예로부터 그 예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평했다.
  • 오다 노부나가는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보낸 의견서(이견 17개조)에서 "요시아키가 '악 어소'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요시노리도 일찍이 이와 유사한 소문이 있었다"라고 언급했다.[35]
  • 사이기 카즈마는 「공포의 시대, 가키의 변의 배경」(1968년)에서 요시노리의 정치를 일종의 공포 정치로 평가했다.
  • 이자와 모토히코는 요시노리가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완성시킨 비에이산 제압이나 다이묘 통제 등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고, 요시미쓰도 해내지 못한 규슈 평정·간토 제압을 달성하여 최대 영토를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절대 권력의 확립에 의한 국내 안정·평화의 달성"을 거의 완성했지만, 절정기에 암살당하여 무로마치 막부는 이후 성과를 흐지부지하게 만들었다는 견해를 보였다.[35]
  • 아카시 산진은 요시노리를 "요리토모·히데요시·이에야스보다 위, 무가 역사상 유례없는 천재 무장"이라고 평가했다.[35]

4. 연호


※ 날짜는 구력임.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2] 논문 The Poet Who Challenged the Shogun: Asukai Masayo and Shinshoku Kokin Wakashū https://muse.jhu.edu[...] 2024
[3] 서적 Homosexuality and Civiliza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4] 서적 Yoshimasa and the Silver Pavilion https://books.google[...] 2003
[5] 서적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1712
[6] 웹사이트 Mochiuji's suicide at Hōkoku-ji http://www.kamakurat[...] kamakuratoday.com 2016-03-03
[7] 웹사이트 Kitayama bunka(北山文化) http://www.aisf.or.j[...] JAANUS (Japanese Architecture and Art Net Users System)
[8] 웹사이트 Yoshinori & Hon-do, Shuon'an Ikkyuji (1334). http://www.cis.doshi[...] 2008-02-20
[9] 웹사이트 Yasaka Pagoda, Kyoto. http://www.2000crane[...]
[10] 서적 https://books.google[...]
[11] 서적 Yoshimasa and the Silver Pavilion https://books.google[...]
[12] 서적 Kings in All but Name: The Lost History of Ouchi Rule in Japan, 1350-1569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13] 논문 The Establishment of the Tosen-bugyō in the Reign of Ashikaga Yoshinori" (唐船奉行の成立 : 足利義教による飯尾貞連の登用) http://ci.nii.ac.jp/[...]
[14] 간행물 This is Okinawa http://www.pref.okin[...] Okinawa Prefecture 2004
[15] 논문 Some Reflections on Japanese Religion and Its Relationship to the Imperial System http://www.nanzan-u.[...] 2008-02-29
[16] 문서 Warriors, Warlords, and Domains Westview 2012
[17] 문서 ibid.
[18]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https://books.google[...] 2006
[19] 서적 Yoshimasa and the Silver Pavilion https://books.google[...]
[20] 서적 Rennyo and the Roots of Modern Japanese Buddhism https://books.google[...] 2005
[2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22] Kotobank 足利義教 null
[23] 사전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24] 사전 足利義教
[25] 서적 中世日本の政治と文化 思文閣出版
[26] 논문 足利将軍家子弟・室町殿猶子寺院入室とその意義-室町殿と寺院・公家社会との関係を探る- 吉川弘文館 2021
[27] 서적 室町時代の将軍家と天皇家 勉誠出版
[28] 웹사이트 東京大学法学部研究室図書室法制史資料室所蔵コレクション · 御前落居記録 · 東京大学学術資産等アーカイブズ共用サーバ https://iiif.dl.itc.[...] 2023-08-16
[29] 서적 籤引き将軍足利義教
[30] 논문 まぼろしの鎌倉公方-足利義永-について
[31] 서적 戦国大名と天皇
[32] 문서 建内記 吉川弘文館
[33] 서적 赤松円心・満祐 吉川弘文館
[34] 문서 満済准后日記、看聞日記、薩戒記等
[35] 서적 二人の天魔王 「信長」の真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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