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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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무로마치 막부의 13대 쇼군으로, 1536년에 태어나 1565년에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쇼군직을 물려받았으며, 미요시 나가요시와의 항쟁을 겪었다. 쇼군 권위 회복을 위해 노력하여 여러 다이묘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분쟁을 조정했으나,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에게 살해당했다.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검호 쇼군'으로 불렸으며, 미카즈키 무네치카를 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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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호쿠리쿠에서 공을 세웠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다 항복 후 히고 국주로 임명되었지만 히고 국인 일기를 진압하지 못해 할복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 아시카가 요시테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 義輝) / 아시카가 요시후지 (足利 義藤) |
| 로마자 표기 | Ashikaga Yoshiteru |
| 출생 | 1536년 3월 31일 |
| 사망 | 1565년 6월 17일 (향년 30세) |
| 계명 | 광원원 융산도원 (光源院融山道圓) |
| 어릴적 이름 | 기쿠도마루 (菊童丸) |
| 초명 | 요시후지 (義藤) |
| 개명 | 요시테루 (義輝) |
| 국적 | 일본 |
| 가문 | |
| 씨족 | 아시카가 쇼군 가문 |
| 아버지 | 아시카가 요시하루 |
| 어머니 | 게이주인 (慶寿院, 고노에 히사미치의 딸) |
| 양아버지 | 고노에 히사미치 |
| 형제자매 | 요시아키, 슈코, 기타 |
| 배우자 | 다이요인 (大陽院, 고노에 다네이에의 딸) |
| 측실 | 고시주노쓰보네 (신시 하루야의 딸) |
| 자녀 | 데루와카마루, 여자 (요잔, 호쿄지 주지), 여자 (덴잔 세이켄, 호쿄지 주지), 오이케 요시타쓰?, 덴요 (아시카가 요시타카)? |
| 정치 | |
| 직위 | 쇼군 |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정이대장군 |
| 재임 기간 | 1547년 - 1565년 |
| 이전 | 아시카가 요시하루 |
| 이후 | 아시카가 요시히데 |
| 관위 | 종5위하, 정5위하・좌마두, 종4위하・정이대장군, 참의, 좌근위중장 추증 종1위・좌대신 |
| 천황 | 고나라 오기마치 |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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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덴분 5년(1536년) 3월 10일,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기쿠도마루였으며, 어머니는 고노에 히사미치의 딸 게이쥬인이었다.[11] 아버지 요시하루는 간레이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요시테루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덴분 15년(1546년) 12월, 요시테루는 11세의 나이로 아버지에게서 쇼군직을 물려받아 제13대 쇼군이 되었다.[11] 그러나 요시하루와 하루모토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덴분 17년(1548년)에는 하루모토가 교토로 진격해오자 요시테루와 요시하루는 오미 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후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나가요시가 하루모토를 배신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요시테루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덴분 19년(1550년) 아버지 요시하루가 사망하고, 덴분 21년(1552년)에는 나가요시와 화평을 맺고 교토로 돌아왔지만, 사실상 나가요시와 그의 가신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다.[12]
덴분 22년(1553년), 요시테루는 하루모토와 다시 손잡고 나가요시에게 대항했으나 패배하고 오미국으로 도망쳐 5년간 머물렀다. 에이로쿠 원년(1558년), 롯카쿠 요시카타의 중재로 나가요시와 화해가 성립되어 교토로 돌아왔지만, 나가요시의 권세는 더욱 커져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요시테루는 막부와 쇼군 권위의 부활을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여러 센고쿠 다이묘들과 우호를 다지고 분쟁을 조정하며 쇼군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오다 노부나가, 우에스기 겐신 등이 요시테루를 알현하고, 오토모 소린은 총을 헌상하는 등, 여러 다이묘들이 쇼군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에이로쿠 7년(1564년)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하자,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는 요시테루를 제거하고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히사히데와 산닌슈는 니조성(니조고쇼)을 공격했고(에이로쿠의 변), 요시테루는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 향년 30세였다.[31]
2. 1. 유소년기 및 쇼군 취임
덴분 5년(1536년) 3월 10일,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무로마치 막부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장남으로 히가시야마 난젠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노에 히사미치의 딸 게이쥬인이며, 아명은 기쿠도마루였다. 탄생 직후, 아버지 요시하루의 부탁으로 외할아버지 고노에 히사미치의 요시가 되었다.[11]당시 아버지 요시하루는 간레이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권력 다툼을 벌여 오미국 사카모토로 피신했다가 교토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기쿠도마루도 이러한 상황에 여러 번 휘말렸다. 이전까지 쇼군가의 적자는 만도코로 집사인 이세 씨 가문에서 양육되는 관례였으나, 기쿠도마루는 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덴분 15년(1546년) 7월 27일, 기쿠도마루는 조정으로부터 '''요시후지'''라는 휘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쇼군의 적자가 대대로 임명되어 온 사마노카미에 임명되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요시하루가 조정을 통해 이루어 낸 일이었다.
같은 해 12월 19일, 요시후지의 원복식이 거행되었다. 원복식은 오미 사카모토의 히요시 신사(현 히요시 대사)에서 롯카쿠 씨의 당주 롯카쿠 사다요리를 에보시 친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쇼군의 에보시 친은 간레이가 맡는 것이 관례였으나, 요시하루는 사다요리를 간레이 대리로 임명하여 원복을 치렀다. 이는 하루모토의 간레이로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다음 날인 12월 20일, 쇼군 선하 의식이 거행되어 요시후지는 11세의 나이로 아버지에게서 쇼군직을 물려받아 정식으로 제13대 쇼군이 되었다. 교토에서 출발한 조정의 칙사가 사카모토에 도착하여 쇼군 선하를 진행했다.
같은 달 말, 요시후지는 아버지 요시하루와 함께 사카모토를 떠나 교토의 히가시야마 지쇼지로 돌아왔고, 곧바로 쇼군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덴분 16년(1547년) 정월, 호소카와 우지쓰나의 유력 무장 호소카와 구니요시가 공가들의 지시센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후지는 구니요시를 쇼군의 적으로 규정하고 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니요시는 요시후지에게 사죄했지만 용서받지 못하고 교토 외곽 다카오로 도망쳤다.
정월 26일, 요시후지는 아버지 요시하루와 함께 고나라 천황에게 배알하고 하사품을 헌상했다. 이때 요시후지는 롯카쿠 씨의 병사 3천을 거느리고 교토 시내를 행진하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이후 요시하루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결별하고 호소카와 우지쓰나와 손을 잡았으나, 하루모토는 보복으로 아와에서 비호하던 요시하루의 형제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옹립했다. 롯카쿠 사다요리는 요시하루·요시후지 부자와 하루모토 양측 모두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곤경에 처했다.
사다요리는 양측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하루모토의 딸을 요시후지의 정실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요시하루·요시후지와 하루모토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하루모토는 교토로 진격했다.
덴분 17년(1548년) 3월 29일, 요시후지와 요시하루는 기타시라카와에 건설 중이던 쇼군야마성으로 피신하여 농성했다. 7월 12일, 쇼군야마성은 사다요리와 하루모토의 대군에게 포위되었고, 사다요리는 부자에게 하루모토와의 화해를 강요했다. 결국 부자는 사다요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7월 19일, 요시후지와 요시하루는 쇼군야마성에 불을 지르고 오미 사카모토로 향했다. 7월 29일, 사다요리의 중재로 요시후지는 사카모토에서 하루모토와 화해했다.
같은해 4월, 사다요리는 호소카와 하루모토 파와 우지쓰나 파의 화해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은 수습되었고, 기나이 지역의 정세도 안정되었다. 6월 17일, 요시후지와 요시하루는 사카모토에서 교토로 돌아와 이마데가와 고쇼에 들어갔다.
2. 2. 미요시 나가요시와의 항쟁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나가요시는 하루모토를 배신하고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지지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로 인해 1549년 아시카가 요시하루-요시테루 부자와 하루모토는 교토에서 쫓겨나 오미 국으로 피신했다.[12] 덴분 19년(1550년), 아버지 요시하루가 사망한 뒤, 요시테루는 가타타를 거쳐 구쓰키로 옮겨갔다.
덴분 21년(1552년) 1월,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간레이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나가요시와 화평을 맺고 교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쇼군 복귀 후, 요시테루는 나가요시와 그의 가신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다.
덴분 22년(1553년), 요시테루는 하루모토와 다시 손잡고 나가요시와 싸웠지만 패배하고 오미국 구쓰키로 도망쳐 5년간 머물렀다. 덴분 23년(1554년) 2월 12일, 구쓰키에서 이름을 요시테루로 바꾸었다.
에이로쿠 원년(1558년) 5월, 롯카쿠 요시카타의 지원을 받아 하루모토와 함께 사카모토로 이동하여 교토 귀환을 도모했다. 뇨이가다케에서 미요시 측 군사와 교전했으나, 롯카쿠 씨의 지원 중단 등으로 인해 밀리게 되었다. 11월, 롯카쿠 요시카타의 중개로 나가요시와 화해가 성립되어 5년 만에 교토로 돌아와 막부 정치를 재개했다. 12월 28일에는 큰아버지 고노에 다네이에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다. 나가요시의 권세는 더욱 커졌고 바쿠후의 실권을 쥐게 되었으며, 요시테루는 나가요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2. 3. 쇼군의 직접 통치
요시테루는 막부와 쇼군 권위의 부활을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여러 구니(國)의 센고쿠 다이묘들과 우호를 다지고, 분쟁을 조정하며 쇼군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다이묘 간 분쟁 조정:
- 1548년(덴분 17년): 다테 하루무네·다테 다네무네 부자 간 분쟁
- 1558년(에이로쿠 원년): 다케다 신겐·우에스기 겐신 간 분쟁
- 1560년(에이로쿠 3년): 시마즈 다카히사·오토모 요시시게, 모리 모토나리·아마고 하루히사 간 분쟁
- 1563년(에이로쿠 6년): 모리 모토나리·오토모 소린 간 분쟁
- 1564년(에이로쿠 7년): 나가오 가게토라·호조 우지마사·다케다 하루노부 간 분쟁
- 회유책:
- 오토모 요시시게를 지쿠젠(筑前)·부젠(豊前) 슈고(守護)로 임명
- 모리 다카모토를 아키(安芸) 슈고로 임명
- 미요시 나가요시·요시오키 부자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 막부 상징인 동문(桐紋) 사용 허락
- 유력 인물들에게 '데루(輝)'(본인 이름자) 또는 '요시(義)'(아시카가 막부 통자(通字))를 헨기(偏諱)[36]로 줌 (예: 모리 데루모토, 다테 데루무네, 우에스기 데루토라)
이러한 정치적 수완으로 요시테루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그릇"(아노기(穴太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다 노부나가, 우에스기 겐신 등이 교토에서 요시테루를 알현했고, 오토모 소린은 총을 헌상하는 등, 여러 다이묘가 쇼군 권위를 인정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사이를 조정, 1558년(에이로쿠 원년) 신겐을 시나노(信濃) 슈고로 임명했다. 신겐이 나가오 가게토라의 시나노 철군을 요구하자, 요시테루는 가게토라의 시나노 출병을 인정했다. 에이로쿠 4년, 신겐에게 쫓겨 망명한 전(前) 시나노 슈고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귀국 지원을 명하기도 했다.
요시테루는 사리사욕을 위해 쇼군 권위를 이용하려던 다이묘들에게 둘러싸였지만, 적극적인 외교로 쇼군 권위를 재확립했다.
2. 4. 몰락과 최후
에이로쿠 원년(1558년) 교토로 돌아온 뒤에도 미요시 나가요시의 권세는 여전했다. 그러나 하타케야마 다카마사, 롯카쿠 요시카타(육각 요시카타)가 기나이에서 봉기하고, 미요시 일족 미요시 요시카타가 구메이덴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미요시 가문에 쇠퇴 조짐이 보였다. 에이로쿠 5년(1562년), 나가요시와 손잡고 막부 정치를 독점하던 만도코로 집사 이세 사다타카가 나가요시와 반목하자, 요시테루는 나가요시를 지지하며 사다타카를 경질하고 셋쓰 하루카도를 만도코로 집사로 앉혔다. 격노한 사다타카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나가요시에게 토벌되었다. 이로써 이세 씨 가문에 의한 만도코로 지배는 막을 내렸고, 쇼군이 만도코로를 장악할 단초를 마련했다.[30]에이로쿠 7년(1564년) 7월,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하자, 요시테루는 막부 권력 부활을 꾀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나가요시 사후 막부를 배후에서 조종하려던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에게 요시테루는 방해물이었다. 그들은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양자인 요시쓰나와 손잡고, 요시테루 대신 요시쓰나의 아들 요시히데를 새로운 쇼군 후보로 옹립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히사히데와 산닌슈는 주군 미요시 요시쓰구와 함께 요시히데를 앞세워 모반을 일으켜 요시테루의 본거지 니조성(니조고쇼)을 공격했다(에이로쿠의 변).[31] 요시테루는 가미이즈미 노부쓰나, 쓰카하라 보쿠덴 등에게 사사한 검술 실력을 발휘하여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향년 30세(만 29세). 셋쓰 하루카도의 적자 치요마루와 요시테루의 생모 게이쥬인도 함께 죽었다.[24]
3. 인물 및 평가
가미이즈미 노부쓰나와 쓰카하라 보쿠덴에게 검술을 배워, 역대 쇼군 중 가장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인물로 알려져 있다.[37] '검호 쇼군', '검성 쇼군'으로도 불린다.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이 니조고쇼를 습격했을 때, 여러 자루의 명검을 미리 준비해 꽂아두었다가 무뎌진 검은 버리고 새 검을 뽑아 싸웠다는 일화가 있다. 이에 놀란 암살자들은 옷가지와 문짝을 던져 요시테루를 넘어뜨린 뒤, 그 위에서 창으로 수십 번을 찔러 간신히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막부 역대 쇼군 가운데 가장 패기 있고 무사다웠던 쇼군으로 평가받는다. 적극적인 정치 활동으로 일시적이나마 쇼군의 권위를 회복시킨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미요시 나가요시를 암살하려 하는 등 넓게 보지 못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피살로 쇼군의 권위는 다시 실추되었다.
五月雨は 露か涙か 不如帰 我が名をあげよ 雲の上まで|사미다레와 쓰유카 나미다카 호토토기스 와가나오 아게요 쿠모노 우에마데|5월의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두견새여 내 이름을 구름 위까지 전해다오일본어라는 절명시에서 마지막까지 야심을 버리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1554년에는 오토모 씨 가문으로부터 총과 화약에 관련된 서적을 기증받았고, 1560년에는 크리스트교 선교를 허가하는 등,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보다 조금 빨리 미요시 씨가 자신의 영내에서의 크리스트교 선교를 허가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크리스트교 선교 허가는 요시테루 개인의 기호나 취향보다는 미요시 씨에 대항하거나, 미요시 씨의 의향에 따른 것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565년에는 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예수회를 교토에서 추방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4. 연표 (관직 이력)
| 연도 | 사건 |
|---|---|
| 덴분 15년(1546년) 7월 27일 | 종5위하 서임.[38] |
| 덴분 15년(1546년) 11월 19일 | 정5위하 승진, 사마노스케(左馬助) 임관.[38] |
| 덴분 15년(1546년) 12월 19일 | 성인식을 치르고 요시후지(義藤)로 개명.[38] |
| 덴분 15년(1546년) 12월 20일 | 정4위하 승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임명.[38] |
| 덴분 16년(1547년) 2월 17일 | 산기(参議) 임명, 사콘에노츄조(左近衛中将) 겸임.[38] |
| 덴분 23년(1554년) 2월 12일 | 종3위 승진, 요시테루로 개명.[38] |
| 에이로쿠 8년(1565년) 5월 19일 | 에이로쿠의 변으로 피살.[38] |
| 에이로쿠 8년(1565년) 6월 7일 | 종1위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 추존.[38] |
5. 헨기를 받은 인물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헨기(偏諱)를 받은 인물은 다음과 같다.
'''藤''' (후지)일본어
| 이름 | 비고 |
|---|---|
| 아시카가 후지우지 | |
| 잇시키 후지나가 | |
| 호소카와 후지카타 | |
| 호소카와 후지타카 | |
| 아이 후지오사무 | |
| 아시카가 후지시 | |
| 아시카가 후지마사 | |
| 오다테 후지야스 | |
| 쿠치키 후지츠나 | |
| 코바야시 후지무네 | |
| 지베 후지미치 | |
| 신시 후지노부 | |
| 타케다 후지노부 | |
| 타케후지 후지카네 | |
| 츠츠이 후지카츠 | 후에 후지마사, 준케이 |
| 카쿠다 후지히데 | |
| 나가오 후지카게 | |
| 마스다 후지카네 | |
| 마츠다 후지히로 | |
| 마츠다 후지요리 | |
| 미츠부치 후지히데 | 후지유키 → 후지히데 |
| 야마나 후지유키 |
'''義''' (요시)일본어
| 이름 | 비고 |
|---|---|
| 모가미 요시미쓰 | |
| 시마즈 요시히사 | |
| 미요시 요시오키 | |
| 다케다 요시노부 | |
| 아사쿠라 요시카게 | |
| 사가라 요시하루 | |
| 아마고 요시히사 | |
| 아카마쓰 요시스케 | |
| 잇시키 요시류 | |
| 오우치 요시나가 | |
| 시마즈 요시토라 | 하루히사 → 요시토시 → 요시토라 |
| 소 요시토모 | |
| 다케다 요시무네 | |
| 마쓰나가 요시히사 | 히사미치 → 요시히사 → 히사미치, 요시테루 살해 후 히사미치로 되돌림 |
| 미요시 요시스케 | |
| 미요시 요시쓰구 | 시게아리 → 요시시게 → 요시쓰구 |
| 미요시 요시카네 | |
| 미요시 요시시게 | |
| 롯카쿠 요시하루 |
'''輝''' (테루)일본어
| 이름 | 비고 |
|---|---|
| 호소카와 테루쓰네 | |
| 오우치 테루히로 | |
| 우에스기 데루토라 | 겐신 |
| 다테 데루무네 | |
| 니키 데루쓰나 | |
| 모리 데루모토 | |
| 아시카가 테루우지 | |
| 아라카와 테루무네 | |
| 잇시키 테루키요 | |
| 잇시키 테루스에 | |
| 잇시키 테루노리 | |
| 잇시키 테루모토 | 테루미츠 |
| 잇시키 테루요시 | |
| 나가오 테루카게 | |
| 우에노 테루키요 | |
| 우에노 테루카 | 고이 |
| 에마 테루모리 | |
| 오다테 테루우지 | |
| 오다테 테루미츠 | |
| 오노데라 테루미치 | 카게미치 |
| 오타가키 테루노부 | |
| 오다 테루나가 | |
| 카타오카 테루치카 | |
| 카네야마 테루자네 | |
| 카노 테루시게 | |
| 쿠츠키 테루타카 | |
| 시모츠야 테루노부 | |
| 센슈 테루스에 | |
| 타케다 테루노부 | |
| 토가시 테루미츠 | |
| 니카이도 테루유키 | 테루유키 |
| 히에누키 테루토키 | 테루이에, 테루타다 |
| 히코베 테루노부 | |
| 호소카와 테루카타 | |
| 호소카와 테루마사 | 미치마사 |
| 미카미 테루후사 |
6. 유산
가미이즈미 노부쓰나와 쓰카하라 보쿠덴에게 검술을 배웠으며, 특히 쓰카하라 보쿠덴으로부터는 검술 오의(奧義)인 '이치노타치(一の太刀)'를 전수받아 역대 쇼군 중 가장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인물로 알려져 있다.[37] 이러한 검술 실력 덕분에 '검호(劍豪)', '검성(劍聖) 쇼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역대 쇼군 중 가장 패기 있고 무사다운 쇼군으로 평가받는다. 활발한 정치 활동으로 쇼군의 권위를 일시적으로나마 회복시킨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넓게 보지 못하는 행동으로 미요시 나가요시를 암살하려 시도하는 등의 행동은 비판받기도 한다.
그의 죽음은 쇼군의 권위를 다시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五月雨は 露か涙か 不如帰 我が名をあげよ 雲の上まで|사미다레와 쓰유카 나미다카 호토토기스
와가나오 아게요 구모노 우에마데일본어" (5월의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두견새여 내 이름을 구름 위까지 전해다오)라는 절명시에는 그의 야망이 담겨 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호 쇼군"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추었으며, 아시카가 다카우지 이후 가장 사무라이이자 무장에 가까웠던 쇼군이었다. 그의 검술 스승은 가시마 신토류의 창시자인 쓰카하라 보쿠덴이었다.[6]
그가 죽을 때 남긴 와카는 그의 야망과 업적의 한계를 보여준다.
| 한자 | 로마자 | 한국어 번역 |
|---|---|---|
| 五月雨は 露か涙か 不如帰 我が名をあげよ 雲の上まで | samidare wa tsuyu ka namida ka hototogisu waga na o ageyo kumo no ue made | 오월의 비가 내리네, 이슬인가 눈물인가? 두견새(뻐꾸기)[7], 내 이름을 구름 위로 날려주세요. |
"미카즈키 무네치카"(三日月宗近)는 일본의 ''천하오검'' 중 하나로, 다섯 자루의 칼 중 가장 아름다운 칼로 여겨진다. 산조 무네치카가 제작한 이 칼은 초승달 모양(''미카즈키'' - 三日月)에서 이름을 따왔다. 다른 천하오검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보 중 하나이며, 현재 도쿄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카즈키 무네치카는 16세기 중반 아시카가 가문의 소유였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미요시 가문의 공격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 검을 사용했다. 이후 도쿠가와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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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등 고위 인물이 자신의 이름 글자 하나를 타인(공을 세운 사람 등)의 이름에 쓰게 하는 것
[37]
문서
다만 보쿠덴은 요시테루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 검술을 가르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요시테루가 보쿠덴의 검술을 완전하게 익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38]
문서
사다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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